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아의 선택 (오사카, 1962년 4월)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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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노아의 선택. 오사카, 1962년 4월.
가족들은 편지를 자주 받지 않았지만 한 번 왔다 하면
온 가족이 누워 있는 요셉 옆에 모여서
편지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요셉은 등을 대고 누워서 메밀로 속을 채운 베개로 머리를 받혀 올렸다.
선자는 당연히 편지 겉봉에 적힌 아들의 글씨체를 알아보았다.
문맹이었지만 자기 이름과 서명은 일본어든 조선어든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은 경희가 편지를 큰소리로 읽으면서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요셉에게 물어보았다.
요셉은 시력이 나빠져 좋아하는 신문도 읽을 수 없어서
경희가 읽어주어야 했다.
경희가 글자 모양을 설명하면
요셉이 가끔씩 문맥으로 미루어보아 무슨 글자인지 추측해주었다.
경희는 맑고 온화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선자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양진은 손자가 무슨 이야기를 전할지 궁금해하면서
얇은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요셉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깨어 있었다.
엄마, 전 와세다대학을 그만 뒀어요. 살던 방에서도 나왔고요.
지금은 새로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았어요.
엄마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제발 절 찾지 말아주세요.
아주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 이에요.
이게 제 혼자 힘으로 살면서 제 정체성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에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요.
그러자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새롭게 시작하면서 지불해야 할 돈이 좀 있었어요.
돈을 좀 더 많이 버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자주 돈을 좀 보내드릴께요.
제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을 거예요.
고한수에게 갚을 돈도 벌 거예요.
고한수가 절 찾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 사람을 알고 쉽지 않아요.
큰아버지와 큰엄마, 할머니,
모자수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아들 노아가.
노아는 쉬운 일본어로 간단한 편지를 썼다.
경희가 편지를 다 읽었을 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양진은 딸의 무릎을 톡톡 두드려주고는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갖고,
경희는 말 없이 창백한 표정으로 앉아 한 팔로 선자를 감싸주었다.
요셉은 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방법이 있을까?
요셉은 그럴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삭이 죽었을 때 요셉은 동생의 어린 아들들을 생각하며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노아와 모자수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요셉은 두 아이를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사고를 당한 후로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두 아이의 미래에 기대는 신세가 되었다.
어리석은 심장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이런 삶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 보였다.
요셉은 살아 움직이는 삶과는 거의 단절된 채 요 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가족들은 고집스럽게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노아는 이삭과 너무나 닮아서 그 아이의 생부가 다른 사람,
온화한 이삭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가여운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노아의 그 결정은 벌이었다.
요셉은 노아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노아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노아에게 사람은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용서 없이 사는 삶이란 숨을 쉬고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혈육과 닮은 사랑하는 조카를 찾으러 가기는커녕
요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북한으로 갔을까요?" 경희가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선자가 요셉을 힐끗 쳐다봤다.
"아니, 그건 아니야."
요셉이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베개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자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북한으로 간 사람은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가 북한에 가지만 않았다면 아직 희망이 있었다.
김창호는 1959년 마지막 달에 떠났고,
그로부터 2년이 넘었지만 그의 소식을 단 두 번밖에 듣지 못했다.
경희는 김창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평양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 때 분명했다.
"모자수는 어떡하죠? 모자수에게는 뭐라고 말하죠?" 경희가 물었다.
경희는 노아의 편지를 든 채 빈손으로 선자의 등을 토닥였다.
"모자수가 물어볼 때까지 기다려.
지금은 자기 일로도 무척 바쁘니까.
모자수가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대답해.
그러다가 나중에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형이 떠났다고 말해."
요셉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학교 공부가 너무 어려워서 도쿄를 떠났고,
다시 학교에 들어가려고 여러 번 시도하다가
너무 부끄러워서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말해.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다들 수긍할 거야."
요셉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선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자수는 그 이야기를 절대 믿지 않겠지만
모자수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형을 찾으러 나설 테니까.
게다가 모자수에게 한수에 관해서 말해줄 수도 없었다.
모자수는 직장에서 많은 책임을 지고 있어서
최근에 잠도 거의 자지 않았고, 유미는 몇 주전에 유산을 했다.
모자수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노아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려고 집으로 왔던 그날 저녁 이후,
선자는 도쿄로 찾아가 노아와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매일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지금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 애가 뭐라고 했던가? 엄마가 내 인생을 앗아갔어요.
노아가 와세다대학을 그만두었다.
선자는 생각을 할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선자는 아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았다.
양진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부엌에서 나와
저녁이 준비됐다고 말했다.
양진과 경희는 선자를 바라보았다.
"뭘 좀 먹어야지." 경희가 말했다.
선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봐야겠어예. 노아를 찾으러 가야겠어예."
경희가 선자의 팔을 꽉 움켜쥐었지만 선자는 그 손을 떨쳐내고 일어섰다.
"가게 둡시데이." 양진이 말했다.
한수는 기차역에서 30분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큰 한수의 집은 조용한 거리에 우뚝 솟아 있었다.
한수는 전쟁 이후에 살았던 미국인 외교관의 거주지에서 살았다.
묵직한 커튼이 실내를 가려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젊었을 때 선자는 한수가 어떤 곳에 살지 상상해보고는 했지만,
이런 집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수는 성에 살고 있었다. 선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택시 운전사가 선자에게 제대로 도착했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어린 하녀가 반짝거리는 하얀색 앞치마를 하고 문을 반쯤 열었다.
집주인이 안 계신다고 하녀는 일본어로 말했다.
"누구지?" 좀 더 나이 많은 여자가 거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여자가 하녀를 가볍게 두드리자 하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활짝 열려서 웅장한 입구가 드러났다.
선자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고한수 씨, 부탁합니다." 선자가 최선을 다해 일본어로 말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누구시죠?"
"보쿠 선자라고 합니다." 한수의 아내 미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구걸하러 온 조선인 거지가 분명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인들은 수도 없이 많아졌고
수치심이라고는 없어서 고국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남편의 성격을 이용했다.
미에코는 남편의 너그러운 성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거지들의 대담한 행동은 싫어했다.
지금은 저녁이었고, 나이가 어떻든 여자가 구걸하러 올 시간은 아니었다.
미에코는 하녀를 돌아보았다. "이 여자에게 원하는 걸 줘서 보내.
배가 고프다면 부엌에 음식이 있으니까 갖다주고."
미에코는 남편이 하던 대로 했다.
아버지도 가난한 사람을 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에코가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하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뇨, 그게 아니고요." 선자가 일본어로 말했다.
"돈 말고요. 음식도 필요 없어요.
고한수와 이야기하고 싶어요." 선자는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미에코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돌아섰다.
조선인들은 버릇없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굴었고
일본인의 차분함과 평온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
미에코의 아이들도 그 피가 반은 섞여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난잡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미에코의 아버지는 한수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한수를 사랑했다.
한수는 진짜 남자라서 그녀를 돌봐 줄 수 있다고 말하며
한수와 결혼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미에코의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다.
한수의 감독 하에 조직은 훨씬 더 강해지고 부유해졌다.
미에코와 그녀의 딸들은 집 안에 숨겨놓은 두둑한 돈다발 외에도
스위스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미에코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이가 여기 사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제 남편을 어떻게 아나요?" 미에코가 선자에게 물었다.
선자는 여자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한수의 아내는 분명히 일본인이 었고,
짧은 회색 머리를 한 육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남다르게 긴 속눈썹에 커다랗고 짙은 눈이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자였다.
한수의 아내는 우아한 몸매에 밝은 초록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우메보시 색깔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마치 기모노 모델 같았다.
"정원에서 일하는 아이를 데려와. 그 애는 조선어를 할 줄 아니까."
한수의 아내가 왼손을 뻗어서 선자에게 문 옆에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미에코는 선자의 낡은 옷과 바깥일을 해서 거칠어진 손을 주시했다.
조선인은 빨리 늙지 않는 편이었다.
여자의 눈은 꽤 예뻤지만 한창때는 지난 나이였다.
한수가 데리고 노는 창녀라고 보기에는 매력적이지 못한 여자였다.
미에코가 알기로 한수의 창녀들은 모두 일본인 호스티스였고,
그중 몇몇은 딸들보다 더 어렸다.
게다가 그 여자들은 한수의 집 문 앞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정원에서 일하는 아이가
뒤뜰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가 달려왔다.
"마님." 소년이 여주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여자가 조선인이 야.
주인 어른이 이곳에 사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봐." 미에코가 말했다.
소녀는 겁에 질린 것 같은 선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자는 작업복 위에 밝은 회색 외투를 입고 있었고,
자신의 엄마 보다 어려 보였다.
"아주머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소년은 아주머니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선자는 소년에게 미소를 짓다가
소년의 눈에 어린 걱정을 읽고는 눈물을 터트렸다.
소년은 한수의 집 하녀나 아내와는 달리 냉담하지 않았다.
"아들을 찾고 있데이.
이 집 주인이 우리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아 가지고.
그래서 이 집 주인을 꼭 만나야 한다. 응?"
선자는 눈물을 삼키느라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집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아나?"
"내 남편이 여기 사는 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알았지?"
한수의 아내가 차분하게 물었다.
소년은 절망에 빠진 여자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주인마님이 시킨 일을 잊어버렸다.
"주인마님이 아주머니가
주인어른이 여기 사시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싶대요.
아주머니, 그걸 꼭 주인마님께 알려드려야 해요. 아시겠죠?"
소년은 선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집 주인 식당, 그러니까 김창호 씨 밑에서 일했다 아이가.
김창호 씨가 북한으로 떠나기 전에 이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김 씨 알지? 김 씨는 평양에 갔데이."
소년은 항상 사탕 살 돈을 주고 뒤뜰에서 같이 축구를 했던, 두꺼운 안경을 쓴 키 큰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호는 소년을 적십자 배에 태워서 북한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주인어른이 못하게 했다.
주인어른은 김창호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누가 김창호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화를 냈다.
선자는 소년이 노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 소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집 주인은 내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모른다.
아들을 찾아야 한데이.
이 집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지금 여기 있나? 날 만나줄 기다."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순간 선자는 고개를 들고 한수의 집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소년 뒤쪽의 웅장한 동굴 같은 로비는 천장이 높고
새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기차역 내부 같았다.
선자는 한수가 나무 계단을 내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번에는 한수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부탁을 할 작정이었다.
모든 힘을 동원해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아들을 찾을 때까지 한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소년이 주인마님에게 돌아서서 선자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한수의 아내는 흐느끼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주인어른이 멀리 떠났다고 말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미에코는 돌아서서 걸어가며 이렇게 덧붙였다.
"기차 요금이나 음식이 필요하다면 여자를 뒤쪽으로 데려가서 줘.
그게 아니면 그냥 보내."
"아주머니, 돈이나 음식이 필요하세요?" 소년이 물었다.
"아이다. 그게 아이다.
그냥 이 집 주인과 얘기를 해야 한데이.
제발, 예야, 날 좀 도와주레이." 선자가 말했다.
소년은 한수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비의 찬란한 전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하얀 앞치마를 걸친 하녀는
감시병처럼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가난하고 지저분한 사람들의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것처럼 선자를 보지 않고 먼 곳을 응시했다.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주인마님이 떠나달라고 해요.
부엌으로 가실래요? 집 뒤쪽으로요? 먹을 걸 좀 드릴 수 있어요. 주인마님이 . . . "
"아니, 그게 아이라고."
하녀가 정문을 조용히 닫았고, 소년은 바깥에 남아 있었다.
소년은 정문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고, 그런 일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선자는 어두운 거리 로 돌아섰다.
반달이 남색 하늘에 떠 있었다.
여주인은 거실로 돌아가 꽃꽂이 잡지를 읽었고,
하녀는 식료품 저장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선자가 큰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인어른이 가끔씩 집에 돌아오시지만
집에서 잠을 자는 일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소년은 일거리를 찾아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번 주인어른과 주인마님은 서로에게 매우 정중했지만
평범한 남편과 아내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자들은 원래 그런지도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소년의 부모와는 전혀 달랐다.
목수였던 소년의 아버지는 간이 나빠져서 돌아가셨다.
일을 쉬는 적이 없었던 어머니는 돈을 벌지 못해도 아버지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정원에서 일하는 소년은 주인어른이 가끔씩
오사카의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녀들과 요리사가 도쿄에 있는 주인어른의 저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운전사 야스다 빼고는 그곳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
소년은 도쿄나 자신이 태어난 오사카, 그리고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나고야 이외의 다른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주인어른이 어디에 계신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야스다와 건장한 경호원 지코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년이 그들에게 주인어린의 행방을 물어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끔씩 주인어른은 조선이나 홍콩에 간다고 했다.
기차역을 향해 걸어가는 조선인 여자의 작은 형체를 제외하면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정원에서 일하는 소년은 재빨리 뛰어가 그 여자를 따라잡았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어디 사세요?"
선자는 소년이 뭔가를 알고 달려오는지 궁금해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카이노에 산데이. 이카이노 아나?"
소년이 웅크린 채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선자의 동그란 얼굴을 응시했다.
"큰 목욕탕 옆의 상점가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산데이.
내 이름은 백선자, 보쿠 선자라고도 칸데이.
아무한테나 설탕과자 파는 아줌마가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면 된다.
기차역에서 설탕과자를 팔고 있고, 항상 시장에 있으니까,
고한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날 찾아와줄래?
니 주인어른을 만나면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 좀 해줄래?"
선자가 물었다.
"네 한번 해볼게요.
주인어른을 자주 만나지는 못해요."
소년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수가 집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게 옳은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어른을 만나면 아주머니가 찾아왔었다고 말씀드릴께요.
주인마님도 아주머니 일을 주인어른께 말씀드릴 거예요."
"이거 받거레이." 선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약간 꺼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전 필요한 걸 다 갖고 있어요.
전 괜찮아요." 소년은 선자의 닳은 신발 고무창을 쳐다봤다.
엄마가 시장에 갈 때 신는 신발과 똑같아 보였다.
"착한 아이구나." 이렇게 말한 선자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노아는 선자의 기쁨이었다.
노아는 선자가 인생에서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때에도 선자에게 흔들림 없는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저희 엄마가 나고야 시장에서 일해요.
엄마는 야채를 파는 다른 아주머니를 돕고 있어요."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새해 이후로 엄마와 누나들을 만나지 못했다.
이곳에서 조선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주인어른뿐이었다.
"엄마도 널 보고 싶어 하시겠구나."
선자는 소년이 가여워서 소년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소년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기차역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