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네 번째-69
[...]
공작원 초대소, 스물 네 번째
어머니와 현옥이는 내게 그동안의 소식들은 전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친구 아무개가 누구에게 시집가서 어디에서 사는데 내 소식을 묻더라든가, 나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윗학년 남학생이 내가 소환된 후 우리집까지 찾아와 내 소식을 꼬치꼬치 물었다든가 하며 수다를 피웠다.
휴가 중 만나보고 싶은 동무도 많았지만 오랜만인 가족과의 상봉 시간이 몇 날 밤을 지새우더라도 짧은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집에 있을 때 잘 먹고 좋아하던 음식을 해주기 위해 아껴 보관해 두었던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거기서도 먹기는 잘 먹겠지만 엄마 마음을 생각해서 많이 먹어라.”
눈 깜짝할 사이에 2박 3일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의 몇 시간과도 같이 짧은 시간이었다. 휴가가 끝나고 초대소로 돌아온 처음 며칠 동안은 마음이 들떠 일이 통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집에 다녀온 길이 꼭 꿈결인 듯한 느낌이었다. 숙희 역시 시간만 나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거나 창문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내 마음과 같을 것이다.
지도원은 우리의 이런 태도를 눈치채고,
“이래서야 어떻게 혁명가가 되겠는가. 다음부터는 아예 휴가를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하며 엄포를 놓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항일투쟁 시기에 고향 어머니가 지병이 급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달려가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어머님 강반석 여사께서 말하시기를 나라를 찾겠다고 집을 나선 사람이 집에 미련을 두어서야 어떻게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했소. 이 내용을 교훈삼아 사사로운 미련 버리시오.”
지도원은 그런 말까지 하며 우리가 가진 집에대한 그리움을 씻어내도록 종용했다.
숙희와 우리집은 그래도 평양에서 잘 사는 층이고 아직 미혼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집에 대한 미련이 적은 편이었다. 초대소 식모들의 말에 의하면 지방에 가족이 있는 기혼자들의 경우는 집에 한 번 다녀오면 그 비참한 가정 형편에 충격을 받아 초대소에 돌아온 후에는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지방 출신 공작원들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얼굴을 내밀 정도로 휴가를 보내지 않아 공작원 아주머니들이 생과부가 되다시피 한다고 했다.
룡성 40호에서의 훈련도 어언 17개월이 지나자 지루한 감이 들었다. 1984년 7월 초. 리 지도원과 대외정보조사부 1과 최 부과장이라는 사람이 초대소를 찾아와서 나에게 초대소 생활과 학습내용에 대해 묻고 돌아갔다. 2,3일이 지나고 다시 담당 최 부부장이 찾아와 1과에서 제기된 사업이 있으니 옥화동무가 가서 내일부터 좀 도와 주어야겠다고 지시했다.
다음 날 오후 3시쯤 나는 룡성초대소를 출발하여 1시간 뒤 동북리 2층 2호 특각 초대소로 옮겨갔다. 이 초대소는 은혜에게서 일본인화 교육을 받던 동북리 3호 초대소 부근에 있는 초대소다. 초대소에 도착하자 지난번 룡성 40호 초대소로 찾아와서 나와 담화를 했던 1과 부과장이 50대의 지도원과 로인 한 분을 대동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은 앞으로 옥화동무를 담당할 장 지도원이오.”
최 부과장은 담당 지도원부터 소개했다.
“또 이분은 김 선생인데 앞으로 옥화 동무와 함께 일할 분이니 친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잘 모시기 바라오.”
소개받은 김 선생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허리가 약간 굽은 로인이었는데 마치 귀국자 같은 인상이 풍겼다. 이 김 선생이라는 로인이 바로 나와 같이 남조선 려객기를 폭파한 김승일이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