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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책읽는 밤 (Another Audio Book Collection), [KOR/ENG SUB] 트바… – Text to read

레오의 책읽는 밤 (Another Audio Book Collection), [KOR/ENG SUB] 트바로티 김호중 책_김호중 자서전_김호중 빈체로 스토리_굴곡진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 트바로티로 태어나다_김호중 인생 이야기ㅣ에세이ㅣ오디오북ㅣ책읽어주는남자

Avanzato 1 di coreano lesson to practice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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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NG SUB] 트바로티 김호중 책_김호중 자서전_김호중 빈체로 스토리_굴곡진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 트바로티로 태어나다_김호중 인생 이야기ㅣ에세이ㅣ오디오북ㅣ책읽어주는남자

* 이 영상은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 홍보의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일부만 낭독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 마이크와 선글라스만 있으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를 불렀고,

누가 시키면 더 신나서 노래를 불렀으며, 누가 박수를 쳐주면 더더욱 흥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는 것이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노래를 불러 먹고살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땐 잘한다 소리를 종종 들었지만 노래가 업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 부르는 게 좋았고, 노래 듣는 것이 좋았다. 세상 밖으로

내 인생은 고3 때 '스타킹' 출연으로 크게 바뀌었다.

먼저 한양대학교 음악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존경하던 고성현 교수님의 클래스에 배정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디서부터인가 꼬이기 시작했다. 입학 전에 연주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스타킹' 출연 이후 여기저기에서 많이 불러주었던 것이다.

이게 좀 화근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학내에 파다하게 돌았다고 한다. 학교에 차를 몰고 왔다는 둥, 학교 앞에서 차 사고를 냈다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다. 심지어 ‘김호중은 정통 클래식 하는 애가 아니라 딴따라다'라는 말까지 있다고 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괜히 물을 흐리는 것 같아서 조용히 휴학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대학교에 와서도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씩이나 당하고 살기엔 억울했고, 억울한 마음을 꾹 참자니 종잡을 수 없이 문제가 커질 것 같았다. 그 무렵 독일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지 과감히 유학을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서수용 선생님께도 의논을 드렸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분이셨다.

내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셨다. “어디를 가도 넌 잘 해낼 거다. 그만한 실력이 있지 않냐.” 해외 유학은 누구에게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내게 그런 기회가 왔으니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보냈다면 독일 유학 제안을 거절하거나 보류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학기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대학 캠퍼스를 걸어보기만 했을 뿐 학교 식당에서 밥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 고성현 교수님과는 학교 밖에서 따로 뵈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학교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고, 나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선배들은 교수님과 계속 제자로 만나야 할 사이였다.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생긴 일이라 레슨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이해해주시고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건네주셨다. 독일 유학을 결정했는데 당장 여권이 없었다.

당시 가장 빨리 나오는 곳이 영등포구청이라고 해서 바로 신청했다. 여권이 나온 날이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갓 나온 여권을 가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스타킹>으로 인연을 맺었던 피디님께서 기자회견처럼 방송을 해주셨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받은 콩쿠르 상금과 후원금은 서수용 선생님께서 차곡차곡 모아주셨다.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을 때의 후원금부터, 김천에 사신다는 어느 남자분이 학교 수위실에 맡기고 가신 후원금 등 또 다른 많은 후원금도 잘 모아주셨다.

거기에 본인의 사비까지 더해서 졸업하던 날 통장을 주셨다.

유학 떠나기 전엔 이런 농담도 하셨다.

“비행기 안에선 신발 벗는 거 알지?”

“에이, 선생님도,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호기롭게 말했지만 정작 비행기를 타니 통로가 너무 깨끗해서 정말로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다가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있는데 스튜어디스분이 오셔서 자리로 안내해 주시고 슬리퍼도 내주셨다. 알고 보니 비행기를 늦게 탔던 나를 비즈니스석 손님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 신기하기만 했다.

좌석에 모니터가 있었는데 리모컨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리모컨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을 그때는 뭔가를 물어보는 게 괜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영화 한 편을 못 보고 빈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보았다. 심심함에 몸을 뒤틀던 나는 가방에 넣어온 책이 생각났다.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에 짐을 많이 꾸릴 것도 없어 가방은 단출했다. 필요한 건 독일에 도착해서 사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내에 갖고 간 가방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박지성 선수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이었다.

영화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지성 선수가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일인 양 빠져들었다.

앞으로의 일이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박지성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도전을 멈추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다.

순식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을 한 권이나 읽었는데도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또다시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의 책을 읽은 덕분인지 곧 도착할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다. ‘숙소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어떤 스승님들께 배우게 될까?'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 배우기 어려우면 어쩌지?' 평소 한식을 좋아했기에 밥 먹는 일도 걱정되었다. 독일에도 한국 식당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미처 못 했기에 매일 소시지만 먹는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어떤 친구들을 만날지 설레기도 했다.

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한겨울이라 상당히 추웠다.

짐부터 찾아야 하는데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앞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아주머니들 다섯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옳지, 저분들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졸졸 따라가서 출입국 입구에 늘어서 있는 줄에 섰다. “패스포트 플리즈.” “패, 패스……?” “패스포트 플리즈.” 패스포트라는 말을 알아듣긴 했는데 그 말의 뜻이 여권인 줄 몰랐던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엉뚱하게 지갑을 꺼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갑을 패스포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지갑에 이어 가방까지 보여주었지만 계속 거부를 당하니 나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쪽은 그쪽대로 내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 손짓으로 옆에 서 있으라고 했다. 제법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이 다 줄어들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독일 땅을 밟기도 전에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란해 하고 있는데 우연히 한국 스튜어디스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분들은 바로 상황을 알아봐주셨는데 알고 보니 아주머니들을 따라갔던 곳은 프랑크푸르트 입국장이 아니라 로마나 밀라노 등지로 경유하는 곳이었다. 겨우 해결이 되어 짐을 찾으러 가니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남아 빙빙 돌고 있었다. 홀로 낯선 곳에 떨어진 내 신세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는 독일이었다.

내 손으로 여권을 만들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살면서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는데 막연히 꿈꾸던 유학 생활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나는 두 발에 힘을 주고 힘차게 한 걸음씩 걸어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 옛날 서러운 눈물을 이 악물고 참으며 대문을 힘겹게 넘어가던 걸음이 아니었다. 새롭게 펼쳐질 인생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걸음이었다. 공항 문턱을 넘어가는 그 걸음은 내 인생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네, 독일 유학까지 떠나게 되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저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패스포트라는 말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경험들, 그리고 처음에 대학에 진학했을 때 여러 겪었던 문제들,

마침내 독일 떠나게 된 그런 날들, 모두 다 이 책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계속 읽어볼게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첫 번째 팬 미팅을 마치고 나니 소중한 분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수천 번 감사하다고 말해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분. 서수용 선생님이다.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고, 더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내가 방황할 때도 내가 잘될 때도 내 옆에서 내 편이 되어 무조건 나를 믿어주셨다. 내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은 나를 늘 지켜봐 주시면서도 간섭은 일체 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셨다. 그러지 마라고 하거나 이쪽이 더 좋다고 날 밀지도 않으셨다. 예를 들어 내가 물이 가득 찬 컵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다고 해보자. 누군가는 걱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야, 조심해. 그러다가 쏟아져.”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너 이렇게 하면 안 돼. 그거 쏟아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쏟아지면 다시 주워 담으면 되지. 설령 못 담더라도 괜찮아”라고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쏟아질 것 같으면 대부분은 “그거 쏟아진다. 꽉 잡아!”라고 할 텐데 선생님은 쏟아질 때까지 그냥 놔두셨다.

선생님의 이런 태도가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느껴졌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라고 질책하면서 “너도 손해 보고 나도 손해 보는 일을 왜 하냐. 이거 치우려면 얼마나 고생인데”라고 짜증을 내기 일쑤지만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다. 그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쏟아지면 어때. 괜찮아. 치우면 되지. 대신 네가 그랬으니 네가 책임지면 되는 거다.” 이런 태도를 선생님을 통해 배우면서 사람을 믿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흔히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겠냐고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선생님의 몇 마디 말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말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두 사람만의 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넌 평생 노래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선생님에게 듣는 순간 종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머릿속에서 큰 종이 울리는 듯했다.

내가 지금까지 노래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건 그때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다. 학창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약간 무식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경험도 안 해보고 걱정하는 걸 싫어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찍어 먹어봐야 알았던 것 같다. 똥은 어떤 것이며 된장이 어떤 것인지, 그 둘이 뭐가 어떻게 다르고 좋고 나쁜지 지혜롭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님은 눈물보다 땀을 흘리는 일의 가치를 알게 해주셨다. 눈물은 누군가의 동정을 살지 모르지만, 땀을 정직한 보상과 결과를 가져다준다. 물론 상처를 입는 날도 있지만 그 상처를 상처로 끝나고 둘 것인지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 곁을 떠난 건 스무 살이 되어서였다. 혼자 해나가야 했다. 누군가는 무작정 준비 없이 독일 유학을 가서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마저도 이것저것 몸소 겪어보았으니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설령 직진이 아니라 곡선을 만들면서 지름길을 두고 다소 돌아가더라도 인생을 허비했다거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스푼 경험했다면 한 스푼 떠먹은 기억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해주셨던 수많은 말은 내게 밥보다 보약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고3 때 목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낙담했던 적이 있었다.

노래를 정말 잘 부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던 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시계에 비유한다면 태어난 시각이 0시다. 열아홉 살 너는 이제 겨우 새벽 5시나 6시야. 아침 5시에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있겠냐?” “있을 수도 있죠.”

“그래. 있을 수 있지.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 “인생이라는 학교도 마찬가지야. 지금 넌 새벽 5시니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기도 힘든 시간이지 않냐. 학교를 가려고 일어났어도 신발도 아직 안 신은 시각인데 목이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때가 와.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힘든 순간이면 이 말이 떠올랐다.

서른을 앞두고 답답함이 컸을 때도 ‘아직 아침 9시쯤 된 거지. 목이 잠겨 있는 시각이지'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서 충실히 노래를 불렀다.

<미스터트롯>을 준비할 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괜찮겠냐고 걱정하셨다. 트롯은 성악과 너무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그런데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주셨다.

“호중아, 내가 말한 거 그거 취소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성악을 가르친 선생이지만 음악을 가르친 선생 아니냐. 네가 그 음악에서 놀려고 하고, 그 음악을 네가 하려고 하는데 내가 시선을 너무 좁게 봤던 것 같다.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열심히 멋지게 한번 하고 와라.” 그러고는 경연 내내 누구보다 든든하게 응원해주셨다. 심지어 “뽕기를 너무 뺀 거 아니냐. 뽕끼를 더 넣어야 하지 않냐”는 말씀까지 하셨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혹여 망설임이 생길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먼 곳을 보시면서도 절대로 내 앞에 서서 나를 잡아당기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뒤에서 뒷짐 지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마냥 보고 있기만 하지도 않으셨다. 때로는 반 발짝 뒤에 때로는 반 발짝 앞에 계시면서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셨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무엇을 가장 자랑하고 싶냐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말할 것이다. “서수용 선생님이 저의 선생님인 게 가장 큰 자랑입니다.”

여담이지만, 선생님께서 제일 많이 해준 칭찬이 내가 귀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땐 ‘목이 발달되어야 하는데 귀가 발달되어 있으면 어떡하노?'라는 걱정도 몰래 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큰 칭찬이었는지 동원이를 보면서 알았다. 동원이는 귀가 정말 좋다.

귀가 좋으니 노래도 잘 부르고 흉내도 잘 낸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출중하다.

나와 동갑인 영웅이는 형으로 부르고 나는 삼촌으로 부르는 건 못마땅하지만 앞으로도 동원이의 든든한 삼촌이 되어줄 생각이다.

선생님을 떠올리면 내가 큰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나의 전부를 수용하고 받아주는 넉넉한 바다.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물질로도, 심적으로도 적극 지원해주셨다. 혹시라도 그동안 받은 상금이 축날까 모두 모아주신 데다가 당신의 사비까지 얹어서 나를 지원해주신 분이다. 세상에 누가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셨다. 내게 노래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말해주신 분. 선생님의 재산을 거덜 내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선생님, 제가 노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앞으로도 선생님의 재산 축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어릴 때부터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 집에 있던 오래된 라디오는 가끔 지지직거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 주파수를 맞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음질이 깨끗해졌다. 이제는 라디오 주파수 맞출 일이 없다.

하지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기억은 내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내 인생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걸까.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그냥 참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음악이 나오는 곳의 주파수를 끈질기게 찾는 걸까.

주파수를 찾는 시간은 더 정확한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거나 내 라디오는 왜 이렇게 고물이냐고 짜증을 내봤자 소용이 없다. 그저 세심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에 묵묵히 집중하면 어느 순간 탁 하며 걸림 쇠가 풀리듯 깨끗하고 선명한 음악이 나오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묵묵히 인내하며 노래를 불러온 시간은 어찌 보면 나만의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었다. 깨끗하게 잡히는 다른 주파수에서 좋은 노래들이 흘러나와도 내가 찾는 주파수가 아니라면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빨리 잘 찾는 것은 나의 장점이 아니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묵묵히 견디고 인내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섬세하게 맞춰보는 게 내 성미와 맞았다. 그래서 그 시간을 기다렸고, 그 세월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멋 부리지 않고 말하자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잘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도달했냐고 묻는다면 주파수를 맞추는 노력을 매일매일 해왔다는 말이 가장 진실한 대답이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다. 내 인생을 내가 원해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과 말에 취약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주파수에만 나 자신을 맞추고 살아갈 수는 없다.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내 주파수를 찾는 일을 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노래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가 미묘하게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말 저 말에 갈팡질팡하다가는 라디오가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말로만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고 직접 땀을 흘리며 1밀리미터씩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손의 감각이 민감해지고, 귀가 열리면서 ‘아, 여기구나!'하고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세 끼 밥을 먹은 날은 삶이 참 살 만하다고 느꼈다.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살아 있으니 괜찮다며 내게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버티고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래를 꿈꾸면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나이는 상관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10대이든 취직준비를 하는 20대이든 전직을 꿈꾸는 30대이든 삶을 막막하게 버티고 있는 40대이든 나이 듦을 느끼기 시작하는 50대이든 은퇴를 앞두고 있는 60대이든 처음으로 노년의 시간을 겪고 있는 70대이든 혹은 그 이상의 나이이든 간에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일 것이다.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삶이 있고, 각자에게 딱 맞는 삶의 주파수가 있다고 믿는다. 나도 처음부터 나만의 주파수를 찾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주파수를 꾸준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유언이라는 시작점이 있었던 덕분이다.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할머니의 이 말은 얕은 재주나 부리며 살아가란 뜻이 아니다. 비굴하게 고개 숙여 받는 박수를 추구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타인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진실한 것이다.

남의 주파수를 내 것인 양 착각하지 않고 내 주파수를 찾을 때까지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유언을 나는 이렇게 알아듣고 살아왔고 살아가려 한다. “남들에게 박수를 받으려면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너의 인생을 살아가라. 힘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공중으로 뻗어나가는 소리처럼 빛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할미가 하늘에서 꼭 지켜볼 거다. 단디 행동하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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