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1편 | 설립자 이병철의 인생 [브랜드 스토리]
주제 선정 이벤트를 통해 국내 브랜드 부문에서 대한민국 재계 순위 1위 삼성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과도 많이 엮여있기 때문에 기존 영상에 비해 좀 더 많은 편수로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삼성은 어떻게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었을까?
자, 브랜드 백과사전 삼성 1편 시작하겠습니다. 1.의령 금수저, 이병철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는 아주 넓은 농토를 소유한 대지주, 이찬우와 그의 아내 권재림이 2남 1녀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찬우의 가족이 살던 이 집은 찬우의 할아버지 이홍석이 지은 집이었는데,
무려 570평의 넓은 땅에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 멋들어지는 기와집으로 지어진 대저택이었습니다. 그러던 1910년 2월 12일(음력),
이들 부부 사이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대한민국 경영계에 큰 획을 그으며 삼성그룹의 초대 회장이 되는 호암 이병철입니다. 참고로 병철이 태어난 이 집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에 해당하는 명당 중 명당일 뿐 아니라,
부자의 기가 흐른다고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부자 기 받기'를 하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병철이 태어난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경술국치가 일어납니다.
시대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병철의 아버지, 찬우는 아주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엄청난 양의 쌀을 수확하는 천석지기였기 때문에 병철은 어려서부터 아주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병철은 6살때부터 할아버지가 세운 문산정이라는 서당을 다녔습니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댕기를 땋은 전형적인 학도의 모습으로
천자문과 사서삼경..
그러니까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삼경-시경, 상서, 주역을 배웠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논어를 가장 즐겨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철은 어릴 적에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배우는 기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그러다 1921년,
12살이 된 병철은 고향인 의령을 떠나 진주로 시집간 둘째 누나 이분시의 집에 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둘째 누나, 분시는 병철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은 다름 아닌 이발소였습니다.
그렇게 병철은 12년간 길렀던 댕기머리를 순식간에 댕강!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날을 자신의 ‘개화의 날'이라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2.받지 못한 졸업장
병철이 진주로 온 이유는 새로 세워진 신식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1921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 지수 보통학교가 세워지는데, 이는 지금의 지수초등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허준이라는 인물이 인재 양성을 위해 땅을 기증하면서 세워지게 되는데, 참고로 허준은 GS를 창립한 허만정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1922년 3월,
짧게 이발한 병철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덕분에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 중에는 구인회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 락희화학공업사, 지금의 LG를 창립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학교를 같이 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2년 9월,
병철이 외갓집이 있던 경성, 지금의 서울로 올라와 수송 보통학교 3학년으로 다시 편입했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처음에는 사투리 때문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아, 50명 중 35등~4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예외적으로 산수 과목만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병철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졸업 때까지 끝까지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경성 수송 보통학교를 다니던 그는 보통학교 5학년, 6학년 과정을 단기간에 속성으로 배울 수 있었던 중동 중학 속성과에 다시 편입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수료한 뒤, 중동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제법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26년 12월 5일(음력), 17살이 된 병철은 중동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부모님이 정해 준 대로 박두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후 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병철은 갑자기 학업을 마치지 않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제대로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심을 아버지에게 전 하게 되는데,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유학경비가 없었던 병철은 자신의 형, 이병각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함안의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형의 친구는 병철에게 선뜻 500원을 내어줬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3원 정도였다고 하니, 500원은 정말 엄청난 돈이었는데,
그 돈을 선뜻 내준 형의 친구는 훗날, 효성을 창립한 조홍제였습니다.
1929년 10월,
3년간의 유학 준비 끝에 도쿄에 있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정말 처음으로 학업에 열심히 정진했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공장을 찾아다니며 일본 공업에 대한 것을 최대한 배우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런 병철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지치고 힘이 쭉 빠지는 이상한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일본 내에서 어떻게든 치료하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1931년,
병철은 회복을 위해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병철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와세다대학을 중퇴했다.
지수 보통학교, 수송 보통학교, 중동학교로 이어지는 네 번째 중퇴로 나에게는 졸업증서라는 것이 한 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도쿄가 세계 중심지의 하나라는데 그곳에서는 세계가 보이더라”
3.사업의 시작
병철이 일본에서 앓았던 병의 정체는 티아민(비타민 B1)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각기병이었습니다.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온 병철은 쉬면서 곧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학업에서 손을 떼자, 좋지 않은 길로 빠지게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골패라는 도박에 빠졌는데, 골패는 숫자를 점으로 표기한 패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1928년에 낳은 장녀 이인희, 1931년에 낳은 장남 이맹희,
그리고 1933년에 낳은 차남 이창희까지 3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병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새 골패 노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1934년 어느 날,
병철은 여느 때와 같이 하루종일 골패노름을 하다가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밝은 달빛이 창 너머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달빛에 비친 쌔근쌔근 잠든 세 아이가 병철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뜻을 세워야 해!'
그날 밤, 병철은 잠을 자려고 했지만 생각이 많아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한 끝에 그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며칠 뒤, 병철은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이 사업을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때, 병철의 아버지 찬우는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이 좋다'며
300석의 쌀을 추수할 수 있는 재산을 사업 자금으로 내어주었습니다.
사업 자금이 생긴 병철은 부산, 대구뿐 아니라 경성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사업 아이템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다 경남 일대에서 수확한 쌀을 항구도시였던 마산에서 도정하여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정보를 듣게 되는데,
그 양은 무려 연간 수백만 석에 이르렀고 정미소가 부족해서 도정을 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1936년 3월,
병철은 도정 사업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며
친구인 정현용, 박정원과 함께 각자 1만 원씩 출자하여 3만 원으로 마산에 협동 정미소를 세웠습니다.
당시 마산에 물자 운송수단이 많지 않아 운송비가 비쌌는데,
병철은 이 점을 역이용해서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일출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여 개인적으로 운수업도 시작했습니다.
병철의 첫 사업들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세 번째 사업을 준비하게 됩니다.
산수에 강했던 그는 쌀 값을 분석했는데,
당시는 일제의 농민 수탈정책 때문에 쌀 생산량의 절반을 소작료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에 은행 대출을 더해 다시 농토를 사들여 쌀을 수확하더라도
소작료를 내고 은행 이자를 갚고도 약간의 이익이 남았던 겁니다.
병철은 계획대로 조선식산은행 마산점에서 대출을 받아 김해평야 전체를 사들일 기세로 무섭게 토지를 늘려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1년 만에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되어 연간 일 만석의 쌀을 수확하며 사업을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던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중일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병철이 돈을 빌렸던 식산은행은 대출을 중단했고 설상가상으로 땅값은 완전히 폭락했습니다.
결국 병철은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삼성상회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가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버린 이병철
하지만,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찬우는 병철에게 30,000원이라는 거금을 다시 내어줬습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15원 정도였기 때문에 3만 원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습니다.
병철은 다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부산, 경성,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을 거쳐
중국의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까지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어떤 사업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물색했습니다.
그러다 중국에서는 엄청난 규모로 상거래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개월간의 여행 끝에 그는 청과물과 건어물 등이 무역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38년 3월 1일,
병철은 아버지에게 받은 3만 원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250평 규모의 점포를 사들여서 청과물과 건어물을 무역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3과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별을 뜻하는 성을 합쳐 가게 이름을 삼성상회라고 지었습니다.
삼성상회는 대구지역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포항 지역에서 생산되는 건어물을 들여와 중국 대륙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했습니다.
병철은 예전에 정미소를 하다 폭망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만 의존하는 것이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하고는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여 제조업도 함께 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면 제품이 별표국수입니다.
삼성상회는 꽤 안정적으로 운영되며 성장해갔습니다.
1939년, 사업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병철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술을 만드는 양조업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매물로 내놓은 ‘조선양조'라는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한편,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당연히 경제침체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대박을 치던 물품이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습니다.
경영난은 무슨, 오히려 재고가 없어서 걱정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폭격한 진주만 공격이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부터 삼성상회든 조선양조든 생산량의 95%를 일본의 군수물자로 강제 납품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1942년 1월 9일,
병철과 두을 부부의 7번째 자녀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삼성그룹 2대 회장이 되는 이건희였습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삼성물산공사
광복 후, 병철은 계속해서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운영해 갔습니다.
특히 조선양조에서 청주를 만들어 월계관이라는 상표를 붙여 팔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업은 점차 확장했지만, 병철의 마음 한 켠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 경제 상황은 정말 암담한 수준이었는데,
병철이 판단하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국제무역을 하는 것이란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분명 위험부담은 굉장히 컸지만 병철은 그동안 벌어들인 자금으로 국제 무역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을 과감하게 친구였던 이순근에게 모두 맡기고
1947년 5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1948년 11월,
종로 2가에 1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을 빌려서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여 마카오와 홍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국제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당시 투자자 중에는 앞서 언급되었던 형의 친구 조홍제가 있었습니다.
병철이 쓴 자서전, 호암자전에 따르면, 자신이 75%를 출자했고 나머지 투자자들이 25%를 출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홍제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자신이 1,000만圓을 투자하고 병철이 700만圓을 투자하여 총 자본금 1,700만圓으로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자로 표기된 圓(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원'의 1000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지분 갈등으로 인해 훗날 이병철과 조홍제는 갈라서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고,
어쨌든 설립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친형제와 같이 아주 돈독했습니다.
한편, 회사 내부적으로는 사원이라면 누구나 회사에 투자를 할 수 있었고 투자한 만큼의 정당한 배당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삼성물산공사는 듣보잡 무역회사로 시작하긴 했지만, 아주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1949년에는
전택보의 천우사, 김인형의 동아상사, 김용주의 대한물산, 박흥식의 화신무역 등
그 당시 잘나가던 대무역회사들에 이어 무역업계에서 거래액 7위 기록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뒤에는 그 모두를 따라잡으며 1등 무역회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덕분에 병철은 전택보, 설경동 등과 함께 일본 경제시찰단 15명에 선발되어 한국 대표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쟁은 삼성물산공사가 그동안 이뤄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병철의 가족은 다른 사원들과 함께 트럭을 구해서 대구로 피난했습니다.
벌써 전쟁 때문에 사업이 두 번이나 망한 병철…
그는 대구에 도착해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조선양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양조를 운영하던 경영진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장님, 양조장 운영이 잘 되어 3억圓 정도의 비축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 다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병철은 또 한 번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내려가
1951년 1월 10일,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롭게 설립했습니다.
게다가 삼성물산공사 당시 홍콩에서 받지 못했던 3만 달러를 회수했는데,
당시 환율이 달러당 2,500圓이었기 때문에 7,500만圓의 추가 자금이 생겼습니다.
전쟁 중이긴 했지만, 삼성물산주식회사는 꽤 여유 있는 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하여 부산 국제시장 도매상에게 판매했고, 1년 만에 60억圓의 매출을 달성, 순이익은 20억圓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병철은 이것이 큰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치상으로는 분명 큰 금액이었지만, 당시 전쟁의 영향으로 통화 남발과 물가 상승이 되풀이되는 악성 인플레이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51년 당시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무려 531%의 물가 상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병철은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고 소비 물자를 수입에 의존하기보다 원료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제조한 뒤 다시 수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병철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라는 엄청난 기업을 세우게 됩니다.
삼성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