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세 번째-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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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세 번째
홍매는 영화에 광적이다시피 취미가 있어 많은 배우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래서 배우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팔로군 투쟁 영화인 ‘대하는 굽이쳐 흐른다'라는 중국영화에 나오는 40대 후반 남자배우 뚜슝과 홍매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의 부인도 성우로 아주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는 여러 번 그녀의 목소리로 중어 교과서 내용을 녹음했다가 들었다. 동방로에 있는 그의 집에 놀러 갔다가 상해 출신 여배우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당시 그 여배우는 미국 친척집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왔으며 곧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신청해 놓고 있다고 했다. 이 상해 출신 여배우가 바로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 부의의 정실로 나오는 ‘죠안첸'이라는 여자이다. 이들 중국인들과 사귀면서 생일 연회에도 참석하고 명절날에 방문하기도 하고 결혼식에도 참석하면서 중국의 생활 풍습과 역사를 배워 나갔다. 또한 그들과 함께 ‘백운산', ‘유화공원', ‘동산공원', ‘수려공원', ‘계림' 등 광주 주변 명소를 관광하기도 하고 ‘백운빈관', ‘화원빈관' 등에서 얌차를 먹어 보기도 했다. 교외 채소밭이나 양어장을 견학하기도 하고 사진전, 미술전람회, 광주도서관 등의 시설을 이용도 해보았다. 북경로나 주강 주변을 산책하기도 하면서 중국의 환경 지리도 익혔다. 1년이 지나자 사귀던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이제는 완전히 중국사람 같다, 말을 너무 잘 한다' 며 우리를 추켜세웠다. 우리가 생각해도 중국어 실력이 급작히 발전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정치사상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김일성, 김정일 덕성 자료로 독보를 하고 노동신문을 읽었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박 지도원의 지도로 주간 생활총화를 하여 그간의 결함을 비판하고 결의를 다졌다. 또한 A-2의 지령을 받기 위해 매월 10, 11 일과 25, 26일 새벽 1시에 라지오에 귀를 기울여 암호문을 받아 써 해독해야 했다. 수신상태가 좋지 않아 고생할 때도 있었고 지령이 없는 달도 있었다. 우리가 해독한 지령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크나큰 신임과 배려로 조국 해방 40돌을 맞아 기념 메달이 수여되었음을 축하한다. ' ‘항상 혁명적 경각심을 높이고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것을 기대한다. ' 북조선 창건 기념일, 로동당 창건일, 신년, 김정일 생일, 김일성 생일 등 5대 명절을 맞을 때마다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의 축전과 함께 광주 실습 생활 및 학습 총화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창해 지도원을 경유하여 본부 성원에게 보고하였다. 광주에서 1년이 지나자 우리는 마카오로 떠날 준비에 바빴다. 그동안 광주에서 사귀어 정든 동무들에게는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알렸다. 그들은 몹시 서운해 하며 송별연도 열어주고 기념품도 주면서 다음에 꼭 다시 오라고 당부했다. 편지하라고 주소도 써주었지만 우리는 신분상 그럴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인사말로만 그러리라 응답했다. 광주는 사회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는 물자의 풍족함이 있었고 개인적인 자유가 그런대로 인정이 되는 사회였다. 처음에는 거리나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꾀죄죄하여 중국을 무시했으나 살면서 점점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순수하고 속이 깊었으며 진국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들이 베풀어 준 따뜻한 우정이 일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이 쏟아 준 정에 비해 우리는 하나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는 압박감 때문에 가슴속 깊은 뜨거운 정을 마음껏 나누어 주지 못한 것이 항상 미얀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