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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무대: 2016 10월 - 11월,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2)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2)

그렇게 힘이 뻗치면 가서 구두라도 닦아놔.

희자 (문 닫고 나가는)

철환 성질머리하고는.

E.

방문 노크

철환 뭐야.

어린형규 아빠, 출근하세요..?

E.

상상 에코

철환 (웃으며) 빗질 하는 아비가 그리 멋있드냐?

어린형규 아빠, 하와이는 얼마나 멋진 곳이에요? 이 퍼즐그림보다 더 굉장해요?

철환 뜬금없긴. 그래, 하와이는 그 퍼즐 속 풍경보다 애비의 이 옷보다 더 화려한 곳이다.

어린형규 다음엔 저도 꼭 데리고 가주세요.

철환 네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 생각해보마.

어린형규 정말요? 정말요?

철환 이 녀석아, 옷에 주름간다! 한 시간이나 다린 옷이란 말이다! 어허, 안기지 말래도.

철환 뭐냐,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빗질하는 거 처음 보는 것처럼 뭘 뚱하니 서있어?

형규(N) 올려다본 아버지 는, 여름 햇살보다 더 눈부셔서 하와이라던지, 비행기라던지 하는 말은 꾹 삼킨 채 그저 오래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형규 퍼즐, 감사해요. 아버지.

철환 싱겁긴. 다녀오마.

M. 회상 OUT

E.김천댁 식당, 미닫이 문 여는

김천댁 추우니까 문 꼭 닫아요

형규 네 (문 닫는)

김천댁 혼자? (반찬 놓는)

형규 네, 김치찌개 주세요

김천댁 처음 왔나보네. 여긴 주문 따로 안 받아요. 오늘은 고등어찜이니까 싫으면 가고.

형규 네, 그냥 주세요.

형규(N) 김천댁...자네 아버지가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식당...

E.

식사하는 형규

형규 맛있네요

김천댁 생색내도 반찬은 더 안 줘.

형규 (웃는)

M. 브릿지

E.

형규의 사무실

선배 요즘 점심마다 바쁜 거 같던데? 그래서, 일자리는 찾아봤어?

형규 아뇨, 아직요

선배 뭐? 아직? 형규씨, 이제 정말 몇달 안 남았어.. 요새 바빠보이길래 좀 면접도 보고 다니나 했더니.. 정말. 형규 (자조) 한심하죠..

선배 (안쓰러운) 여자 친구하고도 아직 연락이 안 돼?

형규 화가 많이 났나봐요.

선배 잘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쉬고) 남자 머리가 벗겨진다고.

형규 하하. 그게 뭐예요.

선배 자, 청첩장.

형규 결혼하세요?

선배 뭐, 그렇게 됐어. 계약직한테 청첩장 주는 거 좀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한 일 선후배라고 생각 안하니까.

와서 밥이나 먹어.

형규 축하드려요.

선배 축하받아야 할지. (귓속말) 속도위반. 이러지 않고는 요즘같은 시대에 결혼하겠다는 결심이 안 서잖아. 보통. (웃는)

형규 .. 그렇죠..

E.전화벨 울리는

형규 여보세요.

여친구 (F) 형규씨, 어떡해요. 우리 세빈이 불쌍해서 어떡해요. 형규씨.

형규 세빈이가 왜요? 미나씨? 미나씨? M. 코드

E.병원 응급실 링겔 떨어지는 소리

여친구 영양실조래요. 형규씨 사람이 어쩜 그렇게 모질어요? 홀몸도 아닌 앨.. 부모님한테 들킬까봐 압박붕대까지 하고 있었대요. 세빈이. 그러게 왜 책임지지도 못할...

형규 이런 인간이라. 더, 책임질 수 없을까봐예요. .. 가서 수납하고 올게요. (걸어나가는...)

E.병원 수납창구

직원 잔액 부족인데요? 이 카드?

형규 (당황) 그럴리가...

직원 어떻게 하실래요?

형규 (주머니 통장 쥐곤) 현금.. 현금으로 할게요. 잠시만요.

E. ATM기 통장 비밀번호가 계속 틀리는.

알람 삐- 비밀번호가 다릅니다.

형규 생일도 아니고 전화번호도 아니고 대체 뭐야.

상조직원(E) 참, 통장 비밀번호는 형규씨가 가장 잘 아는 번호라고 하시던데요.

형규 잘 아는 번호.. 그럼 혹시.. (알림/확인되었습니다) 하, 내 생일이었어? 나름 유산이다 이건가. 아버지

M. 브릿지

E.

김천댁 식당, 미닫이 문 여는

김천댁 또 왔어? 혼자만 말고 색시도 데리고 오라니까

형규 총각이에요. 색시 없어요.

김천댁 멀쩡하게 생겨서 왜 아직 장가를 안 갔어?

형규 밥 주세요. 배고파요

김천댁 (반찬 놓으며) 오늘은 청국장이야.

형규 좋네요. 저 테이블은 항상 신문이 놓여있네요.

김천댁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신문 보면서 먹으라고. 벽만 보고 먹으면 체하잖아. 하긴, 신문 말고 퍼즐인가 뭔가를 하던 괴짜인간도 있었지만.

형규 퍼즐이요?

김천댁 그래, 저 혼자 넓은 테이블 하나 딱 차지하고. 10월 5일인가? 때마다 와선 하루만 봐달라고.

형규 (N) 내 생일이다.

김천댁 (O.L) 1년에 한번 있으니까 망정이지. 그러고 보니, 그이가 몇달째 안 보이네. 어디 가서 얼어 죽었나... 식당하다 보면 맘 변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봐도 식성 변하기는 쉽지 않은데..

형규 뭘 제일 좋아했는데요 그분은.

김천댁 내 집에서 반찬투정하면 돼? 주면 다 먹어야지.

형규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거 말이에요

김천댁 뭐, 청국장에 돌솥밥이지. 죽이네 죽이네 하면서 안 죽고 두 공기 꿀떡 밥 비며 먹었지. 고향 생각난다면서. ..혹시 최씨 아예 김천으로 내려간 건가? 그렇게 고향, 고향 했쌌더니만..

형규 김천 이요? 최철환씨.. 고향이에요? 거기가?

김천댁 최철환? 그런 이름인가? 뭐 누구든 고향 내려가 뜨신 밥 잘 먹고 몸 성히 있으면 되는 거지. 밥 부족하면 더 떠다먹고.

형규 네. 근데, 저, 퍼즐은 무슨 그림인지.. 기억나세요?

김천댁 퍼즐? 글쎄... 하와뭐시깽인가라던데?

E.형규 방, 박스 뒤지는, 쉽게 보이지 않고

형규 그럼 그렇지. 퍼즐은 무슨. (외투 속 비닐봉지 열면 퍼즐 있는 헛웃음)

형규 (N) 쫑쫑 묶은 검은 봉지 안엔 하와이가 있었다. 야자수와 푸른 바다가 그려진. 아버지 옷만큼이나 화려한. 검은 봉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와이가 그려진 퍼즐이..

(회상)

E.

집 마당

아줌마 (off)최철환 그 자식 어디 숨겼어?

희자 (off)그 사람 저도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요.

아줌마 (off)이 연놈이 쌍으로 사람을 거지 핫바지로 아나.. 좋게 말하니까 못 알아듣겠지? 응?

(멱살잡는)

희자 (off)정말 왜 그래요! 경찰부를거에요?

아줌마2 (off)이 독한 년이 어디서 큰 소리야! 오냐, 오늘 경찰도 부르고 장의사도 부르고! 오늘 너랑 나! 관짜자!

E.

다가오는 형규와 친구

친구2 형규야. 저기 너희 집 아냐?

어린형규 .엄마?

어린형규 (뛰어가 비집고 들어가는)엄마! 잠깐만요,저희 엄마란말이에요.

구경꾼1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구경꾼2 왜에~ 형규네 아빠가 얼굴도 곱상하고 옷도 밤무대 나가는 사람처럼 화려하고 그랬잖우? 글쎄 강남에서 유명한 제비래요.

구경꾼1 제비요? 형규네 하와이에서 미제 받아 판다고 하지 않았어요?

구경꾼2 하와이뭐시기는 무슨. 얼마나 많은 강남여편네들을 홀리고 다녔는지.. 그간 뜯긴 건만 해도 건물 한 채래요.

구경꾼1 어머, 저러다가 형규네 엄마 경치르겠어요. 경찰 불러야하는거 아녜요?

구경꾼2 경찰 불렀다가 형규네 아빠만 쇠고랑 차지 뭐. 아이고, 남자가 눈웃음을 뭘 그래 치나했더니, 결국 이런 사단이 나네.

민정댁도 말린다고 끼어들었다가 괜한 머리끄덩이 잡히지 말고.

어린형규 엄마! 우리 엄마 때리지 마요!

아줌마 얜 또 뭐야!

희자 형규야! 넌 들어가 있어.

아줌마2 하! 설마 설마 했는데 자식까지 있었어? 이 연놈들이 진짜. 네 가정 귀한 줄 알면 남의 가정도 귀한 줄 알아야지.

희자 (머리 끄덩이 잡히는) 악

어린형규 하지마! 하지마! (달려가 아줌마 손 물어뜯는)

아줌마 으악! (쓰러지며 퍼즐 엎는)

E.

밤, 방안

어린형규 엄마, 괜찮아? 많이 아프지..

희자 엄마는 괜찮아.. 많이 놀랐지, 형규. 퍼즐도 다 엉망이 됐네.. 형규가 밤새서 한건데.. 미안해.. 엄마가 많이 미안해..

어린형규 아니야, 또 하면 돼. 울지마 엄마. 울지마.

E.

현관문 열리고 들어오는

철환 야밤에 무슨 청승이야. (발에 집기들 걸린) 집안꼴은 왜이래.

어린형규 아빠. 철환 (놀란) 당신, 얼굴이 왜그래?

어린형규 이상한 아줌마들이 막 엄마를..

희자 이혼해.

철환 뭐?

희자 참을 만큼 참았어. 당신도 나도. 당신도 이제 편히 살아.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잡지 않을테니까. 어차피 당신이란 사람한테 안 어울리는 삶이었어. 당신도 나도 더이상 무리하지말자고.

철환 뭐야, 이제 나말고 다른 서방이라도 생겼나보지?

희자 말 가려해. 애 앞이야. 내가 미쳤지. 차라리 당신이란 사람. 없는 게 형규한테 더 이로워. 제발 나가.

철환 나도 뭐 이 집구석 좋은줄 알아? 그래, 이혼해. 나야 땡큐지.

어린형규 (울먹이며 잡는) 아빠.. 안돼.. 가지마세요.

철환 (버럭!) 이 자식이, 어딜 잡아. 바지 주름잡히게! 손 놔! 이놈아!

어린형규 아빠아..

E.

현관문 쾅 닫히는, 매미 소리 크게 울리는.

형규(N) 어지럽혀진 퍼즐 속 조각난 하와이의 풍경처럼 여섯 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은 그렇게 끝이 났다.

M. 브릿지

E.시내

안내음성 (F) 삐- 소리가 나면

형규 몸은.. 이제 괜찮아? 나 지금 아버지 고향에 왔어. 내일 올라 갈거야.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 줘. 세빈아. (전화 끊는)

형규 나도 참, 뭘 찾겠다고 계획도 없이 김천까지.

E.오토바이 경적

오토바이남 임마, 눈 똑바로 뜨고 다녀

형규 (놀라) 뭐 이자식아! 거기 서, 임마!

다방레지 (티켓 날리며 멀어지며) 귀여운 오빠야, 이상 있으면 여기로 찾아온나

형규 (줍고) 다방 제비? 다방 이름하고는.. 가만 여기 들어 본 것 같은데.. (수첩 꺼내 뒤져보며) 제비 제비.. 아, 있다! 제비 다방 유마담..

E.다방 입구, 차임벨 울리며, 트롯트 가요 흐르고...

유마담 어서 오세요~ 오빠 혼자?

형규 혼자는 맞는데, 오빠는 아닌 것 같은데요.

유마담 오빠지 그럼 언니야? 앉고 싶은데 앉아요.

형규 (가서 앉고, 중얼) 역시 들어오는 게 아니었나.

유마담 (다가와서) 음료는 뭐 줄까?

형규 쌍, 쌍화탕 주세요. 노른자 띄워서.

유마담 흐으응~ 쌍화탕은 무슨, 커피 마셔. 더워 보이는데. 냉커피 괜찮지?

형규 그럴거면 주문은 왜..

유마담 오빠, 보기보다 뒤끝있다?

형규 혹시 유마담이라는 분이.

유마담 (앉으며) 어머 어머 난데? 나 알아?

형규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런) 저희 아버지가 최철환씬데..

유마담 그게 뭐?

형규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유마담 병이야..?

형규 폐암이셨대요

유마담 많이.. 아팠대?

형규 그건 저도.

유마담 그랬겠지. 죽었구나 그 인간. 결국. (이내 밝게) 근데 왜 날 찾아왔어?

형규 아버지 유품 중에 빚장부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이름이 있더라고요. 총..

유마담 273만원인가.? 몇 년 전 빚을.. 그 인간도 끈질기네.. 그래서 아버지 대를 이어서 빚을 받겠다는 거야? 너도 참 할 일이 없구나. 근데, 나 돈없어. 보다시피 파리 아니면 시덥잖은 인간들만 들끓어서 말이야.

형규 빚 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유마담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형규 아들.. 로서..

유마담 아아~들? (자지러지게 깔깔대는) 아들이래... (숨 고르며) 오빠 몇 살이지? 서른 좀 넘었나? 오빠네 엄마도 참 대단하다. 그렇지?

형규 무슨.

유마담 최철환 그 인간.. 애 못 만들어.

형규 ..!

유마담 생물학적으로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만약 그랬다간 나랑 그 인간 사이에 벌써 축구단 만들었을 걸? 그렇게 벙쪄있지말고. 이제 와서 아빠가 필요했다느니 하는 거 웃기잖아? 지금처럼 잘 먹고 잘 살면 돼. 아빠가 누구든, 누가 아빠란 이름으로 살다가 죽었든간에.

E.

시간경과, 다방 음악 바뀌고

손님1 유마담 커피는 언제 마셔도 맛있어.. 손이 이렇게 예뻐서 그런가?

유마담 김사장님도, 어제는 정미가 타주는 게 맛있다고 해놓구선.

손님2 김사장이 실수했네, 유마담은 아직도 잘 삐친다구.

손님1 유마담 삐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랬지~

유마담 아이, 너무해요.

손님2 그래서, 유마담이 젊은 애 키우는 거 아냐? 저 젊은이 표정이 영 안 좋다고. 여기서 늙은이들 비위 맞춰도 되는 거야?

유마담 어머, 아니에요. 손님이에요. 손님. (일어나서 형규에게 다가가)

유마담 (앉고) 언제까지 정신 놓고 있을 거야. 있는 건 상관없는데 그런 표정은 장사에 방해된다고.

형규 (퍼즐 봉지 부스럭) 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회상)

E.

28년 전의 제비 다방, 오래된 가요...차임벨 울리며

유마담 어서 오세..(반가운) 철환씨, 이게 얼마만이야? 얼굴 더 좋아졌다?! 서울물이 맞는가봐?

철환 호들갑은. 넌 마담하더니 좀 늙었다?

유마담 (거울 보며) 어디가..? 진짜, 간만에 봤는데 그럴거야..

철환 거울 본다고 주름 펴지는 것도 아니고 냉커피나 줘. 덥다.

유마담 김양아, 여기 냉커피 달달하게!

웬일로 김천까지 행차한 거야?

철환 (장난) 돈 갚으라고. 이제 갚을 때도 됐잖아..?

유마담 진짜! 철환씨 일부러 그러는 거지.

철환 그냥.. 오랜만에 고향 밥 먹고 싶어서.

유마담 (걱정) 무슨 일 있어? 있구나? 그치?

철환 (귀여운) 풉- 성격 급하긴.. 그래가지고 장사하겠어?

유마담 (야속한) 당신이랑 내가 그런 사이야? 무슨 일이길래 그래? 응?

철환 나.. 이제 이 짓 그만할까봐..

유마담 (핏-) 무슨 짓? 강남 싸모님들 후리고 다니는 짓? 소문에는 서울의 한강이 그 마나님들 눈물로 채운 거래매? 아님 강남 노른자땅에 벌써 빌딩이라도 세운거야?

철환 .. 그냥 이제 남의 돈은 체할 거 같아서. 소화가 잘 안 되네.

유마담 (장난) 철환씨도 이제 나이드나 보다.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하고. 농담이라면 재미없는데.

철환 그냥 최형규 아버지로만.. 그렇게 살고 싶다면 욕심일까.

유마담 (삐친) 그럼 정관 수술이라도 하지 그래..? 그렇게도 지조를 지키고 싶으면?

철환 (웃는) 몰랐구나, 너? 나 그런거 안 해도 돼. 처음부터 씨 없는 수박이였으니까.

유마담 그럼 형규는? 말도 안 돼.. 당신 형규 때문에 그렇게..

철환 내 자식이야. 형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잡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아빠라고 불렀으니까. 그래서 난 아빠야. 난 아빠가 됐어. (자조) 좋은 아빠라는 거 나도 될 수 있을까?

유마담(N) 그 사람이 그렇게 웃는데.. 그런 얼굴은 나도 정말 처음이라.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 “웃기고 있네” 라고 비웃어 줬다면 그 사람 좀 더 편해졌을까.. (쉬고) 우리 일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변덕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어.

E.

매미소리 작게. 다방 차임벨 울리고 비틀비틀 들어서는 철환.

유마담 아직 개시 전이에요.. 철환씨..?

철환 여어..

유마담 아침부터 웬 술이야? 좋은 아빠가 된다더니..

철환 (취해서 웃는) 난 안 되나봐. 역시. 나까짓게 무슨.

유마담 무슨 소리야 그게.

철환 이혼했어.

유마담 뭐?

철환 무리인가봐 역시 나같은 고아새끼한테는. 핏줄같은 거.. 그치?

유마담 당신이 뭐가 어때서! 정말! 뭐 그딴 년이 다 있어. 어떤 놈이 붙어먹었는지 모를 새끼 데려와 호적필요하다고 발목 잡더니 뭐 이혼..? 그 년 집 어디야. 내가...

철환 년이라고 하지마. 내 아내야. 형규는 내 자식이고.

유마담 차라리 잘됐어. 이제 당신도 깨끗하게 새출발해.. 나도 이제 당신 빚 갚을 정도 됐으니까. 내가 돈 댈게.

철환 그럴까.. 해볼까. 새출발.

E.

다방 음악, 형규와 유마담

유마담 (차 마시고, 약간 물기 어린) 새출발한다고 하더니.. 진짜 넌덜머리날 정도로 바보라니까. 그 인간.

형규 죄송해요.

유마담 네가 왜 사과를 해.

형규 그냥 사과를 하고 싶어요. 죄송해요.

정말.

유마담 어쨌거나 그 인간한테 핏줄은 너 하나야. 진짜고 가짜고간에 그인간 피땀으로 길러냈으니까. 막일 하면서도 네 생활비는 꼬박 꼬박 보내야 직성이 풀렸어. 그 좋아하는 술도 담배도 줄이면서. 바보같이 아들이 뭐라고..

형규 (퍼즐 주머니 넣으며) 그럼, 갈게요. 얘기해주셔서 감사해요.

유마담 그거 퍼즐이지? 최철환 거. 조각 하나 모자르는.

형규 (N) 잃어버린 조각..

(회상)

E.

퍼즐을 맞추다 조각을 찾는 어린 형규와 희자

어린형규 어? 이상하다? 하나가 어디갔지? 엄마아~

희자 박스는? 잘 찾아봤어?

어린형규 응, 이거만 없어..

희자 지난번에 청소하다가 섞여 버렸나보다. 어쩌지? .. (간지럼 태우며) 형규 배꼽처럼 하와이 하늘에 구멍이 났네?

어린형규 으하핫, 그만~ 엄마~

형규 (N) 우습지만, 그 해 내 크리스마스 소원은 그 구멍난 퍼즐 조각 하나였다. 구멍 난 하와이의 하늘처럼 구멍 난 우리 가족을 다시 예전처럼 찾아달라고. 그런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 빠진 조각이 완성된 채 돌아와있었다. 머리맡에. 선물처럼. 그리고.

E.

방안 구슬치기 하는 초3 형규와 친구들

초3형규 간다앗~! (하면서 손가락으로 구슬치는, 챙소리와 함께)

친구1 아! 최형규! 장롱속으로 들어갔잖아!

초3형규 꺼내면 되지! (자로 장롱속을 뒤지는데) 엇, 나온다. 푸핫 먼지!

친구1 (같이 콜록되며) 어? 야, 이거 퍼즐인데?

초3형규 퍼즐? 어라, 이거 찾았는데? 왜 똑같은 게 두 개지?

E.

다방 음악

유마담 잠깐 있어봐 (서랍속 사진을 찾아 형규에게 보여주며) 자, 여기 사진! 기억나?

형규 (N) 그렇게 오래된 먼지를 끌고 나온 퍼즐 한 조각처럼 기억 깊숙이 있던 기억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회상)

E.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2) Looking for My Father (10/21/2016) (2)

그렇게 힘이 뻗치면 가서 구두라도 닦아놔.

희자 (문 닫고 나가는)

철환 성질머리하고는.

E.

방문 노크

철환 뭐야.

어린형규 아빠, 출근하세요..?

E.

상상 에코

철환 (웃으며) 빗질 하는 아비가 그리 멋있드냐?

어린형규 아빠, 하와이는 얼마나 멋진 곳이에요? 이 퍼즐그림보다 더 굉장해요?

철환 뜬금없긴. 그래, 하와이는 그 퍼즐 속 풍경보다 애비의 이 옷보다 더 화려한 곳이다.

어린형규 다음엔 저도 꼭 데리고 가주세요.

철환 네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 생각해보마.

어린형규 정말요? 정말요?

철환 이 녀석아, 옷에 주름간다! 한 시간이나 다린 옷이란 말이다! 어허, 안기지 말래도.

철환 뭐냐,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빗질하는 거 처음 보는 것처럼 뭘 뚱하니 서있어?

형규(N) 올려다본 아버지 는, 여름 햇살보다 더 눈부셔서 하와이라던지, 비행기라던지 하는 말은 꾹 삼킨 채 그저 오래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형규 퍼즐, 감사해요. 아버지.

철환 싱겁긴. 다녀오마.

M. 회상 OUT

E.김천댁 식당, 미닫이 문 여는

김천댁 추우니까 문 꼭 닫아요

형규 네 (문 닫는)

김천댁 혼자? (반찬 놓는)

형규 네, 김치찌개 주세요

김천댁 처음 왔나보네. 여긴 주문 따로 안 받아요. 오늘은 고등어찜이니까 싫으면 가고.

형규 네, 그냥 주세요.

형규(N) 김천댁...자네 아버지가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식당...

E.

식사하는 형규

형규 맛있네요

김천댁 생색내도 반찬은 더 안 줘.

형규 (웃는)

M. 브릿지

E.

형규의 사무실

선배 요즘 점심마다 바쁜 거 같던데? 그래서, 일자리는 찾아봤어?

형규 아뇨, 아직요

선배 뭐? 아직? 형규씨, 이제 정말 몇달 안 남았어.. 요새 바빠보이길래 좀 면접도 보고 다니나 했더니.. 정말. 형규 (자조) 한심하죠..

선배 (안쓰러운) 여자 친구하고도 아직 연락이 안 돼?

형규 화가 많이 났나봐요.

선배 잘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쉬고) 남자 머리가 벗겨진다고.

형규 하하. 그게 뭐예요.

선배 자, 청첩장.

형규 결혼하세요?

선배 뭐, 그렇게 됐어. 계약직한테 청첩장 주는 거 좀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한 일 선후배라고 생각 안하니까.

와서 밥이나 먹어.

형규 축하드려요.

선배 축하받아야 할지. (귓속말) 속도위반. 이러지 않고는 요즘같은 시대에 결혼하겠다는 결심이 안 서잖아. 보통. (웃는)

형규 .. 그렇죠..

E.전화벨 울리는

형규 여보세요.

여친구 (F) 형규씨, 어떡해요. 우리 세빈이 불쌍해서 어떡해요. 형규씨.

형규 세빈이가 왜요? 미나씨? 미나씨? M. 코드

E.병원 응급실 링겔 떨어지는 소리

여친구 영양실조래요. 형규씨 사람이 어쩜 그렇게 모질어요? 홀몸도 아닌 앨.. 부모님한테 들킬까봐 압박붕대까지 하고 있었대요. 세빈이. 그러게 왜 책임지지도 못할...

형규 이런 인간이라. 더, 책임질 수 없을까봐예요. .. 가서 수납하고 올게요. (걸어나가는...)

E.병원 수납창구

직원 잔액 부족인데요? 이 카드?

형규 (당황) 그럴리가...

직원 어떻게 하실래요?

형규 (주머니 통장 쥐곤) 현금.. 현금으로 할게요. 잠시만요.

E. ATM기 통장 비밀번호가 계속 틀리는.

알람 삐- 비밀번호가 다릅니다.

형규 생일도 아니고 전화번호도 아니고 대체 뭐야.

상조직원(E) 참, 통장 비밀번호는 형규씨가 가장 잘 아는 번호라고 하시던데요.

형규 잘 아는 번호.. 그럼 혹시.. (알림/확인되었습니다) 하, 내 생일이었어? 나름 유산이다 이건가. 아버지

M. 브릿지

E.

김천댁 식당, 미닫이 문 여는

김천댁 또 왔어? 혼자만 말고 색시도 데리고 오라니까

형규 총각이에요. 색시 없어요.

김천댁 멀쩡하게 생겨서 왜 아직 장가를 안 갔어?

형규 밥 주세요. 배고파요

김천댁 (반찬 놓으며) 오늘은 청국장이야.

형규 좋네요. 저 테이블은 항상 신문이 놓여있네요.

김천댁 혼자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신문 보면서 먹으라고. 벽만 보고 먹으면 체하잖아. 하긴, 신문 말고 퍼즐인가 뭔가를 하던 괴짜인간도 있었지만.

형규 퍼즐이요?

김천댁 그래, 저 혼자 넓은 테이블 하나 딱 차지하고. 10월 5일인가? 때마다 와선 하루만 봐달라고.

형규 (N) 내 생일이다.

김천댁 (O.L) 1년에 한번 있으니까 망정이지. 그러고 보니, 그이가 몇달째 안 보이네. 어디 가서 얼어 죽었나... 식당하다 보면 맘 변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봐도 식성 변하기는 쉽지 않은데..

형규 뭘 제일 좋아했는데요 그분은.

김천댁 내 집에서 반찬투정하면 돼? 주면 다 먹어야지.

형규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거 말이에요

김천댁 뭐, 청국장에 돌솥밥이지. 죽이네 죽이네 하면서 안 죽고 두 공기 꿀떡 밥 비며 먹었지. 고향 생각난다면서. ..혹시 최씨 아예 김천으로 내려간 건가? 그렇게 고향, 고향 했쌌더니만..

형규 김천 이요? 최철환씨.. 고향이에요? 거기가?

김천댁 최철환? 그런 이름인가? 뭐 누구든 고향 내려가 뜨신 밥 잘 먹고 몸 성히 있으면 되는 거지. 밥 부족하면 더 떠다먹고.

형규 네. 근데, 저, 퍼즐은 무슨 그림인지.. 기억나세요?

김천댁 퍼즐? 글쎄... 하와뭐시깽인가라던데?

E.형규 방, 박스 뒤지는, 쉽게 보이지 않고

형규 그럼 그렇지. 퍼즐은 무슨. (외투 속 비닐봉지 열면 퍼즐 있는 헛웃음)

형규 (N) 쫑쫑 묶은 검은 봉지 안엔 하와이가 있었다. 야자수와 푸른 바다가 그려진. 아버지 옷만큼이나 화려한. 검은 봉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와이가 그려진 퍼즐이..

(회상)

E.

집 마당

아줌마 (off)최철환 그 자식 어디 숨겼어?

희자 (off)그 사람 저도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요.

아줌마 (off)이 연놈이 쌍으로 사람을 거지 핫바지로 아나.. 좋게 말하니까 못 알아듣겠지? 응?

(멱살잡는)

희자 (off)정말 왜 그래요! 경찰부를거에요?

아줌마2 (off)이 독한 년이 어디서 큰 소리야! 오냐, 오늘 경찰도 부르고 장의사도 부르고! 오늘 너랑 나! 관짜자!

E.

다가오는 형규와 친구

친구2 형규야. 저기 너희 집 아냐?

어린형규 .엄마?

어린형규 (뛰어가 비집고 들어가는)엄마! 잠깐만요,저희 엄마란말이에요.

구경꾼1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구경꾼2 왜에~ 형규네 아빠가 얼굴도 곱상하고 옷도 밤무대 나가는 사람처럼 화려하고 그랬잖우? 글쎄 강남에서 유명한 제비래요.

구경꾼1 제비요? 형규네 하와이에서 미제 받아 판다고 하지 않았어요?

구경꾼2 하와이뭐시기는 무슨. 얼마나 많은 강남여편네들을 홀리고 다녔는지.. 그간 뜯긴 건만 해도 건물 한 채래요.

구경꾼1 어머, 저러다가 형규네 엄마 경치르겠어요. 경찰 불러야하는거 아녜요?

구경꾼2 경찰 불렀다가 형규네 아빠만 쇠고랑 차지 뭐. 아이고, 남자가 눈웃음을 뭘 그래 치나했더니, 결국 이런 사단이 나네.

민정댁도 말린다고 끼어들었다가 괜한 머리끄덩이 잡히지 말고.

어린형규 엄마! 우리 엄마 때리지 마요!

아줌마 얜 또 뭐야!

희자 형규야! 넌 들어가 있어.

아줌마2 하! 설마 설마 했는데 자식까지 있었어? 이 연놈들이 진짜. 네 가정 귀한 줄 알면 남의 가정도 귀한 줄 알아야지.

희자 (머리 끄덩이 잡히는) 악

어린형규 하지마! 하지마! (달려가 아줌마 손 물어뜯는)

아줌마 으악! (쓰러지며 퍼즐 엎는)

E.

밤, 방안

어린형규 엄마, 괜찮아? 많이 아프지..

희자 엄마는 괜찮아.. 많이 놀랐지, 형규. 퍼즐도 다 엉망이 됐네.. 형규가 밤새서 한건데.. 미안해.. 엄마가 많이 미안해..

어린형규 아니야, 또 하면 돼. 울지마 엄마. 울지마.

E.

현관문 열리고 들어오는

철환 야밤에 무슨 청승이야. (발에 집기들 걸린) 집안꼴은 왜이래.

어린형규 아빠. 철환 (놀란) 당신, 얼굴이 왜그래?

어린형규 이상한 아줌마들이 막 엄마를..

희자 이혼해.

철환 뭐?

희자 참을 만큼 참았어. 당신도 나도. 당신도 이제 편히 살아.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잡지 않을테니까. 어차피 당신이란 사람한테 안 어울리는 삶이었어. 당신도 나도 더이상 무리하지말자고.

철환 뭐야, 이제 나말고 다른 서방이라도 생겼나보지?

희자 말 가려해. 애 앞이야. 내가 미쳤지. 차라리 당신이란 사람. 없는 게 형규한테 더 이로워. 제발 나가.

철환 나도 뭐 이 집구석 좋은줄 알아? 그래, 이혼해. 나야 땡큐지.

어린형규 (울먹이며 잡는) 아빠.. 안돼.. 가지마세요.

철환 (버럭!) 이 자식이, 어딜 잡아. 바지 주름잡히게! 손 놔! 이놈아!

어린형규 아빠아..

E.

현관문 쾅 닫히는, 매미 소리 크게 울리는.

형규(N) 어지럽혀진 퍼즐 속 조각난 하와이의 풍경처럼 여섯 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은 그렇게 끝이 났다.

M. 브릿지

E.시내

안내음성 (F) 삐- 소리가 나면

형규 몸은.. 이제 괜찮아? 나 지금 아버지 고향에 왔어. 내일 올라 갈거야.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 줘. 세빈아. (전화 끊는)

형규 나도 참, 뭘 찾겠다고 계획도 없이 김천까지.

E.오토바이 경적

오토바이남 임마, 눈 똑바로 뜨고 다녀

형규 (놀라) 뭐 이자식아! 거기 서, 임마!

다방레지 (티켓 날리며 멀어지며) 귀여운 오빠야, 이상 있으면 여기로 찾아온나

형규 (줍고) 다방 제비? 다방 이름하고는.. 가만 여기 들어 본 것 같은데.. (수첩 꺼내 뒤져보며) 제비 제비.. 아, 있다! 제비 다방 유마담..

E.다방 입구, 차임벨 울리며, 트롯트 가요 흐르고...

유마담 어서 오세요~ 오빠 혼자?

형규 혼자는 맞는데, 오빠는 아닌 것 같은데요.

유마담 오빠지 그럼 언니야? 앉고 싶은데 앉아요.

형규 (가서 앉고, 중얼) 역시 들어오는 게 아니었나.

유마담 (다가와서) 음료는 뭐 줄까?

형규 쌍, 쌍화탕 주세요. 노른자 띄워서.

유마담 흐으응~ 쌍화탕은 무슨, 커피 마셔. 더워 보이는데. 냉커피 괜찮지?

형규 그럴거면 주문은 왜..

유마담 오빠, 보기보다 뒤끝있다?

형규 혹시 유마담이라는 분이.

유마담 (앉으며) 어머 어머 난데? 나 알아?

형규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런) 저희 아버지가 최철환씬데..

유마담 그게 뭐?

형규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유마담 병이야..?

형규 폐암이셨대요

유마담 많이.. 아팠대?

형규 그건 저도.

유마담 그랬겠지. 죽었구나 그 인간. 결국. (이내 밝게) 근데 왜 날 찾아왔어?

형규 아버지 유품 중에 빚장부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이름이 있더라고요. 총..

유마담 273만원인가.? 몇 년 전 빚을.. 그 인간도 끈질기네.. 그래서 아버지 대를 이어서 빚을 받겠다는 거야? 너도 참 할 일이 없구나. 근데, 나 돈없어. 보다시피 파리 아니면 시덥잖은 인간들만 들끓어서 말이야.

형규 빚 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유마담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형규 아들.. 로서..

유마담 아아~들? (자지러지게 깔깔대는) 아들이래... (숨 고르며) 오빠 몇 살이지? 서른 좀 넘었나? 오빠네 엄마도 참 대단하다. 그렇지?

형규 무슨.

유마담 최철환 그 인간.. 애 못 만들어.

형규 ..!

유마담 생물학적으로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만약 그랬다간 나랑 그 인간 사이에 벌써 축구단 만들었을 걸? 그렇게 벙쪄있지말고. 이제 와서 아빠가 필요했다느니 하는 거 웃기잖아? 지금처럼 잘 먹고 잘 살면 돼. 아빠가 누구든, 누가 아빠란 이름으로 살다가 죽었든간에.

E.

시간경과, 다방 음악 바뀌고

손님1 유마담 커피는 언제 마셔도 맛있어.. 손이 이렇게 예뻐서 그런가?

유마담 김사장님도, 어제는 정미가 타주는 게 맛있다고 해놓구선.

손님2 김사장이 실수했네, 유마담은 아직도 잘 삐친다구.

손님1 유마담 삐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랬지~

유마담 아이, 너무해요.

손님2 그래서, 유마담이 젊은 애 키우는 거 아냐? 저 젊은이 표정이 영 안 좋다고. 여기서 늙은이들 비위 맞춰도 되는 거야?

유마담 어머, 아니에요. 손님이에요. 손님. (일어나서 형규에게 다가가)

유마담 (앉고) 언제까지 정신 놓고 있을 거야. 있는 건 상관없는데 그런 표정은 장사에 방해된다고.

형규 (퍼즐 봉지 부스럭) 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회상)

E.

28년 전의 제비 다방, 오래된 가요...차임벨 울리며

유마담 어서 오세..(반가운) 철환씨, 이게 얼마만이야? 얼굴 더 좋아졌다?! 서울물이 맞는가봐?

철환 호들갑은. 넌 마담하더니 좀 늙었다?

유마담 (거울 보며) 어디가..? 진짜, 간만에 봤는데 그럴거야..

철환 거울 본다고 주름 펴지는 것도 아니고 냉커피나 줘. 덥다.

유마담 김양아, 여기 냉커피 달달하게!

웬일로 김천까지 행차한 거야?

철환 (장난) 돈 갚으라고. 이제 갚을 때도 됐잖아..?

유마담 진짜! 철환씨 일부러 그러는 거지.

철환 그냥.. 오랜만에 고향 밥 먹고 싶어서.

유마담 (걱정) 무슨 일 있어? 있구나? 그치?

철환 (귀여운) 풉- 성격 급하긴.. 그래가지고 장사하겠어?

유마담 (야속한) 당신이랑 내가 그런 사이야? 무슨 일이길래 그래? 응?

철환 나.. 이제 이 짓 그만할까봐..

유마담 (핏-) 무슨 짓? 강남 싸모님들 후리고 다니는 짓? 소문에는 서울의 한강이 그 마나님들 눈물로 채운 거래매? 아님 강남 노른자땅에 벌써 빌딩이라도 세운거야?

철환 .. 그냥 이제 남의 돈은 체할 거 같아서. 소화가 잘 안 되네.

유마담 (장난) 철환씨도 이제 나이드나 보다. 안 어울리는 소리를 하고. 농담이라면 재미없는데.

철환 그냥 최형규 아버지로만.. 그렇게 살고 싶다면 욕심일까.

유마담 (삐친) 그럼 정관 수술이라도 하지 그래..? 그렇게도 지조를 지키고 싶으면?

철환 (웃는) 몰랐구나, 너? 나 그런거 안 해도 돼. 처음부터 씨 없는 수박이였으니까.

유마담 그럼 형규는? 말도 안 돼.. 당신 형규 때문에 그렇게..

철환 내 자식이야. 형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를 잡고, 나를 바라보고, 나를 아빠라고 불렀으니까. 그래서 난 아빠야. 난 아빠가 됐어. (자조) 좋은 아빠라는 거 나도 될 수 있을까?

유마담(N) 그 사람이 그렇게 웃는데.. 그런 얼굴은 나도 정말 처음이라.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 “웃기고 있네” 라고 비웃어 줬다면 그 사람 좀 더 편해졌을까.. (쉬고) 우리 일이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변덕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어.

E.

매미소리 작게. 다방 차임벨 울리고 비틀비틀 들어서는 철환.

유마담 아직 개시 전이에요.. 철환씨..?

철환 여어..

유마담 아침부터 웬 술이야? 좋은 아빠가 된다더니..

철환 (취해서 웃는) 난 안 되나봐. 역시. 나까짓게 무슨.

유마담 무슨 소리야 그게.

철환 이혼했어.

유마담 뭐?

철환 무리인가봐 역시 나같은 고아새끼한테는. 핏줄같은 거.. 그치?

유마담 당신이 뭐가 어때서! 정말! 뭐 그딴 년이 다 있어. 어떤 놈이 붙어먹었는지 모를 새끼 데려와 호적필요하다고 발목 잡더니 뭐 이혼..? 그 년 집 어디야. 내가...

철환 년이라고 하지마. 내 아내야. 형규는 내 자식이고.

유마담 차라리 잘됐어. 이제 당신도 깨끗하게 새출발해.. 나도 이제 당신 빚 갚을 정도 됐으니까. 내가 돈 댈게.

철환 그럴까.. 해볼까. 새출발.

E.

다방 음악, 형규와 유마담

유마담 (차 마시고, 약간 물기 어린) 새출발한다고 하더니.. 진짜 넌덜머리날 정도로 바보라니까. 그 인간.

형규 죄송해요.

유마담 네가 왜 사과를 해.

형규 그냥 사과를 하고 싶어요. 죄송해요.

정말.

유마담 어쨌거나 그 인간한테 핏줄은 너 하나야. 진짜고 가짜고간에 그인간 피땀으로 길러냈으니까. 막일 하면서도 네 생활비는 꼬박 꼬박 보내야 직성이 풀렸어. 그 좋아하는 술도 담배도 줄이면서. 바보같이 아들이 뭐라고..

형규 (퍼즐 주머니 넣으며) 그럼, 갈게요. 얘기해주셔서 감사해요.

유마담 그거 퍼즐이지? 최철환 거. 조각 하나 모자르는.

형규 (N) 잃어버린 조각..

(회상)

E.

퍼즐을 맞추다 조각을 찾는 어린 형규와 희자

어린형규 어? 이상하다? 하나가 어디갔지? 엄마아~

희자 박스는? 잘 찾아봤어?

어린형규 응, 이거만 없어..

희자 지난번에 청소하다가 섞여 버렸나보다. 어쩌지? .. (간지럼 태우며) 형규 배꼽처럼 하와이 하늘에 구멍이 났네?

어린형규 으하핫, 그만~ 엄마~

형규 (N) 우습지만, 그 해 내 크리스마스 소원은 그 구멍난 퍼즐 조각 하나였다. 구멍 난 하와이의 하늘처럼 구멍 난 우리 가족을 다시 예전처럼 찾아달라고. 그런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 빠진 조각이 완성된 채 돌아와있었다. 머리맡에. 선물처럼. 그리고.

E.

방안 구슬치기 하는 초3 형규와 친구들

초3형규 간다앗~! (하면서 손가락으로 구슬치는, 챙소리와 함께)

친구1 아! 최형규! 장롱속으로 들어갔잖아!

초3형규 꺼내면 되지! (자로 장롱속을 뒤지는데) 엇, 나온다. 푸핫 먼지!

친구1 (같이 콜록되며) 어? 야, 이거 퍼즐인데?

초3형규 퍼즐? 어라, 이거 찾았는데? 왜 똑같은 게 두 개지?

E.

다방 음악

유마담 잠깐 있어봐 (서랍속 사진을 찾아 형규에게 보여주며) 자, 여기 사진! 기억나?

형규 (N) 그렇게 오래된 먼지를 끌고 나온 퍼즐 한 조각처럼 기억 깊숙이 있던 기억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회상)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