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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4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4

그러면서 바로 테레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그 둘이 사랑얘기처럼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끝날 때 가지도 토마스나 테레사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묘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잘 생겼느지 못생겼는지, 미인인지 뭐 아니면 박색인지, 아니면 키가 큰지 작은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아죠. 언젠가 밀란 쿤데라는 자기의 다른 에세이에서 '일부러 그랬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기는 이 등장인물들이 토마스니, 테레사니, 사빌라니, (이 사빌라라는 여성도 상당히 인상적인 그런 인물인데요) 이런 인물들이 마치 우리 옆에 살고 있는 진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썼다라고 얘기를 한겁니다. 이것이 소설이 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은 밀란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장면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부분을 읽어나갈 때 그것까지 의식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고요 나중에야 알게됐죠. 그러나, 모르지만, 부지불식간에 대단히 이 소설이 독특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네 이런 식으로 작가는 분명히 알고 있으되 독자는 스토리에 빠져서 잘 눈치채지 못하는, 그러나 이 소설이 대단히 독특하고 뭔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뭘가 걸리는 게 있다, 이런 느낌을 받게하는 것, 이것이 사실은 일급 소설들의 기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법이 너무 눈에 띄어도 문제고요. 작가가 지금 뭘, 무슨 기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말하자면 트릭을 쓰고 있는지 모르면서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했는데요. 영화는 대단히 각색을 잘 했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독특한 느낌들은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소설에서만 가능한 어떤 기법들을 밀란 쿤데라가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요. 즉, 이것이 소설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라는 것을 드러내면서도, 소설이 가진 이야기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밀란 쿤데라 특유의 기법들이 여기에서 아주 잘 발휘되고 있는데요. 즉, 자꾸 작가가 드나듭니다. 들락날락하게 되고요. 네, 그런 면은 이 '영혼과 육체'인가요? 아 '육체와 영혼'이군요. 2 부 '육체와 영혼'의 서두를 보면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부분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가 자기의 작중인물이 실제 살았노라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면 이것처럼 바보짓거리도 없을 것이다. 작중인물은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몇몇 암시적인 문장이나 어떤 키 포인트가 되는 상황에서 탄생한다. 토마스는 '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란 관용어에서 태어났고 테레사는 꾸르륵거리는 배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처음으로 토마스가 살던 집에 들어설 때 그녀의 뱃속이 꾸르륵거렸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먹은 것이라곤 오직 그날 오전 기차에 오르기 전 플랫폼에서 먹은 샌드위치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대담한 여행에 완전히 정신을 쏟고 있어서 식사하는 것을 망각했던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더 쉽게 육체의 희생이 된다. 그때 토마스의 앞에 서서 자기의 뱃속이 요런하게 소리내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난처한 일이었겠는가.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다행스럽게 토마스가 10초 뒤 그녀를 포옹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뱃속의 소리를 잊을 수 있었다

테레사는 무자비하게도 기본적 인간경험인, 육체와 영혼이 통합될 수 없는 이 원성을 드러내주는 상황에서 탄생했다. 아득한 옛날 언젠가 인간은 자기 가슴속의 규칙적인 고동소리에 놀라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육체 처럼 그토록 낯설고 생소한 것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육체는 일종의 새 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보고 듣고, 두려워하고 생각하며 놀라워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육체를 빼낸 다음 남는 잔유물, 그 무엇이 영혼이었다.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것이 심장이고, 코는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육체에서 밖으로 돌 출한 호스의 끝이라는 것을. 사람의 얼굴은 소화시키고,

보고 듣고 숨쉬고 생각 하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집결되어 있는 일종의 계기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명명할 수 있게 된 이래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케 한다. 또한 우리는 영혼이란 것이 회색빛 덩어리의 뇌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은 학문적 개념으로 감싸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은 시효를 잃은 선입관으로서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조소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홀딱 반해서 자기의 내장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어보기만 해보라. 그러면 이미 학문적 시대의 서정적 환상인 육체와 영혼의 통일성을 해체되고 만다.

그녀는 자기 육체를 통해 자신을 보려 애썼다. 그 때문에 그녀는 종종 거울 앞에 섰다. 그럴때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시선은 몰래 저지르는 죄악의 성격을 띠었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유혹한 것은 허영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보는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녀는 자기 육체기능의 계기판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 했다. 그녀는 자기 얼굴 모습에서 나타나는 자기의 영혼을 본다고 믿었다. 그녀는 코가 다만 허파로 가는 공기통의 끝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서 자기 성격의 순수한 표현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때때로 자기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 견하고 당황해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집요하게 자신을 관찰했고, 어머니 의 모습을 지워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결국 그녀는 자기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완전히 지울 수가 있었다. 그녀 얼굴에는 오직 그녀 자신인 것만이 남아 있어야 했다. 이것이 성공했을 때 그것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그녀의 영혼은 마치 갑판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와 온 갑판을 뒤덮고 하늘을 향해 손을 저으며 노래하는 선박의 승무원들처럼 육체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이런 식으로 밀란 쿤데라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소설적인 입장, 그리고 그 관점을 바로 드러내면서 바로 또 이 테레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테레사라는 인물은, 일종의 패러디겠죠, 일종의 비너스의 탄생 처럼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하죠), 테레사는 자기 뱃속의 꾸르륵 거리는 소리, 즉 이 꾸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누가냐면 테레사이고, 테레사 이전에 작가인 밀란 쿤데라입니다. 즉 밀란 쿤데라는 뱃속에 꾸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는 여자를 상상했고 그게 테레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인물은 작가에게는 꾸르륵 거리는 소리에서 탄생한 인물이라는 것이죠. 작가들은 이런식으로 인물들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전화를 받는 사람, 뭐 이렇게 만들어 낼 수도 있죠. 전화를 받는 사람 또는 옛날에 노영심 씨가 노래한 것 처럼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말하자면 이런 어떤 정의, 어떤 인물의 한 단면에서 인물이 점차 육체를 갖게 되면서 작가에게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되고요. 밀란 쿤데라는 이런 것을 그대로, 날 것 그대로 제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 인물들은 이상하게 더 사실적입니다. 더 현실적이예요. 그것이 이 소설에 흥미로운 점인데 그게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잘 느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가 읽은 버전은 초판이고요. 손동준 씨가 번역한 것인데요 그 뒤에 다른 번역자들이 새로 번역한 버전들이 나와있습니다. 어떤 걸 고르셔도 좋을 것 같고요. 오늘은 이렇게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지고요 책 읽는 시간 진행해 봤습니다. 지금까지 작가 김영하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계십시오.


Episode 27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Part 4 Episode 27 - Milan Kundera "The Irresistible Lightness of Being" - Part 4

그러면서 바로 테레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그 둘이 사랑얘기처럼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끝날 때 가지도 토마스나 테레사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묘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잘 생겼느지 못생겼는지, 미인인지 뭐 아니면 박색인지, 아니면 키가 큰지 작은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아죠. 언젠가 밀란 쿤데라는 자기의 다른 에세이에서 '일부러 그랬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기는 이 등장인물들이 토마스니, 테레사니, 사빌라니, (이 사빌라라는 여성도 상당히 인상적인 그런 인물인데요) 이런 인물들이 마치 우리 옆에 살고 있는 진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썼다라고 얘기를 한겁니다. 이것이 소설이 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은 밀란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장면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부분을 읽어나갈 때 그것까지 의식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고요 나중에야 알게됐죠. 그러나, 모르지만, 부지불식간에 대단히 이 소설이 독특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네 이런 식으로 작가는 분명히 알고 있으되 독자는 스토리에 빠져서 잘 눈치채지 못하는, 그러나 이 소설이 대단히 독특하고 뭔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뭘가 걸리는 게 있다, 이런 느낌을 받게하는 것, 이것이 사실은 일급 소설들의 기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법이 너무 눈에 띄어도 문제고요. 작가가 지금 뭘, 무슨 기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말하자면 트릭을 쓰고 있는지 모르면서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했는데요. 영화는 대단히 각색을 잘 했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독특한 느낌들은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소설에서만 가능한 어떤 기법들을 밀란 쿤데라가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요. 즉, 이것이 소설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라는 것을 드러내면서도, 소설이 가진 이야기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밀란 쿤데라 특유의 기법들이 여기에서 아주 잘 발휘되고 있는데요. 즉, 자꾸 작가가 드나듭니다. 들락날락하게 되고요. 네, 그런 면은 이 '영혼과 육체'인가요? 아 '육체와 영혼'이군요. 2 부 '육체와 영혼'의 서두를 보면요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부분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가 자기의 작중인물이 실제 살았노라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면 이것처럼 바보짓거리도 없을 것이다. 작중인물은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몇몇 암시적인 문장이나 어떤 키 포인트가 되는 상황에서 탄생한다. 토마스는 '한 번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란 관용어에서 태어났고 테레사는 꾸르륵거리는 배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처음으로 토마스가 살던 집에 들어설 때 그녀의 뱃속이 꾸르륵거렸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먹은 것이라곤 오직 그날 오전 기차에 오르기 전 플랫폼에서 먹은 샌드위치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대담한 여행에 완전히 정신을 쏟고 있어서 식사하는 것을 망각했던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더 쉽게 육체의 희생이 된다. 그때 토마스의 앞에 서서 자기의 뱃속이 요런하게 소리내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난처한 일이었겠는가. 그녀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다행스럽게 토마스가 10초 뒤 그녀를 포옹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뱃속의 소리를 잊을 수 있었다

테레사는 무자비하게도 기본적 인간경험인, 육체와 영혼이 통합될 수 없는 이 원성을 드러내주는 상황에서 탄생했다. 아득한 옛날 언젠가 인간은 자기 가슴속의 규칙적인 고동소리에 놀라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육체 처럼 그토록 낯설고 생소한 것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육체는 일종의 새 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보고 듣고, 두려워하고 생각하며 놀라워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육체를 빼낸 다음 남는 잔유물, 그 무엇이 영혼이었다.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것이 심장이고, 코는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육체에서 밖으로 돌 출한 호스의 끝이라는 것을. 사람의 얼굴은 소화시키고,

보고 듣고 숨쉬고 생각 하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집결되어 있는 일종의 계기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명명할 수 있게 된 이래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케 한다. 또한 우리는 영혼이란 것이 회색빛 덩어리의 뇌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은 학문적 개념으로 감싸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은 시효를 잃은 선입관으로서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조소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홀딱 반해서 자기의 내장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어보기만 해보라. 그러면 이미 학문적 시대의 서정적 환상인 육체와 영혼의 통일성을 해체되고 만다.

그녀는 자기 육체를 통해 자신을 보려 애썼다. 그 때문에 그녀는 종종 거울 앞에 섰다. 그럴때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에 거울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시선은 몰래 저지르는 죄악의 성격을 띠었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유혹한 것은 허영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보는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녀는 자기 육체기능의 계기판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 했다. 그녀는 자기 얼굴 모습에서 나타나는 자기의 영혼을 본다고 믿었다. 그녀는 코가 다만 허파로 가는 공기통의 끝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했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서 자기 성격의 순수한 표현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때때로 자기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 견하고 당황해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더욱더 집요하게 자신을 관찰했고, 어머니 의 모습을 지워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결국 그녀는 자기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완전히 지울 수가 있었다. 그녀 얼굴에는 오직 그녀 자신인 것만이 남아 있어야 했다. 이것이 성공했을 때 그것은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그녀의 영혼은 마치 갑판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와 온 갑판을 뒤덮고 하늘을 향해 손을 저으며 노래하는 선박의 승무원들처럼 육체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네 이런 식으로 밀란 쿤데라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소설적인 입장, 그리고 그 관점을 바로 드러내면서 바로 또 이 테레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테레사라는 인물은, 일종의 패러디겠죠, 일종의 비너스의 탄생 처럼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하죠), 테레사는 자기 뱃속의 꾸르륵 거리는 소리, 즉 이 꾸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누가냐면 테레사이고, 테레사 이전에 작가인 밀란 쿤데라입니다. 즉 밀란 쿤데라는 뱃속에 꾸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는 여자를 상상했고 그게 테레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인물은 작가에게는 꾸르륵 거리는 소리에서 탄생한 인물이라는 것이죠. 작가들은 이런식으로 인물들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전화를 받는 사람, 뭐 이렇게 만들어 낼 수도 있죠. 전화를 받는 사람 또는 옛날에 노영심 씨가 노래한 것 처럼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말하자면 이런 어떤 정의, 어떤 인물의 한 단면에서 인물이 점차 육체를 갖게 되면서 작가에게 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되고요. 밀란 쿤데라는 이런 것을 그대로, 날 것 그대로 제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 인물들은 이상하게 더 사실적입니다. 더 현실적이예요. 그것이 이 소설에 흥미로운 점인데 그게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잘 느끼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가 읽은 버전은 초판이고요. 손동준 씨가 번역한 것인데요 그 뒤에 다른 번역자들이 새로 번역한 버전들이 나와있습니다. 어떤 걸 고르셔도 좋을 것 같고요. 오늘은 이렇게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지고요 책 읽는 시간 진행해 봤습니다. 지금까지 작가 김영하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