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엔의 빚 」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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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213엔의 빛.
경희는 문 앞에 나타난 두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두 남자는 경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뾰족한 얼굴에 키가 큰 남자가 미소를 더 자주 지었지만,
키가 작은 남자의 표정이 훨씬 더 친절해 보였다.
두 사람은 노동자와 비슷하게 검은 바지에 소매가 짧은 셔츠를 걸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은 값비싸 보이는 가죽 구두였다.
키 큰 남자는 두드러지게 티가 나는
제주도 억양으로 말을 했다.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접어 놓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당신 남편이 여기에 서명을 했어요."
키 큰 남자가 경희에게 공식 문서 같아 보이는 종이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서류의 일부는 조선어였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와 중국어였다.
경희는 서류 상단 오른쪽 구석에 적힌 요셉의 이름과 도장을 발견했다.
"지불이 연체됐어요."
"전 모르는 일이에요. 남편은 지금 일하러 가고 없어요."
경희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 손을 문에 올려놓은 채 남자들이 떠나주기를 바라며 말했다.
"나중에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다시 찾아와 주세요."
선자는 두 손을 배에 올린 채 경희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선자의 눈에는 남자들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체격으로 봤을 때 두 남자는 고향의 하숙집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경희 언니는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아주버님은 오늘 늦게 집에 오실 거니까 나중에 다시 오이소."
선자가 훨씬 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이 동서군요, 그렇죠?" 키 작은 남자가 선자에게 말했다.
남자가 미소를 짓자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팼다.
선자는 남자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다물었다.
키 큰 남자는 경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싱긋 웃고 있었다.
남자의 크고 네모난 치아는 물론이고
옅은 분홍색 잇몸까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남편과는 이미 이야기를 해봤는데 우리를 무시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을 만나보려고 이렇게 집에 들렀죠."
키 큰 남자가 말을 멈추고 경희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백경희라 . . . 내 사촌 이름도 경희 인데.
당신 일본 이름이 반도 기미코 맞죠?"
키 큰 남자가 큼직한 손을 문 위에 올리고는 선자를 흘낏 쳐다봤다.
"당신 동서까지 만나게 되다니 이거 두 배로 기쁜데, 안 그래?"
두 남자는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경희는 다시 한 번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경희가 마침내 말했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백요셉이 우리 사장님께 120엔을 빚졌어요."
키 큰 남자가 두 번째 단락에 한자로 적힌 120이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당신 남편이 두 번이나 빚을 갚지 않았어요.
오늘 당신이 남편에게 돈을 좀 갚으라고 말해주면 좋겠는데요."
"갚을 돈이 얼마인데요." 경희가 물었다.
"매주 8엔에 이자까지 내야 합니다."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경상도 억양이 강한 남자였다.
"집에 돈이 좀 있다면 지금 줄 수 있을까요?"
키 작은 남자가 물었다. "20엔 정도 되거든요."
요셉이 준 돈은 다음 2주 동안 쓸 식비 뿐이었고,
경희의 지갑에는 겨우 6엔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돈을 남자에게 줘버리면 식구들이 굶어야 했다.
"총금액이 120엔이라면서에?" 선자가 물었다.
선자는 그 서류 내용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선자의 말에 키 작은 남자가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이자가 붙어서 거의 두 배가 됐어요. 왜요? 돈 있어요?"
"오늘까지 치면 총금액은 213엔이 될 겁니다."
암산에 능한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어머! 경희가 놀라 소리쳤다.
충격을 받은 경희는 두 눈을 감은 채 문틀에 몸을 기댔다.
그때 선자가 앞으로 나서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 드릴게예." 선자는 옷을 빨아달라던 하숙생 뚱보에게 하던 것과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두 남자를 대했다.
그녀는 심지어 두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 시간 후에 다시 오시소. 어두워지기 전에예."
"그럼 나중에 뵙죠." 키 큰 남자가 말했다.
두 여자는 쓰루하시 역 옆의 상점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천 가게 창문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센베이 과자 가판대 앞에 멈춰 서지도 않았다.
친절한 야채 가게 주인들과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은 한 몸이 된 듯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동생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경희가 말했다.
"아버지한테서 이런 일에 대해서 들었어예.
원금을 갚지 못하면 이자가 점점 높아져서 그 돈을 다 못 갚게 된다꼬예.
결국에는 빌린 돈보다 훨씬 많은 빚을 지게 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예.
잘 생각해보이소. 120엔이 어떻게 213엔이 됐겠어예?"
선자의 아버지는 묘목이나 장비를 사려고
적은 돈을 빌렸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웃들을 봤었다.
그런 이웃들은 고리대금업자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원금에다 가진 곡식까지 모두 줘야 했다.
선자의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들을 혐오 했고,
종종 선자에게도 빚을 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며 조심하라고 했다.
"내가 알았다면 우리 부모님께 돈을 보내지 않았을 거야."
경희가 중얼거렸다. 선자는 그녀들을 힐끗거리는 혼잡한 거리의
그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선자는 전당포 주인에게 할 말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언니, 언니가 조선어 간판을 봤다고 했지예?
그럼 그 가게 주인도 조선인이겠네예?"
"글쎄. 나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
두 여자는 나지막한 벽돌 건물 정면에 달린 조선어 간판들을 따라가다가
그 뒤쪽으로 난 널찍한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갔다.
전당포에 사무실 문에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구가 하나 있었다.
선자는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6월의 따뜻한 날이었지만 창구 뒤쪽에 있던 노인은
하얀색 셔츠 안쪽에 초록색 목도리를 매고
갈색 조끼 까지 입고 있었다.
거리를 마주보는 네모난 장 세 개는 모두 열려 있었고, 반대쪽 구석에는
선풍기 두 대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서로 닮은 통통한 얼굴의 젊은 남자 둘이 중앙에
있는 창문 옆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
두 여자가 들어서자 남자들이 힐끗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전당포 주인이 조선어로 물었다.
고향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억양이었다.
"앉으시겠어요?" 전당포 주인이 의자를 가리켰고,
선자는 서 있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다.
경희는 선자 옆에 서서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선자가 손바닥을 펴서 회중시계를 보여주었다.
"아제요, 이거 드리면 얼마 주실 수 있습니꺼?"
"어디서 난 거죠?"
"친정엄마가 주신 깁니더. 은이 확실하고 그 위에 도금한 거라고 했어예."
선자가 말했다.
"이거 파는 걸 어머니가 아나요?"
"팔라고 주신 겁니더. 아기를 위해서예."
"시계를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시계를 팔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전당포 주인이 물었다. 한 번 빌린 돈은 갚기 가 힘들테니
담보물을 계속 갖고 있을 수 있었다.
선자가 천천히 말했다. "팔고 싶습니더.
아제가 이걸 사기 싫다 카면 여기 오래 있을 필요가 없지예."
전당포 주인은 눈앞의 여자애가
이미 다른 전당포에도 들렀다 온 건지 궁금해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전당포가 세 개나 더 있었다.
다른 전당포 주인들은 조선인이 아니지만
여자애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면 시계를 쉽게 팔 수 있었다.
같이온 예쁘장한 여자는 옷차림 때문에 일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쁜 여자가 자기 시계를 팔려고 임신한 소녀를 데리고 왔을 수도 있었다.
"시계를 팔아야 한다면 고향 사람인데
당연히 기쁘게 도와드려야죠." 전당포 주인이 말했다.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시장에서는 말을 적게 하라고 가르쳤다.
경희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
더 차분한 선자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의 은색 덮개를 열어서
그 속으로 보이는 기계 구조를 자세히 살펴봤다.
굉장히 특별한 시계라서 눈앞의 여자애 엄마가
이런 것을 갖고 있었다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계는 일년 정도 된 것 같았고, 흠집 하나 없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를 뒤집어서
책상 위의 초록색 가죽 패드 위에 올려놓았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손목시계를 선호해요.
이걸 팔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선자는 전당포 주인이 그 말을 하고 나서
눈을 자주 깜박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좀 전에 자신과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을 한 번도 깜박거리지 않았다.
"살펴봐주셔서 감사합니더." 선자는 이렇게 말하고
전당포 주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경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썼다.
선자가 시계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긴 치마 끝을 모아 잡았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여." 전당포 주인이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선자가 돌아섰다. "돈이 당장 필요하다면 이 더운 날에
그 몸 상태로 걸어 다니는 것보다 여기서 시계를 파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출산일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를 잘 돌봐드릴 수 있는 아들이 태어나면 좋겠군요.
전당포 주인이 말했다. "50엔 드리죠."
"200엔 주이소. 그건 적어도 300엔의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더.
스위스에서 만든 새 물건이니까예." 선자가 말했다.
창가에 있던 두 남자가 화투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곳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지 그래요."
전당포 주인은 여자애의 거만한 태도에 짜증이 난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선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본인이 주인인 전당포에 시계를 팔면
전당포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할까 봐 두려웠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업 거래에
경찰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한수한테서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더. 아제 시간을 더 이상 뺏고 싶지 않네예."
선자가 말했다. 선자의 말에 전당포 주인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경희는 선자가 막 오사카에 도착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너무도 무력해 보였고 혹시 길을 잃기라도 할까봐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가지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선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든든한 사람으로 보였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무슨 일을 했나요? 부산에서 온 것 같은데."
전당포 주인이 물었다.
선자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거기 시장에서 일했나요?" "하숙집을 운영하십니더."
"분명히 현명한 사업가시겠네요."
전당포 주인은 임산부의 어머니가 창녀거나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상인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시계도 훔친 것일 수 있었다.
임신한 소녀는 말씨와 옷차림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아가씨, 어머니가 이걸 팔라고 준 게 확실하단 말이죠.
혹시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아가씨 이름과 주소를 기록해둬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125엔까지 쳐드리죠."
"200엔 주셔야 됩니더."
선자는 그 돈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욕심이 많아 보이는 전당포 주인이 50엔에서 125엔까지 값을 높여 부를 정도라면
이 시계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당포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책상 옆으로 다가온 젊은이들도 같이 웃었다.
두 젊은이 중에서 어린 쪽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일해야겠는데요." 전당포 주인이 가슴에 팔짱을 꼈다.
전당포 주인은 시계를 갖고 싶었다.
그는 이 시계를 살 만한 사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 저 어린 엄마가 부르는 값을 쳐줘야겠는데요.
저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이 말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이 거래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좀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소녀가 안돼 보였다.
소년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금반지를 팔러 오는
그런 평범한 여자들과는 달랐다.
"당신이 여기 온 걸 남편도 알고 있어요?"
이번에도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이 물었다.
"네." 선자가 대답했다.
"남편이 술주정뱅이거나 도박꾼인가?"
전당포 주인의 둘째 아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자들을 많이 봐왔고,
그네들의 사정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언지예." 선자는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175엔." 전당포 주인이 말했다.
"200엔." 선자는 손바닥에 닿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금속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수라면 자기가 부른 값을 절대 낮추지 않았을 것이다.
전당포 주인이 반박했다. "내가 그걸 팔 수 있을지 어떻게 알지?"
"아버지, 같은 땅에서 온 어린 엄마를 도와주셔야죠."
이번에는 큰아들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당포 주인의 책상은 선자가 난생 처음 보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짙은 갈색 바탕에 아이 손바닥 크기만 한 소용돌이무늬가 있었다.
선자는 책상 상판에 있는
눈물방울 모양의 소용돌이무늬 세 개를 헤아려 보았다.
한수와 버섯을 따러 갔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숲 속에 양탄자처럼 깔려 있던
퀴퀴한 냄새가 나는 젖은 나무잎들,
버섯으로 가득 찬 바구니, 그와 함께 누웠을 때 느꼈던
날카로운 통증 . . . 그 모든 추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선자는 한수를 지워버려야 했다.
잊고 싶은 남자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짓을 그만 둬야 했다.
선자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경희는 긴장한 탓에 양손을 거의 비틀듯이 맞잡고 있었다.
"아제가 이걸 사고 싶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예."
선자가 조용히 말하고는 돌아서버렸다.
그 순간 전당포 주인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선자에게 기다리라고 신호하고는 금고가 있는 뒷방으로 들어갔다.
두 남자가 돈을 받으러 돌아왔다.
경희와 선자는 문 옆에 서서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제가 돈을 내주면
빚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걸 우째 압니꺼?
선자가 키 큰 남자에게 물었다.
"우리 사장님이 약속어음에다 빚이 청산됬다고 서명 해줄 겁니다.
당신이 돈을 갖고 있다는 건 어떻게 믿죠?"
"당신 사장님이 여기로 올 수 있나예?" 선자가 물었다.
"미쳤군요." 키 큰 남자가
선자의 요구에 충격을 받아 말했다.
선자는 눈앞의 남자들에게 돈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자는 경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문을 살짝 닫으려고 했지만 남자가 발로 문을 밀었다.
"내 말 들어봐요. 진짜 돈을 갖고 있다면 우리 함께 사무실로 갈 수 있어요.
당장 사무실로 안내하죠."
"어디에 있는데요?" 경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술 가게 옆에 있어요. 멀지 않아요."
사장이란 사람은 성실해 보이는 젊은 조선인이었고,
경희보다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의사나 교사처럼 평범한 정장에 금테 안경을 썼으며,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서
사려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고리대금업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그런 인상의 남자였다.
사무실은 아까 갔던 전당포 가게만 했고,
출입문 반대쪽 벽 선반에는 일본어와 조선어로 된 책이 늘어서 있었다.
편안해보이는 의자들 옆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남자애 한 명이 컵에 뜨거운 녹차를 따라서 갖다주었다.
경희는 남편이 왜 이 남자한테서
돈을 빌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경희가 갚을 돈을 모두 건네주자 고리대금업자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붉은 도장을 약속어음에 찍어 어음을 취소시켰다.
"제가 도와드릴 다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고리대금업자가 경희를 보면서 이야기했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는
서로 돕고 살아야죠.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언제, 그러니까 남편이 언제 그 돈을 빌렸나요?"
경희가 고리대금업자에게 물었다.
"2월에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어요.
남편 분과는 친구 사이라서 당연히 그 부탁을 들어드렸죠."
두 여자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은 이삭과 선자의 입국 허가증을 받으려고 돈을 빌린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경희가 말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걸 알면 남편 분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고리대금업자는 여자들이 돈을 어떻게 이처럼 빨리 구했는지
궁금해하면서 말했다.
두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저녁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