×

我們使用cookies幫助改善LingQ。通過流覽本網站,表示你同意我們的 cookie policy.


image

RFA: 뉴스, 6.25 흥남철수작전 통역관 김익창 박사

6.25 흥남철수작전 통역관 김익창 박사

~6.25 흥남철수작전 통역관 김익창 박사~

흥남철수 작전 통역관이었던 김익창 박사는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어느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전이었다고 말한다. 피난민들이 배의 갑판까지 콩나물시루같이 서서 자유를 찾았다고 한다. 김익창 박사는 200척의 배로 군사 물자와 군인 10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남하했다고 한다. 또 200척의 배 중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운 기적의 배였으며 그 배가 사흘 동안 거제도로 가는 동안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동포 김익창 의학박사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통역관으로 활동한 이야기로 함께한다.

625 전쟁 중에 흥남 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극적으로 탈출시킨 작전이었다며 김익창 박사는 한배에서 선장의 주의사항을 통역했다고 들려준다.

김익창 박사 : 아이 5명이 태어난 배는 다른 배에요. 거기에 한국 산파가 있어서 아이를 무사히 태어났는데 김치 넘버 1 김치 넘버2 3-5까지 미국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다고 그래요. 200척의 배 중에 제가 탄 배에도 한국 군인들도 많이 타고 피난민도 잔뜩 탔어요. 그 배에서 선장이 주의 사항 같은 것을 한국말로 번역해서 배 전체에 들리게 통역을 했어요.

현재 김익창 박사가 고령과 파킨슨병으로 말하기가 어려워 부인 그레이스 김 여사가 대신 답변하기로 한다. 김익창 박사가 625전쟁 중에 해군 입대와 의과대학생으로 공부하던 이야기다.

그레이스 김 : 그때(625전쟁 중)는 서울대학교 의예과 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의사가 되기 전이지요. 625전쟁이 났는데 부산에 피난 가서 해군에 입대했데요. 왜냐면 의사는 아니지만, 의사들을 옆에서 도울 수는 있으니까? 그래 해군에서 의사들을 도우면서 배에서도 일하고 해군에서 의사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그때 부상자가 굉장히 많았잖아요. 그래 의사들 돕는 일이 참 많았나 봐요. 몇 달 지나고 나니까? 해병대에서 연락이 왔데요. 우리가 부상자가 더 많으니까? 여기 와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해병대로 가셨어요. 그때는 의사가 상당히 부족한 때여서 의과 대학생들은 전부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하라고 제대를 시켰데요. 그래 제대를 하고 의과대학에 돌아간 거예요. 그때 부산에 의과대학이 천막학교가 있었지요. 저도 천막학교에서 공부했거든요.

흥남 철수작전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함께 들어보자!

그레이스 김 : 서울로 다 돌아갔는데 맥아더 장군(General Douglas MacArthur)이 북한까지 쳐들어갔잖아요. 인천상륙을 하고 나서요. 서울도 다 복구되고 그때 군대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답니다. 왜냐면 유엔군과 한국군 사이에서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대요. 김 박사가 영어를 잘하셨어요. 그때도요. 오산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회화를 많이 마스터를 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영어를 잘하셔서 거기에 뽑혔어요. 그래 비행기를 타고 함흥에 다 내려놓았답니다. 맥아더가 신의주까지 다 쳐들어간 다음이지요. 그래 일을 시작하려면 며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중공군이 합세한 거예요. 그래 갑자기 중공군이 내려와서 많은 분이 추워서 사망했어요. 그래 맥아더가 중공군이 저렇게 많이 합세해서 내려올 줄 몰라 위험하게 됐으니까? 잠깐 우리가 후퇴해야 되겠다고 그래서 배 한 200척을 보내라고 명령하셨데요. 흥남 철수 작전이 그때 생긴 거랍니다.

흥남 철수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을 데려오기까지 현봉학 선생의 역활이 컸으며 김익창 박사는 한 배에서 통역을 담당했단다.

그레이스 김 : 10만 명의 군인과 (한국군 유엔군 합쳐서) 10만 명의 함경도 지역의 피난민이 다 보따리를 싸서 아이들을 업고 부두에서 기다렸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우리를 좀 태워달라고! 그러니까? 사령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적군의 사람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믿고 우리 배에 태울 수 있는가 하고 거절을 했답니다. 무기도 실어야 되고 모든 군인을 실어서 후퇴해야 할 텐데 민간인을 태울 수 없다고 거절했대요. 그때 현봉학 박사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아몬드 장군의 어드바이저로 계셨답니다. 의사로서요. 저희들도 잘 아는 분인데요. 그분이 막 사정을 하셨대요. 이 사람들은 공산당원들이 아니고 공산당이 싫어서 남한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친척들이고 우리의 친구들인데 의심하지 말라고! 꼭 이번에 같이 가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우리가 왔을 때 태극기를 가지고 나와 환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 다 총살감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우리 같이 가야 한다고! 그래서 마지막에 아몬드 장군이 OK를 하셨답니다.

김익창 박사는 영어로 책을 쓴 것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남은 생애도 한국전쟁의 참상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김익창 박사 : 책을 쓰느라고 고생을 했어요. 하루에 10시간씩 영어로 쓰느라고 컴퓨터로 작업했는데 머리를 숙여서 (자세가 나빠서) 머리가 앞으로 구부러졌어요. 한인 2세 3세, 우리 자녀도 한국말을 몰라서요. 그리고 미국사람들도 내 책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많아요. 책을 쓰느라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 또 반응이 좋아요.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김익창 박사 부부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은퇴 촌에서 살고 있다. 은퇴 촌에서 사시는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 우리가 사는 은퇴 촌에 9천 명이 사는데 한국 사람이 700명이에요. 그런데 2012년이 은퇴 촌이 생긴지가 50년이 됐어요. 그래 50주년 큰 잔치가 있었지요. 그래 잡지도 나온 거예요. 50주년 기념 책을 만들었는데 결혼 50주년 된 분들 다 나오라고 하니까? 한 5쌍밖에 없었어요. 60-70년 된 분들이 더 많았어요. 노인들이 많으니까? 그래 그분들의 50년 된 분들을 인터뷰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중에 하나가 됐지요. 작년에 결혼한 지가 50년 됐거든요.

김익창 박사 부부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을까? 궁금했다.

그레이스 김 : 버펄로 뉴욕에 가서 62년도에 결혼했어요. 장로교회서요. 부모님도 안 계시는 데 제가 한국에서 와서 결혼한 거예요. 한국에서는 같은 영락교회에 다녔고, 같은 서울대학교고 단과대학은 달랐어요. 기독학생회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협동 관이라는 모든 대학생이 모여서 하는 기독학생회가 있었어요. 연세대의 오기영 박사가 시작하셨어요. 김 박사를 이 모임에서도 만났고 그래 친구로 지냈는데 김 박사가 미국에 오기 전에 저희가 1년 동안 데이트를 했어요. 오랫동안 친구인데 데이트를 하게 된 거지요. 약혼도 안 했지만 약혼한 거나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는 때가 되면 결혼할 꺼다, 두 사람 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 박사가 한국에 못 돌아오게 됐어요. 일할 자리가 없었어요. 1962년도만 해도 정신과가 별로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기 전이랍니다. 자리도 없었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오라는 병원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는 요. 정신과 병원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박사 학위도 있고 정신과 의사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취직이 금방 되는데 한국에서는 안됐어요. 그래서 제가 오게 된 거예요. 그래 갑자기 와서 미국에서 결혼하게 된 거예요. 6년 동안을 못 만났어요. 그때는 전화가 없으니 전화도 못 하고 한 주에 한 번씩 편지가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어요.

김익창 박사의 자랑도 들려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 첫째는 신앙이 좋으세요. 3대 장로교인이거든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지만, 장로교인으로서 철저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걸 제가 느끼고요. 그다음은 둘째는 성품이 굉장히 인내심이 많고 사랑이 많고 남을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이 너무너무 강해요. 인내심 많은 것은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랄 정도지요. 그리고 상당히 인텔리전트 한 분이에요. 공부도 많이 하셨고 학자 타입이지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신과 의사지만, 목사님 같다고요. 너무 사랑이 많고 인내심이 많은 분이라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포근하데요. 저도 그걸 동의하지요. 하여튼 노력가고요.

김익창 박사는 625 때 어머니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었단다. 그래서 장남으로서 동생들 뒷바라지에도 힘썼다고 들려준다.

그레이스 김 : 625 때 어머니가 납치당해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장남으로서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에 동생들을 다 돌보는 그런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 미국에 유학을 오기 전에 모든 친척이 다 모여서 아버님가 결혼하셔야 된다고 해 결혼하시게 되는데 다행히도 상당히 신앙이 좋으시고 아주 좋은 어머니를 만나 뵙게 됐거든요. 아버지가 결혼하시니 안심하고 미국에 올 수가 있었지요. 동생들이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니까? 어머니가 안 계시는 형편에서 더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아요. 또 그때는 625전쟁 끝나고 나서는 모두가 다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지금은 너무 한국이 많이 발전하고 좋아졌지만, 그때는 배불리 먹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돈도 없었고 일을 해도 월급이 몇 달에 한 번 나왔어요. 아버지께서 엔지니어로 일하셨거든요. 월급이 나와야 할 텐데 월급을 가끔 받으셨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가족은 많은데요. 그러니까? 김 박사도 의과대학 다닐 때 고학을 했어요. 또 미국에 와서도 한국 가족들이 고생하니까? 인턴들의 월급이 100달러엮거든요. 거기서 50달러를 꼭 보냈대요. 50달러는 한국에서 큰돈이었어요. 그래 장남으로서 고생을 더 많이 한 분이에요.

‘SHIP OF MIRACLE'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레이스 김 : 우리가 아는 미국 친구가 있는데 그분은 비디오 프로듀서인데 어떤 사명감이 있느냐면 사람들이 모르는 귀한 스토리 그런 것만 찾아다니면서 만드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흥남 철수 이야기를 듣고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래 너무너무 잘 됐지요. 그중에 200백 척의 한 배가 기적의 배가 되어 버렸어요. 왜냐면 그 많은 사람을 꽉꽉 태운 배에서 아이 5명이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그 배를 나중에 기적의 배라고 어떤 미국 분이 책을 썼어요. 그래 그 책을 읽고 우리가 아는 프로듀서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하고는 저희 집에 연락이 왔어요. 저희가 데이비스에서 살 때인데 흥남 철수 때 해병대로 있던 분들이 10명 정도 사셨어요. 그분들 제가 다 연락을 해서 다 모여 인터뷰하고 김 박사도 인터뷰하고 그때도 현봉학 박사님께서 우리 집 전화번호를 주셨데요. 그래서 그분이 우리 집에 온 거예요. 그게 다 끝났지요. 그래서 DVD로 잘 나왔지요.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동포 김익창 의학박사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통역관으로 활동한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6.25 흥남철수작전 통역관 김익창 박사 6.25 Dr. Ikchang Kim, interpreter for Operation Heung Nam Cheol-soo

~6.25 흥남철수작전 통역관 김익창 박사~

흥남철수 작전 통역관이었던 김익창 박사는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어느 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전이었다고 말한다. 피난민들이 배의 갑판까지 콩나물시루같이 서서 자유를 찾았다고 한다. 김익창 박사는 200척의 배로 군사 물자와 군인 10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남하했다고 한다. 또 200척의 배 중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운 기적의 배였으며 그 배가 사흘 동안 거제도로 가는 동안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했다.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동포 김익창 의학박사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통역관으로 활동한 이야기로 함께한다.

625 전쟁 중에 흥남 철수 작전은 10만 명의 피난민을 극적으로 탈출시킨 작전이었다며 김익창 박사는 한배에서 선장의 주의사항을 통역했다고 들려준다.

김익창 박사 : 아이 5명이 태어난 배는 다른 배에요. 거기에 한국 산파가 있어서 아이를 무사히 태어났는데 김치 넘버 1 김치 넘버2 3-5까지 미국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다고 그래요. 200척의 배 중에 제가 탄 배에도 한국 군인들도 많이 타고 피난민도 잔뜩 탔어요. 그 배에서 선장이 주의 사항 같은 것을 한국말로 번역해서 배 전체에 들리게 통역을 했어요.

현재 김익창 박사가 고령과 파킨슨병으로 말하기가 어려워 부인 그레이스 김 여사가 대신 답변하기로 한다. 김익창 박사가 625전쟁 중에 해군 입대와 의과대학생으로 공부하던 이야기다.

그레이스 김 : 그때(625전쟁 중)는 서울대학교 의예과 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의사가 되기 전이지요. 625전쟁이 났는데 부산에 피난 가서 해군에 입대했데요. 왜냐면 의사는 아니지만, 의사들을 옆에서 도울 수는 있으니까? 그래 해군에서 의사들을 도우면서 배에서도 일하고 해군에서 의사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그때 부상자가 굉장히 많았잖아요. 그래 의사들 돕는 일이 참 많았나 봐요. 몇 달 지나고 나니까? 해병대에서 연락이 왔데요. 우리가 부상자가 더 많으니까? 여기 와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해병대로 가셨어요. 그때는 의사가 상당히 부족한 때여서 의과 대학생들은 전부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하라고 제대를 시켰데요. 그래 제대를 하고 의과대학에 돌아간 거예요. 그때 부산에 의과대학이 천막학교가 있었지요. 저도 천막학교에서 공부했거든요.

흥남 철수작전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함께 들어보자!

그레이스 김 : 서울로 다 돌아갔는데 맥아더 장군(General Douglas MacArthur)이 북한까지 쳐들어갔잖아요. 인천상륙을 하고 나서요. 서울도 다 복구되고 그때 군대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답니다. 왜냐면 유엔군과 한국군 사이에서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대요. 김 박사가 영어를 잘하셨어요. 그때도요. 오산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회화를 많이 마스터를 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영어를 잘하셔서 거기에 뽑혔어요. 그래 비행기를 타고 함흥에 다 내려놓았답니다. 맥아더가 신의주까지 다 쳐들어간 다음이지요. 그래 일을 시작하려면 며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동안에 중공군이 합세한 거예요. 그래 갑자기 중공군이 내려와서 많은 분이 추워서 사망했어요. 그래 맥아더가 중공군이 저렇게 많이 합세해서 내려올 줄 몰라 위험하게 됐으니까? 잠깐 우리가 후퇴해야 되겠다고 그래서 배 한 200척을 보내라고 명령하셨데요. 흥남 철수 작전이 그때 생긴 거랍니다.

흥남 철수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을 데려오기까지 현봉학 선생의 역활이 컸으며 김익창 박사는 한 배에서 통역을 담당했단다.

그레이스 김 : 10만 명의 군인과 (한국군 유엔군 합쳐서) 10만 명의 함경도 지역의 피난민이 다 보따리를 싸서 아이들을 업고 부두에서 기다렸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우리를 좀 태워달라고! 그러니까? 사령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적군의 사람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믿고 우리 배에 태울 수 있는가 하고 거절을 했답니다. 무기도 실어야 되고 모든 군인을 실어서 후퇴해야 할 텐데 민간인을 태울 수 없다고 거절했대요. 그때 현봉학 박사라고 계셨는데 그분이 아몬드 장군의 어드바이저로 계셨답니다. 의사로서요. 저희들도 잘 아는 분인데요. 그분이 막 사정을 하셨대요. 이 사람들은 공산당원들이 아니고 공산당이 싫어서 남한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친척들이고 우리의 친구들인데 의심하지 말라고! 꼭 이번에 같이 가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우리가 왔을 때 태극기를 가지고 나와 환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두 다 총살감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우리 같이 가야 한다고! 그래서 마지막에 아몬드 장군이 OK를 하셨답니다.

김익창 박사는 영어로 책을 쓴 것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남은 생애도 한국전쟁의 참상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김익창 박사 : 책을 쓰느라고 고생을 했어요. 하루에 10시간씩 영어로 쓰느라고 컴퓨터로 작업했는데 머리를 숙여서 (자세가 나빠서) 머리가 앞으로 구부러졌어요. 한인 2세 3세, 우리 자녀도 한국말을 몰라서요. 그리고 미국사람들도 내 책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많아요. 책을 쓰느라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 또 반응이 좋아요.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김익창 박사 부부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은퇴 촌에서 살고 있다. 은퇴 촌에서 사시는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 우리가 사는 은퇴 촌에 9천 명이 사는데 한국 사람이 700명이에요. 그런데 2012년이 은퇴 촌이 생긴지가 50년이 됐어요. 그래 50주년 큰 잔치가 있었지요. 그래 잡지도 나온 거예요. 50주년 기념 책을 만들었는데 결혼 50주년 된 분들 다 나오라고 하니까? 한 5쌍밖에 없었어요. 60-70년 된 분들이 더 많았어요. 노인들이 많으니까? 그래 그분들의 50년 된 분들을 인터뷰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그중에 하나가 됐지요. 작년에 결혼한 지가 50년 됐거든요.

김익창 박사 부부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을까? 궁금했다.

그레이스 김 : 버펄로 뉴욕에 가서 62년도에 결혼했어요. 장로교회서요. 부모님도 안 계시는 데 제가 한국에서 와서 결혼한 거예요. 한국에서는 같은 영락교회에 다녔고, 같은 서울대학교고 단과대학은 달랐어요. 기독학생회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협동 관이라는 모든 대학생이 모여서 하는 기독학생회가 있었어요. 연세대의 오기영 박사가 시작하셨어요. 김 박사를 이 모임에서도 만났고 그래 친구로 지냈는데 김 박사가 미국에 오기 전에 저희가 1년 동안 데이트를 했어요. 오랫동안 친구인데 데이트를 하게 된 거지요. 약혼도 안 했지만 약혼한 거나 마찬가지로 마음속으로는 때가 되면 결혼할 꺼다, 두 사람 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 박사가 한국에 못 돌아오게 됐어요. 일할 자리가 없었어요. 1962년도만 해도 정신과가 별로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기 전이랍니다. 자리도 없었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오라는 병원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는 요. 정신과 병원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박사 학위도 있고 정신과 의사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취직이 금방 되는데 한국에서는 안됐어요. 그래서 제가 오게 된 거예요. 그래 갑자기 와서 미국에서 결혼하게 된 거예요. 6년 동안을 못 만났어요. 그때는 전화가 없으니 전화도 못 하고 한 주에 한 번씩 편지가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어요.

김익창 박사의 자랑도 들려달라고 했다.

그레이스 김 : 첫째는 신앙이 좋으세요. 3대 장로교인이거든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지만, 장로교인으로서 철저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걸 제가 느끼고요. 그다음은 둘째는 성품이 굉장히 인내심이 많고 사랑이 많고 남을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이 너무너무 강해요. 인내심 많은 것은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랄 정도지요. 그리고 상당히 인텔리전트 한 분이에요. 공부도 많이 하셨고 학자 타입이지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신과 의사지만, 목사님 같다고요. 너무 사랑이 많고 인내심이 많은 분이라 만나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하고 포근하데요. 저도 그걸 동의하지요. 하여튼 노력가고요.

김익창 박사는 625 때 어머니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었단다. 그래서 장남으로서 동생들 뒷바라지에도 힘썼다고 들려준다.

그레이스 김 : 625 때 어머니가 납치당해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장남으로서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에 동생들을 다 돌보는 그런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 미국에 유학을 오기 전에 모든 친척이 다 모여서 아버님가 결혼하셔야 된다고 해 결혼하시게 되는데 다행히도 상당히 신앙이 좋으시고 아주 좋은 어머니를 만나 뵙게 됐거든요. 아버지가 결혼하시니 안심하고 미국에 올 수가 있었지요. 동생들이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니까? 어머니가 안 계시는 형편에서 더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아요. 또 그때는 625전쟁 끝나고 나서는 모두가 다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지금은 너무 한국이 많이 발전하고 좋아졌지만, 그때는 배불리 먹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돈도 없었고 일을 해도 월급이 몇 달에 한 번 나왔어요. 아버지께서 엔지니어로 일하셨거든요. 월급이 나와야 할 텐데 월급을 가끔 받으셨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가족은 많은데요. 그러니까? 김 박사도 의과대학 다닐 때 고학을 했어요. 또 미국에 와서도 한국 가족들이 고생하니까? 인턴들의 월급이 100달러엮거든요. 거기서 50달러를 꼭 보냈대요. 50달러는 한국에서 큰돈이었어요. 그래 장남으로서 고생을 더 많이 한 분이에요.

‘SHIP OF MIRACLE'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레이스 김 : 우리가 아는 미국 친구가 있는데 그분은 비디오 프로듀서인데 어떤 사명감이 있느냐면 사람들이 모르는 귀한 스토리 그런 것만 찾아다니면서 만드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흥남 철수 이야기를 듣고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래 너무너무 잘 됐지요. 그중에 200백 척의 한 배가 기적의 배가 되어 버렸어요. 왜냐면 그 많은 사람을 꽉꽉 태운 배에서 아이 5명이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그 배를 나중에 기적의 배라고 어떤 미국 분이 책을 썼어요. 그래 그 책을 읽고 우리가 아는 프로듀서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하고는 저희 집에 연락이 왔어요. 저희가 데이비스에서 살 때인데 흥남 철수 때 해병대로 있던 분들이 10명 정도 사셨어요. 그분들 제가 다 연락을 해서 다 모여 인터뷰하고 김 박사도 인터뷰하고 그때도 현봉학 박사님께서 우리 집 전화번호를 주셨데요. 그래서 그분이 우리 집에 온 거예요. 그게 다 끝났지요. 그래서 DVD로 잘 나왔지요.

자유아시아방송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재미동포 김익창 의학박사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통역관으로 활동한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