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여덟번째-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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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여덟번째
주체사상탑 근처에 있는 초대소에서 나와 은혜는 마지막 밤을 맞았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이제 기회는 없어.”
우리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해 그날 밤 자유쥬의를 결행하기로 약속했다. 당시 나는 원칙이 강했기 때문에 들통날까봐 겁이 났지만 은혜의 성화에 못 이겨 결심을 해버렸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9시에 초대소를 몰래 빠져나왔다. 은혜는 재미있어 하며 들떠 있었지만 나는 내심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보이던 주체사상탑은 가도가도 끝이 없이 멀리에 있었다. 별도로 준비한 신이 없어 우리는 높은 뽀족 구두를 신고 나선 데다가 밤길을 걷자니 힘들었지만 이왕 나선 김에 끝까지 가보려고 참고 걸었다.
탑에 막상 도착해 보니 불빛에 모여드는 벌레에게 시달리기만 했고 멀리서 보듯 아름답지도 못해 실망감만 안고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은 더욱 더 멀었다. 더구나 초대소에 갇혀만 살아서 구두에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인지 이내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구두를 벗어 양손에 들고 맨발로 절룩거리며 걸어 겨우겨우 밤 12시가 다 되어 초대소로 돌아왔다. 초대소 아주머니에게 발각됐지만 우리 마음을 이해해 주고 그냥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날 일어났다. 동북리 초대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도원이 시내에 나왔으니 상점이나 들렀다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어젯밤 자유주의로 발이 부르터서 구두를 신고 걷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나 지도원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어 상점엘 들렀다. 은혜와 나는 자유주의가 탄로나지 않으려고 발을 옮길 때마다 너무나 아파서 비명이 저절로 새나오고 눈물까지 찔끔거렸으나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초대소에 돌아와 우리는 아픔도 잊고 자유주의를 잘했다고 통쾌해 하면서 둘이 손을 잡고 무사함을 자축했다.
은혜와의 추억담은 너무나 많다. 그녀가 북조선 여성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고 또 생활습관까지도 익혀야 하는 것이 나의 학습 목표였으므로 24시간 노상 붙어 지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초저녁에 야산 길을 산책하는데 마침 염소 1마리가 풀을 뜯어 먹으며 매매 울었다. 은혜는 염소 소리를 듣고 마침 생각난 듯이 노래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노래는 ‘도나도나'라는 곡명으로 어느 날 송아지 한 마리가 친구들과 같이 있지 못하고 마차에 실려 팔려간다는 슬픈 내용이었다. 동요 비슷해서 그녀를 따라 배우기는 했으나 끌려 온 자기 신세를 비유하며 부르는 것 같아 마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은혜는 생의 희망을 잃은 듯 했다. 일요일이나 휴식 날이 되면 대개의 여자들은 옷을 꺼내어 손질도 하고 입어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은혜는 착 달라붙는 바지와 쎄타 몇 벌뿐 입을 만한 옷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외국인이므로 매달 외화상점에서 외화 대용으로 쓸수 있는 ‘바꾼돈'으로 200원 정도를 받았다. 제법 쓸 만한 돈이었는데 그녀는 옷도 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돈을 저축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점에 가면 비싼 외제 담배나 술을 사서 지도원에게도 주고 초대소 어머니에게도 선심을 쓰며 헤프게 써버렸다. 가끔 지도원이 은혜에게 ‘바꾼 돈'을 빌려가는데 그녀는 돈이 떨어져 쩔쩔 맬 때도 지도원이 돈을 꾸어 달라고 하면 없다고 하지를 못하고 속만 상해 했다. 은혜의 생활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북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고싶어했다. 1982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나는 입당하기 위해 그녀와 헤어져 잠시 다른 초대소로 떠나 있었다. 그때 지도원은 은혜가 알면 서운해 할까봐 내가 떠나있는 이유를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그냥 행사가 있어 간다고만 말해 주었다. 내가 입당한 뒤 돌아오니 누가 그녀에게 알렸는지 내가 입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