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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8 -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 Part 2

Episode 28 -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 Part 2

마침 나도 딸애가 뒤늦게 학위르 한답시고 겨우 젖 떨어진 어린 것을 할미한테 전적으로 갖다 맞겼을 때라 어디 소개해주고 말 것도 없이 내 사정이 급했다. 그 후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호강을 한지가 어언 십여년에 이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식모라는 직업도 사라진 후, 나는 파출부 따라 식성까지 바뀌는 생활을 해왔다. 나는 내가 살림을 할 줄도 모르고 취미도 없기 때문에 누굴 가르칠 줄도 모른다. 정 음식을 맛없게 하면 저 사람은 음식은 못해도 청소하나는 잘하지, 또는 다림질 하나는 끝내주지..하는 식으로 좋은 면만 보려고 애썼다. 다 못해야만, 차라리 내가 하는 게 속편할 것 같아 그만두게 하고 부지런을 떨어봤뎄자 한 달이 못가 또 딴 파출부를 구해드리곤 했다. 동생 덕으로 내 딸이 무사히 학위를 하고나자 내 남편이 병들어 입퇴원을 되풀이 하게됬다. 동생은 한약도 잘 달이고 또 잘 쒔다. 남편이 병석에 있는 동안 동생은 나에게 내 자식들 보다 더 의지가 되었다. 환자의 몸과 마음에 보비이 보다 더 좋은 효자는 없다. 동생을 그걸 완벽하게 해주었다. 내 남편이 투병 중인 동안 나는 동생의 남편도 병중에 있단 걸 안중에도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일찍오게 하고 밤 늦도록 붙잡아 두려고 했다. 설사 제부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해도 수고비를 넉넉히 쳐주니까 동생도 바라는 바이지, 나를 심하게 여길 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과부된지 삼년 후에 동생도 과부가 되었다. 그 삼년 동안 나는 동생이 내 남편한테 해준 생각을 해서라도 제부에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우선 동생을 매일 쓸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매일 오도록 했다. (not clear)보다는 정당한 보수를 보장해 주는 게 동생을 돕는 길이었다. 문병도 가보려고 했지만 동생이 한사코 싫다고 했다 . 동생의 말투로 미루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은 환자보다도 사는 형편인 듯 했다. 이사갈 때만 해도 것은 번드르르해 보였지만 워낙 난림집인데다 세줘 먹으려고 나중에 올린 옥탑방은 더 엉터리여서 여기저기 뒤틀리고 금가서 겨울에는 수도, 화장실이 얼어 붙어 못 쓰고, 여름에는 비 까지 새서 비닐 조각으로 임시변통을 해야한다고 했다. 환자까지 있는 집 꼬락서니가 그러하니 다년간 누적된 누추가 어떠하리라는 건 집작하고도 남았다.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동생 마음에 따르는 게 수였다. 얼어 붙는 상하수도 때문에 겨울이면 물통이나 요강까지 들고 옥외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동생의 관절염은 해마다 조금씩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동생은 약을 입게 달고 살았다. 관절이 부드러워지는 봄, 여름에도 약국만 바라봐도 삭신이 쑤셔서 약을 안 먹고는 못 배긴다고 했다. 나는 문병은 갔지만 내 딴엔 남보다 후한 월급 외에도 도움을 주려고 은근히 제부에게 많은 배려를 하는 편이었다. 남편의 유품 중 따듯하고 편한 옷을 죄다 보냈고 집에서 별식을 할 때 뿐 아니라 자식들이 나한테 보내는 고깃근이나 영양제도 늘 넉넉하게 나누었다. 약식이나 인절미 같은 것도 잘 먹고, 소화도 잘 시킨다고 하기에 출입만 못 할 뿐 제부는 마냥 살 줄 알았다. 물론 그걸 동생의 복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착하고 솜씨좋은 동생이 어쩌면 복은 그렇게 지지리도 없을까 생각할 때 마다 그게 제부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동생하고 준비할게 이것 저것 적지 않을 때 동생한테서 못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매일 온다고는 하나, 지 볼일을 못 볼정도로 매여있는 건 아니여서 시집 대소사나 친구끼리 계모임에도 거의 안 빠지는 동생이었다. 그렇지만 사전 양해 없이 긴요할 때 빠지겠다고 한건 처음이었다. 나는 벌컥 화가났지만 환자가 아침에도 먹을 걸 안 찾는게 암만해도 이상해서 집을 비우기 싫다고 했다. (not clear)에 사는 아들 며느리는 뒀다가 뭐하느냐고 역정을 내려다가 말았는데 참길 잘 했다. 제부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옥외 계단으로 시신을 내가게 될까봐 늘 걱정하던 동생은 119를 불러 혼수상태의 병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러고 나서 곧 임종을 맞았다고 했다. 만약 내가 성질을 부려서 동생을 남편 임종도 못 보게 했더라면 어쩔뻔 했나. 생각 날 때마나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나중에 들어서 안 얘기지만 제부는 죽기 전날 밤 느닷없이 동생의 손목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더란다. 기분이 이상해서 누구 보고싶은 사람없냐, 아이들을 부를까 물어봤더니 아니, 아무도 안 보고 싶다고,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사랑한다고 강조하더란다. 그 다음날 아침 안 깨어나길래 죽을 준비를 침착하게 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그후에도 동생은 아무한테나 사랑한다는 제 남편의 마지막 말을 되뇌며 헤헤거렸다. 남편으로 부터 그런 임종의 말을 들은 여편네있으면 어디 나와보라는 투였다. 아무리 작은 것에 행봉해 하는 동생이라지만 저리도 속이 없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남겨진 건 더이상 퇴락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누추한 전셋방이 다였다. 그나마 전세돈을 올려달라지 않는 것만 다행이었다. 떼 봤뎄자 천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전셋방이 서울시내에 어디있겠느냐. 주인은 곧 재개발이 되어 헐릴집이라는 핑계로 고쳐주지도 않는 대신 돈도 더 달래지 않았다. 동생의 두 자식들도 저마다 옹색한 단칸방에서 제 자식을 둘 씩 낳아 기르면서 반듯한 독채 전셋집을 얻을 만한 돈을 마련하는 걸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동생을 자식들이 저 살 궁리만 한다고 섭섭해하는 소리를 한번도 안 했다. 오히려 부모덕 없는 걸 원망하지 않고 씩씩하게 하는 걸 고마워 했다.

관절 때문에 겨울나기를 유난히 힘들어 하던 동생이 지난 여름에는 더위를 못 참아하면서 그 좋던 얼굴도 점점 못 쓰게 돼가는게 눈에 띄었다. 남편의 상 중에도 화색을 잃지 않고 무슨 잔칫날 처럼 조문객을 챙겨 먹이려고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지 않던 동생이었다. 어디 아픈게 아니냐고 물어도 괜찮다는 대답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혈색없는 얼굴에 푸석한 부기까지 나타났다. 안 되겠다 싶어 심각하게 따져 물었더니 옥탑방의 더위는 밤에도 화덕 속 같다는 것이었다. 선풍기를 두대나 틀어놓고 자는데도 환장하게 더워서 러닝셔츠를 물에 담갔다가 대강 짜서 잆고 자면 그게 마르는 동안은 조금 견딜만해서 잠을 청할 수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무겁고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젖은 옷을 입고 잔다는 소리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삼복더위가 가실 때 까지만이라도 우리 집에 같이 있자는 말이 입 밖까지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우리 집은 단열과 통풍이 잘 돼있어 열대야 현상을 거의 못 느끼고 여름을 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끝없는 수다를 참아낼 생각을 하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평소에도 동생을 우리집에 들어서자 마자 거의 한시간은 수다를 떨어야 일을 시작했다.

나하고 관계되는 사람 얘기하면 들을 만도 하겠는데 거의가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시집의 친척들 얘기 아니면 친목계원들 얘기였다. 동생은 시집 쪽이 번족한데 이젠 대가 갈려 젊은이들 세상이 되니까 서럽게 된 노인도 많고 재산 관리를 잘못해 억울하게 된 노인이나 병든 노인도 여럿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 이들 모인데서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저그런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얘기였다. 아마도 우리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친척간의 왕래가 정상적으로 회복됐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동생이 그런 얘기를 할 때 저렇게도 신이나서 한 얘기를 또하고 또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것은 제 잇속만 챙기고 제 마누라 말만 받들어 보실 줄 아는 요새 젊은 것들 중에서는 그래도 내 새끼들이 그중 효자더라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동생의 큰 아들은 소원대로 방이 세개 있는 독채 전세로 이사를 한지 얼마 안 되었다. 나는 그때 으레 동생이 그 끔찍한 옥탑방을 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이 방이 세개지 하나는 창고로 쓰기도 작고 중학교 갈 날이 머지 않은 손자들 두 놈은 한 놈이 들어서도 집안이 꽉 찰 만큼 성장했다. 동생은 거기 들어가 같이 살 생각을 꿈에도 안 해본 것 같았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잔다는 소리를 듣고 부터는 여름동안 만이라도 와있으라는 소리를 안 하는 아들 내외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집에 와 있으라는 얘기를 꼴각 삼키고 만 것은 수다 때문이라기 보다는 누가 더 동생에게 가까울까 하는 책임감의 문제였다. 와 있으라고는 못 했지만 며칠 바캉스를 다녀오겠다는 말에는 반색을 하며 그러라고 했다.

바캉스라는 말이 동생 입에서 나오니까 그렇게 신선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남해에 작은 섬에서 민박집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섬은 주위가 청정해역일 뿐 아니라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면서 한번 꼭 놀러오란다는 것이었다. 넉넉 잡아 일주일간 있다 올줄 안 동생은 열흘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민박집이 동생을 부른 것은 서늘한 여름을 나려는게 아니라 동생을 부려먹고 싶어서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자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좋은 섬이라면 올 여름 같은 혹서에 오죽 피서객이 많이 몰리겠는가. 민박집이 호황을 맞아 일손이 딸릴게 뻔했다. 그러잖아도 공밥을 얻어먹을 동생이 아니었다. 오죽 바지런을 떨며 구석구석 쓸고 닦고 옆옆하게 투숙객들 시중을 들것인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 속없는 것이 본업을 까맣게 잊고 팁 몇 푼 받아 쓰는 재미에 팔려 배알이라도 빼줄 듯이 헤헤거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울화통이 치밀었다. 파출부란 제도가 있기전 옛날, 요새 너도나도 아무리 가난뱅이라도 밥만 안 굶으면 다 자가용 부리듯이, 도시에선 집집마다 식모를 두고 살던 때가 있었다. 공단이 생기면서 그 흔한 식모가 귀해지기 시작하자 남의 식모를 빼돌리다가 탄로가 나서 친하던 이웃끼리 쌈박질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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