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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의 책읽는 밤 (Another Audio Book Collection), [KOR/ENG SUB] 트바로티 김호중 책_김호중 자서전_김호중 빈체로 스토리_굴곡진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 트바로티로 태어나다_김호중 인생 이야기ㅣ에세이ㅣ오디오북ㅣ책읽어주는남자

[KOR/ENG SUB] 트바로티 김호중 책_김호중 자서전_김호중 빈체로 스토리_굴곡진 삶의 고비고비를 넘어 트바로티로 태어나다_김호중 인생 이야기ㅣ에세이ㅣ오디오북ㅣ책읽어주는남자

* 이 영상은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 홍보의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일부만 낭독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 마이크와 선글라스만 있으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를 불렀고,

누가 시키면 더 신나서 노래를 불렀으며, 누가 박수를 쳐주면 더더욱 흥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는 것이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노래를 불러 먹고살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땐 잘한다 소리를 종종 들었지만 노래가 업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 부르는 게 좋았고, 노래 듣는 것이 좋았다. 세상 밖으로

내 인생은 고3 때 '스타킹' 출연으로 크게 바뀌었다.

먼저 한양대학교 음악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존경하던 고성현 교수님의 클래스에 배정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학교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디서부터인가 꼬이기 시작했다. 입학 전에 연주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스타킹' 출연 이후 여기저기에서 많이 불러주었던 것이다.

이게 좀 화근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학내에 파다하게 돌았다고 한다. 학교에 차를 몰고 왔다는 둥, 학교 앞에서 차 사고를 냈다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다. 심지어 ‘김호중은 정통 클래식 하는 애가 아니라 딴따라다'라는 말까지 있다고 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괜히 물을 흐리는 것 같아서 조용히 휴학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대학교에 와서도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씩이나 당하고 살기엔 억울했고, 억울한 마음을 꾹 참자니 종잡을 수 없이 문제가 커질 것 같았다. 그 무렵 독일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지 과감히 유학을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서수용 선생님께도 의논을 드렸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분이셨다.

내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셨다. “어디를 가도 넌 잘 해낼 거다. 그만한 실력이 있지 않냐.” 해외 유학은 누구에게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내게 그런 기회가 왔으니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보냈다면 독일 유학 제안을 거절하거나 보류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학기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대학 캠퍼스를 걸어보기만 했을 뿐 학교 식당에서 밥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 고성현 교수님과는 학교 밖에서 따로 뵈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학교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고, 나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선배들은 교수님과 계속 제자로 만나야 할 사이였다.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생긴 일이라 레슨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이해해주시고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건네주셨다. 독일 유학을 결정했는데 당장 여권이 없었다.

당시 가장 빨리 나오는 곳이 영등포구청이라고 해서 바로 신청했다. 여권이 나온 날이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갓 나온 여권을 가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스타킹>으로 인연을 맺었던 피디님께서 기자회견처럼 방송을 해주셨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받은 콩쿠르 상금과 후원금은 서수용 선생님께서 차곡차곡 모아주셨다.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을 때의 후원금부터, 김천에 사신다는 어느 남자분이 학교 수위실에 맡기고 가신 후원금 등 또 다른 많은 후원금도 잘 모아주셨다.

거기에 본인의 사비까지 더해서 졸업하던 날 통장을 주셨다.

유학 떠나기 전엔 이런 농담도 하셨다.

“비행기 안에선 신발 벗는 거 알지?”

“에이, 선생님도,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호기롭게 말했지만 정작 비행기를 타니 통로가 너무 깨끗해서 정말로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다가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있는데 스튜어디스분이 오셔서 자리로 안내해 주시고 슬리퍼도 내주셨다. 알고 보니 비행기를 늦게 탔던 나를 비즈니스석 손님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 신기하기만 했다.

좌석에 모니터가 있었는데 리모컨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리모컨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을 그때는 뭔가를 물어보는 게 괜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영화 한 편을 못 보고 빈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보았다. 심심함에 몸을 뒤틀던 나는 가방에 넣어온 책이 생각났다.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에 짐을 많이 꾸릴 것도 없어 가방은 단출했다. 필요한 건 독일에 도착해서 사면 된다고 생각했다.

기내에 갖고 간 가방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박지성 선수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이었다.

영화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지성 선수가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일인 양 빠져들었다.

앞으로의 일이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박지성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도전을 멈추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다.

순식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을 한 권이나 읽었는데도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또다시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의 책을 읽은 덕분인지 곧 도착할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다. ‘숙소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어떤 스승님들께 배우게 될까?'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 배우기 어려우면 어쩌지?' 평소 한식을 좋아했기에 밥 먹는 일도 걱정되었다. 독일에도 한국 식당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미처 못 했기에 매일 소시지만 먹는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어떤 친구들을 만날지 설레기도 했다.

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한겨울이라 상당히 추웠다.

짐부터 찾아야 하는데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앞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아주머니들 다섯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옳지, 저분들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졸졸 따라가서 출입국 입구에 늘어서 있는 줄에 섰다. “패스포트 플리즈.” “패, 패스……?” “패스포트 플리즈.” 패스포트라는 말을 알아듣긴 했는데 그 말의 뜻이 여권인 줄 몰랐던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엉뚱하게 지갑을 꺼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갑을 패스포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지갑에 이어 가방까지 보여주었지만 계속 거부를 당하니 나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쪽은 그쪽대로 내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 손짓으로 옆에 서 있으라고 했다. 제법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이 다 줄어들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독일 땅을 밟기도 전에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란해 하고 있는데 우연히 한국 스튜어디스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분들은 바로 상황을 알아봐주셨는데 알고 보니 아주머니들을 따라갔던 곳은 프랑크푸르트 입국장이 아니라 로마나 밀라노 등지로 경유하는 곳이었다. 겨우 해결이 되어 짐을 찾으러 가니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남아 빙빙 돌고 있었다. 홀로 낯선 곳에 떨어진 내 신세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는 독일이었다.

내 손으로 여권을 만들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살면서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는데 막연히 꿈꾸던 유학 생활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나는 두 발에 힘을 주고 힘차게 한 걸음씩 걸어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 옛날 서러운 눈물을 이 악물고 참으며 대문을 힘겹게 넘어가던 걸음이 아니었다. 새롭게 펼쳐질 인생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걸음이었다. 공항 문턱을 넘어가는 그 걸음은 내 인생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네, 독일 유학까지 떠나게 되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저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패스포트라는 말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경험들, 그리고 처음에 대학에 진학했을 때 여러 겪었던 문제들,

마침내 독일 떠나게 된 그런 날들, 모두 다 이 책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계속 읽어볼게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첫 번째 팬 미팅을 마치고 나니 소중한 분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수천 번 감사하다고 말해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분. 서수용 선생님이다.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고, 더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내가 방황할 때도 내가 잘될 때도 내 옆에서 내 편이 되어 무조건 나를 믿어주셨다. 내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선생님은 나를 늘 지켜봐 주시면서도 간섭은 일체 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셨다. 그러지 마라고 하거나 이쪽이 더 좋다고 날 밀지도 않으셨다. 예를 들어 내가 물이 가득 찬 컵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다고 해보자. 누군가는 걱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야, 조심해. 그러다가 쏟아져.”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너 이렇게 하면 안 돼. 그거 쏟아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쏟아지면 다시 주워 담으면 되지. 설령 못 담더라도 괜찮아”라고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쏟아질 것 같으면 대부분은 “그거 쏟아진다. 꽉 잡아!”라고 할 텐데 선생님은 쏟아질 때까지 그냥 놔두셨다.

선생님의 이런 태도가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느껴졌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라고 질책하면서 “너도 손해 보고 나도 손해 보는 일을 왜 하냐. 이거 치우려면 얼마나 고생인데”라고 짜증을 내기 일쑤지만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다. 그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쏟아지면 어때. 괜찮아. 치우면 되지. 대신 네가 그랬으니 네가 책임지면 되는 거다.” 이런 태도를 선생님을 통해 배우면서 사람을 믿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흔히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겠냐고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선생님의 몇 마디 말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말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두 사람만의 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넌 평생 노래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선생님에게 듣는 순간 종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머릿속에서 큰 종이 울리는 듯했다.

내가 지금까지 노래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건 그때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다. 학창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약간 무식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경험도 안 해보고 걱정하는 걸 싫어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찍어 먹어봐야 알았던 것 같다. 똥은 어떤 것이며 된장이 어떤 것인지, 그 둘이 뭐가 어떻게 다르고 좋고 나쁜지 지혜롭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님은 눈물보다 땀을 흘리는 일의 가치를 알게 해주셨다. 눈물은 누군가의 동정을 살지 모르지만, 땀을 정직한 보상과 결과를 가져다준다. 물론 상처를 입는 날도 있지만 그 상처를 상처로 끝나고 둘 것인지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 곁을 떠난 건 스무 살이 되어서였다. 혼자 해나가야 했다. 누군가는 무작정 준비 없이 독일 유학을 가서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마저도 이것저것 몸소 겪어보았으니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설령 직진이 아니라 곡선을 만들면서 지름길을 두고 다소 돌아가더라도 인생을 허비했다거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스푼 경험했다면 한 스푼 떠먹은 기억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해주셨던 수많은 말은 내게 밥보다 보약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고3 때 목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낙담했던 적이 있었다.

노래를 정말 잘 부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던 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시계에 비유한다면 태어난 시각이 0시다. 열아홉 살 너는 이제 겨우 새벽 5시나 6시야. 아침 5시에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있겠냐?” “있을 수도 있죠.”

“그래. 있을 수 있지.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 “인생이라는 학교도 마찬가지야. 지금 넌 새벽 5시니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기도 힘든 시간이지 않냐. 학교를 가려고 일어났어도 신발도 아직 안 신은 시각인데 목이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하지. 시간이 지나면 다 때가 와.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힘든 순간이면 이 말이 떠올랐다.

서른을 앞두고 답답함이 컸을 때도 ‘아직 아침 9시쯤 된 거지. 목이 잠겨 있는 시각이지'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서 충실히 노래를 불렀다.

<미스터트롯>을 준비할 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괜찮겠냐고 걱정하셨다. 트롯은 성악과 너무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그런데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주셨다.

“호중아, 내가 말한 거 그거 취소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성악을 가르친 선생이지만 음악을 가르친 선생 아니냐. 네가 그 음악에서 놀려고 하고, 그 음악을 네가 하려고 하는데 내가 시선을 너무 좁게 봤던 것 같다.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열심히 멋지게 한번 하고 와라.” 그러고는 경연 내내 누구보다 든든하게 응원해주셨다. 심지어 “뽕기를 너무 뺀 거 아니냐. 뽕끼를 더 넣어야 하지 않냐”는 말씀까지 하셨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혹여 망설임이 생길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먼 곳을 보시면서도 절대로 내 앞에 서서 나를 잡아당기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뒤에서 뒷짐 지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마냥 보고 있기만 하지도 않으셨다. 때로는 반 발짝 뒤에 때로는 반 발짝 앞에 계시면서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셨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무엇을 가장 자랑하고 싶냐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말할 것이다. “서수용 선생님이 저의 선생님인 게 가장 큰 자랑입니다.”

여담이지만, 선생님께서 제일 많이 해준 칭찬이 내가 귀가 좋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땐 ‘목이 발달되어야 하는데 귀가 발달되어 있으면 어떡하노?'라는 걱정도 몰래 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큰 칭찬이었는지 동원이를 보면서 알았다. 동원이는 귀가 정말 좋다.

귀가 좋으니 노래도 잘 부르고 흉내도 잘 낸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출중하다.

나와 동갑인 영웅이는 형으로 부르고 나는 삼촌으로 부르는 건 못마땅하지만 앞으로도 동원이의 든든한 삼촌이 되어줄 생각이다.

선생님을 떠올리면 내가 큰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나의 전부를 수용하고 받아주는 넉넉한 바다.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물질로도, 심적으로도 적극 지원해주셨다. 혹시라도 그동안 받은 상금이 축날까 모두 모아주신 데다가 당신의 사비까지 얹어서 나를 지원해주신 분이다. 세상에 누가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셨다. 내게 노래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말해주신 분. 선생님의 재산을 거덜 내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선생님, 제가 노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앞으로도 선생님의 재산 축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어릴 때부터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 집에 있던 오래된 라디오는 가끔 지지직거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 주파수를 맞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음질이 깨끗해졌다. 이제는 라디오 주파수 맞출 일이 없다.

하지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기억은 내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내 인생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지금 어디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걸까.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그냥 참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음악이 나오는 곳의 주파수를 끈질기게 찾는 걸까.

주파수를 찾는 시간은 더 정확한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거나 내 라디오는 왜 이렇게 고물이냐고 짜증을 내봤자 소용이 없다. 그저 세심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에 묵묵히 집중하면 어느 순간 탁 하며 걸림 쇠가 풀리듯 깨끗하고 선명한 음악이 나오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묵묵히 인내하며 노래를 불러온 시간은 어찌 보면 나만의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었다. 깨끗하게 잡히는 다른 주파수에서 좋은 노래들이 흘러나와도 내가 찾는 주파수가 아니라면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빨리 잘 찾는 것은 나의 장점이 아니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묵묵히 견디고 인내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섬세하게 맞춰보는 게 내 성미와 맞았다. 그래서 그 시간을 기다렸고, 그 세월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멋 부리지 않고 말하자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잘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도달했냐고 묻는다면 주파수를 맞추는 노력을 매일매일 해왔다는 말이 가장 진실한 대답이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다. 내 인생을 내가 원해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과 말에 취약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주파수에만 나 자신을 맞추고 살아갈 수는 없다.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내 주파수를 찾는 일을 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노래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가 미묘하게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말 저 말에 갈팡질팡하다가는 라디오가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말로만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고 직접 땀을 흘리며 1밀리미터씩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손의 감각이 민감해지고, 귀가 열리면서 ‘아, 여기구나!'하고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세 끼 밥을 먹은 날은 삶이 참 살 만하다고 느꼈다.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살아 있으니 괜찮다며 내게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버티고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래를 꿈꾸면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나이는 상관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10대이든 취직준비를 하는 20대이든 전직을 꿈꾸는 30대이든 삶을 막막하게 버티고 있는 40대이든 나이 듦을 느끼기 시작하는 50대이든 은퇴를 앞두고 있는 60대이든 처음으로 노년의 시간을 겪고 있는 70대이든 혹은 그 이상의 나이이든 간에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일 것이다.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삶이 있고, 각자에게 딱 맞는 삶의 주파수가 있다고 믿는다. 나도 처음부터 나만의 주파수를 찾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주파수를 꾸준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유언이라는 시작점이 있었던 덕분이다.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할머니의 이 말은 얕은 재주나 부리며 살아가란 뜻이 아니다. 비굴하게 고개 숙여 받는 박수를 추구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타인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진실한 것이다.

남의 주파수를 내 것인 양 착각하지 않고 내 주파수를 찾을 때까지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유언을 나는 이렇게 알아듣고 살아왔고 살아가려 한다. “남들에게 박수를 받으려면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너의 인생을 살아가라. 힘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공중으로 뻗어나가는 소리처럼 빛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할미가 하늘에서 꼭 지켜볼 거다. 단디 행동하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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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I don't know when I started singing. いつから歌を歌い始めたのか分からない。 Não sei quando comecei a cantar. Ne zaman şarkı söylemeye başladığımı bilmiyorum.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장난감 마이크와 선글라스만 있으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From a very young age, I was happier than anyone in the world with a toy microphone and sunglasses. Desde muito jovem, eu era mais feliz do que qualquer outra pessoa no mundo com um microfone de brinquedo e óculos de sol. Çok küçük yaşlardan itibaren oyuncak bir mikrofon ve bir güneş gözlüğü ile dünyadaki herkesten daha mutluydum.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래를 불렀고, I sang even if no one told me , and if Eu cantei sem ninguém me dizer, Kimse ona söylemeden şarkı söyledi,

누가 시키면 더 신나서 노래를 불렀으며, 누가 박수를 쳐주면 더더욱 흥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someone told me , I was more excited to sang, and if someone clapped me, I was even more excited and sang. Quando alguém mandava, eu cantava com mais emoção, e quando alguém aplaudia, eu cantava com mais emoção. Biri ona söylediğinde ve hatta biri alkışladığında daha da heyecanla şarkı söylüyordu. 노래라는 것이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When the song flowed out of my body, the cells of my whole body seemed to move alive. Şarkı içimden akıp giderken vücudumdaki her hücre canlanmış gibiydi. 그럼에도 노래를 불러 먹고살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Nevertheless, I didn't think I would sang a song and lived. Yine de, yaşamak için şarkı söyleyeceğimi hiç düşünmemiştim.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땐 잘한다 소리를 종종 들었지만 When I went to karaoke with my friends and sang songs, I often heard that I was good at singing, but I Arkadaşlarımla karaokeye gidip şarkı söylediğimde, genellikle iyi olduğum söylenir ama değilimdir. 노래가 업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never imagined that the song would be a karma. Şarkı söylemenin benim kaderim olacağını hiç düşünmemiştim.

그저 노래 부르는 게 좋았고, 노래 듣는 것이 좋았다. I just liked to sing, and I liked listening to songs. 세상 밖으로 Outside the world, Dünyanın dışında

내 인생은 고3 때 '스타킹' 출연으로 크게 바뀌었다. my life changed drastically to appearing in'stockings' in high school. Lisedeyken "Stocking" filminin oyuncu kadrosuna girmemle hayatım büyük ölçüde değişti.

먼저 한양대학교 음악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First, he entered Hanyang University's College of Music as a scholarship student. İlk olarak, Hanyang Üniversitesi Müzik Fakültesi'ne burslu öğrenci olarak kabul edildi. 더군다나 존경하던 고성현 교수님의 클래스에 배정되기까지 했다. Furthermore, I was even assigned to the class of Professor Seong-Hyun Ko, whom I respected. Dahası, hayran olduğum Profesör Ko Sung-hyun tarafından verilen bir sınıfa atandım. 그런데 학교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디서부터인가 꼬이기 시작했다. But before I even started my school life, I started getting twisted somewhere. Ama daha okula başlamadan işler ters gitmeye başladı. 입학 전에 연주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There were many requests to attend the concert before enrollment. Kabulden önce resitallere katılmak için çok sayıda talep geldi.

'스타킹' 출연 이후 여기저기에서 많이 불러주었던 것이다. After appearing in'Stockings', he sang a lot here and there. Stocking'de göründüğümden beri orada burada çokça söylediğim bir şarkı.

이게 좀 화근이 되었던 것 같다. I think this has become a bit of a fire. Bu durum biraz heyecan yaratmışa benziyor.

당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학내에 파다하게 돌았다고 한다. At that time, it is said that strange rumors about me circulated in the school. 학교에 차를 몰고 왔다는 둥, 학교 앞에서 차 사고를 냈다는 둥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퍼져 있었다. There were groundless stories spreading, such as driving to school and having a car accident in front of the school. Okula arabayla gelen ve okulların önünde arabalara çarpan insanlarla ilgili asılsız hikayeler vardı. 심지어 ‘김호중은 정통 클래식 하는 애가 아니라 딴따라다'라는 말까지 있다고 했다. They even said that'Kim Ho-jung is not a classic classic, but a different one'. Hatta bazı insanların 'Kim Hojoong otantik bir klasik çalgıcı değil, bir takipçi' dediğini söyledi. 미꾸라지 한 마리가 괜히 물을 흐리는 것 같아서 조용히 휴학을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One loach seemed to be cloudy, so I thought about taking a quiet leave of absence. Hatta bir çoprabalığı gereksiz yere suları bulandırıyormuş gibi hissettiğim için sessizce izne ayrılmayı bile düşündüm. 고등학교 때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대학교에 와서도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Even in high school, it was difficult to endure, but when I came to university, I couldn't bear it when I faced the same situation. Lisedeyken bununla başa çıkmak yeterince zordu ama üniversiteye gelip kendimi aynı durumda bulduğumda artık dayanamadım. 두 번씩이나 당하고 살기엔 억울했고, 억울한 마음을 꾹 참자니 종잡을 수 없이 문제가 커질 것 같았다. It was unfair to live after being hit twice, and it seemed that the problem would grow beyond control by holding on to the unfair mind. Katlanılması çok zordu ve hayal kırıklığımı sürdürürsem sorunun daha da kötüye gideceğini biliyordum. 그 무렵 독일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Around that time, the opportunity to study in Germany came. O sıralarda Almanya'da yurtdışında eğitim alma fırsatı doğdu.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지 과감히 유학을 갈 것인지 고민을 했다. I thought about whether to continue attending school or boldly to study abroad. Okulda mı kalsam yoksa yurtdışında mı okusam bilemedim. 서수용 선생님께도 의논을 드렸다. We also discussed with Su-Yong Seo. Bu konuyu Suyong Seo ile de görüştüm.

선생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분이셨다. The teacher knew me better than anyone else. Beni herkesten daha iyi tanıyordu.

내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셨다. He fully understood the feeling of being unable to make decisions easily. Kararsızlığımı anladı. “어디를 가도 넌 잘 해낼 거다. 그만한 실력이 있지 않냐.” “Wherever you go, you'll do well. Isn't that good enough.” "Nereye gidersen git, başaracaksın. Bunun için yeterince iyisin." 해외 유학은 누구에게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Studying abroad was not an easy opportunity for everyone. Yurtdışında eğitim almak herkese kolay gelen bir fırsat değildir. 감사하게도 내게 그런 기회가 왔으니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hankfully, that opportunity came to me, so I thought it would be nice to go. Neyse ki fırsat ayağıma kadar geldi ve ben de bunu değerlendirebileceğimi düşündüm.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보냈다면 독일 유학 제안을 거절하거나 보류했을지도 모르겠다. If you had spent time adjusting to school life and enjoying the joy of learning, you might have rejected or withheld your offer to study in Germany. Okulda başarılı olsaydım ve öğrenmekten keyif alsaydım, Almanya'da eğitim alma teklifimi reddedebilir ya da beklemeye alabilirdim. 하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But my college life wasn't like that. Ama benim üniversite deneyimim böyle değildi.

나는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I quit school after worrying. Uzun süre düşündükten sonra okulu bıraktım.

1학기라도 다니고 싶었지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I wanted to go to the first semester, but it felt meaningless. Bir dönem gitmek istedim ama anlamsız geldi. 대학 캠퍼스를 걸어보기만 했을 뿐 학교 식당에서 밥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 I just walked around the college campus and couldn't eat at the school cafeteria. Sadece üniversite kampüsümde dolaştım ve kafeteryada hiç yemek yemedim. 고성현 교수님과는 학교 밖에서 따로 뵈었다. I met with Professor Seong-Hyun Ko outside the school. Profesör Ko Sung-hyun ile okul dışında görüştüm.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I couldn't raise my head because of my regret, but it was difficult to explain the phrases. Başımı kaldıramadığımı söylediğim için üzgünüm ama bunu açıklamak zordu. 어쨌든 학교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고, 나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Anyway, school problems were something I had to solve, and I didn't want anything complicated to happen because of me. Zaten okul meselesiyle uğraşmak zorunda kalacaktım ve bunun benim yüzümden karmaşık hale gelmesini istemiyordum. 더욱이 선배들은 교수님과 계속 제자로 만나야 할 사이였다. Moreover, the seniors had to continue meeting with the professor as disciples. Dahası, son sınıf öğrencilerinin profesörleriyle birlikte öğrenci olmaya devam etmeleri bekleniyordu.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생긴 일이라 레슨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건 너무나 아쉬웠지만 It happened before I even started the class officially, so it was very regretful that I didn't take the lesson properly, but the Bu olay ben daha resmi olarak öğretmenliğe başlamadan önce gerçekleşti, bu yüzden tam bir ders alamadığım için çok hayal kırıklığına uğradım. 교수님은 감사하게도 이해해주시고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건네주셨다. professor thanked me for understanding and told me to work hard. Profesör sağ olsun beni anladı ve elimden gelenin en iyisini yapmamı söyledi. 독일 유학을 결정했는데 당장 여권이 없었다. I decided to study in Germany, but I didn't have a passport right away. Almanya'da okumaya karar verdim ama hemen bir pasaportum yoktu.

당시 가장 빨리 나오는 곳이 영등포구청이라고 해서 바로 신청했다. At the time, the fastest place to come out was Yeongdeungpo-gu Office, so I applied right away. O sırada en hızlısı Yeongdeungpo-gu Ofisi'ydi, ben de hemen başvurdum. 여권이 나온 날이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The day the passport was issued was the day of the flight. Pasaportumun çıktığı gün uçağa bindiğim gündü.

갓 나온 여권을 가지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I went to Incheon Airport with my fresh passport. Yeni pasaportumla Incheon Havaalanı'na gittim.

<스타킹>으로 인연을 맺었던 피디님께서 기자회견처럼 방송을 해주셨다. PD, who had a relationship with , broadcasted like a press conference. <Starking> ile ilişkisi olan P.D., basın toplantısı gibi bir yayın yaptı. 고등학생 시절 내가 받은 콩쿠르 상금과 후원금은 서수용 선생님께서 차곡차곡 모아주셨다. When I was a high school student, Su-Yong Seo collected the prize money and donations for the contest I received. Lisedeyken, tüm yarışma kazançlarım ve sponsorluklarım öğretmenim Suyong Seo tarafından toplanırdı.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을 때의 후원금부터, 김천에 사신다는 어느 남자분이 학교 수위실에 맡기고 가신 후원금 등 From the donation when he received the Korea Talent Award, a man who lives in Gimcheon left it to the school guard room and Kore Yetenek Ödülü'nü kazandığımda yapılan bağıştan tutun da Gimcheon'da bir adamın okulun hademesinin odasına bıraktığı bağışa kadar. 또 다른 많은 후원금도 잘 모아주셨다. gave a lot of other donations, such as donation.

거기에 본인의 사비까지 더해서 졸업하던 날 통장을 주셨다. He added his own personal expenses and gave him a bankbook on the day of graduation.

유학 떠나기 전엔 이런 농담도 하셨다. Before leaving for study, he also joked like this.

“비행기 안에선 신발 벗는 거 알지?” “Did you know you take off your shoes on the plane?”

“에이, 선생님도,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Ah, teacher, don't lie. Are you sure I don't even know that much?” 호기롭게 말했지만 정작 비행기를 타니 통로가 너무 깨끗해서 정말로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다가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있는데 I said it happily, but when I got on the plane, the aisle was so clean that I really had to take off my shoes, but I was taking off my shoes, and the 스튜어디스분이 오셔서 자리로 안내해 주시고 슬리퍼도 내주셨다. stewardess came and guided me to the seat and gave me slippers. 알고 보니 비행기를 늦게 탔던 나를 비즈니스석 손님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As it turned out, he misunderstood that I was a business class guest, who was on a late flight.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 신기하기만 했다. It was the first time I was born, so it was amazing.

좌석에 모니터가 있었는데 리모컨이 따로 있었다. There was a monitor in the seat, but there was a remote control.

그런데 리모컨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But I couldn't figure out how to operate the remote control.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면 물어보면 될 것을 그때는 뭔가를 물어보는 게 괜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서 If I think about it now, I can ask if I don't know. At that time, I was embarrassed to ask something, and my pride was hurt 그 오랜 시간 동안 영화 한 편을 못 보고 빈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보았다. 심심함에 몸을 뒤틀던 나는 가방에 넣어온 책이 생각났다. Twisting with boredom, I remembered the book I had put in my bag.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에 짐을 많이 꾸릴 것도 없어 가방은 단출했다. I didn't have much to pack, so I didn't have much to pack, so I took out my bag. 필요한 건 독일에 도착해서 사면 된다고 생각했다. I thought that all I needed was to buy it when I arrived in Germany.

기내에 갖고 간 가방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There was a book in the bag I took on board. 박지성 선수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이었다. It was Park Ji-sung's autobiography, “Unstoppable Challenge”.

영화 대신 책을 읽기 시작했다. I started reading books instead of movies.

박지성 선수가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일인 양 빠져들었다. While reading a book about how Park Ji-sung started playing football and did not stop challenging, I fell in love with it as if it were my job.

앞으로의 일이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박지성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I was thrilled and afraid of the future, but as Park Ji-sung did, 나도 도전을 멈추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다. I also pledged not to stop challenging.

순식간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I read the whole book in no time.

책을 한 권이나 읽었는데도 도착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Even after reading a book, there was still a long time left to arrive. 또다시 화면에 뜬 작은 비행기 그림만 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Again, I had to look at the small plane picture on the screen. 그러나 박지성 선수의 책을 읽은 덕분인지 곧 도착할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다. However, thanks to reading Park Ji-Sung's book, I imagined one or another about my life in Germany, which will soon arrive. ‘숙소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어떤 스승님들께 배우게 될까?' 'What kind of people are in the accommodation?' 'Which Masters will you learn from?'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데 배우기 어려우면 어쩌지?' 'What if I can't speak German but it's difficult to learn?' 평소 한식을 좋아했기에 밥 먹는 일도 걱정되었다. Because I usually liked Korean food, I was also worried about eating. 독일에도 한국 식당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미처 못 했기에 매일 소시지만 먹는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I didn't think there would be a Korean restaurant in Germany, so I seriously thought about what to do if I only eat sausage every day. 어떤 친구들을 만날지 설레기도 했다. I was excited to see what kind of friends I would meet.

많은 생각과 다양한 감정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After a lot of thoughts and various emotions, I arrived at Frankfurt Airport after twists and turns. 한겨울이라 상당히 추웠다. It was quite cold because it was in the middle of winter.

짐부터 찾아야 하는데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I had to find my luggage first, but I couldn't figure out where to go. 비행기에서 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앞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As I got off the plane and looked around, I heard Korean in front of me. 한국 아주머니들 다섯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Five Korean aunts were talking.

‘옳지, 저분들을 따라가면 되겠구나.' 'That's right, I can follow them.'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졸졸 따라가서 출입국 입구에 늘어서 있는 줄에 섰다. Unnoticed, he followed him from behind and stood in the line at the entrance to the immigration. “패스포트 플리즈.” “패, 패스……?” “패스포트 플리즈.” “Passport Please.” “L, pass… … ?” “Passport Please.” 패스포트라는 말을 알아듣긴 했는데 그 말의 뜻이 여권인 줄 몰랐던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엉뚱하게 지갑을 꺼냈다. I understood the word passport, but I didn't know that the meaning of the word was a passport, but I stood farther and pulled out my wallet.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갑을 패스포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When I was younger, I remembered when my dad called my wallet a passport. 지갑에 이어 가방까지 보여주었지만 계속 거부를 당하니 나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I showed my wallet and even my bag, but as I kept getting rejected, I was also frustrated. 그쪽은 그쪽대로 내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 손짓으로 옆에 서 있으라고 했다. They asked me to stand next to me with a hand gesture because I couldn't understand what I was saying. 제법 길게 늘어서 있던 줄이 다 줄어들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I had to stand still until the lengthy lines were all shortened. 독일 땅을 밟기도 전에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났다. Before I even stepped on the German soil, I felt a cold sweat, wondering what would happen.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란해 하고 있는데 우연히 한국 스튜어디스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I was in trouble without knowing what to do, but the Korean stewardesses accidentally found me and approached me. 그분들은 바로 상황을 알아봐주셨는데 알고 보니 아주머니들을 따라갔던 곳은 프랑크푸르트 입국장이 아니라 로마나 밀라노 등지로 경유하는 곳이었다. They immediately checked the situation, but it turned out that the place where they followed the aunts was not the Frankfurt arrival hall, but via Rome or Milan. 겨우 해결이 되어 짐을 찾으러 가니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 가방만 덩그러니 남아 빙빙 돌고 있었다. When it was finally settled, I went to find my luggage, and only my bag remained on the conveyor belt, and it was spinning around. 홀로 낯선 곳에 떨어진 내 신세 같아서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I felt funny and sad because I felt like I was alone in a strange place. 그러나 여기는 독일이었다. But this was Germany.

내 손으로 여권을 만들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곳이었다. It was a place where I made a passport with my own hands and took a flight by myself.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노래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Above all, I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continue the song I wanted to do.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살면서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못했는데 막연히 꿈꾸던 유학 생활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Until just a few years ago, I couldn't even imagine that a day like this would come, but my vague dream of studying abroad was a reality. 나는 두 발에 힘을 주고 힘차게 한 걸음씩 걸어 공항 밖으로 나갔다. I stepped out of the airport, step by step with strength and strength on both feet. 그 옛날 서러운 눈물을 이 악물고 참으며 대문을 힘겹게 넘어가던 걸음이 아니었다. It wasn't a step that I had struggled to cross the gate while holding back the sad tears in the old days. 새롭게 펼쳐질 인생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걸음이었다. It was a powerful step toward a new life. 공항 문턱을 넘어가는 그 걸음은 내 인생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준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That step across the threshold of the airport was a meaningful step that brought me out of the world when I think about it throughout my life.

네, 독일 유학까지 떠나게 되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저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요. Yes, I think the author's feelings on the plane leaving for study in Germany are conveyed intact.

물론 패스포트라는 말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경험들, Of course, the experiences I had suffered because I didn't understand the word passport at first, the 그리고 처음에 대학에 진학했을 때 여러 겪었던 문제들, problems I had when I first went to college , and the

마침내 독일 떠나게 된 그런 날들, 모두 다 이 책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요. days I finally left Germany, all seem to be immersed in this book. 그럼 계속 읽어볼게요. Then I will continue reading.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The teacher's grace was like the sky, so after

첫 번째 팬 미팅을 마치고 나니 소중한 분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the first fan meeting, the face of a precious person came to mind again. 수천 번 감사하다고 말해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분. 서수용 선생님이다. Even if you say thank you thousands of times, you always feel like you're not good enough. This is Su-Yong Seo.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고, 더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Throughout my life, I received a lot of grace, and I was loved so much that I could not add it. 내가 방황할 때도 내가 잘될 때도 내 옆에서 내 편이 되어 무조건 나를 믿어주셨다. When I wandered, even when I was well, He stood by my side and trusted me unconditionally. 내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I learned from my teacher that I am a person who gives faith to someone, and that I can be such a person. 선생님은 나를 늘 지켜봐 주시면서도 간섭은 일체 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셨다. The teacher always watched me, but did not interfere at all and just believed. 그러지 마라고 하거나 이쪽이 더 좋다고 날 밀지도 않으셨다. He didn't tell me not to do that or push me to say that this is better. 예를 들어 내가 물이 가득 찬 컵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다고 해보자. For example, let's say I'm holding a cup full of water narrowly. 누군가는 걱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야, 조심해. 그러다가 쏟아져.” Someone would have said this with anxiety. “Hey, be careful. Then it pours.”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너 이렇게 하면 안 돼. But the teacher never said that. “You can't do this. 그거 쏟아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가 아니라 If it spills, what do you want to do?” rather than

“괜찮아. 쏟아지면 다시 주워 담으면 되지. 설령 못 담더라도 괜찮아”라고 하시는 분이었다. “It's okay. When it pours, you can pick it up and put it back. Even if I can't put it, it's okay.” 뭔가 쏟아질 것 같으면 대부분은 “그거 쏟아진다. 꽉 잡아!”라고 할 텐데 선생님은 쏟아질 때까지 그냥 놔두셨다. If something seems to be pouring, most of them say, “That's pouring. Hold it tight!” but the teacher left it until it poured out.

선생님의 이런 태도가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느껴졌다. This attitude of the teacher was felt as a belief in one person in me. 내가 실수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라고 질책하면서 When I make a mistake, others say, “Look. "What did I say?" he rebuked and said, “너도 손해 보고 나도 손해 보는 일을 왜 하냐. 이거 치우려면 얼마나 고생인데”라고 짜증을 내기 일쑤지만 "Why do you lose and I lose too?" How hard it is to get rid of this,” he said, but the 선생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셨다. 그저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teacher never did that. He just said this. “쏟아지면 어때. 괜찮아. 치우면 되지. 대신 네가 그랬으니 네가 책임지면 되는 거다.” “What if it spills? OK. You can clean it up. Instead, you did it, so you are responsible for it.” 이런 태도를 선생님을 통해 배우면서 사람을 믿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As I learned this attitude through a teacher, I also learned that it is very important to believe in people. 흔히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겠냐고 의문을 갖는다. People often ask whether their life will change with just one word. 그런데 나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 But I actually had such an experience.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선생님의 몇 마디 말로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말이다. In less than 10 seconds, a few words from the teacher have completely changed my life.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두 사람만의 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It is said that lovers in love hear only the two of them. 그런데 나는 “넌 평생 노래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선생님에게 듣는 순간 종소리를 들었다. But the moment I heard from my teacher, "You are a person who can live with songs for a lifetime," I heard the bell. 정말로 머릿속에서 큰 종이 울리는 듯했다. There really seemed to be a big bell ringing in my head.

내가 지금까지 노래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건 그때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다. The reason I can live as a singer until now is because I met the teacher at that time. 학창 시절에 말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방황을 많이 했다. When I was in school, I wandered a lot because of my ridiculous pride.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내가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다른 방법을 알지도 못했다. I was embarrassed and embarrassed to behave only that way, but I didn't know any other way. 약간 무식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경험도 안 해보고 걱정하는 걸 싫어했다. It might be a little ignorant, but I didn't even have experience and hated worrying.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찍어 먹어봐야 알았던 것 같다. If you ask if you have to dip it to know if it is shit or doenjang, I think I knew it only after dipping it. 똥은 어떤 것이며 된장이 어떤 것인지, 그 둘이 뭐가 어떻게 다르고 좋고 나쁜지 지혜롭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No one wisely told me what shit is, what doenjang is, and how the two are different, good and bad. 선생님은 눈물보다 땀을 흘리는 일의 가치를 알게 해주셨다. The teacher made me realize the value of sweating more than tears. 눈물은 누군가의 동정을 살지 모르지만, 땀을 정직한 보상과 결과를 가져다준다. Tears may live someone's sympathy, but sweat brings honest rewards and results. 물론 상처를 입는 날도 있지만 그 상처를 상처로 끝나고 둘 것인지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Of course, there are days when I get hurt, but it is up to me to decide whether to leave the wound in a wound or make it a beautiful pattern. 선생님 곁을 떠난 건 스무 살이 되어서였다. 혼자 해나가야 했다. I left my teacher because I was 20 years old. I had to do it alone. 누군가는 무작정 준비 없이 독일 유학을 가서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Someone may wonder if he wasted his time by going to study in Germany without any preparation. 그러나 선생님은 그마저도 이것저것 몸소 겪어보았으니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 However, the teacher said that it was good because he had experienced this and that. 그래서 내가 설령 직진이 아니라 곡선을 만들면서 지름길을 두고 다소 돌아가더라도 인생을 허비했다거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So, I don't think I've wasted my life or wasted time even if I took a shortcut and made a curve instead of going straight. 한 스푼 경험했다면 한 스푼 떠먹은 기억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This is because if you experience a spoonful, you have a memory of eating a spoonful. 선생님이 해주셨던 수많은 말은 내게 밥보다 보약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The countless words the teacher said were more precious to me than rice.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Among them, there is an unforgettable story.

고3 때 목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낙담했던 적이 있었다. When I was in high school, I was discouraged because my throat didn't go well.

노래를 정말 잘 부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던 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I really want to sing well, but the teacher said to me, who didn't like my heart. “사람을 시계에 비유한다면 태어난 시각이 0시다. 열아홉 살 너는 이제 겨우 새벽 5시나 6시야. “If a person is compared to a clock, the time of birth is 0. You're 19 years old, you're only 5 or 6 in the morning. 아침 5시에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있겠냐?” “있을 수도 있죠.” Are there any friends who come to school at 5 in the morning?” “It could be.”

“그래. 있을 수 있지.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 "okay. Can be. But you won't be able to do that every day for all three years in school.” “… … .” “인생이라는 학교도 마찬가지야. 지금 넌 새벽 5시니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The same goes for the school of life. Now that you are at 5 am, you don't have to work too hard.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기도 힘든 시간이지 않냐. 학교를 가려고 일어났어도 신발도 아직 안 신은 시각인데 목이 풀리지 않는 건 당연하지. Isn't it difficult to get up after rubbing your eyes in the morning? Even when I woke up to go to school, I didn't wear my shoes yet, but it's natural that my throat doesn't get loose. 시간이 지나면 다 때가 와.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When time passes, the time comes. Your time will surely come.” 너의 때도 반드시 올 거다. 힘든 순간이면 이 말이 떠올랐다. Your time will surely come too. In a difficult moment, this word came to my mind.

서른을 앞두고 답답함이 컸을 때도 ‘아직 아침 9시쯤 된 거지. 목이 잠겨 있는 시각이지'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Even when the frustration was big ahead of the thirty,'It's still around 9 in the morning. I waited for the time, thinking,'It's the time when my neck is locked.'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진 않았다. I didn't just wait blindly.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서 충실히 노래를 불렀다. I sang faithfully while doing what I could.

<미스터트롯>을 준비할 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괜찮겠냐고 걱정하셨다. When I was preparing , I called the teacher and was worried that it would be okay. 트롯은 성악과 너무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이라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Trot would have been worried because it was a challenge for a genre that was too different from vocal music. 그런데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바로 전화를 주셨다. But as soon as the first broadcast went out, he called me.

“호중아, 내가 말한 거 그거 취소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성악을 가르친 선생이지만 음악을 가르친 선생 아니냐. “Hojoong, what I said is cancellation. Looking still, I am a teacher who taught vocal music, but am I not a teacher who taught music? 네가 그 음악에서 놀려고 하고, 그 음악을 네가 하려고 하는데 내가 시선을 너무 좁게 봤던 것 같다.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열심히 멋지게 한번 하고 와라.” You're trying to play in that music, and you're trying to play it, but I think I looked too narrowly. I'm sorry to you. Do your best and do it nicely.” 그러고는 경연 내내 누구보다 든든하게 응원해주셨다. Then, throughout the contest, he supported me more than anyone else. 심지어 “뽕기를 너무 뺀 거 아니냐. 뽕끼를 더 넣어야 하지 않냐”는 말씀까지 하셨다. Even, "Isn't it too much to remove Ponggi?" Shouldn't I add more mulberry?” he even said.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혹여 망설임이 생길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It was the path that I chose, but it would have meant that I was asked to eat comfortably in case he would hesitate. 선생님은 나보다 더 먼 곳을 보시면서도 절대로 내 앞에 서서 나를 잡아당기지 않으셨다. Even though the teacher looked farther than me, he never stood in front of me and pulled me. 그렇다고 뒤에서 뒷짐 지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마냥 보고 있기만 하지도 않으셨다. But he didn't just look behind me and watch where I was going. 때로는 반 발짝 뒤에 때로는 반 발짝 앞에 계시면서 든든하게 옆을 지켜주셨다. Sometimes he was half step back and sometimes half step ahead, and he securely guarded his side. 누군가 내게 살면서 무엇을 가장 자랑하고 싶냐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말할 것이다. If someone asks me what I want to show off most in my life, I will not hesitate to tell. “서수용 선생님이 저의 선생님인 게 가장 큰 자랑입니다.” “I am proud to say that Su-Yong Seo is my teacher.”

여담이지만, 선생님께서 제일 많이 해준 칭찬이 내가 귀가 좋다는 것이었다. As an aside, the most compliment the teacher gave was that I had good ears. 그 말을 들을 땐 ‘목이 발달되어야 하는데 귀가 발달되어 있으면 어떡하노?'라는 걱정도 몰래 했다. When I heard that, I secretly worried,'What should I do if my neck needs to be developed, but my ears are developed?' 그런데 그게 얼마나 큰 칭찬이었는지 동원이를 보면서 알았다. By the way, I saw how much praise it was while watching Dongwon. 동원이는 귀가 정말 좋다. Dongwon has really good ears.

귀가 좋으니 노래도 잘 부르고 흉내도 잘 낸다. He has good ears, so he sings well and imitates well.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출중하다. Musical talent is so outstanding that there are no instruments that cannot be handled.

나와 동갑인 영웅이는 형으로 부르고 나는 삼촌으로 부르는 건 못마땅하지만 I don't like calling a hero who's the same age as my brother and I'm an uncle, but I plan to 앞으로도 동원이의 든든한 삼촌이 되어줄 생각이다. continue to be Dongwon's strong uncle.

선생님을 떠올리면 내가 큰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When I think of the teacher, I feel like I'm floating in the big sea.

나의 전부를 수용하고 받아주는 넉넉한 바다. A generous sea that accepts and accepts all of me.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물질로도, 심적으로도 적극 지원해주셨다. He actively supported me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so that I could study abroad in Germany. 혹시라도 그동안 받은 상금이 축날까 모두 모아주신 데다가 당신의 사비까지 얹어서 나를 지원해주신 분이다. He was the one who supported me by collecting all of the prize money I received so far, and putting your personal expenses on it. 세상에 누가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셨다. He really loved me so much that I wondered who could be like this. 내게 노래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말해주신 분. The person who gave me all of his fortune telling me that I can eat and live my whole life with songs. 선생님의 재산을 거덜 내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I am very fortunate that I did not take away the teacher's property.

“선생님, 제가 노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eacher, thank you for allowing me to continue singing.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앞으로도 선생님의 재산 축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I will do my best not to forget the teacher's valuable teachings, and to keep the teacher's wealth.”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Ho Joong-ah, Ni, who will be applauded from now on, has

어릴 때부터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다. been fond of listening to radio since childhood.

할머니 집에 있던 오래된 라디오는 가끔 지지직거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 주파수를 맞추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음질이 깨끗해졌다. The old radio at my grandmother's house used to crack occasionally, but every time I turned the dial carefully to tune the frequency, the sound quality became clear as if when it did. 이제는 라디오 주파수 맞출 일이 없다. There is no need to tune in to the radio frequency anymore.

하지만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기억은 내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내 인생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However, the memory of tuning the radio frequency evokes a strange nostalgia for me and at the same time symbolically shows a section of my life. 나는 지금 어디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걸까. Where am I setting the frequency right now?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그냥 참고 있는 걸까, Am I just holding on while listening to the crackling noise, or

내가 원하는 음악이 나오는 곳의 주파수를 끈질기게 찾는 걸까. am I persistently searching for the frequency where the music I want comes out?

주파수를 찾는 시간은 더 정확한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The time to find the frequency is also the time to match the more accurate frequency. 그 시간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거나 내 라디오는 왜 이렇게 고물이냐고 짜증을 내봤자 소용이 없다. It's useless if you think that time isn't a big deal or if you're annoyed about why my radio is so stupid. 그저 세심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에 묵묵히 집중하면 어느 순간 탁 하며 걸림 쇠가 풀리듯 깨끗하고 선명한 음악이 나오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If you silently focus on just fine-tuning the frequency, you will encounter a moment when clear and clear music comes out as if the stumbling block is released. 묵묵히 인내하며 노래를 불러온 시간은 어찌 보면 나만의 주파수를 맞추는 시간이었다. The time I spent patience silently singing songs was a time to tune my own frequency in some way. 깨끗하게 잡히는 다른 주파수에서 좋은 노래들이 흘러나와도 내가 찾는 주파수가 아니라면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Even though good songs came out on other frequencies that were clear, I didn't give up until I found them unless they were the frequencies I was looking for. 빨리 잘 찾는 것은 나의 장점이 아니었다. Finding well quickly was not my strength.

조금 느리더라도 묵묵히 견디고 인내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섬세하게 맞춰보는 게 내 성미와 맞았다. Even if it was a little slow, it was my temper to endure silently, persevere, and carefully match them one by one. 그래서 그 시간을 기다렸고, 그 세월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So I waited for that time, and those years must have made me who I am. 멋 부리지 않고 말하자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This is what I'm trying to say in the end, rather than being cool.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잘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They liked what they liked more, and they tried to do better what they did well.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도달했냐고 묻는다면 주파수를 맞추는 노력을 매일매일 해왔다는 말이 가장 진실한 대답이다. If you ask how you have reached this moment, the most sincere answer is that you have made every day effort to tune the frequency.

무대에서 노래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다. Making singing on stage my business is a lot of my heart's influence. 내 인생을 내가 원해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과 말에 취약해질 때가 있다. Even though I live my life because I want it, there are times when I become vulnerable to the eyes and words of others.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주파수에만 나 자신을 맞추고 살아갈 수는 없다. However, I can't live by adjusting myself to the frequencies they want.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내 주파수를 찾는 일을 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This is even more so because I have been searching for my frequency with a long desperate heart. 내가 하고 싶은 노래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가 미묘하게 다를 수도 있다. The song you want to play and the song people want to hear may be subtly different. 그렇다고 이 말 저 말에 갈팡질팡하다가는 라디오가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른다. However, if you go crazy with words and words, the radio may be broken and it may not function properly. 중요한 것은 말로만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고 직접 땀을 흘리며 1밀리미터씩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이다.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ay this or that, but to sweat and move even a millimeter at a time. 그러다 보면 손의 감각이 민감해지고, 귀가 열리면서 ‘아, 여기구나!'하고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온다. Then the sensation of the hand becomes sensitive, and the day comes when my ears open and I know what I was looking for and saying,'Oh, here it is!' 세 끼 밥을 먹은 날은 삶이 참 살 만하다고 느꼈다. On the day I ate three meals, I felt life was worth living.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살아 있으니 괜찮다며 내게도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버티고 기다렸다. Even if I was just breathing, I said that it was okay because I was alive and waited for a good day to come to me as well. 지금 이 순간에도 노래를 꿈꾸면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Even at this moment, there will be young friends who are living today while dreaming of singing. 아니, 나이는 상관없다. No, it doesn't matter how old you are.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There will be people who want to live while doing what they want to do. 시험을 앞두고 있는 10대이든 취직준비를 하는 20대이든 Whether you're in your teens before exams, your 20s getting ready for a job, your 전직을 꿈꾸는 30대이든 삶을 막막하게 버티고 있는 40대이든 30s dreaming of a job change, your 40s struggling with life, your 나이 듦을 느끼기 시작하는 50대이든 은퇴를 앞두고 있는 60대이든 50s starting to feel aging, or your 60s about to retire 처음으로 노년의 시간을 겪고 있는 70대이든 혹은 그 이상의 나이이든 간에 Whether you're in your 70s or older, who's suffering,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일 것이다. today is a different day from yesterday if you're dreaming of something.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삶이 있고, 각자에게 딱 맞는 삶의 주파수가 있다고 믿는다. We believe that everyone has their own life given to them, and that there is a frequency of life that suits each person. 나도 처음부터 나만의 주파수를 찾았던 것은 아니다. I wasn't looking for my own frequency from the beginning either.

내가 주파수를 꾸준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유언이라는 시작점이 있었던 덕분이다. The reason I was able to consistently tune the frequency was thanks to the starting point of my grandmother's will. “호중아, 니는 앞으로 박수 받는 사람으로 살아라이.” “Hojoong-ah, you will live as a person who will be applauded in the future.”

할머니의 이 말은 얕은 재주나 부리며 살아가란 뜻이 아니다. Grandma's words don't mean to live with shallow tricks. 비굴하게 고개 숙여 받는 박수를 추구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It doesn't mean that you should pursue the applause that you bow your head. 타인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알아주는 것이다. The recognition of others is also important, but the more important thing is for me to recognize me. 내가 나에게 진실한 것이다. I am true to me.

남의 주파수를 내 것인 양 착각하지 않고 내 주파수를 찾을 때까지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It is to live life faithfully until you find your own frequency without mistaking the frequency of others as mine. 그러므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유언을 나는 이렇게 알아듣고 살아왔고 살아가려 한다. Therefore, I have lived and tried to understand the will that my grandmother left me like this. “남들에게 박수를 받으려면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To be applauded by others, I have to be proud of myself. 너의 인생을 살아가라. 힘차게 흐르는 강물처럼 공중으로 뻗어나가는 소리처럼 Live your life. Like a powerfully flowing river, like a sound stretching out into the air, like 빛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a tree that stretches vigorously toward the light,

할미가 하늘에서 꼭 지켜볼 거다. 단디 행동하래이.” Grandmother will watch from the sky. Just 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