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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 Min Jin Lee ⎟ 파친코 ⟨2018 번역, 이미정 옮김⟩, 「 나쁜 조선인 (오사카, 1953년 1월) 」 Pachinko, author Min Jin Lee. 파친코, 이미정 옮김. [Book 2. 조국]

「 나쁜 조선인 (오사카, 1953년 1월) 」 Pachinko, author Min Jin Lee. 파친코, 이미정 옮김. [Book 2.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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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1953 - 1989).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

박완서.

나쁜 조선인.

오사카, 1953년 1월.

돈 걱정에 잠을 못 이루던 선자는

내다 팔 설탕과자를 만들려고 한밤중에 일어났다.

양진은 딸이 잠자리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부엌으로 갔다.

"잠을 통 못 자는 것 같디만, 잠 못 자면 몸이 아프데이." 양진이 말했다.

"엄마, 저는 괜찮아예. 엄마는 주무시소."

난 늙어서 잠을 마이 안 자도 된다 아이가."

양진이 앞치마를 두르며 말했다.

선자는 노아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더 벌려고 했다.

노아는 몇 점 차이로 와세다대학 시험에 떨어졌지만 수학 과외를 받으면 다음번에는 합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과외비는 엄청나게 비쌌다.

여자들은 노아가 하고 있는 경리 관련 일을 그만두고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돈을 더 벌려고 했지만,

노아의 봉급과 식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는 생활비와 요셉의 약값을 충당하기도 힘들었다.

매주 김창호는 방세와 식대를 냈다.

그가 노아의 과외비를 보태주려고 했지만

요셉은 합당한 금액 이상의 돈을 받지 말라고 여자들에게 말했다.

요셉은 한수가 노아의 학비로 주는 돈도 받지 못하게 했다.

"어젯밤에 잠을 좀 자기는 했나?" 양진이 물었다.

선자는 절구 소리를 죽이려고

커다란 흑설탕 덩어리 위로 깨끗한 천을 덮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은 쉽게 지쳤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육십이 넘어서고 있었다.

어린 소녀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더 부지런히 일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았다.

최근에는 쉽게 지치고 조바심이 났다.

별것 아닌 작은 것들에도 신경이 거슬렸다.

나이가 들면 인내심이 더 많아져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주 화가 났다.

가끔씩 손님이 설탕과자의 양이 적다고 불평할 때는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에는 거의 입을 떼지 않는 딸아이의 침묵이 제일 거슬렸다.

양진은 딸아이를 붙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부엌은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고, 전등에서도 온화한 빛이 흘러나왔다.

벽지를 발라놓은 벽 위 천장에 갓 없는 전등 두 개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연결된 전선줄이 선명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꼭 박 두 개가 나뭇잎 없는 넝쿨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그 애들 생각이 난데이." 양진이 말했다.

"동희 언니하고 복희 언니예? 두 사람은 중국에서 일자리를 찾은 아닙니꺼?"

"그 애들을 서울에서 왔다 카는 말 잘하는 여자한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둘 다 만주로 가서 돈을 번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어 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하숙집을 살 정도로 돈을 마이 벌면 돌아온다 깼는데.

좋은 애들이라 지금도 걱정이 된다."

선자는 사랑스러웠던 두 언니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렇게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현재 조선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

한때 마음이 부드러웠던 사람들도 모두 날카로워지고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순수함은 아주 어린 아이들한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들은 얘긴데 공장으로 일하러 간 여자애들이

어딘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한테 끔찍한 일을 당했다 카대."

양진은 여전히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말을 멈췄다.

"그게 참말인 것 같나?"

선자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 언젠가 한수는

일본군을 위해 일하며 좋은 일자리를 약속하는 조선인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몇 번이고 했었다.

하지만 선자는 엄마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는 최대한 설탕을 곱게 빻으며 말을 삼켰다.

"그 애들도 그런 데로 끌려갔으면 우짜노?" 양진이 물었다.

"그런 일은 없었을 깁니더." 선자가 속삭였다.

선자는 난로의 불꽃을 피우고 설탕과 물을 쇠로 된 국자에 넣었다.

"그 애들도 그런 일을 당한 게 분명하데이."

양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하숙집을 잃은 걸 니 아버지가 알면

엄청나게 슬퍼할 기다. 아이고.

인자는 조선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돌아갈 수도 없는 거제?"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이 몸을 떨었다.

부엌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양진의 마른 갈색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양진은 수건을 창틈에 끼워넣었다.

그러고는 낡은 면 조끼를 잠옷 위로 단단히 여몄다.

선자가 약한 불 위에서 뽀글거리는 국자를 지켜보고 있자

양진은 다음에 넣을 설탕을 빻기 시작했다.

선자는 갈색으로 녹은 설탕을 젓기 시작했다.

부산은 오사카와 비교하면 또 다른 세상 같았다.

바위 많은 작은 섬 영도는 선자의 기억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하고 따사로운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돌아가지 못한 지 20년이나 흘렀는데도 말이다.

이삭이 선자에게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려고 했을 때

선자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자신의 고향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보았던 달과 별도

이곳에서 보는 차갑기만 한 그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국의 상황이 나쁘다고 사람들이 불평을 해도

선자는 화기애애하고 든든했던 고향집이 그리웠다.

유리같은 초록빛 바다 옆에 고향 집에는

아버지가 잘 가꾼 수박과 상추, 호박을 심었던 윤택한 텃밭이 딸려 있었고,

고향집 근처 야외 시장에서는 맛있는 것이 많았다.

그곳에 살 때는 그곳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풍족하지 못한 오사카에서의 생활과

노아를 대학에 보낼 돈을 벌려고 애쓰는 애처로운 노력들이 사치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을 함께 있었다.

적어도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에서 상업이 부흥했고,

일자리가 더욱 많이 생겼다.

적어도 이 곳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설탕과 밀을 구할 수 있었다.

요셉이 선자에게 한수한테서 돈을 받지 말라고 했지만,

김창호가 부족한 재료들을 인맥을 통해 구해줄 때면 선자와 경희는 말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요셉에게 그 일을 비밀로 했을 뿐이었다.

설탕과자가 국자 위에서 서늘하게 식자마자

여자들은 재빨리 네모반듯하게 잘랐다.

"동희 언니는 내가 양파를 어설프게 자른다고

맨날 놀렸어예." 선자가 웃으며 말했다.

"밥솥도 무지 느리게 씻는다고 타박했고예.

아침마다 내가 바닥을 청소하고 있으모 꼭 이래 말했어예.

'항상 걸레 도 개로 바닥을 청소 해야 한다 안 했나.

먼저 쓸고 나서 깨끗한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새 걸레로 다시 한번 닦는 기다!'

동희 언니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깔끔한 여자였습니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선자는 자기에게 지시를 하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던 동희의 동그스슴하고 수수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동희의 얼굴 표정과 태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나서

평소에는 기도를 잘하지 않는 선자였지만

그 두 사람을 보살펴달라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선자는 그 두 사람이 군인들에게 끌려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audio error correction)

이삭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겪는지에 대해서 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해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낼 때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이삭이 말했다.

왜 자신은 무사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까?

많은 사람들이 고국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자신은 이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이삭은 하나님에게는 계획에 있으시다고 말하곤 했다.

선자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사라진 두 자매를 생각하면

그러한 믿음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선자의 하숙집에서 일했던 두 자매는

선자의 두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보다 더 순진했다.

선자가 고개를 들자 엄마가 울고 있었다.

"걔들은 엄마를 잃고 아버지까지 잃었데이.

내가 걔들을 더 잘 챙겨줬어야 했는데.

걔들을 시집보내주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고통스럽게 사는 게 여자의 운명인갑다.

우리 여자들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선자는 두 자매가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갔다는 엄마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직감했다.

두 사람은 지금쯤 죽었으리라.

선자는 한 손을 엄마의 어깨에 올렸다.

머리카락이 거의 잿빛으로 변한 엄마는

낮 동안 머리를 목 뒤로 쪽 지어 올렸다.

밤에는 잿빛으로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바깥일을 오랫동안 한 탓에 엄마의 길쭉한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했다.

이마와 입 주위에도 깊은 고랑이 패였다.

선자가 기억하는 엄마는

제일 먼저 일어나서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었다.

동희와 복희를 고용했을 때도 엄마는 어린 동희만큼이나 부지런히 일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자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선자는 엄마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 아버지랑 같이 고구마 캤던 거 기억나자예?

아버지의 그 실한 고구마들예.

통통한 그것들을 잿더미에 구워 먹을 때 진짜 맛있었다 아입니꺼.

그래 좋은 고구마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 . . "

양진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딸아이는 훌륭한 아버지였던 훈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양진은 많은 아이들 잃었지만 선자가 있었다.

양진에게는 아직 선자가 있었다.

"적어도 우리 애들은 안전하니까 우리가 여기 머물고 있는 거 아이가. 그래, 그런 기다.

양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사는 거지."

양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자수는 아가 어찌나 웃긴지 모른다.

어제는 미국에서 살고 싶다 카더라.

영화에서처럼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싶다 카대.

아들 다섯 명을 낳고 싶다고도 카드라!"

선자는 모자수다운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이라고예? 그래서 엄마는 뭐라 캤어예?"

"아들 다섯명을 델고 내를 만나러 오기만 하면 괜찮다 캤지!"

부엌에서 설탕과자 냄새가 진동을 했고,

모녀는 햇살이 집 안에 가득 들어올 때까지 바쁘게 일을 했다.

학교 생활은 끔찍했다.

모자수는 열세 살이었고, 또래보다 키가 컸다.

널찍한 어깨와 근육 잡힌 팔 덕분에 몇몇 남자 선생님들보다

더 남자다워 보였다.

노아가 한자를 가르쳐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도

모자수는 제 학년 수준의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해서 역 살짜리 아이들과 같은 반이었다.

그래도 일본말은 또래 아이들만큼 잘했다.

말솜씨는 아주 좋아서 형들이나 또래들과 다툴 때는 지는 법이 없었다.

산수 실력은 반 평균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본어 쓰기와 읽기에는 젬병이었고

선생님들은 모자수를 조선인 바보라고 불렸다.

모자수는 그 지옥 같은 학교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노아는 전쟁으로 다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일하지 않을 때는 항상 대학 입학시험 공부를 했다.

수험서와 책장수한테서 산 낡은 영어소설책 없이는 집을 나선 적이 없었다.

노아는 일주일에 6일, 동네에서 집을 가장 많이 소유한 활기찬 일본인 호지 씨 밑에서 일했다.

호지 씨가 사실은 부라쿠민 혼혈이나

조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집주인 인지라

그의 수치스러운 혈통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순수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악한 소문은 불평 많은 세입자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호지 씨는 그런 소문에 개의치 않았다.

호지 씨에 비서이자 경리로 일하는 노아는

호지 씨의 원장을 아주 훌륭하게 순서대로 정리했고,

호지 씨를 대신해서 아름다운 일본어로 문서를 작성해서 관할 관청에 보냈다.

호지 씨는 미소 띤 얼굴로 농담을 잘했지만

세를 받을 때는 가차 없었다.

노아에게도 아주 적은 돈을 줬지만 노아는 불평하지 않았다.

파친코 사업이나 야키니쿠 식당을 하는

조선인들 밑에서 일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지만 노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책상에 앉아 일하고 싶었다.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 사업가들처럼

호지 씨도 보통은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호지 씨의 조카가 귀띔을 해준 덕분에

헐값에 나온 물건을 놓치지 않는 호지 씨는 조카의 가장 뛰어난 학생을 고용할 수 있었다.

저녁이면 노아는 모자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었지만

둘 다 그게 쓸모없는 짓이란 걸 잘 알았다.

모자수는 한자를 암기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모자수의 가정교사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노아는

동생에게 셈과 기본적인 쓰기를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모자수가 시험 성적을 엉망으로 받아와도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해서 절대 화내지 않았다.

노아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학교에서 나쁜 성적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결국에는 중퇴했는데

모자수가 그렇게 되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모자수의 시험 성적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큰아버지와 엄마에게

모자수의 성적표를 보고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부탁도 했다.

노아는 모자수가 일하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평균을 좀 웃도는 정도로만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노아가 그렇게 열심히 신경 써서 모자수를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모자수는 동네에 다른 모든 조선인들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쇳조각을 모아서 돈을 벌러 다녔을 것이다.

아니면 집에서 엄마가 키우는 돼지에게 줄 먹이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에는 소소한 범죄를 저질러

경찰서를 들락거렸을지도 몰랐다.

노아가 모자수의 공부를 도와주고 나면

노아는 학생이 되어 사전과 문법책을 갖다 놓고 영어 공부를 했다.

모자수는 일본어나 조선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으로 모자수가 노아에게

영어 단어와 숙어 문제를 내면서 노아가 새로운 단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줬다.

끔찍한 학교에서 모자수는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뒤쪽으로 가서 혼자 지냈다.

같은 반에는 조선인 아이들이 네 명 더 있었지만

그 애들은 모두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고,

출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다른 조선인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모자수는 그 애들과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그 애들 가족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들의 출신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들은 모두 열 살밖에 되지 않아서 모자수보다 훨씬 작았다.

모자수는 그 아이들을 경멸하다가도

가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거리를 뒀다.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적어도 이름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

모자수는 평소에는 백모세의 일본식 이름인

보쿠 모자주라고 불렸고,

학교 문서와 거주증에 올라 있는 일본식 성인 반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서양 종교에서 따온 이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선인 성,

빈민가 주소 등을 볼 때 모자수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일본인 아이들은 모자수와 아무것도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자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어렸을 때는 놀림을 당하면 괴로웠다.

물론 노아는 다른 학생들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학업 실력과

운동 실력 덕분에 그런 놀림을 덜 받았다.

매일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후에

덩치 큰 아이들이 모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으로 돌아가. 이 냄새나는 새끼야."

그러나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한두 명이 그런 소리를 하면 모자수는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모자수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나쁜 조선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들은 종종 도둑질을 하거나 집에서 술을 만드는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매주 모자수와 같은 동네 사는 누군가가 경찰과 얽혔다.

노아는 몇몇 조선인들이 법을 어겨서 모든 조선인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카이노에서는 어디에나 아내를 때리는 남자들이 있었고,

술집에서 일하며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여자들도 있었다.

노아는 조선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스스로를 드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자수는 그냥 나쁜 소리를 하는 인간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이카이노에는 욕을 퍼붓는 못생긴 할머니들과

술에 취해 집 밖에서 잠을 자는 남자들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 근처에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더럽고 돼지와 함께 살아서 냄새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이들 몸에는 이가 득시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부라쿠민보다 더 천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부라쿠민에게는 일본인 피가 섞여 있었으니까.

모자수는 노아가 예전 선생님들한테서

훌륭한 조선인이라고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생각 났다.

그렇게 말했던 선생님들이 모자수의 형편없는 학업 성적과 나쁜 태도를 보면

모자수에게는 나쁜 조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고? 모자수는 다른 열 살짜리 아이들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폭력적이라고 생각해도 또한 상관없었다.

모자수는 필요하다면

그 애들의 입 안에 있는 이를 몽땅 뽑아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짐승이라고 생각한다면 짐승이 되어 모조리 다 물어뜯어주겠어.'

모자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자수는 착한 조선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봄이 오기 전, 교토에서 전학생이 왔다.

곧 열두 번째 생일을 앞둔 열한 살 먹은 아이였다.

도토야마 하루키는 낡은 교복과

딱하기 그지 없는 상태의 신발로 보아 가난한 아이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가냘픈 몸에 눈까지 나빴다.

작고 세모난 얼굴의 그 남자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가 조선인 빈민가와 일본인 빈민가 사이의

경계 지역에 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퍼뜨렸다.

곧이어 하루키가 부라쿠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는 부라쿠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어서 하루키에게 머리가 움푹 패여 여름철 참외같이 생긴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루키의 엄마는 일본인임에도 더 나은 거주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그들 가족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하루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싸우다 죽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사실 갓 태어난 하루키의 남동생을 보자마자 떠나버렸던 것이다.

혼자 있으려는 모자수와는 달리

하루키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무진 애를 썼지만

가장 천한 신분의 아이들도 하루키를 끼워주지 않았다.

하루키는 병에 걸린 짐승 취급을 받았다.

이번 학교는 교토의 예전 학교와 다르기를 바랐지만

이곳에서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하루키는 긴 탁자 끝에 앉았고,

그 옆에 비어 있는 두 자리는

빽빽하게 박힌 검은 옥수수 알처럼 모여 있는 다른 아이들과

분리시켜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같았다.

그 탁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처럼 혼자 앉아 있던 모자수는 간간이 다른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보려고 애쓰는 전학생을 쳐다봤다.

그런 하루키의 노력에도 그에게 대답을 해주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 때

모자수는 마침내 화장실에서 하루키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하는 거야?" 모자수가 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하루키가 대답했다.

"다 꺼지라고 하고 넌 너대로 살면 되지."

"그럼 넌 어떻게 사는데?" 하루키가 물었다.

시비조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형이 그랬어." / "형이 있어?"

"그래. 호지 씨 밑에서 일해. 너도 알지? 그 지주 말이야."

"안경 쓴 젊은 형이 네 형이야? 하루키가 물었다.

호지 씨는 하루키 가족의 지주이기도 했다.

모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수는 동네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노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모두가 노아를 존경했다.

"교실로 돌아가야겠어. 늦으면 혼날 거야."

"겁쟁이구나. 진짜로 그 선생이 소리를 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가라 선생은 덩치만 컸지 너보다 더 나약한 겁쟁이야."

하루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만 좋다면 쉬는 시간에 내 옆에 앉아도 돼." 모자수가 말했다.

모자수는 지금까지 어떤 누구에게도 그런 제의를 한 적이 없었지만,

하루키가 그 개자식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무시당하는 꼴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하루키의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모자수는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진짜?" 하루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가 된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았다.

「 나쁜 조선인 (오사카, 1953년 1월) 」 Pachinko, author Min Jin Lee. 파친코, 이미정 옮김. [Book 2. 조국] "Böse Koreaner (Osaka, Januar 1953)" Pachinko, Autor Min Jin Lee. Pachinko, übersetzt von Im Jung Lee. [Buch 2. Vaterland]. "Bad Koreans (Osaka, January 1953)" Pachinko, author Min Jin Lee. Pachinko, translated by Im Jung Lee. [Book 2. Fatherland]. "Coreanos malos (Osaka, enero de 1953)" Pachinko, autor Min Jin Lee. Pachinko, traducción de Im Jung Lee. [Libro 2. Pa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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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1953 - 1989).

아무리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도 조선 땅이고 조선 사람밖에 없는 줄 알았다. No matter how much I crossed the hill and crossed mine, I thought it was Joseon land and there were only Koreans.

박완서.

나쁜 조선인.

오사카, 1953년 1월.

돈 걱정에 잠을 못 이루던 선자는

내다 팔 설탕과자를 만들려고 한밤중에 일어났다.

양진은 딸이 잠자리에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부엌으로 갔다.

"잠을 통 못 자는 것 같디만, 잠 못 자면 몸이 아프데이." 양진이 말했다.

"엄마, 저는 괜찮아예. 엄마는 주무시소."

난 늙어서 잠을 마이 안 자도 된다 아이가."

양진이 앞치마를 두르며 말했다.

선자는 노아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더 벌려고 했다.

노아는 몇 점 차이로 와세다대학 시험에 떨어졌지만 수학 과외를 받으면 다음번에는 합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과외비는 엄청나게 비쌌다.

여자들은 노아가 하고 있는 경리 관련 일을 그만두고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돈을 더 벌려고 했지만,

노아의 봉급과 식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는 생활비와 요셉의 약값을 충당하기도 힘들었다.

매주 김창호는 방세와 식대를 냈다.

그가 노아의 과외비를 보태주려고 했지만

요셉은 합당한 금액 이상의 돈을 받지 말라고 여자들에게 말했다.

요셉은 한수가 노아의 학비로 주는 돈도 받지 못하게 했다.

"어젯밤에 잠을 좀 자기는 했나?" 양진이 물었다.

선자는 절구 소리를 죽이려고

커다란 흑설탕 덩어리 위로 깨끗한 천을 덮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은 쉽게 지쳤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육십이 넘어서고 있었다.

어린 소녀 시절에는 누구보다도 더 부지런히 일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았다.

최근에는 쉽게 지치고 조바심이 났다.

별것 아닌 작은 것들에도 신경이 거슬렸다.

나이가 들면 인내심이 더 많아져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주 화가 났다.

가끔씩 손님이 설탕과자의 양이 적다고 불평할 때는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에는 거의 입을 떼지 않는 딸아이의 침묵이 제일 거슬렸다.

양진은 딸아이를 붙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부엌은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고, 전등에서도 온화한 빛이 흘러나왔다.

벽지를 발라놓은 벽 위 천장에 갓 없는 전등 두 개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연결된 전선줄이 선명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꼭 박 두 개가 나뭇잎 없는 넝쿨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그 애들 생각이 난데이." 양진이 말했다.

"동희 언니하고 복희 언니예? 두 사람은 중국에서 일자리를 찾은 아닙니꺼?"

"그 애들을 서울에서 왔다 카는 말 잘하는 여자한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둘 다 만주로 가서 돈을 번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어 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하숙집을 살 정도로 돈을 마이 벌면 돌아온다 깼는데.

좋은 애들이라 지금도 걱정이 된다."

선자는 사랑스러웠던 두 언니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렇게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전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현재 조선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

한때 마음이 부드러웠던 사람들도 모두 날카로워지고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순수함은 아주 어린 아이들한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들은 얘긴데 공장으로 일하러 간 여자애들이

어딘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한테 끔찍한 일을 당했다 카대."

양진은 여전히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말을 멈췄다.

"그게 참말인 것 같나?"

선자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 언젠가 한수는

일본군을 위해 일하며 좋은 일자리를 약속하는 조선인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몇 번이고 했었다.

하지만 선자는 엄마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자는 최대한 설탕을 곱게 빻으며 말을 삼켰다.

"그 애들도 그런 데로 끌려갔으면 우짜노?" 양진이 물었다.

"그런 일은 없었을 깁니더." 선자가 속삭였다.

선자는 난로의 불꽃을 피우고 설탕과 물을 쇠로 된 국자에 넣었다.

"그 애들도 그런 일을 당한 게 분명하데이."

양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하숙집을 잃은 걸 니 아버지가 알면

엄청나게 슬퍼할 기다. 아이고.

인자는 조선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돌아갈 수도 없는 거제?"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이 몸을 떨었다.

부엌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양진의 마른 갈색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양진은 수건을 창틈에 끼워넣었다.

그러고는 낡은 면 조끼를 잠옷 위로 단단히 여몄다.

선자가 약한 불 위에서 뽀글거리는 국자를 지켜보고 있자

양진은 다음에 넣을 설탕을 빻기 시작했다.

선자는 갈색으로 녹은 설탕을 젓기 시작했다.

부산은 오사카와 비교하면 또 다른 세상 같았다.

바위 많은 작은 섬 영도는 선자의 기억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하고 따사로운 곳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돌아가지 못한 지 20년이나 흘렀는데도 말이다.

이삭이 선자에게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려고 했을 때

선자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자신의 고향이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보았던 달과 별도

이곳에서 보는 차갑기만 한 그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국의 상황이 나쁘다고 사람들이 불평을 해도

선자는 화기애애하고 든든했던 고향집이 그리웠다.

유리같은 초록빛 바다 옆에 고향 집에는

아버지가 잘 가꾼 수박과 상추, 호박을 심었던 윤택한 텃밭이 딸려 있었고,

고향집 근처 야외 시장에서는 맛있는 것이 많았다.

그곳에 살 때는 그곳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풍족하지 못한 오사카에서의 생활과

노아를 대학에 보낼 돈을 벌려고 애쓰는 애처로운 노력들이 사치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그들을 함께 있었다.

적어도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일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에서 상업이 부흥했고,

일자리가 더욱 많이 생겼다.

적어도 이 곳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설탕과 밀을 구할 수 있었다.

요셉이 선자에게 한수한테서 돈을 받지 말라고 했지만,

김창호가 부족한 재료들을 인맥을 통해 구해줄 때면 선자와 경희는 말없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고

요셉에게 그 일을 비밀로 했을 뿐이었다.

설탕과자가 국자 위에서 서늘하게 식자마자

여자들은 재빨리 네모반듯하게 잘랐다.

"동희 언니는 내가 양파를 어설프게 자른다고

맨날 놀렸어예." 선자가 웃으며 말했다.

"밥솥도 무지 느리게 씻는다고 타박했고예.

아침마다 내가 바닥을 청소하고 있으모 꼭 이래 말했어예.

'항상 걸레 도 개로 바닥을 청소 해야 한다 안 했나.

먼저 쓸고 나서 깨끗한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새 걸레로 다시 한번 닦는 기다!'

동희 언니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제일 깔끔한 여자였습니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선자는 자기에게 지시를 하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던 동희의 동그스슴하고 수수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동희의 얼굴 표정과 태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나서

평소에는 기도를 잘하지 않는 선자였지만

그 두 사람을 보살펴달라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선자는 그 두 사람이 군인들에게 끌려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audio error correction)

이삭은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겪는지에 대해서 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해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낼 때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이삭이 말했다.

왜 자신은 무사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까? Why is it that you are safe but others are not?

많은 사람들이 고국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자신은 이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이삭은 하나님에게는 계획에 있으시다고 말하곤 했다.

선자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사라진 두 자매를 생각하면

그러한 믿음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선자의 하숙집에서 일했던 두 자매는

선자의 두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보다 더 순진했다.

선자가 고개를 들자 엄마가 울고 있었다.

"걔들은 엄마를 잃고 아버지까지 잃었데이.

내가 걔들을 더 잘 챙겨줬어야 했는데.

걔들을 시집보내주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고통스럽게 사는 게 여자의 운명인갑다.

우리 여자들은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선자는 두 자매가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갔다는 엄마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직감했다.

두 사람은 지금쯤 죽었으리라.

선자는 한 손을 엄마의 어깨에 올렸다.

머리카락이 거의 잿빛으로 변한 엄마는

낮 동안 머리를 목 뒤로 쪽 지어 올렸다.

밤에는 잿빛으로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바깥일을 오랫동안 한 탓에 엄마의 길쭉한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 했다.

이마와 입 주위에도 깊은 고랑이 패였다.

선자가 기억하는 엄마는

제일 먼저 일어나서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었다.

동희와 복희를 고용했을 때도 엄마는 어린 동희만큼이나 부지런히 일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자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선자는 엄마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 아버지랑 같이 고구마 캤던 거 기억나자예?

아버지의 그 실한 고구마들예.

통통한 그것들을 잿더미에 구워 먹을 때 진짜 맛있었다 아입니꺼.

그래 좋은 고구마는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 . . "

양진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딸아이는 훌륭한 아버지였던 훈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양진은 많은 아이들 잃었지만 선자가 있었다.

양진에게는 아직 선자가 있었다.

"적어도 우리 애들은 안전하니까 우리가 여기 머물고 있는 거 아이가. 그래, 그런 기다.

양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사는 거지."

양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자수는 아가 어찌나 웃긴지 모른다.

어제는 미국에서 살고 싶다 카더라.

영화에서처럼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싶다 카대.

아들 다섯 명을 낳고 싶다고도 카드라!"

선자는 모자수다운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이라고예? 그래서 엄마는 뭐라 캤어예?"

"아들 다섯명을 델고 내를 만나러 오기만 하면 괜찮다 캤지!"

부엌에서 설탕과자 냄새가 진동을 했고,

모녀는 햇살이 집 안에 가득 들어올 때까지 바쁘게 일을 했다.

학교 생활은 끔찍했다.

모자수는 열세 살이었고, 또래보다 키가 컸다.

널찍한 어깨와 근육 잡힌 팔 덕분에 몇몇 남자 선생님들보다

더 남자다워 보였다.

노아가 한자를 가르쳐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도

모자수는 제 학년 수준의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해서 역 살짜리 아이들과 같은 반이었다.

그래도 일본말은 또래 아이들만큼 잘했다.

말솜씨는 아주 좋아서 형들이나 또래들과 다툴 때는 지는 법이 없었다.

산수 실력은 반 평균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본어 쓰기와 읽기에는 젬병이었고

선생님들은 모자수를 조선인 바보라고 불렸다.

모자수는 그 지옥 같은 학교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노아는 전쟁으로 다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일하지 않을 때는 항상 대학 입학시험 공부를 했다.

수험서와 책장수한테서 산 낡은 영어소설책 없이는 집을 나선 적이 없었다.

노아는 일주일에 6일, 동네에서 집을 가장 많이 소유한 활기찬 일본인 호지 씨 밑에서 일했다.

호지 씨가 사실은 부라쿠민 혼혈이나

조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집주인 인지라

그의 수치스러운 혈통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순수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악한 소문은 불평 많은 세입자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호지 씨는 그런 소문에 개의치 않았다.

호지 씨에 비서이자 경리로 일하는 노아는

호지 씨의 원장을 아주 훌륭하게 순서대로 정리했고,

호지 씨를 대신해서 아름다운 일본어로 문서를 작성해서 관할 관청에 보냈다.

호지 씨는 미소 띤 얼굴로 농담을 잘했지만

세를 받을 때는 가차 없었다.

노아에게도 아주 적은 돈을 줬지만 노아는 불평하지 않았다.

파친코 사업이나 야키니쿠 식당을 하는

조선인들 밑에서 일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지만 노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책상에 앉아 일하고 싶었다.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 사업가들처럼

호지 씨도 보통은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호지 씨의 조카가 귀띔을 해준 덕분에

헐값에 나온 물건을 놓치지 않는 호지 씨는 조카의 가장 뛰어난 학생을 고용할 수 있었다.

저녁이면 노아는 모자수의 학교 공부를 도와주었지만

둘 다 그게 쓸모없는 짓이란 걸 잘 알았다.

모자수는 한자를 암기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모자수의 가정교사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노아는

동생에게 셈과 기본적인 쓰기를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모자수가 시험 성적을 엉망으로 받아와도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해서 절대 화내지 않았다.

노아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학교에서 나쁜 성적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결국에는 중퇴했는데

모자수가 그렇게 되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모자수의 시험 성적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큰아버지와 엄마에게

모자수의 성적표를 보고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부탁도 했다.

노아는 모자수가 일하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평균을 좀 웃도는 정도로만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노아가 그렇게 열심히 신경 써서 모자수를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모자수는 동네에 다른 모든 조선인들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쇳조각을 모아서 돈을 벌러 다녔을 것이다.

아니면 집에서 엄마가 키우는 돼지에게 줄 먹이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최악의 경우에는 소소한 범죄를 저질러

경찰서를 들락거렸을지도 몰랐다.

노아가 모자수의 공부를 도와주고 나면

노아는 학생이 되어 사전과 문법책을 갖다 놓고 영어 공부를 했다.

모자수는 일본어나 조선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으로 모자수가 노아에게

영어 단어와 숙어 문제를 내면서 노아가 새로운 단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줬다.

끔찍한 학교에서 모자수는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뒤쪽으로 가서 혼자 지냈다.

같은 반에는 조선인 아이들이 네 명 더 있었지만

그 애들은 모두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고,

출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다른 조선인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모자수는 그 애들과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그 애들 가족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들의 출신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애들은 모두 열 살밖에 되지 않아서 모자수보다 훨씬 작았다.

모자수는 그 아이들을 경멸하다가도

가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거리를 뒀다.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적어도 이름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

모자수는 평소에는 백모세의 일본식 이름인

보쿠 모자주라고 불렸고,

학교 문서와 거주증에 올라 있는 일본식 성인 반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서양 종교에서 따온 이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선인 성,

빈민가 주소 등을 볼 때 모자수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일본인 아이들은 모자수와 아무것도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모자수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어렸을 때는 놀림을 당하면 괴로웠다.

물론 노아는 다른 학생들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학업 실력과

운동 실력 덕분에 그런 놀림을 덜 받았다.

매일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후에

덩치 큰 아이들이 모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으로 돌아가. 이 냄새나는 새끼야."

그러나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한두 명이 그런 소리를 하면 모자수는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모자수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나쁜 조선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찰들은 종종 도둑질을 하거나 집에서 술을 만드는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매주 모자수와 같은 동네 사는 누군가가 경찰과 얽혔다.

노아는 몇몇 조선인들이 법을 어겨서 모든 조선인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카이노에서는 어디에나 아내를 때리는 남자들이 있었고,

술집에서 일하며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여자들도 있었다.

노아는 조선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스스로를 드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자수는 그냥 나쁜 소리를 하는 인간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이카이노에는 욕을 퍼붓는 못생긴 할머니들과

술에 취해 집 밖에서 잠을 자는 남자들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 근처에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더럽고 돼지와 함께 살아서 냄새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이들 몸에는 이가 득시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부라쿠민보다 더 천한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부라쿠민에게는 일본인 피가 섞여 있었으니까.

모자수는 노아가 예전 선생님들한테서

훌륭한 조선인이라고 칭찬받았다는 이야기가 생각 났다.

그렇게 말했던 선생님들이 모자수의 형편없는 학업 성적과 나쁜 태도를 보면

모자수에게는 나쁜 조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고? 모자수는 다른 열 살짜리 아이들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폭력적이라고 생각해도 또한 상관없었다.

모자수는 필요하다면

그 애들의 입 안에 있는 이를 몽땅 뽑아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짐승이라고 생각한다면 짐승이 되어 모조리 다 물어뜯어주겠어.'

모자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자수는 착한 조선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봄이 오기 전, 교토에서 전학생이 왔다.

곧 열두 번째 생일을 앞둔 열한 살 먹은 아이였다.

도토야마 하루키는 낡은 교복과

딱하기 그지 없는 상태의 신발로 보아 가난한 아이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가냘픈 몸에 눈까지 나빴다.

작고 세모난 얼굴의 그 남자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가 조선인 빈민가와 일본인 빈민가 사이의

경계 지역에 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퍼뜨렸다.

곧이어 하루키가 부라쿠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는 부라쿠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어서 하루키에게 머리가 움푹 패여 여름철 참외같이 생긴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루키의 엄마는 일본인임에도 더 나은 거주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그들 가족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하루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싸우다 죽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사실 갓 태어난 하루키의 남동생을 보자마자 떠나버렸던 것이다.

혼자 있으려는 모자수와는 달리

하루키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무진 애를 썼지만

가장 천한 신분의 아이들도 하루키를 끼워주지 않았다.

하루키는 병에 걸린 짐승 취급을 받았다.

이번 학교는 교토의 예전 학교와 다르기를 바랐지만

이곳에서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하루키는 긴 탁자 끝에 앉았고,

그 옆에 비어 있는 두 자리는

빽빽하게 박힌 검은 옥수수 알처럼 모여 있는 다른 아이들과

분리시켜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같았다.

그 탁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처럼 혼자 앉아 있던 모자수는 간간이 다른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보려고 애쓰는 전학생을 쳐다봤다.

그런 하루키의 노력에도 그에게 대답을 해주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 때

모자수는 마침내 화장실에서 하루키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하는 거야?" 모자수가 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하루키가 대답했다.

"다 꺼지라고 하고 넌 너대로 살면 되지."

"그럼 넌 어떻게 사는데?" 하루키가 물었다.

시비조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내 말 잘 들어.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형이 그랬어." / "형이 있어?"

"그래. 호지 씨 밑에서 일해. 너도 알지? 그 지주 말이야."

"안경 쓴 젊은 형이 네 형이야? 하루키가 물었다.

호지 씨는 하루키 가족의 지주이기도 했다.

모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수는 동네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노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모두가 노아를 존경했다.

"교실로 돌아가야겠어. 늦으면 혼날 거야."

"겁쟁이구나. 진짜로 그 선생이 소리를 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가라 선생은 덩치만 컸지 너보다 더 나약한 겁쟁이야."

하루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만 좋다면 쉬는 시간에 내 옆에 앉아도 돼." 모자수가 말했다.

모자수는 지금까지 어떤 누구에게도 그런 제의를 한 적이 없었지만,

하루키가 그 개자식들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무시당하는 꼴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하루키의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모자수는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진짜?" 하루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가 된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