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날, 열 한 번째-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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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열 한 번째
수사기관에서는 고문을 하다가 그래도 불지 않으면 혈관에 무슨 주사약을 넣어 자신도 모르게 사실을 슬슬 불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내 피를 뽑아 가려고 하자 너무나 무서워 벌벌 떨었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아주 간단해.”
의사와 간호사는 내가 하도 무서워하며 달달 떨자 오히려 이상스럽다는 듯이 안심시켰다. 그들은 숙달된 솜씨로 손을 놀려 피를 뽑아 갔다. 피를 뽑힌 후 나는 곰곰이 내 처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무조건 버티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내가 계속해서 고집만 피우고 말을 안 들으면 강압적, 물리적인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버티지 못하고 모든 비밀을 털어 놓게 된다. 그런 사태가 생기기 전에 어떤 거짓말이든 들려 주고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잘 하면 그 위장에 넘어 갈 수도 있다. 우선 말을 열어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자.' 내 딴에는 피를 뽑힌 후 겁을 먹고 잔꾀를 부리기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갑자기 말을 하는 것도 수상히 여길 것 같아서 우선 간호사에게 간단한 영어로 물을 달라, 손을 아프다 등의 말을 슬슬 시작했다. 그랬더니 방 안에서 내 말을 들은 간호사와 경찰관들이 “마유미가 말을 한다”고 소리치며 기뻐했다. 내 스스로 말을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기한 모양이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좋아하는 그들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내가 비겁해지는 것 같아 처량하기도 했다.
핸더슨과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오후 5시경만 되면 옷이나 과자를 사들고 어김없이 찾아와 속삭이듯 나를 위로하면서 안심시키려 들었다.
영어로 느리게 말해 의사소통을 했는데 그들은 내가 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사소한 이야기를 잡담처럼 늘어놓다가도 느닷없이 남조선 려객기 사건에 관한 질문을 끈덕지게 던지곤 했다. 나는 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9가지 질문사항을 중국어로 적어 왔다. 그것까지 거절하기가 뭐해서 나는 내가 구상했던 대로 가짜 경력을 중국어로 적어 주었다.
그들이 이것을 믿을 리가 만무였다. 내 경력이 의문 투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질문을 해댔다. 그때마다 나는 불쌍하고 외롭고 어리석은 중국인 고아이며 이번 남조선 려객이 폭파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 사건에 대해서 왜 나에게 묻는지 그 자체도 리해가 안 된다며, 그 비행기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죄가 되느냐고 오히려 따져 되물었다.
내가 완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억지를 쓰듯 우겨대는 나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따스함을 보이는 그들의 끈기에 감탄했다. 내 거짓말에 실망하는 빛도 경멸하는 빚도 보이지 않고 시종 내 건강을 보살펴 주며 동정심을 보였다.
어느날 아침, 간호사가 내게 아무런 의사도 묻지 않고 화장실로 데리고 가 세면대 앞에 세워 놓고 손으로 얼굴을 씻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왼손이 수갑에 채워져 여자 경찰 손목에 련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스러운 한 손으로 고양이 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세수를 끝내자 이번에는 손가락에 치약을 짜주고 이를 닦으라고 한다. 특별 대접이었다.
꼴짝거리는 세수와 양치질일망정 세수도 하고 이도 닦고 나니 한결 개운한 기분이었다.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커피와 홍차 중 무엇을 들겠냐고 물었다. 나는 홍차를 주문하면서 갑작스럽게 달라진 특별 대접에 불안을 느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대접이 좋아도 걱정, 대접이 나빠도 걱정인 상황이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