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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 Min Jin Lee ⎟ 파친코 ⟨2018 번역, 이미정 옮김⟩, 「좋은 소식 (1942년 5월)」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좋은 소식 (1942년 5월)」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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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좋은 소식.

1942년 5월.

백노아는 이 동네의 여덟 살 먹은 여타 아이들과는 달랐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는 반드시 뺨이 빨갛게 될 때까지 얼굴을 문질러 씻었다.

또 올리브기름 세 방울을 검은 머리에 발라 문지르고 나서

엄마한테 배운 대로 이마 옆으로 빗어 넘길 줄도 알았다.

아침으로 보리죽과 된장국을 먹고 나면 입을 깨끗이 헹구고

작고 둥근 손거울로 하얀 이를 살펴봤다.

엄마는 아무리 피곤해도 전날 밤에 노아의 셔츠를 다려놓았고,

깨끗하게 다린 옷을 차려입은 노아는

부유한 동네 출신의 중산층 일본인 아이처럼 보였다.

씻지도 않은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빈민가 아이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학교에서는 산수와 쓰기를 잘했고, 기민한 운동신경과 달리기 실력으로 체육 교사를 놀라게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책상을 정리하고 교실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지나치게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보다 거친 아이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남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저녁 먹을 때까지 밖에서 노는 동네 아이들과 달리

바로 집으로 들어가 숙제를 했다.

엄마와 큰엄마가 식당에서 김치를 담기 시작하자

늘 집 안에서 떠돌던 김치 익는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노아는 더 이상 마늘 소년이라는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와 큰엄마가 식당에서 요리한 음식을 집으로 가져오는 덕분에

오히려 동네의 다른 집들보다 음식 냄새가 훨씬 덜 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식당에서 가져오는 구운 고기와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노아에게도 비밀이 있었지만 평범한 비밀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노아는 백노아가 아니라 보쿠 노부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반 친구들은 한국 성을 일본식으로 읽는 노아의 이름이 평범한 일본 이름과는 달라서

노아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노아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노아는 대부분의 일본인 아이들보다도 더 일본어를 잘 말하고 잘 썼다.

교실에서는 부모님이 태어난 한반도 이야기가 나올까 봐 두려워 했고,

혹시라도 선생님이 조선 식민지 이야기를 할 때면

종이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노아는 또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고,

2년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급 과제로 가족을 소개해야 했을 때는 아버지가 비스킷 공장에서

감독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이 큰아버지인 요셉이 노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때도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와 큰엄마,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지에게도 밝히지 않은 가장 큰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온화하고 친절한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갇히게 내버려 뒀다.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는 달랐다.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늦은 봄날 오후였다. 노아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엄마가 일하러 가기 전에 준비해놓은 간식을 발견했다.

간식은 가족들이 식사를 할 때나 노아가 숙제를 할 때 쓰는

나지막한 밥상에 놓여 있었다.

노아가 목이 말라서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노아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 근처 바닥에 지저분한 몰골의 비쩍 마른 남자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왼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채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비명을 질러야 할까?

노아가 고민했다. 누가 도와주러 올까?

엄마와 큰엄마, 큰아버지는 일하러 가셨고, 처음에 비명을 질렀을 때도

아무도 노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문 옆에 쓰러진 거지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지저분한 데다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지만 도둑일 수도 있었다.

큰아버지는 음식이나 귀중품을 훔치려고

집 안으로 쳐들어오는 강도와 도둑을 조심하라고 했다.

노아의 바지 주머니에는 50센이 들어 있었다.

활쏘기 에 관한 그림책을 사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이제 남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남자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거지의 얼굴은 빨간 상처와 검은 딱지로 뒤덮여 있었다.

노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을 꺼냈다.

남자에게 발을 잡힐까 봐 두려워서

남자의 손 근처에 동전을 던져놓을 수 있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노아는 부엌으로 뒷걸음쳐서 뒷문으로 달려 나가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남자의 울음소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노아는 남자의 회색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옷이 찢어지고 더러웠지만

학교 교장선생님이 입는 짙은 색 정장과 비슷해 보였다.

"노아야, 아버지야." 남자가 말했다.

노아는 숨을 헉 들이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니?" 아버지 목소리였다.

노아가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는 식당에 있어요."

노아가 대답했다.

"어디에 있다고?" 이삭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가서 엄마를 데려올게요. 아버지 괜찮아요?"

노아는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남자는 아버지가 분명했다.

벗겨진 피부로 덮인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부드럽게 빛나는 눈 빛은 아버지의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배가 고픈 건지도 몰랐다.

옷 아래의 어깨뼈와 팔꿈치가 삐쩍 말라 날카로운 나뭇가지 처럼 보였다.

"뭔가 먹고 싶어요, 아버지?"

노아가 엄마가 준비해 놓고 간 간식을 가리켰다.

수수와 보리로 만든 주먹밥 두 개가 있었다.

이삭이 소년의 걱정 어린 태도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아들, 물 좀 갖다줄래?"

노아가 부엌에서 차가운 물 한 컵을 갖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사이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요! 물 가져 왔어요!

물 마셔요, 아버지," 노아가 소리쳤다.

이삭이 눈을 뜨고는 노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피곤해서 그래.

잠 좀 자야겠구나."

"아버지, 물 드세요." 노아가 컵을 들어 올렸다.

이삭은 고개를 들고 물을 쭉 들이키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노아는 몸을 숙여서 아버지의 입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는 숨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아버지의 약한 숨소리를 들은 노아는 자기 베개를 가져와 아버지의 부스스한 잿빛 머리 아래에 받쳐주었다.

묵직한 이불도 갖다가 덮어주고는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노아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 아니요' 말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예의 바른 소년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자수는 창고에서 자고 있었다.

두 살배기 아기 모자수는 잠에서 깼을 때는

식당을 헤집고 다녔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천사 같았다.

김창호 사장은 선자의 아이들에 관해서 불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만화책을 사주었고,

이따금씩 뒤쪽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모자수를 돌봐주었다.

"어머나." 한창 일을 하던 경희가 고개를 들었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노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리니? 괜찮니?

곧 일이 끝날 거야. 배고파?"

경희는 노아가 혼자 있는게 외로워서 왔나 보다 생각하면서 먹을 것을 챙겨 주려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픈 것 같아요.

우리집 바닥에서 자고 있어요."

노아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면서 아무 말도 않던 선자가

젖은 양손을 앞치마에 황급히 닦았다.

"가도 될까예? 지금 가도 되겠습니꺼?"

선자는 여태껏 한 번도 일찍 나선 적이 없었다.

"내가 남아서 일을 끝낼게. 어서 가. 서둘러.

나도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

선자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선자는 거리를 반쯤 달려 내려가다가 소리쳤다.

"모자수!" 노아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큰엄마가 집으로 데려올 거예요."

노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선자는 노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고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제 우리 노아가 엄마를 달래주는구나.

우리 아들, 다 컸네, 다 컸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가는 아이를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선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자의 아버지는 항상 선자에게 뭔가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심지어는 선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습관적으로 선자의 정수리를 만지거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른 부모가 그랬다면 딸을 망치는 짓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질책을 받았겠지만 선자의 불과 아버지를 질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의 아버지는 정상적인 팔다리를 갖고 태어난 선자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선자의 아버지는 선자가 걷고, 말하고,

간단한 암산을 하는 것만 봐도 즐거워했다.

이제는 떠나고 안 계시지만

선자는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와 다정한 말을 소중한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선자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귀하게 보살핌을 받았다.

선자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노아에게도 그런 보살핌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선자는 아이들을 주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 바쳐 감사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면

한 번도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이란 그 자체가 기쁨임을 가르쳐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선자에게도 자식들은 그녀의 기쁨이 되었다.

"아버지가 마이 아파 보이더나?" 선자가 물었다.

"아버지인지도 몰라봤어요.

아버지는 항상 깨끗하고 깔끔하게 옷을 입었잖아요. 그렇죠?"

선자는 이미 오래전에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의 어른들이

조선인 죄수들은 죽을 때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다고

선자에게 경고했었다.

그래야 죄수들이 감옥에서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죄수들은 구타당하고,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제공받지 못해서 약해졌다.

오늘 아침에도 선자는 음식과 한 주 동안 입을 깨끗한 속옷을 감옥에 갖다주었다.

아버지인지도 몰라봤다는 노아의 말대로라면

교회의 어른들 말이 맞았다.

이삭은 그동안 선자가 가져다준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들과 함께 거리를 따라 걷는 선자의 눈에 행인들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삭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선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삭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돈을 벌고 모을 생각만 했지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나 최악의 경우,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들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으니

노아는 분명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오늘 간식은 먹었나?" 선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한테 주고 왔어요."

두 사람은 사탕가게에서 행복하게 사탕을 먹으며 나오는 학생들 몇몇을 지나쳤다.

노아는 그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엄마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노아가 아는 아이들이었지만 노아의 친구들은 아니었다.

"숙제 있나?"

"네, 하지만 집에 가서 할 거예요, 엄마."

"엄마가 걱정할 게 없네."

선자는 잡고 있는 노아의 온전한 다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아가 튼튼하게 자라줘서 고마웠다.

선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삭은 바닥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선자는 이삭에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눈구멍과 광대뼈를 덮은 피부가 얼룩덜룩하고 거무죽죽하게 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거의 하얗게 새어버렸다.

이삭은 형 요셉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삭은 이제 선자를 오명에서 구해주었던 그 아름답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선자는 이삭에 신발과 구멍 난 양말을 벗겼다.

갈라 지고 쓸린 발바닥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왼발의 새끼발가락은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엄마." 노아가 말했다.

"응."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큰아버지를 불러와야 해요?"

"그래" 선자가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마무라 씨가 큰아버지를 일찍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데이.

큰아버지가 못 나오시면 엄마가 아버지랑 같이 있다고 말씀드리거레이.

큰아버지가 회사에서 곤란해지면 안 된데이. 알겠지?"

노아는 문을 꼭 닫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틈에 새어 들어온 미풍에 이삭이 깨어났다.

눈을 뜬 이삭이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알아보았다.

"여보." 이삭이 말했다.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구만예.

당신이 돌아와서 을매나 기쁜지 몰라예."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한때 새하얗게 반짝였던 치아는 까맣게 변했거나 빠지고 없었다.

아랫니는 전체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예."

"어제 교회 관리인도 죽고, 목사님도 돌아가셨어. 나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선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가로저었다.

"드디어 집에 왔구나.

매일 집에 가는 생각을 했어.

한시도 빼놓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래서 이렇게 집에 돌아왔나 봐.

그동안 당신

무척 힘들었지."

이삭이 선자를 다정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선자는 소매로 얼굴을 닦 (recording error; audio skips over remaining sentence).

비스킷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노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갓 구운 밀 비스킷의 맛있는 냄새가

노아를 반겨주었다.

문 옆에서 비스킷을 포장하는 소녀 한명이

조선어로 노아의 키가 정말 크다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요셉의 등을 가리켰다.

요셉은 비스킷 기계 모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쉽도록

널찍한 터널처럼 설계되어 있어서 길고 좁았다.

공장 사장은 눈에 확 띄도록 비스킷 기계를 자기 사무실 옆에 두었고,

컨베이어 벨트도 나란히 줄서서 일하는 노동자들 쪽으로 움직이도록 설치했다.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쓰고

펜치로 점검판 안쪽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요셉은 공장 감독관이자 정비공이었다.

묵직한 기계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공장에서는 잡담이 금지되어 있기는 했지만

소녀들이 속삭인다 해도 그 소리가 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이 빠르고 정돈을 잘한다고 해서 고용된 40명의 소녀들은

얇은 밀 비스킷 스무 개를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상자들은 중국에 있는 군 장교들에게 보내졌다.

비스킷 두 개를 부서뜨릴 때마다 봉급에서 1센이 깎이기 때문에

소녀들은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비스킷을 포장해야 했다.

부서진 비스킷을 한입 베어 먹기만 해도 당장 해고되었다.

하루 업무가 끝나면 가장 어린 소녀가

부서진 비스킷을 천을 깔아놓은 바구니에 모은 다음 작은 봉지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부서진 비스킷들은 시장에서 할인가로 팔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마무라가

실수 없이 비스킷 상자를 가장 많이 포장한 소녀들에게 저렴하게 팔았다.

요셉은 부서진 비스킷을 절대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일하는 소녀들에게는 부서진 비스킷 부스러기도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장주인 시마무리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주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게 녀 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의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해지만,

다음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탓에 시마무라는 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이야기를 요셉과 나눈 지

일 년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또다시 노아를 보게 되자 화가 났다.

그래서 큰아버지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소년을

못 본 척하며 신문을 쫙 펼쳐들었다.

노아의 가벼운 손길을 깜짝 놀란 요셉이 뒤를 돌아 보았다.

"아니, 노아구나. 그런데 지금 여기 왜 왔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뭐? 정말이니?"

"지금 집에 갈 수 있어요?" 노아가 물었다.

조그맣게 벌어진 노아의 입이 요셉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셉은 아무 말 없이 안경을 벗고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큰아버지는 엄마가 큰엄마나 김 사장님 에게 물어 봐야 하듯이

자신이 선생님에게 화장실에 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하듯이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었다.

가끔씩 바깥 날씨가 좋을 때 노아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오사카 만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오사카 만에 가본 적이 있었던

노아는 언제나 그곳에 다시 한 번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괜찮아 보이든?"

요셉이 노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 머리카락이 회색이 됐어요.

몸도 더러워줬고요.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큰아버지가 올 수 없어도 괜찮다고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저 큰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 알았다. 정말 좋은 소식이구나."

요셉은 시마무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마무라는 신문을 들고 읽는 척했지만 자신을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은 절대 지금 그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경희가 기절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시마무라는 교회 관리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이삭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경찰이 찾아와서 요셉을 신문했고, 시마무라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마다 시마무라는 요셉이 모법적인 조선인이라고 옹호했다.

만일 지금 요셉이 집으로 간다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찰 신문이라도 당하게 될 때

제대로 된 신원증명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노아야, 내 말 잘 들어. 세 시간도 안 돼서 일이 다 끝날 거야.

그 후에 서둘러 집에 갈게.

일을 끝마치지 않고 지금 나갈 수는 없어.

일이 끝나는 대로 너보다 더 빨리 달려서 집으로 가마. 엄마한테 곧 갈 거라고 전해줘.

아버지가 물어보면

큰아버지가 곧 올 거라고 말할."

노아는 큰아버지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일을 끝내야 해, 노아야. 그러니까 넌 집으로 달려가. 알았지?"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다시 쓰고 몸을 돌렸다.

노아는 출입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달콤한 비스킷 향기가 출입문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노아는 그 비스킷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하나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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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좋은 소식.

1942년 5월.

백노아는 이 동네의 여덟 살 먹은 여타 아이들과는 달랐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는 반드시 뺨이 빨갛게 될 때까지 얼굴을 문질러 씻었다.

또 올리브기름 세 방울을 검은 머리에 발라 문지르고 나서

엄마한테 배운 대로 이마 옆으로 빗어 넘길 줄도 알았다.

아침으로 보리죽과 된장국을 먹고 나면 입을 깨끗이 헹구고

작고 둥근 손거울로 하얀 이를 살펴봤다.

엄마는 아무리 피곤해도 전날 밤에 노아의 셔츠를 다려놓았고,

깨끗하게 다린 옷을 차려입은 노아는

부유한 동네 출신의 중산층 일본인 아이처럼 보였다.

씻지도 않은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빈민가 아이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학교에서는 산수와 쓰기를 잘했고, 기민한 운동신경과 달리기 실력으로 체육 교사를 놀라게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책상을 정리하고 교실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나서 지나치게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보다 거친 아이들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남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저녁 먹을 때까지 밖에서 노는 동네 아이들과 달리

바로 집으로 들어가 숙제를 했다.

엄마와 큰엄마가 식당에서 김치를 담기 시작하자

늘 집 안에서 떠돌던 김치 익는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노아는 더 이상 마늘 소년이라는 놀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와 큰엄마가 식당에서 요리한 음식을 집으로 가져오는 덕분에

오히려 동네의 다른 집들보다 음식 냄새가 훨씬 덜 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식당에서 가져오는 구운 고기와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노아에게도 비밀이 있었지만 평범한 비밀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노아는 백노아가 아니라 보쿠 노부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반 친구들은 한국 성을 일본식으로 읽는 노아의 이름이 평범한 일본 이름과는 달라서

노아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노아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다.

노아는 대부분의 일본인 아이들보다도 더 일본어를 잘 말하고 잘 썼다.

교실에서는 부모님이 태어난 한반도 이야기가 나올까 봐 두려워 했고,

혹시라도 선생님이 조선 식민지 이야기를 할 때면

종이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노아는 또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고,

2년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급 과제로 가족을 소개해야 했을 때는 아버지가 비스킷 공장에서

감독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이 큰아버지인 요셉이 노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때도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와 큰엄마,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지에게도 밝히지 않은 가장 큰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온화하고 친절한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갇히게 내버려 뒀다.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는 달랐다.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The secret wish he had more secretly was that he wanted to become a Japanese.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늦은 봄날 오후였다. 노아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엄마가 일하러 가기 전에 준비해놓은 간식을 발견했다.

간식은 가족들이 식사를 할 때나 노아가 숙제를 할 때 쓰는

나지막한 밥상에 놓여 있었다.

노아가 목이 말라서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노아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 근처 바닥에 지저분한 몰골의 비쩍 마른 남자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왼쪽 팔꿈치로 바닥을 짚은 채 일어나 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비명을 질러야 할까?

노아가 고민했다. 누가 도와주러 올까?

엄마와 큰엄마, 큰아버지는 일하러 가셨고, 처음에 비명을 질렀을 때도

아무도 노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문 옆에 쓰러진 거지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지저분한 데다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였지만 도둑일 수도 있었다.

큰아버지는 음식이나 귀중품을 훔치려고

집 안으로 쳐들어오는 강도와 도둑을 조심하라고 했다.

노아의 바지 주머니에는 50센이 들어 있었다.

활쏘기 에 관한 그림책을 사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이제 남자는 흐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남자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거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상태가 나빠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거지의 얼굴은 빨간 상처와 검은 딱지로 뒤덮여 있었다.

노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동전을 꺼냈다.

남자에게 발을 잡힐까 봐 두려워서

남자의 손 근처에 동전을 던져놓을 수 있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노아는 부엌으로 뒷걸음쳐서 뒷문으로 달려 나가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남자의 울음소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노아는 남자의 회색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옷이 찢어지고 더러웠지만

학교 교장선생님이 입는 짙은 색 정장과 비슷해 보였다.

"노아야, 아버지야." 남자가 말했다.

노아는 숨을 헉 들이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니?" 아버지 목소리였다.

노아가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는 식당에 있어요."

노아가 대답했다.

"어디에 있다고?" 이삭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가서 엄마를 데려올게요. 아버지 괜찮아요?"

노아는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남자는 아버지가 분명했다.

벗겨진 피부로 덮인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부드럽게 빛나는 눈 빛은 아버지의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배가 고픈 건지도 몰랐다.

옷 아래의 어깨뼈와 팔꿈치가 삐쩍 말라 날카로운 나뭇가지 처럼 보였다.

"뭔가 먹고 싶어요, 아버지?"

노아가 엄마가 준비해 놓고 간 간식을 가리켰다.

수수와 보리로 만든 주먹밥 두 개가 있었다.

이삭이 소년의 걱정 어린 태도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아들, 물 좀 갖다줄래?"

노아가 부엌에서 차가운 물 한 컵을 갖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사이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요! 물 가져 왔어요!

물 마셔요, 아버지," 노아가 소리쳤다.

이삭이 눈을 뜨고는 노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피곤해서 그래.

잠 좀 자야겠구나."

"아버지, 물 드세요." 노아가 컵을 들어 올렸다.

이삭은 고개를 들고 물을 쭉 들이키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노아는 몸을 숙여서 아버지의 입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는 숨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아버지의 약한 숨소리를 들은 노아는 자기 베개를 가져와 아버지의 부스스한 잿빛 머리 아래에 받쳐주었다.

묵직한 이불도 갖다가 덮어주고는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지만 노아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예, 아니요' 말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예의 바른 소년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자수는 창고에서 자고 있었다.

두 살배기 아기 모자수는 잠에서 깼을 때는 When a two-year-old baby wakes up

식당을 헤집고 다녔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천사 같았다.

김창호 사장은 선자의 아이들에 관해서 불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장난감과 만화책을 사주었고,

이따금씩 뒤쪽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모자수를 돌봐주었다.

"어머나." 한창 일을 하던 경희가 고개를 들었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노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땀을 이렇게 흘리니? 괜찮니?

곧 일이 끝날 거야. 배고파?"

경희는 노아가 혼자 있는게 외로워서 왔나 보다 생각하면서 먹을 것을 챙겨 주려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픈 것 같아요.

우리집 바닥에서 자고 있어요."

노아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면서 아무 말도 않던 선자가

젖은 양손을 앞치마에 황급히 닦았다.

"가도 될까예? 지금 가도 되겠습니꺼?"

선자는 여태껏 한 번도 일찍 나선 적이 없었다.

"내가 남아서 일을 끝낼게. 어서 가. 서둘러.

나도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

선자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선자는 거리를 반쯤 달려 내려가다가 소리쳤다.

"모자수!" 노아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큰엄마가 집으로 데려올 거예요."

노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선자는 노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고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제 우리 노아가 엄마를 달래주는구나.

우리 아들, 다 컸네, 다 컸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가는 아이를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선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자의 아버지는 항상 선자에게 뭔가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줬다.

심지어는 선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습관적으로 선자의 정수리를 만지거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른 부모가 그랬다면 딸을 망치는 짓이라고

동네 사람들의 질책을 받았겠지만 선자의 불과 아버지를 질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의 아버지는 정상적인 팔다리를 갖고 태어난 선자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선자의 아버지는 선자가 걷고, 말하고,

간단한 암산을 하는 것만 봐도 즐거워했다.

이제는 떠나고 안 계시지만

선자는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와 다정한 말을 소중한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선자는 어린 여자아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귀하게 보살핌을 받았다.

선자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노아에게도 그런 보살핌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선자는 아이들을 주신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 바쳐 감사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면

한 번도 그녀에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이란 그 자체가 기쁨임을 가르쳐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선자에게도 자식들은 그녀의 기쁨이 되었다.

"아버지가 마이 아파 보이더나?" 선자가 물었다.

"아버지인지도 몰라봤어요.

아버지는 항상 깨끗하고 깔끔하게 옷을 입었잖아요. 그렇죠?" My father always wore clean and neat clothes. Yes?"

선자는 이미 오래전에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Seon-ja nodded, repeating that he had already predicted the worst a long time ago.

교회의 어른들이

조선인 죄수들은 죽을 때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다고

선자에게 경고했었다.

그래야 죄수들이 감옥에서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

죄수들은 구타당하고,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제공받지 못해서 약해졌다.

오늘 아침에도 선자는 음식과 한 주 동안 입을 깨끗한 속옷을 감옥에 갖다주었다.

아버지인지도 몰라봤다는 노아의 말대로라면

교회의 어른들 말이 맞았다.

이삭은 그동안 선자가 가져다준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들과 함께 거리를 따라 걷는 선자의 눈에 행인들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삭이 돌아오면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선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삭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돈을 벌고 모을 생각만 했지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나 최악의 경우,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들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를

아들에게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으니

노아는 분명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오늘 간식은 먹었나?" 선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한테 주고 왔어요."

두 사람은 사탕가게에서 행복하게 사탕을 먹으며 나오는 학생들 몇몇을 지나쳤다.

노아는 그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숙였지만 엄마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노아가 아는 아이들이었지만 노아의 친구들은 아니었다.

"숙제 있나?"

"네, 하지만 집에 가서 할 거예요, 엄마."

"엄마가 걱정할 게 없네."

선자는 잡고 있는 노아의 온전한 다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아가 튼튼하게 자라줘서 고마웠다.

선자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이삭은 바닥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선자는 이삭에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눈구멍과 광대뼈를 덮은 피부가 얼룩덜룩하고 거무죽죽하게 했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거의 하얗게 새어버렸다.

이삭은 형 요셉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삭은 이제 선자를 오명에서 구해주었던 그 아름답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선자는 이삭에 신발과 구멍 난 양말을 벗겼다.

갈라 지고 쓸린 발바닥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왼발의 새끼발가락은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엄마." 노아가 말했다.

"응."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큰아버지를 불러와야 해요?"

"그래" 선자가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마무라 씨가 큰아버지를 일찍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데이.

큰아버지가 못 나오시면 엄마가 아버지랑 같이 있다고 말씀드리거레이.

큰아버지가 회사에서 곤란해지면 안 된데이. 알겠지?"

노아는 문을 꼭 닫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틈에 새어 들어온 미풍에 이삭이 깨어났다.

눈을 뜬 이삭이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알아보았다.

"여보." 이삭이 말했다.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구만예.

당신이 돌아와서 을매나 기쁜지 몰라예."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한때 새하얗게 반짝였던 치아는 까맣게 변했거나 빠지고 없었다.

아랫니는 전체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예."

"어제 교회 관리인도 죽고, 목사님도 돌아가셨어. 나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선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가로저었다.

"드디어 집에 왔구나.

매일 집에 가는 생각을 했어.

한시도 빼놓지 않고 말이야.

아마 그래서 이렇게 집에 돌아왔나 봐.

그동안 당신

무척 힘들었지."

이삭이 선자를 다정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선자는 소매로 얼굴을 닦 (recording error; audio skips over remaining sentence).

비스킷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노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갓 구운 밀 비스킷의 맛있는 냄새가

노아를 반겨주었다.

문 옆에서 비스킷을 포장하는 소녀 한명이

조선어로 노아의 키가 정말 크다고 속삭였다.

그러고는 요셉의 등을 가리켰다.

요셉은 비스킷 기계 모터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공장은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쉽도록

널찍한 터널처럼 설계되어 있어서 길고 좁았다.

공장 사장은 눈에 확 띄도록 비스킷 기계를 자기 사무실 옆에 두었고,

컨베이어 벨트도 나란히 줄서서 일하는 노동자들 쪽으로 움직이도록 설치했다.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쓰고

펜치로 점검판 안쪽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요셉은 공장 감독관이자 정비공이었다.

묵직한 기계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공장에서는 잡담이 금지되어 있기는 했지만

소녀들이 속삭인다 해도 그 소리가 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이 빠르고 정돈을 잘한다고 해서 고용된 40명의 소녀들은

얇은 밀 비스킷 스무 개를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상자들은 중국에 있는 군 장교들에게 보내졌다.

비스킷 두 개를 부서뜨릴 때마다 봉급에서 1센이 깎이기 때문에

소녀들은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비스킷을 포장해야 했다.

부서진 비스킷을 한입 베어 먹기만 해도 당장 해고되었다.

하루 업무가 끝나면 가장 어린 소녀가

부서진 비스킷을 천을 깔아놓은 바구니에 모은 다음 작은 봉지에 넣어 포장했다.

이렇게 포장한 부서진 비스킷들은 시장에서 할인가로 팔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마무라가

실수 없이 비스킷 상자를 가장 많이 포장한 소녀들에게 저렴하게 팔았다.

요셉은 부서진 비스킷을 절대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아주 적은 돈을 받고 일하는 소녀들에게는 부서진 비스킷 부스러기도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장주인 시마무리는 비품실 크기만 한 유리로 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 덕분에 소녀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일을 잘 못하는 여자아이를 발견하면

요셉을 불러 들여서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라고 시켰다.

두 번 주의를 받으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해도 주급을 받지 못했다.

시마무라는 파란 천으로 장정한 원장에다 소녀들의 이름을 기입해놓고

그 옆에 경고 횟수를 기록해두었다.

감독관인 요셉은 직원들에게 벌을 주기 싫어했지만

시마무라는 그것이 조선인의 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시마무라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인의 효율성과 치밀함,

높은 조직 수준으로 다스린다면 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고 발전해서

저 무도한 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다른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신이 아주 마음씨 좋고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흐리멍덩하게 일을 한다고 지적하면

시마무라는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무능과 태만을 혐오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들이 뭘 배우게 녀 고 반박했다.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딱 한 번 공장의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시마무라는 그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한 일 년 전에 경희가 열병으로 시장에서 기절을 하자

노아가 요셉을 데리러 왔었다.

시마무라는 마지못해서 요셉에게 아내를 돌봐주라고 해지만, Shimamura reluctantly tells Joseph to take care of his wife.

다음날 아침 다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요셉에게 말했다.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 두개를 유능한 정비공 없이

어떻게 돌릴 수 있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셉의 아내가 또 아프거나 하면 그때는

동네 사람이나 다른 가족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요셉은 근무 시간에 공장을 떠날 수 없었다.

비스킷 생산은 전쟁 명령이었고, 전쟁 명령은 즉각 수행해야 했다.

남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 모든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탓에 시마무라는 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이야기를 요셉과 나눈 지

일 년이 겨우 지났을 뿐인데

또다시 노아를 보게 되자 화가 났다.

그래서 큰아버지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소년을

못 본 척하며 신문을 쫙 펼쳐들었다.

노아의 가벼운 손길을 깜짝 놀란 요셉이 뒤를 돌아 보았다.

"아니, 노아구나. 그런데 지금 여기 왜 왔어?"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뭐? 정말이니?"

"지금 집에 갈 수 있어요?" 노아가 물었다.

조그맣게 벌어진 노아의 입이 요셉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셉은 아무 말 없이 안경을 벗고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큰아버지는 엄마가 큰엄마나 김 사장님 에게 물어 봐야 하듯이

자신이 선생님에게 화장실에 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하듯이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었다.

가끔씩 바깥 날씨가 좋을 때 노아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오사카 만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오사카 만에 가본 적이 있었던

노아는 언제나 그곳에 다시 한 번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괜찮아 보이든?"

요셉이 노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버지 머리카락이 회색이 됐어요.

몸도 더러워줬고요.

엄마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큰아버지가 올 수 없어도 괜찮다고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저 큰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 알았다. 정말 좋은 소식이구나."

요셉은 시마무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마무라는 신문을 들고 읽는 척했지만 자신을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장은 절대 지금 그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경희가 기절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시마무라는 교회 관리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이삭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경찰이 찾아와서 요셉을 신문했고, 시마무라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마다 시마무라는 요셉이 모법적인 조선인이라고 옹호했다.

만일 지금 요셉이 집으로 간다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찰 신문이라도 당하게 될 때

제대로 된 신원증명을 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노아야, 내 말 잘 들어. 세 시간도 안 돼서 일이 다 끝날 거야.

그 후에 서둘러 집에 갈게.

일을 끝마치지 않고 지금 나갈 수는 없어.

일이 끝나는 대로 너보다 더 빨리 달려서 집으로 가마. 엄마한테 곧 갈 거라고 전해줘.

아버지가 물어보면

큰아버지가 곧 올 거라고 말할."

노아는 큰아버지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일을 끝내야 해, 노아야. 그러니까 넌 집으로 달려가. 알았지?"

요셉은 안전 보호 안경을 다시 쓰고 몸을 돌렸다.

노아는 출입문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달콤한 비스킷 향기가 출입문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노아는 그 비스킷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하나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