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여섯 번째-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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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여섯 번째
은혜는 가끔 응접실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면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아직 어리고 혁명성과 사상성만이 한창 강하던 처녀애로서 그녀의 가슴 아픈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러는 그녀가 인간적으로 불쌍하기는 했지만 우리 민족의 분단에 책임 있는 일본인이 통일을 위해 1명쯤 희생되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정당하고 현명한 당에서 그런 것을 다 감안하고 하는 일일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은혜는 싫다는 나를 붙들고 둘이서만 있고 싶다면서 일본 노래를 틀어놓고 눈물을 쏟았다.
“나, 울고싶어서 그러니까 리해해줘, 울어도 괜찮지? 저 노래 들으니까 내 과거가 되살아나서 그래.”
은혜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마냥 흐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과일도 깎아주고 과자도 가져다 놓고 하며 그녀를 달래보려고 노력했다. 또 은혜가 슬픔에 젖어 멍하니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왜 이런 괴로운 일을 떠맡아야 하나' 하고 화도 났지만 그녀를 위로하는 이 일 역시도 혁명임무라고 생각하며 서툰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었다. 초대소에서만 갇혀 사는 은혜는 가끔 바깥 세상을 보기를 원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구경과 참관 또는 상점을 가기 위해 나가는 외에는 거의 외출이 없었다. 저녁식사 후 인적이 없는 호젓한 산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도 하루 일과 중 하나였는데 다른 쪽으로 빠져 한참 내려가면 단층집 마을이 있었다. 은혜는 북조선에 와서 아직까지 한 번도 서민의 생활을 본 적이 없다며 사는 형편을 몹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오다가 어두워지면 ‘다른 사람 눈에 안 띄니 그 마을 쪽으로 가서 주민 사는 모습을 엿보자'고 그녀는 제안했다. 평양 주변이 다 그렇듯이 그들의 생활은 몹시 비참한 형편이었다. 단층집을 2.3개로 나누어 각각 작은 방 한 칸과 부엌을 만든 집이었다. 부엌에는 범랑 냄비가 있고 여러 가지 두꺼운 종이로 더덕더덕 기운 장판 우에는 구질구질한 이불 몇 채가 놓여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가구였다. 나는 그런 북조선 주민 생활을 굳이 보려고 애쓰는 그녀가 밉살스럽고 한편 부끄러웠다. 나는 극구 말리며 그만 돌아가자고 잡아끌었다.
그녀는 단지 호기심에서 보려 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자본주의보다 우리 사회주의 북조선이 골고루 다 잘 살고 평등하다며, 자본주의의 빈익빈 부익부를 결점으로 지적하고 북조선의 우월성을 리론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녀에게 사상적으로 사회주의 북조선을 동경하도록 교양하려는 참인데 이와는 전혀 다른 한심한 인민 생활을 보면 어쩌나 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하루는 산책하다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은혜는 막무가내로 마을로 내려갔다. 초대소 구역에는 보초가 있으므로 우리만 다니는 뒷 통로로 20~30분 걸어 내려가 마을로 갔다. 여름이어서 은혜는 깃이 없는 반소매의 흰 면 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북에서는 이런 옷은 내의로 생각해 밖에서는 입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혹간 할머니들이나 아주머니들이 집안에서만 입을 뿐 외출복으로는 입지 않았다.
그런데 은혜는, “이게 어때서? 일본에서는 외출할 때도 입는건데 뭘.” 하고 말하며 그 옷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밤이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속내의를 입고 나서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부끄럽고 걱정스러웠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른 채 그녀는 우리끼리 거리에 나왔다고 좋아하며 이미 닫힌 시골 상점 안을 들여다보고 킥킥거리곤 했다. 지나던 사람들이 그녀의 옷차림이 이상한 데다 담배까지 피위 정신 나간 사람인가 하고 자꾸 쳐다보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