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 Book 1. 고향 ⎟ 한수의 고백
파친코. Book 1. 고향. 한수의 고백.
한수는 일본으로 사업상 출장을 떠났다. 출장 갔다가 돌아올 때는 깜짝 선물을 사 오겠다고 약속했다. 선자는 한수와의 결혼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한수의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한수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엄마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수와 함께 살기 위해서 오사카로 가야 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선자는 하루 종일 지금쯤 한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생활할 한수의 삶을 상상할 때면 선자는 자신이 어딘가 다른 세상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영도도, 부산도, 심지어는 조선도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엄마와 아버지밖에 모르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것이 선자가 아는 전부였다.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도리었다. 선자는 생리가 멈추었을 때, 한수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선자는 한수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집에 시계가 있었더라면 시침은 물론이고 분침까지 다 헤아렸을 것이다. 한수가 돌아온날 아침, 선자는 서둘러 시장으로 달려갔다. 선자가 중매상 사무실을 지나칠 때 한수가 선자를 발견했고,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내일 아침에 해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하숙인들이 일하러 나가자마자 선자는 재빨리 빨랫감을 모아들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정장에 멋들어진 외투를 걸친 채 바위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자는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숙녀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수에게 다가갔겠지만, 오늘은 급한 마음에 두 팔로 빨래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다름질해서 한수가 있는 데로 갔다.
"오빠야, 오셨네예."
"말했잖니. 난 항상 돌아온다고."
"오빠야 보니까 너무 좋아예."
"어떻게 지냈니?"
선자는 한수를 다시 만나서 기뻤다.
"너무 빨리 가지는 마시소."
"눈 감아 봐." 선자는 한수에 말을 순순히 따랐다.
한수가 선자의 오른손에 묵직한 뭔가를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 느낌이 났다.
"오빠야 거랑 똑같네예." 선자가 눈을 뜨고 말했다. 한수는 영국에서 물 건너왔다는 금으로 된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선자의 시계는 그와 비슷한 크기에 은으로 만들어 도금한 것이라고 한수가 설명했다. 얼마 전 선자는 시침과 분침을 구별해서 시계 보는 법을 한수에게 배웠다. 한수의 시계는 조끼 단추 구멍에 끼워진 T자형 막대에 금색 체인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걸 눌러봐.". 한수가 시계 뚜껑을 누르자 뚜껑이 열리며 꼬불꼬뿔한 숫자가 적힌 우아하고 하얀 시계가 보였다.
"요래 아름다운 건 한 번도 못 봤어예, 오빠. 고맙십니더. 정말로 고마워예. 오데서 사셨어예?" 선자는 이런 것을 파는 가게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돈만 있으면 못 살 게 없어. 런던에서 주문한 거야. 이제 너도 우리가 만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거야."
선자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한수가 선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선자를 끌어당겼다.
"보고 싶었어."
선자는 시선을 내리깔고 저고리 앞섶을 열어젖혔다. 선자는 전날 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며 온몸 구석구석을 새빨개질 정도로 깨끗하게 씻었다.
한수가 선자의 손에서 시계를 가져가서는 선자의 가는 속옷 끈으로 고리 모양을 만들어 시계를 묶였다.
"다음에 오사카에 가면 시계에 맞는 체인이랑 핀을 주문해야겠다."
한수가 속삭이며 선자의 속옷을 내렸다. 한수는 드러난 가슴에 입술을 갖다대고 선자의 긴 치마도 벗겨냈다.
처음으로 한수와 사랑을 나눴을 때 선자는 다급하게 성욕을 채우려는 그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좀 무덤덤해졌다. 한수와는 벌써 수차례 관계를 가졌고 처음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선자는 한수와 사랑을 나눌 때,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한수의 거친 몸짓뿐만 아니라 한수의 부드러운 애무가 좋았다. 근엄했던 그의 얼굴표정이 아이처럼 순진하게 변하는 모습도 좋았다.
마침내 한수의 몸이 떨리며 정사가 끝나자 전자는 저고리를 다시 챙겨 입었다. 몇 분 후면 한수는 일하러 돌아가고 선자는 하숙집 빨래를 해야 했다.
"저 얼라를 가졌어예."
한수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네, 그런 것 같아예."
"그렇구나."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선자도 두 사람이 함께 맺은 결실을 자랑스러워하며 빙긋 따라 웃었다.
"선자야."
"오빠야?" 선자가 한수의 심각한 얼굴을 살폈다.
"난 오사카에 아내와 애가 셋 있어."
선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가 천천히 닫혔다. 한수 오빠가 다른 누군가와 있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널 돌봐 줄게. 하지만 너와 결혼할 수는 없어. 난 이미 일본에서 혼인신고를 했거든. 내가 하는 일이랑 관련된 문제라서 좀 복잡해." 한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거야. 마침 너한테 좋은 집을 찾아 줄 생각이었어."
"집이예?"
"네 엄마 집 근처에. 아니 네가 원한다면 부산에 집을 사 줄 수도 있어. 곧 겨울이 올 거고, 그런 밖에서 만날 수도 없잖아." 한수가 웃었다. 한수가 선자의 팔을 쓰다듬었지만 선자는 움찔거렸다.
"그래서 오사카에 간 거였어예? 거기서 . . ."
"철들기도 전에 한 결혼이야. 딸만 셋이고." 한수가 말했다.
한수의 딸들은 영리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잘한 것도 없었다. 그저 사랑스럽고 단순한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는 꽤 예쁘장해서 시집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두 아이는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연약했다. 게다가 신경질적인 아이들 엄마와 똑 닮아 비쩍 말랐다.
"어쩌면 네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일지도 몰라." 한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어떠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수는 지갑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냈다.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너랑 아이 옷도 사야겠다."
선자는 돈을 노려보기만 할 뿐 받지 않았다. 선자의 손은 옆구리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반면 한수는 점점 더 흥분에 휩싸여 목소리를 높였다.
"기분이 좀 달라? 어때?" 한수가 선자의 배에 손을 올리고 기쁘게 웃었다.
한수의 아내는 한수보다 두 살이 많았다. 두 사람은 세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몇 년 동안 아이들 갖지 못했고, 관계도 거의 가지지 않았다. 한수에게는 최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있었지만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선자가 아이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선자에게 작은 집을 사 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큰 집을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선자는 젊은 데다 아이도 잘 낳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있으리라. 한수는 조선에 자기 여자와 아이들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한수는 이제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성욕은 줄어들지 않았다. 선자 곁을 떠나 있을 때는 선자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기도 했다. 한수는 남자가 오직 한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은 거추장스러운 관습에 불과했고 남자라면 많은 여자들을 거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는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리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한수는 선자가 정말로 좋았다. 선자의 탄탄한 몸,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아주 좋았다. 선자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자신을 흠모하는 순진한 선자의 마음에 기대고 싶었다. 선자와 함께 지내고 나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지내면 다시 소년이 되는 모양이었다.
한수가 선자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지만 선자는 돈을 받지 않았다. 지폐들이 선자의 손에서 떨어져 흩어지며 나라갔다. 한수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돈을 주웠다.
"뭐 하는 거니?" 한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선자는 한수의 시선을 피했다. 한수가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한수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자의 마음이 한수의 목소리를 아예 거부하는 것 같았다. 모든 말이 그냥 시끄러운 잡음처럼 들렸다. 일본에 아내와 세 아이가 있다고? 선자는 한수가 항상 자기에게 솔직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컸다. 깜짝 선물을 주겠다고 하더니 시계를 사다 주었다. 그렇지만 선자가 한수를 위해 준비한 이 깜짝 선물은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소식이 되고 말았다. 지금껏 한수가 이 여자 저여자를 희롱하고 다니는 제비 같은 남자라고 의심할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아내와도 사랑을 나누었을까? 내가 대체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 선자는 알고 싶었다. 아름다울까? 친절할까? 선자는 더 이상 한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선자는 자신의 하얀 무명 치마를 응시했다. 닳고 닳은 치맛단은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여전히 얼룩덜룩한 잿빛이었다.
"선자야, 언제 네 엄마를 만나 이야기 할까? 이제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어? 아기가 생긴 건 아시니?" "엄마의?"
"그래, 말씀드렸?"
"언지예. 말 안했어예." 선자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숙집을 사 줄게. 그럼 너랑 어머니는 더 이상 하숙생을 받지 않아도 되고, 넌 그냥 아이만 돌보면 돼.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있어. 네가 좋다면 훨씬 큰 집을 사 줄게."
선자는 자기 발치에 놓인 빨래 더미가 햇살을 받아 불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오늘 해야 할 일거리였다. 선자는 자신이 남자가 원하는 대로 몸을 내준 어리석은 시골 처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자는 한수가 탁 트인 해변에서 자신을 안으려 할 때도 거부하지 않았다. 늘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몸을 맡겼다. 자신이 한수를 사랑하는 만큼 한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수와 결혼을 하지 못하는 한 자기는 평생 손가락질 받는 매춘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배 속의 아이는 성도 없는 사생아가 되고, 엄마의 하숙집도 자기 때문에 온갖 욕을 먹으며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배 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선자처럼 진짜 아버지를 가지지는 못할 터였다.
"다시는 오빠야를 안 만날 낍니더."
"뭐라고?" 한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한수가 두 팔로 선자의 양어깨를 잡았지만 선자가 어깻짓으로 그 팔을 떨쳐냈다.
"한 번만 더 날 만지면 고마 죽어버릴 낍니더. 내가 창녀 같은 짓을 했다니 . . ."
선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아름다운 두 눈과 찢어진 입술, 구부정하고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버지는 긴 하루 일을 끝내고 나면 마른 옥수수 속대와 나뭇가지로 인형을 만들어주고 했다. 주머니 속에 동전이라도 남아 있으면 선자에게 엿을 사다 주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못 보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은 묵묵히 일만 하면서 자신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아껴주셨는데 선자는 그런 부모님을 배신한 꼴이 되고 말았다.
"선자야, 착한 우리 애기야, 왜 그렇게 화를 내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한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와 아이를 돌봐 줄게. 한 가정을 더 꾸릴 만한 돈과 시간쯤은 충분히 있어. 난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널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널 더 깊이 사랑하는 것 같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할 수 있다면 너와 결혼할 거야. 넌 내가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야. 넌 나와 닮았어. 우리 아이들은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라나겠지. 하지만 아내와 세 딸을 버릴 수는 . . . "
"그런 얘기는 한번도 안 했잔아예. 난 오빠야가..."
한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는 한 번도 자기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선자였다. 선자의 입에서는 단 한 번도 거절이나 반대하는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다시는 오빠야를 안 볼낍니더."
한수가 선자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선자가 소리쳤다. "저리 가이소. 오빠야랑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예."
한수는 멈춰서서 선자를 바라보았다. 선자는 속에서 들끓는 화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이제 한수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빠야는 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아예. 전혀에." 선자는 갑자기 진실을 깨달았다. 선자는 한수가 자기 부모님처럼 자신을 아껴주기를 기대했다. 부모님은 딸이 가정 있는 남자의 첩이 되는 것보다는 정직한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랄 게 틀림없었다.
"아가 딸아면 우째 할 껍니꺼? 제 아버지처럼 태어나면예? 기형인 발에 윗입술이 갈라져서 태어나면예?"
"그래서 결혼을 안 한 거니?" 한수가 이마를 찌푸렸다.
선자 엄마는 선자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자 엄마에게 딸을 달라고 하지 않았고, 하숙인들도 선자를 놀리기만 할 뿐 결혼 상대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임신을 하고 나서야 선자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기형인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매년 먼저 죽은 오빠들의 무덤을 찾아갔다. 엄마는 그중에서 아버지처럼 입술이 갈라져 태어난 아이도 있다고 했다. 한수는 건강한 아이를 기대하고 있겠지?" 그런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를 버릴까? "그래서 나와 결혼하려고 한 거지? 정상인과는 결혼할 수 없어서?"
한수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선자는 빨래 보따리를 움켜쥐고 집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