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남자의 사랑 (1959년 12월)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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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두 남자의 사랑. 1959년 12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토요일 아침이었다.
경희는 교회에 가야 했다.
일본어는 할 줄 알지만 조선어를 모르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교회를 방문했고, 교회 목사님이 일본어를 아주 잘하는 경희에게
선교사들에 영접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요셉 곁을 한시도 떠날 수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창호가 요셉을 돌봐주겠다고 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일이었고, 창호는 마지막으로 경희를 위해 몇 가지 일을 해주고 싶었다.
창호는 요셉의 잠자리 옆 따뜻한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의사에게 추천받은 팔다리 운동
몇 가지를 요셉이 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럼, 마음을 정했군요." 요셉이 물었다.
"네, 형님. 가야죠. 고국에 갈 때입니다."
"정말이요? 내일 가나요?"
"내일 아침에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거기서 니가타로 갈 겁니다.
다음 주에 배가 떠나요."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를 천장을 향해 들어올릴 때
요셉의 얼굴이 고통으로 약간 일그러졌다.
창호는 요셉의 허벅지 아래에 오른손을 대서
그의 다리를 천천히 내려주었다.
이어서 왼쪽 다리도 똑같이 운동하게 했다.
요셉은 두 번 더 하고 나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화장한 내 유골을 가져가서
그곳에 묻어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럼 아주 좋을 텐데. 그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난 아직도 천국을 믿어요.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죠.
경희와 결혼해서 그런 것 같아요.
경희의 믿음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었죠.
난 좋은 남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어요.
한때 아버지는 죽어서 천국에 가면
육신을 돌려받는다고 말씀하셨죠.
마침내 이 육신을 버릴 수 있어요.
그럼 좋을 겁니다. 이제 집에 갈 준비가 된것 같아요.
창호는 오른손을 요셉의 머리 아래에 넣었고,
요셉은 양팔을 머리 위로 천천히 올렸다가 내렸다.
요셉의 두 팔은 다리보다 훨씬 튼튼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형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형님은 아직 이렇게 살아 있고, 아직은 몸에서 힘이 느껴져요."
창호는 화상을 입지 않은 요셉의 성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요셉의 연약한 뼈가 만져졌다.
어떻게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 . . "
당신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때는 경희와 결혼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경희를 조선으로 데려갈 수는 없어요.
부탁할게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뭐라고요?" 창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아요.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곳에 경희를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이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일본은 또다시 부유한 나라가 될 테고,
조선은 계속 분단된 상태로 잃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아직 건강해요.
여기서 돈을 벌어서 내 아내 . . . "
요셉은 차마 경희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내가 경희를 너무 고통스럽게 했어요.
경희는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날 사랑해주었죠.
난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함께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경희는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였어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와 함께 있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경희가 그토록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착한 여자였기 때문이죠.
경희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난 아주 오랫동안
그런 경희에게
제대로 된 남편이 되어주지 못했죠."
요셉이 한숨을 쉬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당신이 경희를 좋아한다는 거 압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
당신이 그 폭력배 밑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이곳에는 일자리가 많이 없죠.
그러니 어쩔수 없다는 거 알아요.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겠어요?"
요셉은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가 옳은 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여기 머물러줘요. 난 곧 죽을 겁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요.
당신은 이곳에 필요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는 없어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죠."
"형님은 죽지 않을 겁니다."
"아뇨. 죽어야 해요. 우리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수는 없어요."
요셉의 이야기를 듣자 창호는
자신이 포기했던 경희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다.
경희는 교회에서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구멍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창호를 발견했다.
창호는 신문을 읽으면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창호는 그 가게 주인과 친했고,
가게 앞의 차양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진 조용한 그 장소를 좋아했다.
"여기 있었네요?" 경희가 말했다.
경희는 창호를 만나서 행복했다.
"그이는 괜찮아요? 갇혀 있는 게 쉽지 않죠?
그이를 돌봐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요. 창호 씨는 여기 계세요."
"형님은 괜찮아요. 전 방금 나왔어요.
형님이 잠들기 전에 읽을 신문을 좀 사다달라고 했거든요.
일어나서 본다고. 제가 바람을 좀 쐬고 오기를 바랐나 봐요."
경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에 가려고 돌아섰다.
"누님, 누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럼, 집으로 돌아가요. 저녁을 만드는 게 좋겠어요.
그이가 배가 고플 거예요."
"잠깐만요. 저랑 좀 앉으실래요? 가게에서 음료수 하나 사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경희가 창호에게 미소 짓고는 자리에 앉아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갰다.
경희는 남색 드레스 위에 겨울 코트를 걸치고, 예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창호는 주저하지 않고 경희의 남편이 했던 말을
거의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불안했지만 지금 이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누님은 저와 함께 갈 수 있어요.
다음 주에 첫 배가 떠나지만 나중에 갈 수도 있어요.
조선에는 나라를 재건할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요.
우리 두 사람의 집에 최신 가전제품들을 가득 채워넣고
우리나라에서 사는 거예요.
하루에 세 번 흰쌀밥을 먹고요.
형님의 유골을 조선의 가져갈 수 있고,
누님 부모님이 산소에 가볼 수도 있죠.
적절하게 제사도 지내고요. 고국에 돌아갈 수 있어요.
누님은 제 아내가 될 수 있어요.
경희는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셉이 자신을 창호에게 주려고 했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창호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요셉이 자신을 너무 걱정해서
그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경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교회에서 모임이 끝난 후에 경희는 목사님에게
창호의 여행과 평양에서의 행복을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창호는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지만
경희가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창호를 보살펴주신다면
경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일주일 전에 창호는 경희에게 떠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희는 그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힘들고 슬펐다.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이었다.
창호는 훌륭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믿는 젊은이였다.
경희는 창호가 평양에 꼭 가야 하는 게 아닌데도
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
창호에게는 좋은 일자리와 친구들이 있었다.
평양은 그의 고향도 아니었다.
창호는 경상도 출신이었고 북쪽에서 온 사람은 오히려 경희였다.
"제 뜻을 따라줄 수 있나요?" 창호가 물었다.
"하지만 창호 씨는 떠나고 싶다고 했잖아요.
조선에 가면 창호 씨가 누군가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누님도 제가 누님을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제가 . . . "
경희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게 주인은 뒤쪽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도로에는 자동차 몇 대와 자전거들이 지나다녔지만
토요일 아침이라 많지 않았다.
가게 차양에 달려 있는 붉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바람개비들이
가벼운 겨울 미풍에 천천히 돌아갔다.
"누님이 제 뜻을 따라줄 수 있다면 . . .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경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경희는 창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창호의 친절과 사랑에 힘을 얻었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기도 했다.
같은 감정으로 창호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창호 씨에게는 미래가 있어요.
젊은 아가씨를 만나 아이들을 가져야죠.
남편과 제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임을 알면서도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아이들을 가질 수 있어요.
창호 씨는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거예요.
창호 씨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간 죄를 짓는 거예요."
"제가 기다리는 게 싫어서 그런 거군요.
누님이 기다려 달라고 말 한다면 전 그렇게 할 거니까요."
경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서 파란색 벙어리장갑을 꼈다.
"저녁을 하러 가야겠어요."
"전 내일 떠납니다. 누님 남편은 제가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요.
누님이 원하는 건 남편의 허락을 받는 거 아닌가요?
남편이 허락한다면 누님이 있는 하나님께서도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요?"
"요셉은 하나님의 율법을 바꾸지 못해요.
내 남편은 살아 있고, 난 남편의 죽음을 재촉하고 쉽지 않아요.
창호 씨를 무척 아끼고 있어요.
창호 씨는 내게 소중한 친구예요.
창호 씨가 떠난다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부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건 알아요.
요셉이 살아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에요.
창호 씨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빌게요."
"아뇨, 이해 못 하겠어요.
절대 이해 못 할 겁니다.
누님의 신앙은 어떻게 그런 고통을 강요할 수 있나요?"
"그건 고통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창호 씨가 날 용서하기를 빌게요.
창호 씨가 . . . "
창호는 의자에 음료수 병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일어섰다.
"전 누님과 달라요. 전 그냥 남자라고요.
신성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전 그냥 평범한 애국자일 뿐입니다."
창호는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버렸고,
모두가 잠든 저녁에도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경희가 요셉에게 물을 갖다주려고 부엌으로 가다가
창호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방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창호는 떠나고 없었다.
이불은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창호의 소지품이 많지는 않았지만
창호의 책들과 그 위에 놓여 있던 여분의 안경 하나가 사라진 방은 훨씬 더 황량해 보였다
가족들이 오사카 역까지 창호를 배웅해주기로 했지만
창호는 더 일찍 기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경희가 창호의 문 앞에 서서 울고 있자 선자가 경희의 팔을 잡았다.
선자는 잠옷 위에 작업용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한밤중에 떠났어예.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십니더.
전 설탕과자를 만들려고 나왔다가 마주쳤어예."
"왜 기다리지 않았지? 우리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는데."
"요란스럽게 떠나고 싶지 않다 카대예.
제가 아침을 만들어줄라꼬 했지만
먹을 수가 없다면서 나중에 사먹겠다 카더라고예."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
요셉이 죽고 나서 말이야. 요셉이 그래도 괜찮다고 그에게 말했대."
"엄마야." 선자가 숨을 헉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잖아. 그렇지? 그 사람은 젊은 여자를 만나야 해.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어. 더 이상 생리도 하지 않아."
"아이보다는 언니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아입니꺼."
"안 돼. 두 남자나 실망시킬 수는 없어.
창호는 좋은 사람이야." 경희가 말했다.
선자는 경희의 손을 꼭 잡았다.
"안 된다고 했어예?"
경희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어서
선자가 앞치마 모서리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요셉에게 물을 갖다주러 가야겠어."
경희가 갑자기 왜 잠자리에서 나왔는지 떠올리며 말했다.
"언니, 창호 씨는
아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깁니더.
언니와 함께 있기만 하며 행복해할 기라예.
언니는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아입니꺼."
"아냐. 난 이기적이야. 그렇지 않아."
선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이곳에 붙잡아둔 건 이기적인 행동이었어.
하지만 그는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지.
나는 매일 그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어.
주님이 내가 그를 보내기를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런 식으로 두 남자의 보살핌을 받는게 옳은 일은 아니니까."
선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사람은 자신의 곁에 단 한 사람만 두어야 하는 걸까?
엄마에게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선자의 사람은 한수였을까, 아니면 이삭이었을까?
한수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냥 그녀를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었을까?
사랑에 희생이 필요하다면
이삭은 진정으로 선자를 사랑한 것이었다.
경희는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에게 충실했다.
경희만큼 마음씨가 곱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단 한 남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남자에게
사랑받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왜 남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떠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창호는 기다림의 고통을 충분히 겪어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일까?
선자는 언니가 창호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건 또 경희가 아닐 것이다.
창호는 남편을 배신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했고,
그런 이유로 경희를 사랑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경희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경희가 부엌으로 향했고, 선자는 몇 발자국 뒤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아침 햇살이 부엌 창문을 뚫고 들어와
앞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지만,
햇살 때문에 경희 언니의 가냘픈 체형이 눈부신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