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NG SUB]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사람마다 인품이 있듯 말에도 언품이 있다_이기주 / 책읽어주는 남자 / 오디오북 / 책읽어주는 asmr
안녕하세요. 오늘 레오의 책읽는 밤 여러분께 읽어드릴 책은 《말의 품격》입니다.
부제로는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인데요.
저자 이기주, 황소북스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이 책은 경청, 공감, 반응, 뒷말, 인향, 소음 등 24개의 키워드를 통해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냅니다. 저자 소개를 간단히 해드리면요,
저자 이기주는 자신을 소개할 때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쓴다고 말하는데요. 고민이 깃든 말과 글에 탐닉한다.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놓는다.
지은 책으로는 《언어의 온도》 등이 있습니다.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협상, 극단 사이에서 절충점 찾기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겪었던 일이다.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은 투명하고도 길었다. 바람은 날카로웠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칼바람이 달려들었다. 매서운 바람은 건물을 타고 오르면서 창문으로 진입하려는 햇살을 가로막았고 벽에 달라붙어 있던 눈덩이를 잘게 바스러뜨렸다.
부서진 눈송이는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그 흩날림이, 빛의 조각인지 눈의 조각인지 나는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앞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창문을 열어 젖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이 정면으로 들이닥쳐 얼굴을 때렸다. 누군가 청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실례합니다. 창문 좀 닫으면 안 될까요?”
“추우세요? 공기가 탁한 것 같은데요. 환기를 좀 시키는 게 어때요?” “환기요? 여기 학생들 대부분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찬 공기를 좀 불러들이는 게...”
소모적인 대화가 오갈 듯한 찰나였다.
냉기로 몸을 휘감으려는 청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괜한 감정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득을 보진 못하더라도, 누구 하나 손해를 보지 않을 제안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 반대편 벽에 창문 하나가 보였다. 외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아닌 출입구 근처 창문이었다.
찬바람이 우사인 볼트로 빙의해 얼굴을 향해 곧바로 질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손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쪽 창문 말고 저쪽 창문을 여는 게 어떨까요?”
“네? 음, 그러죠. 어차피 바람만 들어오면 되니까요.”
오래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도서관에서 경험한 작은 협상은 여전히 내 기억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사실 삶 자체가 크고 작은 협상의 연속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연봉과 메뉴 선택, 리모컨 쟁탈전 등을 놓고 누군가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둘러보면 협상을 겁쟁이의 선택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협의와 타협은 고사하고 대화 자체를 거부한 채 적의를 내뿜으며 날카로운 혀와 안광으로 상대의 약점, ‘위크 스폿 weak spot'을 찌르려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평생 전장을 누비며 책략을 쌓은 손무의 견해에 비추어보면, 이런 마음가짐은 상계上計가 아니다. 손무는 “전쟁은 죽음과 삶의 문제이므로 면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손자병법》 ‘모공' 편에서는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강조한 것이다. 손무가 강조한 상책 가운데 하나가 협상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흠집과 맹점을 찾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공세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과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싸우지 않고 양측 모두가 이기는 방법을 찾는 합세合勢의 대결 말이다. ‘스위트 스폿 sweet spot'이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 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골프채의 스위트 스폿으로 공을 쳐야 최대 비거리를 낼 수 있다.
협상학에도 스위트 스폿이 존재한다. 다만 비거리를 최대화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환경을 최적화하려는 역할을 한다. 양측의 이익이 하나로 포개지고 협상 참여자들이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심리 타점心理打點이라고도 한다.
극단 사이에서 절충의 지점을 찾는 일은, 중국 노나라 때 학자 자사子思가 주창한 중용中庸과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중中'은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도리에 맞는 상태를 일컫는다. ‘용庸'은 보편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지지 아니하고 양극단 사이에서 절충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를 서구적 시각으로 풀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중용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반대편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다. 이해 당사자 모두가 실리를 챙기는 포지티브섬 positive-sum 게임에 가깝다.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유연한 흔들림이라고 할까.
바다를 떠다니는 배도 중용의 힘으로 파도를 밀쳐내고 물살 위에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대개 선박은 출항 전 배 밑부분에 평형수를 집어 넣는다.
파도를 만나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가만히 있던 평형수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서 선박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평형수가 제 위치를 절충하는 덕분에 배가 뒤집히지 않고 순항할 수 있는 것이다. 절충과 협상 과정에서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일까? 글쎄다.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른 우주宇宙의 충돌이다. 충돌은 두 주체가 서로 맞부딪치고 맞서는 것이다. 마찰을 일으킨다. 갈등을 낳는다.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내뱉는 “내가 당신을 이해할게요”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완벽히 뿌리내리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오히려 갈등과 다툼질 앞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실을 업신여기지 않을 때 오해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 순간,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의 싹이 돋아날지도 모른다. 겸상, 함께 온기를 나누는 자리
국내 한 언론사 기자가 세계적 협상 전문가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교수님,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입니다.
남북의 당국자가 만나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신경을 써야 할까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의 대답은, 기자가 예상한 답변의 범주를 벗어났다. “글쎄요. 협상 실무자들이 점심을 자주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기자가 되물었다. “네? 점심요?”
“그렇습니다. 서로의 의도를 어림짐작하고 납득할만한 제안을 건네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얘기를 먼저 주고 받는 게 도움이 됩니다. 월드컵이나 스포츠 관련 화젯거리가 좋겠군요. 스무 번쯤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또 서로 사적인 영역도 파악해야 해요. 그런 다음에 제대로 된 협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설명은 기자의 귓속에서 금방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머물렀다.
우리 사회의 온갖 이해와 욕망이 뒤얽힌 문제를 풀려면
당사자들이 식탁에 머리를 맞대고 밥 먹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기자는 생각했다. 석사와 박사 위에 ‘밥사'라는 학위가 존재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이나 단체에서 동료를 위해 기꺼이 밥 한 끼 사는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때로는 상식과 지식보다 밥을 먹는 행위인 회식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회식은 비생산적이고 획일적인 단합 대회가 아니라 함께 밥을 먹으며 온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신문 정치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식사 정치'라는 것이 있다. 정치인의 식사는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 섭취 행위가 아니다. 그들에게 식사는 나름의 정치적 목적과 의미를 겨냥해 힘껏 쏘아 올리는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 “모든 정치는 밥상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나도는 배경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정치적 고비마다 비장의 보검을 꺼내듯 ‘식사 정치' 카드를 뽑아 들었다. 2013년 3월, 공화당과 민주당은 예산안 처리를 두고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예산안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 12명을 백악관 인근 호텔로 초대했다. 폭설로 인한 교통 체증을 뚫고 거물급 정치인들이 집결 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비용은 오바마 대통령이 사비를 털어 계산했다.
오바마는 의원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계산서에 사인했다.
정국은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만, 호텔을 나서는 의원들의 입가에는 봄 햇살을 닮은 웃음기가 돌았다. 식사 자리에서 건설적인 대화가 오갔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식사 정치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태도는 물론 장소와 방법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메신저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곧잘 한다. 상대방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당사자의 태도와 방법이 적절하면 메시지로서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메시지 장소가 곧 메시지”라고 부연하고 싶다. 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장소는 밥과 밥공기의 관계와 유사하다. 밥맛을 결정하는 것은 밥을 구성하는 쌀과 물만이 아니다. 어떤 용기에 밥을 담느냐가 중요하다.
빛을 튕겨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느냐, 은은한 백색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진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진다. 그릇도 분명 맛을 낸다.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다. 메시지의 내용 못지않게 그것을 표현하는공간과 시간적 배경 또한 메시지의 전달력과 설득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더욱이 동아시아처럼 공동체 구성원처럼 공유하는 배경이 비교적 강한 문화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동일한 시간과 상황을 함께하고 있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토양 위에서 대화의 꽃이 쉬이 피어난다.
특히 겸상은 관계의 문을 여는 중요한 관문이다.
식탁을 마주하고 반찬을 권하거나 집어 건네면서 우리는 일상의 고단함을 공유하고 상대방의 온기를 느낀다. 식사 자리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혼재하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인생의 중대사 상당수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앞둔 시점에는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해야 하고,
기업과 개인은 밥 먹는 자리에서 화해를 모색하거나 갈등을 조정한다. 타인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 복잡한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자리가 바로 식사인 것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 앞 좌석에서 중년 여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에게 전화를 거는 듯했다.
“엄마야!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어서 챙겨 먹어라!”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이런 대화를 엿들으면,
그 의미가 너무나 맑고 소중해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마음에 오롯이 새기고 싶다. ‘먹다'의 함의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사 자리에서 무수히 많은 것을 입에 욱여 넣으며 살아간다. 밥만 먹는 게 아니다. 커피도 먹고 술도 먹고 욕도 먹고 어느새 나이도 먹는다. 그러므로 ‘먹다'라는 동사와 가장 가까운 말은 ‘살다'일 것이며, 자식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밥 먹었냐?”하고 물어보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은 상대가 있다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 다시 약속을 잡아 보는 건 어떨까.
혹시 아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반찬을 권하는 순간
세상살이에 지친 고단함이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지고 식사 자리가 단순히 끼니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관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
언어가 생명력을 지니려면 그 의미에 어울리는 크기와 무게를 가져야 하고 온당한 과정을 거쳐 상대방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말과 글이 상대방의 눈과 귀에 달라붙어 제구실을 한다. 다음은 지인의 연애담이다.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재미뿐 아니라 의미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친구 J는 어느 날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이상형에 가까운 여인과 마주쳤다. J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때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초콜릿 CF의 한 장면을 본인이 재연하는 것 같아서 겸연쩍었던 J는 앞이마를 긁적긁적하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어느 역에서 내리세요?”
J는 자신의 말이 그녀의 마음 한복판에 새겨지기를 바랐으나 지나친 욕심이었다. 고전적인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의 눈으로 J를 쏘아보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네? 누구시죠? 왜 그러시죠?” J는 포기하지 않았다. 차창 아래로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한겨울 추위가 풀리면서 투명한 햇살이 물 위에 한가득 퍼져 있었다. J는 날씨와 절기를 대화의 소재로 끌어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저기 좀 보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강의 절반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녹았네요. 달력을 보니 오늘이 절기상 입춘이더군요.
참, 조선 시대 때는 겨울철에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라는 곳에 보관했다고 해요.” “정말요?” “그럼요.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한 곳이 동빙고랍니다.
서빙고에는 주로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쓸 얼음을 저장했죠.” “아, 그랬군요.”
“그나저나 오늘 날씨 참 좋죠? 지하철을 타고 잠실철교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한강 주변은 늘 나름의 운치가 있는 것 같아요.” J가 죽 벌여놓은 문장과 문장의 이음새가 조악하거나 헐겁지 않았다. 여인의 경계심을 푸는 데도 적잖이 도움이 되는 듯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여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J는 말을 이어갔다.
“참, 이 이야기만 하고 전 내릴게요. 사실 그동안 2호선을 타고 오가면서 당신을 아홉 번 봤어요. 아홉 번만 봤으면 말을 걸지 않으려 했는데요, 오늘까지 정확히 열 번째 만남이군요. 묘한 인연이 아닐까 싶어서요. 제게 1분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정말인가요? 그럼 1분만...”
여기서 J가 그녀를 정말로 열 번 목격하고 말을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터다.
나는 J가 대화를 전개한 과정을 해부하려 한다.
그는 풍경과 날씨에 대한 감성처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이야깃거리를 동원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스몰 토크에 해당한다. 스몰 토크는 “날씨가 정말 좋죠?”처럼 일상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화젯거리다. 낯선 사람과 말을 섞고 관계를 맺는 단계에서 우리는 매번 스몰 토크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달리 말해, 스몰 토크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화젯거리는 빅 토크로 분류된다. 말 그대로 큼직한 말이다. 상대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구체적인 행동 변화를 요구할 때 우리는 빅 토크를 활용한다. 빅 토크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크고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대화 도중에 꼭 전달하고 싶어 하는 핵심 메시지와 의중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위 이야기에서 만약 J가 날씨와 풍경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채 무작정 “사실 제가 당신을 열 번 봤습니다. 시간 좀 내주세요”라고 말했다면, 즉 목적성이 다분한 빅 토크를 다짜고짜 휘둘렀다면 어떤 상황이 빚어졌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 말을 주고받기는커녕 순식간에 치한으로 몰렸을 것이다.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단어 커뮤니케이션의 라틴어 어원은 ‘커뮤니카레'이다. ‘교환하다, 공유하다' 등의 뜻이 담겨 있다.
말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소통은 혼자 할 수 없다.
소통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며 화자와 청자가 공히 교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때 가능하다. 상대의 귀를 향해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내던지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 엇갈리는 독백만 주고받는 일인지 모른다. 인생은 작은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강은 단번에 건너뛸 수 없다. 사귐도 그렇다. 크고 작은 돌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씩 밟아가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근차근 건너가야 한다. 삶과 사람 앞에서 디딜 곳이 없다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인생과 관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