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여섯 번째-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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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스물 여섯 번째
항공 로선 및 공작 지역에 대한 연구를 마친 우리에게 마침내 기본 방침이 내려졌다. 수립된 기본 방침은 다음과 같다.
‘평양을 출발하여 복귀시까지는 장 지도원이 인솔하고 김승일은 공작조장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수행한다. 해외 로정은 1984년 8월 중순경 평양에서 장 지도원 인솔하에 공작조2명이 출발하여 모스크바-부다빼스뜨-비엔나-쾨펜하겐에 도착, 그곳에서 장 지도원과 헤여진다. 장 지도원은 마카오로 미리 가서 대기하는 한편, 공작조는 개별 행동하에 쾨펜하겐- 프랑크프루트-쮸리히-제네바-빠리로 간다.' ‘김옥화는 빠리에서 단독으로 홍콩을거쳐 마카오로, 김승일은 서울-홍콩-마카오로 가서 마카오에서 3명이 재합류한다. 다시 장지도원의 인솔로 중국 광주-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복귀한다.' ‘교통편 및 주재 성원 지원은 모스크바, 부다빼스뜨, 광주, 북경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화국 공무 려권을 사용하여 주재 성원의 방조를 받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본인으로 위장, 일본 려권을 사용하며 자체적으로 제기된 문제를 제때 제때 해결해 나간다.'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방법으로는 김승일과 김옥화는 일본인 부녀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김승일은 '하찌야 신이찌‘ 김옥화는 '하찌야 마유미‘ 로 행세한다. '하찌야 마유미‘는 본적이 일본 오까야마껭 도미하라 1006이고 주소는 일본 도꾜도 시부야구 에비수 10-4-6 이며, 생년월일은 1960년 1월 27일생이다.' ‘아버지 ‘하찌야 신이찌'는 오오이 운수주식회사 취체역 부사장으로 있으며, 어머니 ‘다마에'는 7,8년 전 사망했고 현주소인 시부야구 에비수에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에 살던 곳은 이다바시구인데 그곳에서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2년제인 아오야마 녀자 단기대학 가정과를 졸업하였다. 4살 위인 ‘키미에'라는 언니가 1명 있는데 오사까로 시집가서 살고 있다 등 일본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위장구실을 세세하고 완벽하게 마련한다.‘ 김승일과 나는 일본인으로 가장하기 위해 배합되던 날부터 일본어만 사용하여 대화했으며 그의 딸처럼 언제나 나는 그를 ‘오또오상'이라고 불렀다. 나는 일본 처녀처럼 꾸미기 위해 일본 잡지 동영상 등을 보면서 옷차림과 화장, 머리모양에 신경을 썼다. 또 김승일의 건강을 보좌하는 임무를 더 잘 해나가기 위해 초대소 생활 때부터 친할아버지를 모시듯 시간 맞추어 약을 달여 바치면서 진심으로 건강을 돌보는 습관을 익혔다.
8월 초, 장 지도원이 우리가 사용할 려권을 가지고 왔다. 나에게는 생년월일이 1960년 1월 27일생인 김옥화 명의의 북조선 공무려권과 생년월일이 1960년 1월 27일생인 ‘하찌야 마유미' 명의의 일본 려권이 주어졌다. 이때 나는 생전 처음 일본 려권을 보았다. 이렇게 위조 일본 려권을 만들어 사용해도 괜찮을까 걱정이 되였다.
려권에는 이미 1984년 8월 25일 나리타 출국, 1984년 8월 25일 방콕 입국, 26일 방콕 출국을 나타내는 3개의 출입국 도장이 찍혀있었는데 해외로 다닌 흔적을 완벽하게 보이기 위해 장 지도원이 이 내용을 외워두라고 했다. 우리는 려권용 사진을 찍을 때도 김일성 휘장을 달지 않은 상태로 각각 촬영하였다. 휘장을 달고 찍은 사진은 북조선 려권에, 휘장을 달지 않은 사진은 일본 려권에 사용되였다.
사진 촬영은 조사부 소속 사진사가 초대소를 방문하여 2층 응접실에서 촬영했다. 서명 날인하고 일본 려권 9페이지에 3개의 출입국 도장이 이미 찍혀 있음을 확인한 후 려권을 도로 반납하였다.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공작 장비는 모두 일본 제품이 지급되였다. ‘태월춘'이라는 초대소 식모는 나의 장비품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샴푸'를 보고는 크림이냐, 어떻게 쓰는거냐고 묻기도 하고 특히 세이꼬 시계를 몹시 부러워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