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서른 다섯 번째-80
[...]
공작원 초대소, 서른 다섯 번째
나는 원칙대로 그동안 암송한 김일성. 김정일의 덕성 자료를 이야기하여 혁명성과 사상성을 다지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장 지도원과 김 선생은 나를 융통성 없는 녀성으로 본 모양이였다.
김 선생은 려행 중 가끔 나에게 무서운 녀자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귀환한 후 간부에게 줄 선물을 구입한 것까지 비판해댈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금반지로 내 입을 막으려는 속셈인 듯한 느낌을 받아 나는 기분이 나빴고 그래서 굳이 반지를 사양했던 것이다. 끝끝내 사양하면 너무 속 얕은 녀자로 보일 것 같아 마지못해 평범한 모양의 반지를 골라 손에 끼였다.
호텔로 돌아와 우리는 마카오 국경을 통과하여 중국으로 넘어가는 문제를 토의했다. 장 지도원으로부터 김옥화라는 이름으로 된 북조선 공무 려권을 되돌려 받았다. 마카오 국경 초소를 넘을 때는 이 북조선 공무 려권을 제시하고 국경을 통과하여 중국으로 넘어갔다. 초소를 넘어가니 중국 광주에 거주하는 박창해 지도원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있었다. 박 지도원은 후에 내가 숙희와 함께 광주에 실습 나가 있을 때 현지 담당 지도원이 되였다.
우리가 탄 차는 5시간 이상을 달렸다. 그동안 유럽의 풍족하고 윤택한 생활 모습에 눈이 익어서 그런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중국인들의 생활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한심스러웠다. 먼지투성이의 큰길 옆 돌담 우에 앉아 큰 국사발 하나를 받쳐들고 점심을 먹고 있는 로동자들, 공중 화장실 벽에 좌판을 벌리고 물건을 파는 장사군들, 맨발에 실내화를 끌고 나와 웃통을 벗어 젖히고 싸우는 남자들과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이 질서가 없고 너저분해 보였다.
광주 시내가 가까워 오면서 사람들도 거리도 좀 나아지는 듯 했지만 역시 불결하고 사람들의 물결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박창해 지도원의 안내로 동방빈관에 투숙했다.
나는 중국의 주민생활이 어떤가 살폈다. 광주 사람들은 너저분해도 그 많은 거리의 상점, 음식점에는 물건, 음식이 넘쳐나고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풍부함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돌아본 외국 나라 중 인민생활이 궁핍하고 쪼들리는 나라는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제일 못 사는구나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지우기 위해 우리 나라는 분단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장 지도원이 내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야 그까짓꺼, 다른 건 다 부럽지 않은데....배고플 때 음식점에 가서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것이 제일 부럽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이틀 밤을 지내며 휴식하다가 광주 공항에서 중국 국내선으로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북경 공항에는 그곳에 주재하는 지도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북경도 맑고 신선한 가을 날씨였다.
북경 거리는 광주보다는 약간 깨끗한 편이였다. 경주를 하는 것처럼 자전거 무리가 쉴 새 없이 달리는데 그 모습이 생소하고 신기했으며 재미있었다. 일반 인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임을 알고 좋은 생각이라고 믿어졌다. 건강에도 좋고 기름도 들지 않는 교통 수단이였으니 그렇게 많이 리용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빠리에서 짧게 자른 내 머리 모습이 별난지 남자건 녀자건 모두 나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우리는 북경 주재 북조선 대사관 안에 있는 초대소에서 이틀 밤을 지내며 ‘천안문 광장', ‘자금성' 을 구경하였다. 북경공항 면세점에서 한약재인 록태고 2곽, 우황청심환 5곽, 꼬냐크xo 2병을 구입한 뒤 북경을 떠나 평양 귀환 길에 올랐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