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한 번째-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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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한 번째
비행기 안에서 숙희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행동했다.
한창 자존심 강한 스무 살 처녀들의 관계는 참으로 미묘했다. 숙희와 나는 오 과장이 준 편지 1통을 들고 북경공항에 도착했다. 세관을 통과하여 마중 나온 사람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50대 남자가 다가와 자신이 북경에 있는 조선민항 대표라고 소개했다.
“이곳에 나오기로 되여 있던 박 지도원이 사정이 있어 못 나온다는 련락이 와서 내가 대신 나왔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조선민항 대표에게 주어야 할 지 망설이다가 박 지도원에게 직접 전달하라던 오 과장의 말이 떠올라 편지를 전달하지 않았다. 조선민항 대표가 사주는 광주행 비행기 표를 받고 북경공항 2층 간이 식당에 올라가 3시간동안 기다린 끝에 광주로 출발 했다. 오후 2시 경이였다.
오후 5시쯤 광주에 도착했으나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광주의 날씨는 35도를 넘는 무서운 더위였다. 온몸을 땀으로 미역감으며 때 국물이 흐르는 중국 사람들 속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녔다.
하는 수 없이 적어 온 전화번호로 북조선 무역대표부에 련락하려 했는데 전화가 걸어지질 않았다. 우리가 전화와 씨름하고 있는데 공항 안내원이 다가와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자고 한다. 우리가 적어 온 전화번호는 국번이 없는 네 자리 번호였는데 얼마 전부터 두 자리 국번이 더 붙었다며 전화를 걸어주었다.
전화로 담당지도원인 박창해를 찾았으나 출타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역대표부 위치만 알아내고 전화를 끊었다.
택시를 타고 광주 싸멘에 있는 북조선 무역대표부를 찾아가 경비원에게 박창해 지도원과의 면회를 요청했다. 얼마 뒤 박창해가 헐레벌떡 뛰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렸는데.... 북경 출발 시간을 련락받지 못해서 공항에 나가지 못했소. 이거 미안하구만.”
그가 사과했다. 나는 평양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비행기로 날아왔는데 일이 꼬여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니었다. 날이 덥고 짐은 무겁고 길은 알지 못하니 짜증이 절로 났지만 참는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혼자 이리저리 애쓰자 숙희는 어쩔 줄 몰라 안타깝게 나만 쳐다보았었다. 후에 알아보니 북경 대사관에서 련락이 늦었던 것이다.
우리는 곧 박창해가 운전하는 벤즈 승용차에 올라 그가 숙소로 사용하는 조사부 초대소로 갔다. 초대소는 광주시 황화 신촌대장에 있는 일반 중국인 주택 5층 아빠트였다. 초대소는 4층 1호부터 4호까지를 터놓고 사용했는데 그 동네에서는 뒷집이라는 말로 통했다.
박창해 지도원은 평남 순천 출신으로 175cm 가량 되는 훤칠한 키에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김일성대학을 나와 중어에 능해 오래 동안 중국 마카오에서 활동해 왔다. 그의 처는 그보다 4살 아래인데 평철이라는 당시 5살된 아들을 데리고 그 아빠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일과표를 짜고 박 지도원의 지도로 생활 규률을 만들었다. 우리는 작성된 생활규률에 립각하여 생활하고 행동하기로 다짐하였다.
중국어는 표준말인 북경어를 중어 또는 보통어라 하고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었는데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대륙이 넓어 사투리와 사투리가 만나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같은 중국 사람끼리도 통역이 필요한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러나 보통어는 아주 사투리만을 사용하는 지방 로인들이 아니면 대개 할 줄 안다. 그곳 학교에서 보통어로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