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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라의 오디오북 (Novella Audio Books), 5원 75전 최서해 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소설오디오북ㅣ책 읽어주는 노벨라

5원 75전 최서해 ㅣ한글자막(CC), 한국단편소설오디오북ㅣ책 읽어주는 노벨라

안녕하세요

피어노벨라에서는 현재 한국 근대단편소설 읽기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노벨라의 이야기로 오늘도 소설 한편 뚝딱 들어보세요 마음과 몸이 편안한 시간

오늘 이야기는 최서해의 5원 75전

주인공의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단편인데요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하고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장안에는 궂은비가 내리고

삼각산엔 첫눈이 쌓이던 날이었다

나는 온 종일 엎드려서

신문 잡지 원고지와 씨름을 했다

마음은 묵직하고 머리가 띵한 것이

무엇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고

붓을 잡아도 역시 무엇이 써질 듯 하면서

써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화가 더럭더럭 나서

보던 잡지로 낯을 가리고 누워 버렸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이 올 리가 없다

끝도 없고 머리도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는 터져 버리고 떠올라서는 터져 버렸다

생각의 실마리가 흐트러지고

그것이 현실과 항상 뒤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면

가슴이 갑갑하고 누웠던 자리까지 배기는 듯 편치 않았다

그만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으나 또한 별수 없었다

바깥 날이 흐리니 방안은 어두컴컴해서

침울한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비는 개었는지 밖은 고요했다

나는 책상 위에 손을 얹고 멀거니 앉아서

창문만 보고 있었다

나리

나지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나리 계세요

아까보다 좀 높게 불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대답이 없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바로 내 방 창문 앞에서 울렸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소리인지 알았다

김 주사 나리 허허

이번에는 흐릿한 창문에 어둑한 그림자를

묵직 실으면서 더 가까이 와서 불렀다

나는 나를 나리 하고 찾을 리는 만무하다 하면서도

미닫이를 슥 열었다

주인이었다

허허허

툇마루에 비스듬히 올라 앉아서

두 손으로 마룻바닥을 짚고 나를 보는 주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벌써 그 웃음의 뜻을 알았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무슨 일이 있어요

정색하고 물었다

주인은 아첨 비슷하게 싱긋 웃더니

말하기 어려운 듯 머뭇머뭇했다

나 역시 다시 입을 못 벌리고

미닫이 고리를 잡은 채 주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낯이 근질근질함을 깨달았다

난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허 이것 참 큰일났습니다

왜요

지금 종로에 나갔다 들어오니

저놈의 자식들이 전기를 끊어 놓고 갔어요

선웃음치는 주인의 낯에는 그득한 어둠이 흘렀다

전기를 끊다뇨

글쎄 지난 달 전기세를 여태까지 못 냈죠

그것도 여러 달이면 모르지만 겨우 한 달 밀렸는데

다시 와서 재촉도 없이 끊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있었으면 말마디나 했겠지만

안에서들만 있는데 왔으니

거 이거 저녁에 불을 못 보겠으니 이런 큰일이 없습니다

주인은 팔짱을 끼고 툇마루 기둥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본다

그것 참 안 됐습니다

나는 문을 닫지도 못하고 시원한 대답을 주지도 못했다

은연한 주인의 말 가운데에는

요구 조건이 있긴 하지만

지갑이 쇠냄새를 맡은 지가 하도 오래된 판이니

그 요구를 들을 수 없었다

들을 수 없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나가 버릴 수도 없었다

아이 그놈의 난장이 같은 일본 놈이

저한테 전기 청원을 안 했다고 앙심을 먹었단 말이죠

앙심은 왜

그 놈한테 말하면 그 놈이 의뢰금 얼마를 떼어 먹지요

그게 미워서 회사에 직접 말했더니

그 놈이 앙심을 먹었단 말씀이지요

이놈에 세상

주인은 서리고 서렸던 분을 한꺼번에 쏟칠 듯이

혼자 언성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한탄 비스듬하게 뿜었다

세상이란 그런 거죠

정작 책임을 지어야 할 나는

남의 소리하듯 쓸쓸히 대답했다

좀 어떻게 변통할 수 없을까요

주인은 화제를 슬쩍 바꿔 나를 본다

나는 벌써 그 소리가 나올거라 짐작은 했지만

주인의 시선이 내 낯을 스칠 때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네 하자니 거짓말이 되겠고

아니 하자니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글쎄 어떻게 하나

나는 주인의 시선을 피해 방안을 보면서

겨우 한 마디 했다

가슴이 맥맥한 것이 획책이 없었다

나를 보던 주인은 어이없는 코웃음을 쳤다

니가 그럴 테지

그 웃음은 마치 나를 비웃는 듯이 들렸다

나는 더욱 무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모든 자존은 그만

이 순간에다 깨뜨러져 버렸다

아무 권리가 없었다

좀 어떻게 변통을 해 보세요

주인의 소리는 사형 선고같이 들렸다

나는 온몸이 장판속으로 자지러져 드는 듯했다

벌써 몇 달이냐

서너 달이 되도록

동전 한푼 이렇다는 말없이 파먹어 주었으니

이제는 주인 볼 면목이 없다

선금을 준다 하고 들어 와 놓고

한 달 두 달 이렇게 넉달이나 버텨 오니

주인인들 갑갑하지 않을 수 없었다

K사에서 560원 받을 것이 있지만

오늘 내일 하고 그것조차 얼른 주지 않으니

나도 속이려고 해서 속인 건 아니지만

근질근질하고 마음이 조리조리해서

세 끼 밥상 받을 때마다 살이 쪽쪽 내리는 듯했다

사실 살이 내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 서너 달 사이에 눈이 꺼지고 볼이 들어가서

보는 사람마다 중병을 앓았냐고 물었다

주인이 넉넉하거나 우락부락한 처지 같으면

사정도 해 보고 뱃심도 부려 보겠지만

그도 퍽 가난한 형세요 극히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나라는 위인이 그렇게 뱃심이 든든치 못한 터이니

밤낮 은근히 마음만 골릴뿐이었다

이렇게 서너 달이나 끌어 왔지만

주인은 첫날이 막날같이

내게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어떤 때 내가 쓸쓸히 앉았으면

담배까지 사다 주었다

그것 뿐인가

신던 양말까지 깨끗이 빨아다 놓았다

피차 같은 사람으로 누구는 먹고

누구는 지어 주며 누구는 부리고 누구는 부리우라는 패를 차고 있는건가

그런 것 저런 것 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양심은 아팠다

창밖에 빚꾼들이 모여 와서 주인을 땅땅 조르는 때면

내 기운은 더욱 줄어졌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빚꾼들까지

나를 노리는 듯하고

그네들께 쪼들려서 하늘만 쳐다보는 주인의 낯은

보기가 괴로와서

그럴때면 변소에 가는 것까지 주저거려졌다

이렇게 되니 무슨 일이 손에 잡히랴

그렇다고 방안에 자빠져 있을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집에 박혀서 꾸물꾸물 날을 보내면

일하기 싫어하는 부랑자패 같기도 해서

주인 보기가 더 안됐고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행여나 해서 방에 슬그머니 따라 들어와서

눈치만 슬몃슬몃 보는 주인의 낯은 더 볼 수 없었다

죽도록 빌려준 것도 끌기만 하면서 주지 않고

나 때문에 돈 변통을 다니던 B까지 절망이 되는 바람에

나는 아주 두문불출할 작정으로

변소 출입 외에는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렇게 들어앉으니 공상만 펄펄 자라 갔다

하루에도 머릿속에

청기와 집을 몇 백 개씩 지어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번쩍 뜨면 그 모든 것이

돋아 오르는 햇발에 스러지는 안개가 되어버리고

어디까지든 현실은 현실이라는 느낌이 머리를 치는 때면

모면할 수 없는험악한 운명이

큰 물결같이 금방 목을 덮는 것 같아서

퍽 불쾌하고 괴로왔다

이런 때면 내게는 예술도 종교도 철학도 국가도

인류도 부모도 처자도 없었다

다만 내 앞을 가로막은 그 이상한 빗장 밖엔 없었다

그래도 버릇을 버리지 못해

책을 집어들거나 원고지를 대하면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을 쓰려고 했던지

막연할 뿐이었다

역시 떠오르는 것은 현재 내 앞을 가로막은 빗장이었다

이렇게 될수록 주인의 낯보기가 더욱 싫었다

문 밖에서 그의 음성만 들려도

괜히 신경이 들먹거렸다

그리고 안에서들까지

음식 범절에 등한히 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사실 주인이 한 때

오늘은 좀 어떻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다가도

글쎄 그러고 싶어도 되질 않아 그럽니다

라고 내가 말하면

더 말하지는 않아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주인은 나보다 몇 층 위에 앉은 듯 쳐다 보였다

주인의 낯을 쳐다볼 때마다

그는 나를 내려누르고 내 몸을 얽는 무엇 같아서

나중엔 주인과 나 사이가 점점 멀어져

절교한 친구 사이처럼 허성허성 함을 깨달았다

어떤 때 다른 할 말이 있어도

나는 주저거리고 입을 못 열었다

밖에 나서면 길바닥에 깔린 돌까지

아무 권리와 세력 없는 나를 비웃고 꾸짖는 듯했다

이러던 판에 주인의 전기 타령이 나왔다

글쎄 그러면 이를 어쩝니까

주인의 낯에는 웃음이 스러졌다

글쎄 그거 안됐네요

난 연방 안됐구려만 불렀다

주인은 이마를 찡그렸다

이거 불을 켜야 안 쓰겠습니까

주인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울듯울듯한 소리 속에 불평이 그득 흘렀다

나는 아무 말없이 문턱에 팔을 고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또 무엇이 올 것 같다

바람은 없지만 쌀쌀한 기운이 뼈를 찔렀다

어디 좀 나가 보세요

오 원 칠십 오 전이에요

오르는 불평을 억제하려고 하면서도

억제치 못해 주인의 말은 떨렸다

글쎄 보시는 형편에 지금 어디가서 육 원 돈이나 얻는단 말씀입니까 난 너무도 어이없는 김에 이렇게 말했다

주인은 그래도 이젠 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른다

좀 나가 보세요 K사에 가 보시든지

내가 그새 너무도 미안해서

K사에서 좀 어떻게 될거 같은데 하고

주인을 대할 때마다 되뇌였고

또 어디 나갔다 들어올 때면

K사에 갔다 온다고 해서

나도 밥값 때문에 상당히 고심한다는 자취를 보이느라고

애쓴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 때문에 주인은 K사 타령을 끄집어낸 것이다

글쎄 K사도 이제 시간이 다 지난 다음에 가면 뭘 합니까

그러면 이 밤을 어떡합니까 전기를 끊어 놓았으니

주인은 기막히다는 듯이 울적 소리를 높이더니

다시 언성을 낮춰서

그래도 나리야 좀 변통을 해 보세요

하는 것은 마치

돈 받으려는 사람이 돈 꾸러온 사람 같았다

그걸 보니 나는 알 수 없이 가슴이 쯔르르 했다

글쎄 지금은 못해요

내일 봅시다 네좀 참으세요 허허

난 선웃음을 쳤다

내일요 이 밤은 어떡하구요

주인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밤엔 뭐 초를 사다 켭시다 흥

나도 내 소리에 우스워서 흥 하여 버렸다

하 초 살 돈은 있읍니까 주인은 입을 딱 벌렸다

글쎄 지금 없는 돈을 어디서 변통한다는 말입니까

없다니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없는 걸 없다고 안 하고 그래 있다고 해야 옳단 말입니까

난 짜증을 벌컥 내면서 벌떡 일어 서서 모자를 집어 썼다

주인은 아무 소리 없이 어색히 웃으면서

축대에 내려서는 나를 쳐다보았다

큰일이나 한 듯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나오기는 했지만 갈 데가 없다

길 잃은 시골뜨기처럼

질적한 다방골 골목을 어청어청 헤어나왔지만

내 정신으로 내가 걷는 것 같지 않았다

멋없이 짜증낸 것을 생각하니 나도 우스웠다

더구나 멀쓱해서 쳐다보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부끄럽고 미안스러웠다

연세로 봐서 내겐 아버지 뻘이나 되는 이가

무엇 때문에 나리 나리하고 아첨을 한담

난 알수 없이 가슴이 뻐근했다

어디 가서든 돈을 얻어야지

하고 혼자 결심을 했지만 결국 갈 데가 없다

물인지 땅인지 모르고

어청어청 종로 네거리까지 나왔을 때

머리에 언뜻 B군이 떠올랐다

B군은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고

또 나의 동창이다

그가 일본 가는 길에 서울에 잠깐 들렀었다

난 그를 찾아가려고 발을 서대문 쪽으로 돌렸다

어느새 전등은 눈을 떴다

질적한 거리는 번쩍번쩍 빛났다

컴컴할 하숙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졸여서 부리나케 걸었다

하지만 남의 노자를 잘라쓰고

얼른 채워 놓지 못하는 날이면

그의 길이 체연될 것을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사람

내일이나 모레 줄 테니 자네 돈 오 원만 취해 주게 응

지금 급하니

B군은 쾌히 승낙했다

하늘을 가졌으면 이보다 더 기쁘며

땅을 맡았으면 이보다 더 좋으랴

나는 의기양양하게 하숙으로 향했다

난 전등이 꺼져서 껌껌한 문간을 지나 들어갔다

마당은 컴컴했다

두어방 미닫이에 비친 불빛은 꺼불꺼불했다

어느 때는 어디 나갔다가도 슬그머니 들어오던 나는

기침을 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 속에서 누릿한 장판 냄새가 흘러 나왔다

주인은 따라 나와서 초에 불을 켰다

아 김 주사 용서하세요

제가 홧김에 불쾌한 소리를

주인은 아까 일이 미안스럽다는 사과를 한다

나는 도리어 낯이 후끈했다

아니 천만에요

저야말로 참 제 홧김에 괜히

하면서 나는 오 원 지폐를 주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주인은 벙끗 웃었다

아무쪼록 노여워 마세요

천만에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도 나와 같이 웃었다

이 찰나

주인과 나 사이에 가로질렀던 담벽이 툭 터져서

더욱 가까와진 듯 했다

아까 피차 찌그러지던 낯은 티만치도 찾을 수 없었다

아아 단돈 오 원이로구나

나는 가슴이 찌르르하여 눈물이 핑돌았다

또 다시 내일이나 모레 주마

B군에게 한 말이 떠올라서

이마를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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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피어노벨라에서는 현재 한국 근대단편소설 읽기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노벨라의 이야기로 오늘도 소설 한편 뚝딱 들어보세요 마음과 몸이 편안한 시간

오늘 이야기는 최서해의 5원 75전

주인공의 심리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단편인데요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하고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장안에는 궂은비가 내리고

삼각산엔 첫눈이 쌓이던 날이었다

나는 온 종일 엎드려서

신문 잡지 원고지와 씨름을 했다

마음은 묵직하고 머리가 띵한 것이

무엇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고

붓을 잡아도 역시 무엇이 써질 듯 하면서

써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화가 더럭더럭 나서

보던 잡지로 낯을 가리고 누워 버렸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이 올 리가 없다

끝도 없고 머리도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는 터져 버리고 떠올라서는 터져 버렸다

생각의 실마리가 흐트러지고

그것이 현실과 항상 뒤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면

가슴이 갑갑하고 누웠던 자리까지 배기는 듯 편치 않았다

그만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으나 또한 별수 없었다

바깥 날이 흐리니 방안은 어두컴컴해서

침울한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비는 개었는지 밖은 고요했다

나는 책상 위에 손을 얹고 멀거니 앉아서

창문만 보고 있었다

나리

나지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나리 계세요

아까보다 좀 높게 불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대답이 없다

그런데 그 소리는 바로 내 방 창문 앞에서 울렸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소리인지 알았다

김 주사 나리 허허

이번에는 흐릿한 창문에 어둑한 그림자를

묵직 실으면서 더 가까이 와서 불렀다

나는 나를 나리 하고 찾을 리는 만무하다 하면서도

미닫이를 슥 열었다

주인이었다

허허허

툇마루에 비스듬히 올라 앉아서

두 손으로 마룻바닥을 짚고 나를 보는 주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벌써 그 웃음의 뜻을 알았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하고

무슨 일이 있어요

정색하고 물었다

주인은 아첨 비슷하게 싱긋 웃더니

말하기 어려운 듯 머뭇머뭇했다

나 역시 다시 입을 못 벌리고

미닫이 고리를 잡은 채 주인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낯이 근질근질함을 깨달았다

난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허 이것 참 큰일났습니다

왜요

지금 종로에 나갔다 들어오니

저놈의 자식들이 전기를 끊어 놓고 갔어요

선웃음치는 주인의 낯에는 그득한 어둠이 흘렀다

전기를 끊다뇨

글쎄 지난 달 전기세를 여태까지 못 냈죠

그것도 여러 달이면 모르지만 겨우 한 달 밀렸는데

다시 와서 재촉도 없이 끊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있었으면 말마디나 했겠지만

안에서들만 있는데 왔으니

거 이거 저녁에 불을 못 보겠으니 이런 큰일이 없습니다

주인은 팔짱을 끼고 툇마루 기둥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본다

그것 참 안 됐습니다

나는 문을 닫지도 못하고 시원한 대답을 주지도 못했다

은연한 주인의 말 가운데에는

요구 조건이 있긴 하지만

지갑이 쇠냄새를 맡은 지가 하도 오래된 판이니

그 요구를 들을 수 없었다

들을 수 없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나가 버릴 수도 없었다

아이 그놈의 난장이 같은 일본 놈이

저한테 전기 청원을 안 했다고 앙심을 먹었단 말이죠

앙심은 왜

그 놈한테 말하면 그 놈이 의뢰금 얼마를 떼어 먹지요

그게 미워서 회사에 직접 말했더니

그 놈이 앙심을 먹었단 말씀이지요

이놈에 세상

주인은 서리고 서렸던 분을 한꺼번에 쏟칠 듯이

혼자 언성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한탄 비스듬하게 뿜었다

세상이란 그런 거죠

정작 책임을 지어야 할 나는

남의 소리하듯 쓸쓸히 대답했다

좀 어떻게 변통할 수 없을까요

주인은 화제를 슬쩍 바꿔 나를 본다

나는 벌써 그 소리가 나올거라 짐작은 했지만

주인의 시선이 내 낯을 스칠 때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네 하자니 거짓말이 되겠고

아니 하자니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글쎄 어떻게 하나

나는 주인의 시선을 피해 방안을 보면서

겨우 한 마디 했다

가슴이 맥맥한 것이 획책이 없었다

나를 보던 주인은 어이없는 코웃음을 쳤다

니가 그럴 테지

그 웃음은 마치 나를 비웃는 듯이 들렸다

나는 더욱 무색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모든 자존은 그만

이 순간에다 깨뜨러져 버렸다

아무 권리가 없었다

좀 어떻게 변통을 해 보세요

주인의 소리는 사형 선고같이 들렸다

나는 온몸이 장판속으로 자지러져 드는 듯했다

벌써 몇 달이냐

서너 달이 되도록

동전 한푼 이렇다는 말없이 파먹어 주었으니

이제는 주인 볼 면목이 없다

선금을 준다 하고 들어 와 놓고

한 달 두 달 이렇게 넉달이나 버텨 오니

주인인들 갑갑하지 않을 수 없었다

K사에서 560원 받을 것이 있지만

오늘 내일 하고 그것조차 얼른 주지 않으니

나도 속이려고 해서 속인 건 아니지만

근질근질하고 마음이 조리조리해서

세 끼 밥상 받을 때마다 살이 쪽쪽 내리는 듯했다

사실 살이 내리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 서너 달 사이에 눈이 꺼지고 볼이 들어가서

보는 사람마다 중병을 앓았냐고 물었다

주인이 넉넉하거나 우락부락한 처지 같으면

사정도 해 보고 뱃심도 부려 보겠지만

그도 퍽 가난한 형세요 극히 온순한 사람이었다

또 나라는 위인이 그렇게 뱃심이 든든치 못한 터이니

밤낮 은근히 마음만 골릴뿐이었다

이렇게 서너 달이나 끌어 왔지만

주인은 첫날이 막날같이

내게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어떤 때 내가 쓸쓸히 앉았으면

담배까지 사다 주었다

그것 뿐인가

신던 양말까지 깨끗이 빨아다 놓았다

피차 같은 사람으로 누구는 먹고

누구는 지어 주며 누구는 부리고 누구는 부리우라는 패를 차고 있는건가

그런 것 저런 것 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양심은 아팠다

창밖에 빚꾼들이 모여 와서 주인을 땅땅 조르는 때면

내 기운은 더욱 줄어졌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빚꾼들까지

나를 노리는 듯하고

그네들께 쪼들려서 하늘만 쳐다보는 주인의 낯은

보기가 괴로와서

그럴때면 변소에 가는 것까지 주저거려졌다

이렇게 되니 무슨 일이 손에 잡히랴

그렇다고 방안에 자빠져 있을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집에 박혀서 꾸물꾸물 날을 보내면

일하기 싫어하는 부랑자패 같기도 해서

주인 보기가 더 안됐고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행여나 해서 방에 슬그머니 따라 들어와서

눈치만 슬몃슬몃 보는 주인의 낯은 더 볼 수 없었다

죽도록 빌려준 것도 끌기만 하면서 주지 않고

나 때문에 돈 변통을 다니던 B까지 절망이 되는 바람에

나는 아주 두문불출할 작정으로

변소 출입 외에는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렇게 들어앉으니 공상만 펄펄 자라 갔다

하루에도 머릿속에

청기와 집을 몇 백 개씩 지어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번쩍 뜨면 그 모든 것이

돋아 오르는 햇발에 스러지는 안개가 되어버리고

어디까지든 현실은 현실이라는 느낌이 머리를 치는 때면

모면할 수 없는험악한 운명이

큰 물결같이 금방 목을 덮는 것 같아서

퍽 불쾌하고 괴로왔다

이런 때면 내게는 예술도 종교도 철학도 국가도

인류도 부모도 처자도 없었다

다만 내 앞을 가로막은 그 이상한 빗장 밖엔 없었다

그래도 버릇을 버리지 못해

책을 집어들거나 원고지를 대하면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을 쓰려고 했던지

막연할 뿐이었다

역시 떠오르는 것은 현재 내 앞을 가로막은 빗장이었다

이렇게 될수록 주인의 낯보기가 더욱 싫었다

문 밖에서 그의 음성만 들려도

괜히 신경이 들먹거렸다

그리고 안에서들까지

음식 범절에 등한히 하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사실 주인이 한 때

오늘은 좀 어떻게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다가도

글쎄 그러고 싶어도 되질 않아 그럽니다

라고 내가 말하면

더 말하지는 않아도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주인은 나보다 몇 층 위에 앉은 듯 쳐다 보였다

주인의 낯을 쳐다볼 때마다

그는 나를 내려누르고 내 몸을 얽는 무엇 같아서

나중엔 주인과 나 사이가 점점 멀어져

절교한 친구 사이처럼 허성허성 함을 깨달았다

어떤 때 다른 할 말이 있어도

나는 주저거리고 입을 못 열었다

밖에 나서면 길바닥에 깔린 돌까지

아무 권리와 세력 없는 나를 비웃고 꾸짖는 듯했다

이러던 판에 주인의 전기 타령이 나왔다

글쎄 그러면 이를 어쩝니까

주인의 낯에는 웃음이 스러졌다

글쎄 그거 안됐네요

난 연방 안됐구려만 불렀다

주인은 이마를 찡그렸다

이거 불을 켜야 안 쓰겠습니까

주인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울듯울듯한 소리 속에 불평이 그득 흘렀다

나는 아무 말없이 문턱에 팔을 고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또 무엇이 올 것 같다

바람은 없지만 쌀쌀한 기운이 뼈를 찔렀다

어디 좀 나가 보세요

오 원 칠십 오 전이에요

오르는 불평을 억제하려고 하면서도

억제치 못해 주인의 말은 떨렸다

글쎄 보시는 형편에 지금 어디가서 육 원 돈이나 얻는단 말씀입니까 난 너무도 어이없는 김에 이렇게 말했다

주인은 그래도 이젠 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른다

좀 나가 보세요 K사에 가 보시든지

내가 그새 너무도 미안해서

K사에서 좀 어떻게 될거 같은데 하고

주인을 대할 때마다 되뇌였고

또 어디 나갔다 들어올 때면

K사에 갔다 온다고 해서

나도 밥값 때문에 상당히 고심한다는 자취를 보이느라고

애쓴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 때문에 주인은 K사 타령을 끄집어낸 것이다

글쎄 K사도 이제 시간이 다 지난 다음에 가면 뭘 합니까

그러면 이 밤을 어떡합니까 전기를 끊어 놓았으니

주인은 기막히다는 듯이 울적 소리를 높이더니

다시 언성을 낮춰서

그래도 나리야 좀 변통을 해 보세요

하는 것은 마치

돈 받으려는 사람이 돈 꾸러온 사람 같았다

그걸 보니 나는 알 수 없이 가슴이 쯔르르 했다

글쎄 지금은 못해요

내일 봅시다 네좀 참으세요 허허

난 선웃음을 쳤다

내일요 이 밤은 어떡하구요

주인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밤엔 뭐 초를 사다 켭시다 흥

나도 내 소리에 우스워서 흥 하여 버렸다

하 초 살 돈은 있읍니까 주인은 입을 딱 벌렸다

글쎄 지금 없는 돈을 어디서 변통한다는 말입니까

없다니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없는 걸 없다고 안 하고 그래 있다고 해야 옳단 말입니까

난 짜증을 벌컥 내면서 벌떡 일어 서서 모자를 집어 썼다

주인은 아무 소리 없이 어색히 웃으면서

축대에 내려서는 나를 쳐다보았다

큰일이나 한 듯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나오기는 했지만 갈 데가 없다

길 잃은 시골뜨기처럼

질적한 다방골 골목을 어청어청 헤어나왔지만

내 정신으로 내가 걷는 것 같지 않았다

멋없이 짜증낸 것을 생각하니 나도 우스웠다

더구나 멀쓱해서 쳐다보던 주인의 얼굴이 떠올라서

부끄럽고 미안스러웠다

연세로 봐서 내겐 아버지 뻘이나 되는 이가

무엇 때문에 나리 나리하고 아첨을 한담

난 알수 없이 가슴이 뻐근했다

어디 가서든 돈을 얻어야지

하고 혼자 결심을 했지만 결국 갈 데가 없다

물인지 땅인지 모르고

어청어청 종로 네거리까지 나왔을 때

머리에 언뜻 B군이 떠올랐다

B군은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고

또 나의 동창이다

그가 일본 가는 길에 서울에 잠깐 들렀었다

난 그를 찾아가려고 발을 서대문 쪽으로 돌렸다

어느새 전등은 눈을 떴다

질적한 거리는 번쩍번쩍 빛났다

컴컴할 하숙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졸여서 부리나케 걸었다

하지만 남의 노자를 잘라쓰고

얼른 채워 놓지 못하는 날이면

그의 길이 체연될 것을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사람

내일이나 모레 줄 테니 자네 돈 오 원만 취해 주게 응

지금 급하니

B군은 쾌히 승낙했다

하늘을 가졌으면 이보다 더 기쁘며

땅을 맡았으면 이보다 더 좋으랴

나는 의기양양하게 하숙으로 향했다

난 전등이 꺼져서 껌껌한 문간을 지나 들어갔다

마당은 컴컴했다

두어방 미닫이에 비친 불빛은 꺼불꺼불했다

어느 때는 어디 나갔다가도 슬그머니 들어오던 나는

기침을 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 속에서 누릿한 장판 냄새가 흘러 나왔다

주인은 따라 나와서 초에 불을 켰다

아 김 주사 용서하세요

제가 홧김에 불쾌한 소리를

주인은 아까 일이 미안스럽다는 사과를 한다

나는 도리어 낯이 후끈했다

아니 천만에요

저야말로 참 제 홧김에 괜히

하면서 나는 오 원 지폐를 주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주인은 벙끗 웃었다

아무쪼록 노여워 마세요

천만에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도 나와 같이 웃었다

이 찰나

주인과 나 사이에 가로질렀던 담벽이 툭 터져서

더욱 가까와진 듯 했다

아까 피차 찌그러지던 낯은 티만치도 찾을 수 없었다

아아 단돈 오 원이로구나

나는 가슴이 찌르르하여 눈물이 핑돌았다

또 다시 내일이나 모레 주마

B군에게 한 말이 떠올라서

이마를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