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여덟 번째-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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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스물 여덟 번째
담당인 장 부부장은 려행 준비사항 검열 끝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출발 전날 저녁에는 환송연을 겸해 동석식사가 베풀어졌다. 그 자리에서 리 부장은 공작금으로 3만 3천딸라를 지급했다. 공작금 2만 딸라, 려비 1만딸라, 비상금 3천딸라가 그 내역이였다.
리 부장은 맥주가 담긴 술잔을 높이 들어 축배하면서 우리를 격려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크나큰 신임과 배려에 의해 적후로 떠나는 두 동무의 건강과 맡은 임무의 성공을 위하여 이 잔을 듭시다.”
나는 일본어로,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하여 결의를 다졌다.
1984년 8월 15일, 아침 9시 장 지도원, 김 선생님과 나 우리 일행은 장 부부장과 최 부과장의 환송을 받으며 평양 순안비행장을 출발했다. 조선 항공기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나는 너무나 감격해서 크게 소리를 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혼났다. 어릴 적 꾸바에서 돌아올 때 비행기를 타보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북조선에 돌아와 사는 동안 북조선에서 외국에 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인가 알게 되였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려행을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높은 정부의 배려인가를 느끼고 새삼 감사하였다.
비행기는 쏘련 령내에 들어가자마자 중간 기착지인 이르쯔끄 공항에 착륙하여 입국 심사를 받고 휴식하다가 다시 출발하여 약 14시간만에 모스크바 항공에 도착했다. 평양과 모스크바는 6시간 시차가 있기 때문에 평양 같으면 밤 11시여야 하나 모스크바 시각은 오후 5시였다. 날씨 또한 평양은 여름이였으나 모스크바는 쌀쌀하게 추워서 벌써 온수난방 을 틀어주고 있었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그곳 주재 북조선 대사관에 나가 있는 50대의 조사부 지도원이 우리 일행을 위해 나와 대기 중이였다.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묵을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갑시다.”
그 지도원은 장 지도원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우리는 북조선 대사관 5층에 있는 초대소에 수용되여 계획대로 3박 4일간 모스크바에 체류했다. 그동안 우리는 모스크바 주재 지도원의 안내로 크레믈린과, 레닌 묘, 왕궁, 모스크바 대학, 체육경기장, 교예극장 등지를 관광하면서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당시 모스크바 백화점에는 북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싶어 열망하는 단복이 매대에 널려 있었고 식료품 상점에는 질은 떨어지지만 빵과 닭알을 자유롭게 팔고 있었다. 쏘련은 북조선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당시 북조선에서 살아 온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민들의 생활이 여유 있고 자유롭다고 느꼈다. 역시 쏘련은 선진 사회주의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한지 3일 후 8월 18일 11시경, 우리 일행은 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모스크바 주재 지도원이 운전하는 승용차 편으로 모스크바 공항에 닿았다. 웽그리아 주재 정 지도원은 대사관과는 좀 떨어진 웽그리아 주민의 집 웃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55세의 중년에 키가 작고 통통하고 안경을 쓴 것이 일본 사람 같았다. 자녀들 3명은 북조선에 두고 할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12살 막내딸 ‘향희'는 ‘조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공부도 잘 하고 령리했다. 웽그리아 말 외에 로어가 제 3외국어로 되여 있어 누구나 로어를 했다. 향희는 아침이면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로어 숙제와 공부지도를 받고 학교를 가곤 했다. 또한 나를 친언니처럼 따라다녔다. 손톱락카도 칠하고 목걸이를 하겠다고 엄마를 조르면 그의 어머니는 ‘자본주의'에 물들까봐 향희를 엄격히 통제하곤 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