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4편 | 삼성 반도체의 탄생 [브랜드 스토리]
지난 영상에 이어 삼성 4편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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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인자연농원 각종 사업을 하고 있던 병철은 평소에 해외를 자주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꼭 보게 되는 풍경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헐벗은 우리나라의 산지였습니다.
국토의 60% 정도가 산지로 되어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군수물자와 연료용으로 나무를 다 베어 버려
산림이 많이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병철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의 경영 일선에 물러난 병철은
산을 가꾸어보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1968년
병철의 농원 조성사업은 국토개발의 시범사업으로 선정되며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토질, 강우량, 온습도 등을 검토하여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그는
경기도 용인군 포목면에 있던 450만 평 규모의 야산에다가
농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그 야산을 2천 명이 넘는 소유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설득하며 사들였다고 합니다.
1971년부터
다양한 종의 묘목을 심기 시작했고
나무에 필요한 퇴비 생산을 위해 돼지 600두를 수입해왔습니다.
농원 조성에 필요한 물을 위해서 5만 평 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어
잉어와 붕어 등 양어를 하는 동시에 낚시터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동물들도 데려와 동물원도 세팅했는데
국내 최초로 사자 사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1976년 4월 18일
국내 최초 가족놀이동산 용인자연농원이 개장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국내 꽃 축제의 효시라 불리는 장미 축제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96년
용인자연농원은 명칭을 변경하여 운영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용인 에버랜드입니다.
2. 삼성중공업 삼성전자를 설립하고 기초를 다진 병철은 어느샌가 또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경공업 계열의 산업을 해오고 있었지만
일본을 자주 오가며 일본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중화학 분야
바로 조선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항상 세계 최대 규모를 외쳤던 병철은 이번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73년 5월
선진 기술의 도입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사 IHI를 찾아갔습니다.
이후 IHI와 삼성이 각각 50%씩 투자하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짓기 위해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평의 부지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의 전쟁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원유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1차 오일쇼크라 부릅니다.
1차 오일쇼크는 전세계 신규 선박의 발주를 몽땅 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이미 계약했던 것들도 계약금을 포기하며 취소했습니다.
결국 병철도 통영의 안정리조선소 착공을 연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경남 죽도에는 한창 공사를 진행하다가 오일쇼크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중형조선소,
우진조선이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던 이 조선소를 살리기 위해
박정희 정부와 은행은 삼성에게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조선소는 병철이 생각했던 세계 최대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배경
인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77년 4월
정부의 강한 요청으로 인해 삼성은 조선소를 인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9월
최대 6만 5천톤의 건조능력을 갖춘 첫 번째 도크가 완공되며 선박건조를 시작했습니다.
이 조선소는 비록 병철이 의도치 않게 떠맡은 조선소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조선소 중 하나가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입니다.
한편 IHI와 합작으로 진행하려던 조선소 사업 계획이 틀어지면서
기계공업으로 사업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 창원 2공장입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창원1공장 창원 2공장은 볼보에 매각되어 현재는 볼보그룹의 소유가 됩니다.
3. 반도체 사업의 시작 1974년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동양방송 TBC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 이후
한국이 새로운 첨단 산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
건희는 오일쇼크로 인해 한 회사가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바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였습니다.
건희는 우선 '반도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반도체 산업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며
먼지 한 톨도 용납할 수 없는 아주 깨끗한 환경에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젓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재주가 뛰어나며
집에서는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청결면에서도 강점이 있다고 판단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병철에게
“아버지, 반도체는 주식회사와 원자력과 함께 인류의 역사를 바꾼 3대 발명품 입니다."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 사업도 당연히 해야 합니다." 라며
삼성 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를 건의했습니다.
당시 반도체 산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5조~6조 원이 필요했으며
1개의 반도체 라인을 만드는 데만 해도 1조 원이나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타사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개발하면 초대박이 날 수도 있었지만
타사보다 조금만 늦어도 완전 쪽박이 나는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철은 아직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하여
건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74년 12월 6일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건희는 자신의 개인 자산 4억 원으로 대뜸 한국반도체 주식 50%를 매입하며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버렸습니다.
건희는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직 한국반도체의 기술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겁니다.
비실비실한 상태로 겨우 버티고 있던 한국반도체는
결국 1977년 12월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삼성반도체 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80년 1월
삼성전자에 흡수되어 반도체사업부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체 설계 기술이 없었던 탓에 반도체사업부는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하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미운 오리로 낙인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병철은 직접 나서서 반도체 사업부를 살려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병철은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의 한 반도체회사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후 그 반도체회사 회장은 직원들을 보내 삼성반도체의 부천공장을 방문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공장을 방문한 이후 어떠한 피드백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경쟁상대가 될 업체에게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아니, 도대체 반도체가 뭐고?!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이날 이후로 병철은 반도체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77년
한국반도체가 삼성그룹의 애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1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던 병철은
급히 건희를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취합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을 상속할 때 부모가 살던 집은 장남이 물려받는데
병철은 자신이 살고 있던 장충동 본가를 건희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그렇게 1979년 2월
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83년 2월 8일
반도체에 대해 오랜 기간 공부하며 고민해 온 병철은
도쿄에서 한국에 있던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에게 전화하여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했고 이 소식은 중앙일보를 통해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을 '도쿄선언'이라고 부릅니다.
삼성전자의 첫 번째 반도체 사업 목표는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이던 '64K D램'을 양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설계도면을 마이크론으로부터 들여온 뒤
나머지 모든 공정 프로세스를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3년 12월 1일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간지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4. 2대 회장 이건희 1984년 8월부터
삼성전자는 64k D램을 본격적으로 출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마이크론 등 선진 반도체 회사는 256K D램을 출시했고
삼성을 의식하며 64K D램의 가격을 확 낮춰버렸습니다.
결국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수년간 무려 1200억원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병철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면서 이미 각오했던 일이기에
담담히 다음 개발을 진행다고 합니다.
그렇게 1984년 10월에 256K D램 양산에 성공했으며
1986년 7월에는 1M D램을 설계부터 모든 공정까지 독자기술로 개발하게 됩니다.
이 무렵 병철은 더이상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었습니다.
1976년에 위암수술, 1979년에 뇌수술을 받았던 그는
1986년부터는 집에서 요양하며 손주들을 돌봤다고 하는데
그래서 많은 업무가 건희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은 삼성, 현대, 금성이 4M D램을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기업이 별도로 개발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반도체는 웨이퍼라는 원판 위에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저항 등의 많은 소자를 쌓아서 만듭니다.
1M D램까지는 웨이퍼에 단층으로 칩을 쌓아서 제작이 가능했지만
4M D램때부터는 반도체 용량이 커지며
단층으로만 쌓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4M D램 개발을 위해서는 2가지 제작 방식중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고 내려가서 집적도를 높이는 트렌치 공법과
웨이퍼 표면에 새로운 층을 쌓아서 집적도를 높이는 스택 공법.
이 두 가지 공법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트렌치 공법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밑으로 파낼수록 회로가 보이지 않아서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졌으며
스택 공법은 작업이 쉽고 경제성이 있지만 품질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건희는 개발 방식의 선택을 위해
전자공학 박사 두 명을 불러 두 공법에 차이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트렌치 공법은 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지만"
"스택은 아파트처럼 위로 쌓기 때문에 그 속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트렌치는 검증할 수 없지만 스택은 검증이 가능합니다."
"이 점이 핵심 차이입니다."
이 얘기를 건희에게 전한 이들은 권오현 박사와 진대제 박사였습니다.
참고로 권오현 박사는 2018년 3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삼성전자 회장을 지내고
현재 삼성전자 고문으로 있는 인물이며
진대제 박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현재 한국블록체인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희는 이들의 얘기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스택공법보다 트렌치 공법을 선택했으며
우리나라의 현대전자도 트렌치 공법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건희는 위로 쌓는 방식인 스택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4M D램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1대 회장 병철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병철의 셋째 아들 건희는 46살의 나이로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됩니다.
건희는 취임식에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라며 강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1988년 2월
1988년 2월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을 이용한 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선두업체와의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습니다.
1988년 3월 22일
삼성상회가 세워지며 시작된 삼성의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거대한 생명체, 위대한 내일을 약속하는 제2창업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것을 제2 창업 선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희는 자신의 생각대로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연관성이 있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 등을 삼성전자로 한데 묶은
통합 삼성전자가 출범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주산업과 유전공학 등 새로운 사업 진출 의지도 밝혔습니다.
1988년
4M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스택 공법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전년 대비 무려 176%나 성장하며 매출액 6천 7백억 원
누적적자를 제한 순 이익이 1600억원에 이를만큼 성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1990년 8월
세계 선두 업체들과 거의 동시에 16M D램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선두주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트렌치 공법 대신 스택 공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이들이 얘기 합니다.
그렇게 삼성은 안정적으로 체제 변화가 이뤄지고 점점 더 성장해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던 1993년 6월 7일
건희는 명언을 남깁니다.
브랜드백과사전 삼성 5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