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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생활기 - 자유조선방송, 제101화 어머니와의 통화

제101화 어머니와의 통화

휴일이라 늦 잠자느라 이불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붕~ 붕~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북한 전화였다. 후딱 일어나 거절해버리고 인터넷 전화를 집어 들고 다시 걸어주었다.

삼일 전에 준비통화를 했으니 오늘은 분명 어머니가 곁에 계실 것이다. 당국의 통제로 편안히 통화할 수 없으니 아마 몇 십리 길을 걸어 깊은 산속에 오셨을 게 분명했다.

전화가 연결되고 “정임아! ~” 하고 부르시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하염없이 우시는 어머님, 그동안 통화하면서 별로 눈물 흘린 적은 없었다. 집을 떠나 1년 만에 처음 중국에서 통화할 땐 전화통을 붙들고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울었었다. 하지만 그 후론 꼭 꼭 1 년에 한번 씩은 통화를 해와서 그냥 덤덤하기만 했었는데, 오늘따라 어머님 눈물이 헤퍼지셨다.

어머니의 얼굴을 못 본지도 10년 세월이 지났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이 늙으셨을까, 이가 빠져 새어나가는 말 소리에, 더욱 목이 잠기신 듯한 10년간의 어머니의 년륜이 전화통 속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어머님 나이 어느 덧 60여세, 여기선 아직도 한창 나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되어 있다.

어머니는 추위에 온 몸을 부르르 떨고 계셨다. 추위가 한풀 꺾인 여기와는 달리 거긴 눈까지 온 모양이었다. 추운 날씨에 허리 아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딸과의 통화를 위해 50리길을 걸어 와 그 추운 산 속 움막에서 하루 밤을 지내셨다고 하니, 얼마나 춥고 고생 많으셨으랴,

어머니께 물어보니 지금 장마당에선 쌀 1키로에 5~6천원, 집을 나올 때 100원 선에서 오르내리던 쌀값이 10년 안에 천정부지로 올랐다. 국가 경제가 엉망이 되어 생필품이 나오지 않는데다 로임도 변변치 않는 나라에서 장마당 가격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여오르니 하바닥 평 백성들은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 며칠 전엔 전쟁소동을 벌리며 대피 훈련하느라 갱도에 들어가 계셨다고 한다.

들을수록 답답한 고향 소식에 한 숨만 나가고, 더 이상 긴 통화도 할 수 없어 어머니께 돈 100만원 부쳐드렸다. 그래봐야 수수료 떼고 나면 70만원, 혹은 50만원, 그나마도 제대로 전달되면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와 혜여지면서 힘내라고 말로만 인사드리는 이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드시라고, 그리고 맥을 놓지 말고 힘을 내어 사시라고, 꼭 살아서 만날 거라며 눈물로 인사 드렸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니 찌뿌둥한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어머님 계시는 산엔 눈이 왔다고 하니, 미끄러운 산길을 내려가실 어머님 모습이 다시금 눈에 밟힌다. 제발 사고 없이 조심히 돌아가셔야 할 텐데~

통일! 언제면 통일이 오려나, 사랑하는 부모님과 얼싸안고 울고 웃으며 옛말 할 그날은 과연 언제일까, 우린 죄인도 아닌데 왜 살아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질 수도 없고, 세상 그 어디에 이런 기막힌 비극이 또 있단 말인가, 부디 통일이 아니어도 서로 오고 갈수 있게만 되어도 한이 없겠다.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을 끊어버리는 살인 같은 비극이여, 하루 빨리 물러가고 이 땅에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봄비가 내려지기를~


제101화 어머니와의 통화 Episode 101 Talking to your mother

휴일이라 늦 잠자느라 이불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붕~ 붕~ 핸드폰이 울렸다. I did not get out of bed because I had to sleep late because of the holiday, but my phone was ringing. 번호를 보니 북한 전화였다. 후딱 일어나 거절해버리고 인터넷 전화를 집어 들고 다시 걸어주었다.

삼일 전에 준비통화를 했으니 오늘은 분명 어머니가 곁에 계실 것이다. 당국의 통제로 편안히 통화할 수 없으니 아마 몇 십리 길을 걸어 깊은 산속에 오셨을 게 분명했다.

전화가 연결되고 “정임아! ~” 하고 부르시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채 하염없이 우시는 어머님, 그동안 통화하면서 별로 눈물 흘린 적은 없었다. 집을 떠나 1년 만에 처음 중국에서 통화할 땐 전화통을 붙들고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울었었다. 하지만 그 후론 꼭 꼭 1 년에 한번 씩은 통화를 해와서 그냥 덤덤하기만 했었는데, 오늘따라 어머님 눈물이 헤퍼지셨다.

어머니의 얼굴을 못 본지도 10년 세월이 지났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이 늙으셨을까, 이가 빠져 새어나가는 말 소리에, 더욱 목이 잠기신 듯한 10년간의 어머니의 년륜이 전화통 속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어머님 나이 어느 덧 60여세, 여기선 아직도 한창 나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되어 있다.

어머니는 추위에 온 몸을 부르르 떨고 계셨다. 추위가 한풀 꺾인 여기와는 달리 거긴 눈까지 온 모양이었다. 추운 날씨에 허리 아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딸과의 통화를 위해 50리길을 걸어 와 그 추운 산 속 움막에서 하루 밤을 지내셨다고 하니, 얼마나 춥고 고생 많으셨으랴,

어머니께 물어보니 지금 장마당에선 쌀 1키로에 5~6천원, 집을 나올 때 100원 선에서 오르내리던 쌀값이 10년 안에 천정부지로 올랐다. 국가 경제가 엉망이 되어 생필품이 나오지 않는데다 로임도 변변치 않는 나라에서 장마당 가격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여오르니 하바닥 평 백성들은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 며칠 전엔 전쟁소동을 벌리며 대피 훈련하느라 갱도에 들어가 계셨다고 한다.

들을수록 답답한 고향 소식에 한 숨만 나가고, 더 이상 긴 통화도 할 수 없어 어머니께 돈 100만원 부쳐드렸다. 그래봐야 수수료 떼고 나면 70만원, 혹은 50만원, 그나마도 제대로 전달되면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와 혜여지면서 힘내라고 말로만 인사드리는 이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드시라고, 그리고 맥을 놓지 말고 힘을 내어 사시라고, 꼭 살아서 만날 거라며 눈물로 인사 드렸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니 찌뿌둥한 하늘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어머님 계시는 산엔 눈이 왔다고 하니, 미끄러운 산길을 내려가실 어머님 모습이 다시금 눈에 밟힌다. 제발 사고 없이 조심히 돌아가셔야 할 텐데~

통일! 언제면 통일이 오려나, 사랑하는 부모님과 얼싸안고 울고 웃으며 옛말 할 그날은 과연 언제일까, 우린 죄인도 아닌데 왜 살아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질 수도 없고, 세상 그 어디에 이런 기막힌 비극이 또 있단 말인가, 부디 통일이 아니어도 서로 오고 갈수 있게만 되어도 한이 없겠다.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을 끊어버리는 살인 같은 비극이여, 하루 빨리 물러가고 이 땅에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봄비가 내려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