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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 Min Jin Lee ⎟ 파친코 ⟨2018 번역, 이미정 옮김⟩, 「낯익은 사람」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낯익은 사람」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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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친코. Book 1. 고향. 낯익은 사람.

노아가 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오느라 머리가 울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노아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큰아버지가 못 오신돼요."

선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젖은 수건으로 이삭에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삭의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가슴이 약하게나마 들썩이고 있었고,

가끔씩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얇은 이불이 긴 두 다리를 덮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른 흉터들이 이삭에 양어깨와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가슴 위로 불규칙하게 일그러진 마름모를 그리며 가로질러 나 있었다.

이삭이 기침을 할 때마다 목이 붉어졌다.

노아가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안 된데이. 고마 물러나 있거라."

선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윽시로 편찮으시다 아이가.

감기가 너무 심해서 가까이 오면 안 된데이."

선자는 이삭에 몸을 다 닦지는 못했지만 이불을 이삭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대야의 물을 여러 번 바꾸고 강한 비누를 써도 이삭의 몸에서는 여전히 시큼한 냄새가 났고,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서캐가 달라붙어 있었다.

이삭은 심한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몇 분 동안 정신을 차렸으나

지금은 눈을 뜨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자는 펄펄 끓는 이삭의 머리에 새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가장 가까운 병원은 전차를 타고 한참 가야 했고,

설령 선자 혼자서 이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다 해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삭을 김치 수레에 싣고 역까지 갈 수 있다면 전차에 태울 수 있겠지만

수레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수레는 전차에 실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수레를 집에 가져다놓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전차에서 내렸을 때

수레 없이 어떻게 이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만약 전차 운전사가 그들을 태워주지 않는다면 또 어떡할까?

선자는 전차 운전사가 아픈 여자나 남자에게

내리라고 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기침을 피하려고 아버지의 두 다리 옆에 앉았다.

당장 아버지의 날카로운 무릎 뼈를 두드려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만져보고 아버지가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숙제를 하려고 책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노아야, 다시 신발 신어야겠데이.

약국에 가서 공 약사 선생님을 모셔오그라.

중요한 일이라서

엄마가 진료비를 두 배로 드릴기라고 이래 말씀드릴 수 있겠나?"

선자는 조선인 약사가 오지 않는다면

경희에게 일본인 약사를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일본인 약사가 집까지 와 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아가 군소리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달려가는 노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자는 이삭을 닦아주던 작은 수건을 놋대야에 비틀어 짜서 물기를 뺐다.

이삭의 앙상한 등에는 최근에 맞아서 부풀어 오른 자국과

좀 더 오래된 흉터들이 가득했다.

거무스름하게 멍든 이삭의 몸을 닦는 선자의 마음이 아팠다.

이삭처럼 좋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삭은 그녀를 이해하려고 했고, 그녀의 감정을 존중하려고 애쎴다.

선자의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끄집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자수를 낳기 전에 몇 차례 유산을 했을 때는 인내심을 잃지 않고

선자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아들을 낳자 이삭은 더없이 기뻐했다.

하지만 선자는 없는 형편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어 이삭의 기쁨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삭이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이제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삭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이삭이 자신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이삭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선자는 이삭을 바라보았다.

비록 수척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이삭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통통하고 키가 작은 선자와는 달리 이삭은 팔다리가 길고 늘씬하게 키가 컸으며,

심지어는 찢어져 엉망이 된 발도 여전히 반듯하게 잘생겼다.

선자의 작은 눈은 걱정 어린 빛으로 일렁거렸지만

이삭에 커다란 눈은 기대로 넘쳐흘렀다.

대야의 물이 거무튀튀해져서 선자는 새 물을 받아 오려고 일어섰다.

그때 이삭이 깨어났다.

이삭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선자를 발견했다.

"여보"라고 소리쳐 선자를 불렀지만 선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삭은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정신은 살아 있었지만 목소리가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보." 이삭이 웅얼거리며 선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선자는 이미 부엌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이삭은 지금 자신이 오사카의 요셉네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린 소년이었던 꿈에서 깨어났으니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이 분명했다.

꿈속에서 이삭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정원의 나지막한 밤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있었다.

밤나무꽃 냄새가 아직

콧속에 남아 있었다.

감옥에서 꾸었던 많은 꿈처럼 이번에 꿈을 꿀 때도

이삭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실이라면 절대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을 테니까.

어렸을 때 집안 정원사는 신선한 공기를 쐬라고

그 밤나무 아래에서 이삭을 받쳐 올려주었다.

하지만 요셉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갈 정도로 건강 하지는 못했다.

정원사는 요셉을 '원숭이'라고 부르곤 했다.

꿈속에서 이삭은 짙은 초록색 나뭇잎들과

진분홍색 속꽃잎이 있는 하얀 꽃송이들에게서

떨어지기 싫어서 굵직한 나뭇가지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집 안에서 이삭을 부르는 여자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삭은 나이 지긋한 부모와 누나를 보고 싶었다.

그들은 수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꿈속에서는 어린 소녀들 처럼 웃고 있었다.

"여보!"

"어머나!" 선자가 부엌 문간에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이삭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뭘 좀 드릴까예?"

"여보." 이삭이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이삭은 졸린데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자의 얼굴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좀더 나이가 들었고, 훨씬 더 지쳐 보였다.

"고생 많이 했죠? 정말 미안해요."

"말 많이 하지 마이소.

무리하시면 안 됩니더. 쉬셔야지예." 선자가 말했다.

"노아." 이삭은 뭔가 좋은 것을 떠올린 것처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는 어디 있어요?

좀 전에 여기 있었는데."

"약사를 데릴러 갔어예."

"아주 건강해 보이더군요.

성격도 밝아 보이고."

말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삭은 선자에게 하려고 준비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거기서 요리를 하는 거예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삭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

핏방울이 선자의 윗도리에 튀었다.

선자는 수건으로 이삭의 입을 닦아주었다.

이삭이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자는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 봐 걱정스러워서 왼손을 이삭의 머리 아래에,

오른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말렸다.

기침을 하느라 이삭의 온몸이 들썩거렸다.

입을 위로도 이삭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제발 좀 누워 계시소. 나중에 얘기하입시더. 나중에 얘기할 수 있잖아예."

이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돼요."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선자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내 삶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이삭은 고통과 피곤에 찌든 선자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선자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을 기다려주고, 자신의 식구를 보살펴준 그녀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말이다.

자신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을 때

대신 일하며 돈을 벌었을 선자를 생각하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으로 물가까지 상승해 금전적으로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감옥의 간수들은 끊임없이 오르기만 하는 물가를 불평하면서

배불리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귀리죽에 벌레가 들어있다고 불평하지 마!

이삭은 가족들을 위해 양식을 제공해달라고 항상 기도 했다.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와서

당신 인생이 더 고달파졌군요."

선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날 구해준걸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어서 건강해지셔야지예."

선자는 이삭에게 더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데도 이삭은 떨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빨리 건강을 되찾으셔야지예."

당신 없이 제가 우째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겠어예?

"모자수는 어디에 있어요?"

"언니와 같이 식당에 있어예.

식당 사장님이 우리가 일하는 동안 모자수를 데리고 있어도 좋다고 했거든예."

이삭은 모든 통증이 사라진 것처럼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졌다.

그는 아이들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었다.

"모자수."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모세는 노예가 된 백성들을 구하셨지 . . . "

이삭은 머리가 심하게 올려 또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두 아들이 다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삭은 지금껏 이렇게나 간절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이 든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보고 싶다고 바라게 된 지금에야,

이삭은 이렇게 죽으러 집에 보내진 것이었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두 아들이.

노아와 모자수.

하나님, 제 아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조심스럽게 이삭을 살펴보았다.

이삭의 얼굴은 낯설어 보였지만 평온했다.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선자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모자수가 많이 컸습니더. 늘 행복하고 자상한 아이로예.

웃는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예.

어디를 가든 뛰어댕기는데 그게 또 을메 나 빠른지예!"

선자는 양팔을 흔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달리기를 흉내 내다가

자기 꼴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삭도 따라 웃었다.

그 순간, 선자는 이 세상에 모자수가 잘 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녀 이외에 단 한 사람 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주버님 내외가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도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그들의 심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아이들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서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어야 했다.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은 큰 재산이었다.

선자에게는 집도, 돈도 없었지만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이삭이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아이들을 만나 축복해줄 때까지는 안 돼요. 주님, 제가 아이들을 . . . "

선자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이삭이 다시 눈을 감았고, 양어깨가 통증으로 뒤틀렸다.

선자는 오른손을 이삭의 가슴에 올려서

이삭이 얕게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문이 열리더니 예상했던 대로 노아가 혼자 돌아왔다.

약사가 지금은 올 수 없지만 저녁 늦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고 했다.

노아는 이삭의 발치로 돌아가 아버지가 잠을 자는 동안 산수 공부를 했다.

노아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학업 성적을 자랑하고 싶었다.

가장 엄한 호시 선생님도 노아에게 글씨를 잘 쓴다면서

문맹인 조선인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부지런한 조선인 한 명이 만 명의 조선인들을 격려해 게으른 찬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단다!"

이삭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노아는 공부에 몰두했다.

나중에 경희가 모자수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자

이삭이 체포된 이후 처음으로 집 안에 활기가 돌았다.

이삭이 잠깐 깨어나서 해골 같은 사람을 보고도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모자수를 바라보았다.

모자수는 이삭을 "아빠"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러듯이 두 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토닥거렸다.

모자수는 통통하고 하얀 손으로 이삭의 푹 꺼진 두 뺨을 톡톡 건드렸다.

아이는 이삭 앞에 잠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이삭이 눈을 감자마자

경희는 아이한테 병이 옮을까 봐 두려워

이삭한태서 아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요셉이 집에 돌아오자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요셉은 눈앞에 명백히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요셉은 이삭에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녀석아.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니?

사실이 아니라도 천황을 숭배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

이삭은 눈을 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다시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삭은 요셉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희가 남편에게 가위와 긴 면도날, 기름 한 컵, 식초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서캐는 죽지 않아요. 그냥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야해요.

서방님은 지금 무척 가려울 거예요." 경희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잔뜩 젖어 있었다.

요셉은 할 일을 쥐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삭의 머리에 기름 한 컵을 부어 두피를 문질렀다.

"이삭, 움직이지 마." 요셉은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널 가렵게 하는 이 못된 벌레들을 다 없애줄게."

요셉은 이삭의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잘라내서 놋대야에 던져 넣었다.

"이삭아, 기억나니? 요셉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정원사가 어렸을 때 우리 머리카락 잘라줬잖아.

그때 난 미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했지만 넌 절대 그러지 않았지.

넌 동자승처럼 차분하고 평화롭게

가만히 앉아서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어."

요셉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삭아, 내가 왜 너를 이 지옥으로 데려왔을까?

내가 너무 외로워서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래 맞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내 잘못이야.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요셉이 칼날을 대야에 넣었다.

"내가 죽는다면 나도 살 수 없어.

알겠니? 넌 죽을 수 없어. 이삭아, 제발 죽지 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부모님께는 또 뭐라고 말할 수 있게니?"

이삭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계속 잠들어 있었다.

요셉은 젖은 눈을 닦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칼날을 집어 들어

남아 있는 이삭의 회색 머리카락을 묵묵히 잘라냈다.

이삭의 머리가 매끈해지자 요셉은

동생의 수염에도 기름을 발랐다.

저녁 내내 요셉과 경희, 선자는 이삭의 몸에서 이를 잡았다.

아이들을 재우러 갈 때만 그 일을 멈추었다.

후에 약사가 찾아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제는 병원이나 의사가 이삭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요셉은 일을 하러 나갔다.

선자는 이삭 곁에 머물렀고, 경희는 식당에 나갔다.

요셉은 경희가 혼자 일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뭐라고 할 힘도 없었고,

무엇보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형편이었다.

집 바깥 거리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과 학교로 달려가는 아이들로 분주했지만,

방에서 잠든 이삭의 숨소리는 빠르고 얕았다.

이삭은 몸에 난 모든 털을 깎아서 깨끗하고

매끄러워졌고 꼭 갓난아기 같았다.

노아가 아침을 먹은 후, 젓가락을 단정하게 내려놓고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집에 있어도 돼요?"

학교에서 지독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노아였다.

선자는 바느질을 하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픈나?" 노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쯤 깨어난 이삭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아야." "네, 아버지."

"네가 훌륭한 학자가 될 거라고 엄마가 그러더구나."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지만

금세 습관처럼 발을 내려다보았다.

노아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아버지였다.

요셉은 노아에게 아버지인 이삭이 머리가 좋아서 독학으로 한글과 한문, 일본어를 익혔다고 말했다.

이삭이 신학대학에 갔을 무렵에는

이미 성경을 수차례 읽고 난 후였다.

노아는 학교 공부가 어렵다 싶을 때마다 아버지가 배운 사람임을 떠올리고

배움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노아야." "네, 아버지?"

"넌 오늘 학교에 가야 해.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고 싶었단다.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었지."

노아는 예전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우리의 재능을 키워야 한단다.

네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아버지는 행복할 거야.

어디를 가든 넌 우리 가족을 대표하는 훌륭한 사람이 분명해.

학교에서건, 동네에서건,

이 세상 어디에서건, 넌 그런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아.

이삭이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이삭은 아이가

일본 학교에 다니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넌 겸손하고 성실한 아이가 틀림없어.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

적에게도 말이야.

아버지 말 알겠니, 노아야?

인간은 불공정할 수 있지만

주님은 공정하시단다.

두고 보면 알 거야. 두고 보면."

이삭이 지쳐서 약해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 호시 선생님은 노아에게 언젠가 조선인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조선인들을 자애로운 천황폐하의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노아는 깨끗하게 깎은 아버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정수리가 푹 꺼진 거무스레한 뺨과 대조적으로

너무나 하얗게 보였다.

아버지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선자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노아는 아버지와 어머니, 셋이서만 오붓하게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항상 엄마,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삼각형처럼 늘 연결되어 있었다.

고향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면 그 친밀했던 관계가 그리웠다.

노아가 학교에 가야한다는 이삭에 말이 옳았지만

이삭은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머지않아 이삭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 테니까.

선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만큼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삭의 바람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선자는 노아의 가방을 집어 들어 풀죽은 노아에게 건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가라.

기다리고 있을게." 이삭이 말했다.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아버지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 오기 전에는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노아의 작은 가슴속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고통이 치솟아올랐다.

노아는 그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기가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지 않았던가?

왜 아버지처럼 집에서 공부하면 안 되는 걸까?

노아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삭은 노아에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

아이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아이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과 배움,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에 관해서

아이에게 말해주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학교는 많이 힘드니? 이삭이 물었다.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선자는 지금껏 노아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노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노아가 좋아하는 우등생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는데

그들은 노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아는 자기가 조선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다면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나 다른 사람에게 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평범한 일본인이 절대 될 수 없었으니까.

하루는 요셉 큰아버지가 조선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고,

노아는 조선에서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가방과 도시락을 든 노아는 아버지의 친절한 얼굴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문간에서 어정거렸다.

"우리 아들, 이리 오렴." 이삭이 말했다.

노아가 이삭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나님, 하나님 제발 아버지가 낫게 해주세요.

한 번 더 부탁드릴게요. 제발요. 노아가 눈을 꼭 감았다.

이삭이 노아의 손을 잡았다. "넌 아주 용감한 아이야.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하지.

너를 한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건 아주 용감한 일이야."

노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손으로 코를 문질러 닦았다.

"얘야, 사랑하는 아들아,

넌 내 축복이야."

이삭이 아들의 손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낯익은 사람」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Vertrautes" Pachinko Pachinko [Buch 1. Heimatstadt] "Familiar" Pachinko Pachinko [Book 1. Hometown] "Familiar" Pachinko Pachinko [Libro 1. Ciudad natal] "Familiare" Pachinko Pachinko [Libro 1. Città na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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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1. 고향. 낯익은 사람. Pachinko. Book 1. Home. familiar person.

노아가 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Noah slammed the door and entered the house.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오느라 머리가 울리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노아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엄마에게 말했다.

"큰아버지가 못 오신돼요."

선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젖은 수건으로 이삭에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삭의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가슴이 약하게나마 들썩이고 있었고,

가끔씩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얇은 이불이 긴 두 다리를 덮고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른 흉터들이 이삭에 양어깨와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가슴 위로 불규칙하게 일그러진 마름모를 그리며 가로질러 나 있었다.

이삭이 기침을 할 때마다 목이 붉어졌다.

노아가 조용히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안 된데이. 고마 물러나 있거라." It's not okay, just step back

선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 윽시로 편찮으시다 아이가.

감기가 너무 심해서 가까이 오면 안 된데이."

선자는 이삭에 몸을 다 닦지는 못했지만 이불을 이삭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대야의 물을 여러 번 바꾸고 강한 비누를 써도 이삭의 몸에서는 여전히 시큼한 냄새가 났고,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서캐가 달라붙어 있었다.

이삭은 심한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몇 분 동안 정신을 차렸으나

지금은 눈을 뜨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자는 펄펄 끓는 이삭의 머리에 새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가장 가까운 병원은 전차를 타고 한참 가야 했고,

설령 선자 혼자서 이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다 해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삭을 김치 수레에 싣고 역까지 갈 수 있다면 전차에 태울 수 있겠지만

수레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수레는 전차에 실을 수가 없었다.

노아가 수레를 집에 가져다놓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전차에서 내렸을 때

수레 없이 어떻게 이삭을 병원까지 데려갈 수 있을까?

만약 전차 운전사가 그들을 태워주지 않는다면 또 어떡할까?

선자는 전차 운전사가 아픈 여자나 남자에게

내리라고 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기침을 피하려고 아버지의 두 다리 옆에 앉았다.

당장 아버지의 날카로운 무릎 뼈를 두드려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만져보고 아버지가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노아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숙제를 하려고 책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노아야, 다시 신발 신어야겠데이.

약국에 가서 공 약사 선생님을 모셔오그라.

중요한 일이라서

엄마가 진료비를 두 배로 드릴기라고 이래 말씀드릴 수 있겠나?"

선자는 조선인 약사가 오지 않는다면

경희에게 일본인 약사를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일본인 약사가 집까지 와 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아가 군소리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달려가는 노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자는 이삭을 닦아주던 작은 수건을 놋대야에 비틀어 짜서 물기를 뺐다.

이삭의 앙상한 등에는 최근에 맞아서 부풀어 오른 자국과

좀 더 오래된 흉터들이 가득했다.

거무스름하게 멍든 이삭의 몸을 닦는 선자의 마음이 아팠다.

이삭처럼 좋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삭은 그녀를 이해하려고 했고, 그녀의 감정을 존중하려고 애쎴다.

선자의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끄집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자수를 낳기 전에 몇 차례 유산을 했을 때는 인내심을 잃지 않고

선자를 위로해주었다.

마침내 아들을 낳자 이삭은 더없이 기뻐했다.

하지만 선자는 없는 형편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어 이삭의 기쁨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삭이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이제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삭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이삭이 자신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이삭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선자는 이삭을 바라보았다.

비록 수척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이삭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통통하고 키가 작은 선자와는 달리 이삭은 팔다리가 길고 늘씬하게 키가 컸으며,

심지어는 찢어져 엉망이 된 발도 여전히 반듯하게 잘생겼다.

선자의 작은 눈은 걱정 어린 빛으로 일렁거렸지만

이삭에 커다란 눈은 기대로 넘쳐흘렀다.

대야의 물이 거무튀튀해져서 선자는 새 물을 받아 오려고 일어섰다.

그때 이삭이 깨어났다.

이삭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선자를 발견했다.

"여보"라고 소리쳐 선자를 불렀지만 선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삭은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정신은 살아 있었지만 목소리가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보." 이삭이 웅얼거리며 선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선자는 이미 부엌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이삭은 지금 자신이 오사카의 요셉네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린 소년이었던 꿈에서 깨어났으니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이 분명했다.

꿈속에서 이삭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정원의 나지막한 밤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있었다.

밤나무꽃 냄새가 아직

콧속에 남아 있었다.

감옥에서 꾸었던 많은 꿈처럼 이번에 꿈을 꿀 때도

이삭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실이라면 절대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을 테니까.

어렸을 때 집안 정원사는 신선한 공기를 쐬라고

그 밤나무 아래에서 이삭을 받쳐 올려주었다.

하지만 요셉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갈 정도로 건강 하지는 못했다.

정원사는 요셉을 '원숭이'라고 부르곤 했다.

꿈속에서 이삭은 짙은 초록색 나뭇잎들과

진분홍색 속꽃잎이 있는 하얀 꽃송이들에게서

떨어지기 싫어서 굵직한 나뭇가지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집 안에서 이삭을 부르는 여자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삭은 나이 지긋한 부모와 누나를 보고 싶었다.

그들은 수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꿈속에서는 어린 소녀들 처럼 웃고 있었다.

"여보!"

"어머나!" 선자가 부엌 문간에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이삭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뭘 좀 드릴까예?"

"여보." 이삭이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이삭은 졸린데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자의 얼굴은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좀더 나이가 들었고, 훨씬 더 지쳐 보였다.

"고생 많이 했죠? 정말 미안해요."

"말 많이 하지 마이소.

무리하시면 안 됩니더. 쉬셔야지예." 선자가 말했다.

"노아." 이삭은 뭔가 좋은 것을 떠올린 것처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는 어디 있어요?

좀 전에 여기 있었는데."

"약사를 데릴러 갔어예."

"아주 건강해 보이더군요.

성격도 밝아 보이고."

말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갑자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삭은 선자에게 하려고 준비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거기서 요리를 하는 거예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삭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

핏방울이 선자의 윗도리에 튀었다.

선자는 수건으로 이삭의 입을 닦아주었다.

이삭이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자는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 봐 걱정스러워서 왼손을 이삭의 머리 아래에,

오른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 일어나지 못하게 말렸다.

기침을 하느라 이삭의 온몸이 들썩거렸다.

입을 위로도 이삭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제발 좀 누워 계시소. 나중에 얘기하입시더. 나중에 얘기할 수 있잖아예."

이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돼요."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선자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내 삶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이삭은 고통과 피곤에 찌든 선자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를 선자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자신을 기다려주고, 자신의 식구를 보살펴준 그녀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말이다.

자신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을 때

대신 일하며 돈을 벌었을 선자를 생각하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으로 물가까지 상승해 금전적으로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감옥의 간수들은 끊임없이 오르기만 하는 물가를 불평하면서

배불리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귀리죽에 벌레가 들어있다고 불평하지 마! Don't complain that the guinea pigs have bugs in them.

이삭은 가족들을 위해 양식을 제공해달라고 항상 기도 했다.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와서

당신 인생이 더 고달파졌군요."

선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날 구해준걸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어서 건강해지셔야지예."

선자는 이삭에게 더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온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데도 이삭은 떨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빨리 건강을 되찾으셔야지예."

당신 없이 제가 우째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겠어예?

"모자수는 어디에 있어요?"

"언니와 같이 식당에 있어예.

식당 사장님이 우리가 일하는 동안 모자수를 데리고 있어도 좋다고 했거든예."

이삭은 모든 통증이 사라진 것처럼 정신이 또렷하고 맑아졌다.

그는 아이들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었다.

"모자수." 이삭이 미소를 지었다.

"모세는 노예가 된 백성들을 구하셨지 . . . "

이삭은 머리가 심하게 올려 또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두 아들이 다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삭은 지금껏 이렇게나 간절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이 든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보고 싶다고 바라게 된 지금에야,

이삭은 이렇게 죽으러 집에 보내진 것이었다.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 두 아들이.

노아와 모자수.

하나님, 제 아이들을 축복해주소서."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조심스럽게 이삭을 살펴보았다.

이삭의 얼굴은 낯설어 보였지만 평온했다.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선자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모자수가 많이 컸습니더. 늘 행복하고 자상한 아이로예.

웃는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예.

어디를 가든 뛰어댕기는데 그게 또 을메 나 빠른지예!"

선자는 양팔을 흔들어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달리기를 흉내 내다가

자기 꼴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삭도 따라 웃었다.

그 순간, 선자는 이 세상에 모자수가 잘 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녀 이외에 단 한 사람 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주버님 내외가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도

아이가 없어 슬퍼하는 그들의 심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아이들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서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어야 했다.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은 큰 재산이었다. Two healthy and kind sons were a great fortune

선자에게는 집도, 돈도 없었지만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이삭이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아이들을 만나 축복해줄 때까지는 안 돼요. 주님, 제가 아이들을 . . . "

선자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이삭이 다시 눈을 감았고, 양어깨가 통증으로 뒤틀렸다.

선자는 오른손을 이삭의 가슴에 올려서

이삭이 얕게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문이 열리더니 예상했던 대로 노아가 혼자 돌아왔다.

약사가 지금은 올 수 없지만 저녁 늦게 오겠다고 약속했다 고 했다.

노아는 이삭의 발치로 돌아가 아버지가 잠을 자는 동안 산수 공부를 했다.

노아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학업 성적을 자랑하고 싶었다. Noah wanted to brag about his academic performance to his father.

가장 엄한 호시 선생님도 노아에게 글씨를 잘 쓴다면서

문맹인 조선인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부지런한 조선인 한 명이 만 명의 조선인들을 격려해 게으른 찬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단다!" can help you overcome

이삭은 계속 잠들어 있었고, 노아는 공부에 몰두했다.

나중에 경희가 모자수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자

이삭이 체포된 이후 처음으로 집 안에 활기가 돌았다.

이삭이 잠깐 깨어나서 해골 같은 사람을 보고도

울음을 터트리지 않는 모자수를 바라보았다.

모자수는 이삭을 "아빠"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러듯이 두 손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토닥거렸다.

모자수는 통통하고 하얀 손으로 이삭의 푹 꺼진 두 뺨을 톡톡 건드렸다.

아이는 이삭 앞에 잠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이삭이 눈을 감자마자

경희는 아이한테 병이 옮을까 봐 두려워

이삭한태서 아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요셉이 집에 돌아오자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요셉은 눈앞에 명백히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요셉은 이삭에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녀석아.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니?

사실이 아니라도 천황을 숭배한다고 말할 수 없었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

이삭은 눈을 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다시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삭은 요셉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희가 남편에게 가위와 긴 면도날, 기름 한 컵, 식초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

"서캐는 죽지 않아요. 그냥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야해요.

서방님은 지금 무척 가려울 거예요." 경희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잔뜩 젖어 있었다.

요셉은 할 일을 쥐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이삭의 머리에 기름 한 컵을 부어 두피를 문질렀다.

"이삭, 움직이지 마." 요셉은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널 가렵게 하는 이 못된 벌레들을 다 없애줄게."

요셉은 이삭의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잘라내서 놋대야에 던져 넣었다.

"이삭아, 기억나니? 요셉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 정원사가 어렸을 때 우리 머리카락 잘라줬잖아.

그때 난 미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했지만 넌 절대 그러지 않았지.

넌 동자승처럼 차분하고 평화롭게

가만히 앉아서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어."

요셉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점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삭아, 내가 왜 너를 이 지옥으로 데려왔을까?

내가 너무 외로워서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래 맞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내 잘못이야.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요셉이 칼날을 대야에 넣었다.

"내가 죽는다면 나도 살 수 없어.

알겠니? 넌 죽을 수 없어. 이삭아, 제발 죽지 마.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부모님께는 또 뭐라고 말할 수 있게니?"

이삭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계속 잠들어 있었다.

요셉은 젖은 눈을 닦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칼날을 집어 들어

남아 있는 이삭의 회색 머리카락을 묵묵히 잘라냈다.

이삭의 머리가 매끈해지자 요셉은

동생의 수염에도 기름을 발랐다.

저녁 내내 요셉과 경희, 선자는 이삭의 몸에서 이를 잡았다.

아이들을 재우러 갈 때만 그 일을 멈추었다.

후에 약사가 찾아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이제는 병원이나 의사가 이삭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침이 되자 요셉은 일을 하러 나갔다.

선자는 이삭 곁에 머물렀고, 경희는 식당에 나갔다.

요셉은 경희가 혼자 일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뭐라고 할 힘도 없었고,

무엇보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형편이었다.

집 바깥 거리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과 학교로 달려가는 아이들로 분주했지만,

방에서 잠든 이삭의 숨소리는 빠르고 얕았다.

이삭은 몸에 난 모든 털을 깎아서 깨끗하고

매끄러워졌고 꼭 갓난아기 같았다.

노아가 아침을 먹은 후, 젓가락을 단정하게 내려놓고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집에 있어도 돼요?"

학교에서 지독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노아였다.

선자는 바느질을 하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픈나?" 노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쯤 깨어난 이삭이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아야." "네, 아버지."

"네가 훌륭한 학자가 될 거라고 엄마가 그러더구나."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지만

금세 습관처럼 발을 내려다보았다.

노아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아버지였다.

요셉은 노아에게 아버지인 이삭이 머리가 좋아서 독학으로 한글과 한문, 일본어를 익혔다고 말했다.

이삭이 신학대학에 갔을 무렵에는

이미 성경을 수차례 읽고 난 후였다.

노아는 학교 공부가 어렵다 싶을 때마다 아버지가 배운 사람임을 떠올리고

배움의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노아야." "네, 아버지?"

"넌 오늘 학교에 가야 해.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고 싶었단다.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었지."

노아는 예전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내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우리의 재능을 키워야 한단다.

네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아버지는 행복할 거야.

어디를 가든 넌 우리 가족을 대표하는 훌륭한 사람이 분명해.

학교에서건, 동네에서건,

이 세상 어디에서건, 넌 그런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아.

이삭이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이삭은 아이가

일본 학교에 다니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넌 겸손하고 성실한 아이가 틀림없어.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 Be a person who knows how to show compassion to everyone

적에게도 말이야.

아버지 말 알겠니, 노아야?

인간은 불공정할 수 있지만

주님은 공정하시단다.

두고 보면 알 거야. 두고 보면."

이삭이 지쳐서 약해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 호시 선생님은 노아에게 언젠가 조선인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조선인들을 자애로운 천황폐하의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노아는 깨끗하게 깎은 아버지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정수리가 푹 꺼진 거무스레한 뺨과 대조적으로

너무나 하얗게 보였다.

아버지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My father felt like a stranger and a familiar person.

선자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노아는 아버지와 어머니, 셋이서만 오붓하게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다.

항상 엄마,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항상 엄마,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삼각형처럼 늘 연결되어 있었다.

고향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면 그 친밀했던 관계가 그리웠다.

노아가 학교에 가야한다는 이삭에 말이 옳았지만

이삭은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머지않아 이삭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 테니까.

선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만큼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삭의 바람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선자는 노아의 가방을 집어 들어 풀죽은 노아에게 건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가라.

기다리고 있을게." 이삭이 말했다.

노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아버지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 오기 전에는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노아의 작은 가슴속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고통이 치솟아올랐다.

노아는 그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자기가 집에 있으면 아버지가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지 않았던가?

왜 아버지처럼 집에서 공부하면 안 되는 걸까?

노아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이삭은 노아에게 이런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기 싫었다.

아이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던 아이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과 배움,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에 관해서

아이에게 말해주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학교는 많이 힘드니? 이삭이 물었다. 선자가 노아를 돌아보았다.

선자는 지금껏 노아에게 그런 것을 물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노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노아가 좋아하는 우등생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는데

그들은 노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아는 자기가 조선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다면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나 다른 사람에게 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평범한 일본인이 절대 될 수 없었으니까.

하루는 요셉 큰아버지가 조선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고,

노아는 조선에서 사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가방과 도시락을 든 노아는 아버지의 친절한 얼굴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문간에서 어정거렸다.

"우리 아들, 이리 오렴." 이삭이 말했다.

노아가 이삭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나님, 하나님 제발 아버지가 낫게 해주세요.

한 번 더 부탁드릴게요. 제발요. 노아가 눈을 꼭 감았다.

이삭이 노아의 손을 잡았다. "넌 아주 용감한 아이야.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하지.

너를 한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건 아주 용감한 일이야."

노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손으로 코를 문질러 닦았다.

"얘야, 사랑하는 아들아,

넌 내 축복이야."

이삭이 아들의 손을 놓아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