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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 Min Jin Lee ⎟ 파친코 ⟨2018 번역, 이미정 옮김⟩, 「 회상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 회상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

파친코. Book 2. 조국. 회상.

솔로몬은 ⟨철완 아톰⟩ 만화책을 끌어안은 채 자동차 뒷좌석의 선자와 한수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몇 살이니?" 한수가 물었다.

솔로몬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구나. 그 책들을 읽을 거니?"

한수가 솔로몬의 만화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벌써 글자를 읽을 수 있어?" 솔로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밤에 도토가 와서 읽어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솔로몬은 빨간 책가방을 열어서 만화책을 가방 속에 넣었다.

"도토가 누구야" 한수가 물었다.

"아버지의 어릴 때 친구요. 도토는 진짜 일본 경찰이에요.

나쁜 사람들과 강도들을 잡아요.

내가 태어났을 때도 도토가 있었어요."

"그래? 항상 같이 있었니?"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작은 소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도토에게 저녁에 뭘 줄 거에요?" 솔로몬이 물었다.

"생선전하고 닭조림을 해줄 끼란다." 선자가 대답했다.

모자수의 친구 도토야마 하루키는 오늘 저녁에 도착해서

주말 동안 머물 예정이었고, 선자는 이미 식단을 모두 짜놓았다.

"하지만 도토는 불고기를 좋아해요.

불고기를 제일 좋아한다고요."

"내일 저녁에는 불고기를 할 거니까 걱정마레이. 도토는 일요일 저녁까지는 안 떠날 끼다."

솔로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로몬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수가 말을 꺼냈다.

"난 닭조림을 좋아해.

좋은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거든.

불고기는 누구나 식당에서 먹을 수 있지만 네 할머니만 할 수 있는 유일한 . . . "

"도토를 만나고 싶어요? 도토는 제일 친한 제 친구예요."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한수는 그런 선자를 무시했다.

"난 네 아버지가 너만 했을 때부터 네 아버지를 알았단다.

너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싶구나.

초대해줘서 고맙다, 솔로몬."

선자는 현관에서 외투를 벗고 솔로몬의 외투를 벗겨줬다.

솔로몬은 아톰처럼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 왼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철완 아톰⟩을 보려고 방으로 달려갔다.

한수는 선자를 따라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선자는 새우튀김을 작은 바구니에 쏟아붓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둥근 울트라맨 쟁반에 올려놓았다.

"솔로몬." 선자가 솔로몬을 소리쳐 불렀다.

솔로몬은 부엌으로 와서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고 돌아갔다.

한수는 서구식 식탁에 앉았다. "좋은 집이군." 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서양인 거주 지역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최신식 집이었다.

물론 한수는 이 집을 지나쳐 가본 적이 있었고, 선자가 살았던 모든 집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머물렀던 농장을 제외하면

선자의 집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구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것들과 비슷했다.

소파며 높은 원목 식탁, 크리스털 샹드리에, 가죽 안락의자까지 모두 미국식이었다.

한수는 이 집안 식구들이 요나 바닥이 아니라 침대에서 잔다고 추측했다.

이 집에는 오래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선이나 일본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널찍한 부엌 창문 너머로는 이웃집의 바위 정원이 내다보였다.

선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화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수에게 등을 돌린 채 난로만 보고 있었다.

한수는 선자의 낙타색 스웨터와 갈색 바지 속에 감춰진

몸의 곡선을 그려볼 수 있었다.

맨 처음 선자를 보았을 때

저고리 아래의 풍만하고 탱탱한 가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수는 가슴이 크고 탄력 있는 엉덩이를 가진 여자를 좋아했다.

그런데 선자의 알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선자와는 언제나 야외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그때마다 선자는 항상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수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내는

가슴이랄 것도, 엉덩이랄 것도 없는 여자였다.

게다가 누가 만지는 걸 역겨워했기 때문(skip, recording error)

한수도 아내와 관계를 갖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목욕을 해야 했고,

관계가 끝나고 나면 아내는 몇 시간이고 상관없이 오랫동안 목욕을 해야 했다.

아내가 딸 셋을 낳은 후, 한수는 아들을 포기했다.

심지어는 한수가 존경했던 장인도 한수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한수는 자신의 조선 현지처가 되는 걸 거절한 선자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결혼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자신은 선자와 노아를 아주 잘 보살펴줄 수 있었다.

자신과 선자는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있었다.

선자는 노점상을 하거나 식당 부엌에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는 요즘 젊은 여자들과 달리

자신의 돈을 받지 않는 선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에서는 프랑스 향수 한 병이나

이탈리아 구두 한 켤레로 여자를 살 수 있었다.

한수가 부엌 식탁에 앉아 회상에 젖어 있을 때

선자는 그런 한수의 모습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한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선자는 항상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한수의 존재를 느꼇다.

원치 않았지만 한수는 항상 그녀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존재였다.

노아가 사라진 이후, 두 부자가 선자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수는 지금 그녀의 부엌에서

그녀의 관심을 받으려고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왜 왔을까? 언제 가려는 걸까?

한수는 자기 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하는 사람이었다.

찻물을 끓이면서 선자는 생각했다.

'내가 돌아보면 그는 떠나버리고 없을까? 그럼 어쩌지?'

선자는 수입산 버터쿠키 몇 개를 접시에 꺼내놓았다.

찻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채워 넣고 찻잎을 넉넉히 집어 넣었다.

차를 살 돈도 없고, 살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 금세 떠 올랐다.

"매달 첫날에 노아가 잘 있다는 쪽지와 함께 돈을 보내줍니더.

소인은 항상 다르고예." 선자가 말했다.

"나도 노아를 찾아봤어.

노아는 아무도 자기를 찾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

지금도 노아를 찾고 있어.

선자야, 노아는 내 아들이기도 해."

어떻게 날 비난할 수 있어?

한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선자는 한수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선자는 쉰두 살이었다.

주름과 점이 생기지 않도록 밖에 나갈 때

항상 모자와 장갑을 챙기는 경희 언니는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았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선자는 자신의 짤막한 회색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평생 사랑스러웠던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사랑스럽지 못했다.

이런 여자를 원하는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남자에게 사랑받았던 선자의 인생은 모자수의 아버지와 함께 끝이 났다.

이제 선자는 주름살 가득한 평범한 여자였다.

허리와 허벅지도 굵어졌다.

얼굴과 손은 일만 하는 가난한 여자의 그것이었고,

지갑에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매력적인 여자는 될 수 없었다.

오래전에는 자신의 생명보다 한수를 더 간절하게 원했다.

한수와 헤어졌을 때도 한수가 돌아와 자신을 데려가주기를 바랐다.

이제 한수는 칠십이 되었지만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변한 게 있다면 인상이 더 좋아졌다는 것뿐이었다.

한수는 여전히 숱이 많은 흰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어내려

향이 나는 기름을 발라 다듬었다.

그리고 비싼 양복을 차려입고 수제 구두를 신었다.

한수는 우아한 정치가나 잘생긴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야쿠자 보스를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자는 욕실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거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거나 수치스러운 몰골은 아니었지만

들락날락거려도 누구 한 사람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그런 나이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선자는 차가운 물을 틀어서 세수를 했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한수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여자로 봐주기를 바랐다.

자신도 몰랐던 이런 속마음에 선자는 당혹스러워졌다.

선자의 인생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낮다고 선자는 생각했다.

그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선자는 작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불을 껐다.

한수는 부엌에서 쿠키를 먹고 있었다.

"여기서 사는건 괜찮아?"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녀석 말이야. 아주 예의 바르더군."

"모자수가 항상 잘 돌봐줍니더."

"모자수는 언제 집에 와?"

"곧 올 기라예. 전 저녁을 준비하는 게 좋겠어예."

"내가 도와줄까?" 한수가 양복 상의를 벗는 척했다.

선자가 웃었다.

"드디어 웃는군. 난 네가 웃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어."

두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죽어간다고예?" 선자가 물었다.

"전립선암이야. 훌륭한 의사들이 있어.

이 병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빨리는 아니지."

"그러면 죽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네예."

"그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어."

선자는 거짓말을 한 한수에게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그녀는 한수를 사랑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문이 열렸을 때 솔로몬이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

재빠르게 빨간색 스웨터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솔로몬은

왼팔을 들어 급격하게 휜 L 자 모양으로 구부렸다.

그러고는 오른팔과 왼팔을 교차시켜 비스듬한 십자가를 만들었다.

아이는 왼손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소리를 내면서 험악한 포즈를 취했다.

하루키가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하루키는 신음하더니 폭발음을 냈다.

"야호, 내가 괴수를 물리쳤다!"

솔로몬이 소리치면서 하루키를 덮쳤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자수가 한수에게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 도토야마 하루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토야마입니다."

솔로몬이 다시 포즈를 취했다.

"제발 좀 봐줘요. 울트라맨. 도토 괴수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해요.

"어서 들어오거레이." 선자가 말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선자와 하루키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토 괴수!"

"예!" 하루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째 새 울트라맨 사줬어."

"이야, 좋겠는데. 운이 좋은걸." 하루키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보여줄게. 이리 와!"

솔로몬이 하루키를 끌어당기자 다 큰 어른이 솔로몬의 방을 향해 요란스럽게 돌진해나갔다.

한수는 선자의 인생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조사했다.

오사카에서 제복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재봉사의 장남인 도토야마 하루키 형사에 관한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루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지적장애아인 남동생이 있었다.

하루키는 엄마 밑에서 일하는 연상의 여자와 약혼했지만 동성애자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관할구역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저녁 식탁에서는 즐겁고 편안한 이야기가 오갔다.

"요코하마로 와서 우리와 같이 살아요, 네?"

솔로몬이 하루키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흠, 그거 아주 좋은 일인데.

그럼 매일 울트라맨 놀이를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소로야. 어머니와 형제가 오사카에 살고 있어서 나는 오사카에서 살아야 해."

"아." 솔로몬이 한숨을 쉬었다.

"형제가 있는지 몰랐네. 동생이에요, 형이에요?

"동생이야."

"만나고 싶어요.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솔로몬이 말했다.

"그래. 그런데 내 동생이 부끄럼이 많아." 솔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도 부끄럼이 많아요."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었고, 모자수는 미소를 지었다.

"동생과 같이 오면 좋겠어요. 솔로몬이 조용히 말했다.

하루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장애가 있는 동생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누군가를 돌보는 걸 꺼렸다.

"여자 친구 아야메는 오사카보다 도쿄를 더 좋아해.

내 여자 친구는 여기 오면 더 좋아할걸." 하루키가 말했다.

"그럼 결혼해서 여기 올 수도 있겠네." 솔로몬이 말했다.

모자수가 웃었다. "그렇지."

한수는 허리를 좀 더 곧게 펴고 앉았다.

"요코하마 경찰서장이 내 친구야.

전근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봐주지." 한수가 제안을 했다.

그러고는 명함을 꺼내 젊은 경관에게 건네주었고,

하루키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모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자는 조용히 한수를 지켜보았다.

선뜻 도와주겠다는 한수가 의심스러웠다.

한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선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회상 」 Pachinko 파친코 [Book 2. 조국] "Erinnerungen" Pachinko Pachinko [Buch 2. Das Mutterland] "Recollections" Pachinko Pachinko [Book 2. The Motherland] "Recuerdos" Pachinko Pachinko [Libro 2. La patria] "Ricordi" Pachinko Pachinko [Libro 2. Madrepa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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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Book 2. 조국. 회상.

솔로몬은 ⟨철완 아톰⟩ 만화책을 끌어안은 채 자동차 뒷좌석의 선자와 한수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몇 살이니?" 한수가 물었다.

솔로몬은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구나. 그 책들을 읽을 거니?"

한수가 솔로몬의 만화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벌써 글자를 읽을 수 있어?" 솔로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밤에 도토가 와서 읽어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솔로몬은 빨간 책가방을 열어서 만화책을 가방 속에 넣었다.

"도토가 누구야" 한수가 물었다.

"아버지의 어릴 때 친구요. 도토는 진짜 일본 경찰이에요.

나쁜 사람들과 강도들을 잡아요.

내가 태어났을 때도 도토가 있었어요."

"그래? 항상 같이 있었니?"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작은 소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도토에게 저녁에 뭘 줄 거에요?" 솔로몬이 물었다.

"생선전하고 닭조림을 해줄 끼란다." 선자가 대답했다.

모자수의 친구 도토야마 하루키는 오늘 저녁에 도착해서

주말 동안 머물 예정이었고, 선자는 이미 식단을 모두 짜놓았다.

"하지만 도토는 불고기를 좋아해요.

불고기를 제일 좋아한다고요."

"내일 저녁에는 불고기를 할 거니까 걱정마레이. 도토는 일요일 저녁까지는 안 떠날 끼다."

솔로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솔로몬을 유심히 살펴보던 한수가 말을 꺼냈다.

"난 닭조림을 좋아해.

좋은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거든.

불고기는 누구나 식당에서 먹을 수 있지만 네 할머니만 할 수 있는 유일한 . . . "

"도토를 만나고 싶어요? 도토는 제일 친한 제 친구예요."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한수는 그런 선자를 무시했다.

"난 네 아버지가 너만 했을 때부터 네 아버지를 알았단다.

너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싶구나.

초대해줘서 고맙다, 솔로몬."

선자는 현관에서 외투를 벗고 솔로몬의 외투를 벗겨줬다.

솔로몬은 아톰처럼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 왼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철완 아톰⟩을 보려고 방으로 달려갔다.

한수는 선자를 따라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선자는 새우튀김을 작은 바구니에 쏟아붓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둥근 울트라맨 쟁반에 올려놓았다.

"솔로몬." 선자가 솔로몬을 소리쳐 불렀다.

솔로몬은 부엌으로 와서 쟁반을 조심스럽게 들고 돌아갔다.

한수는 서구식 식탁에 앉았다. "좋은 집이군." 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의 서양인 거주 지역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최신식 집이었다.

물론 한수는 이 집을 지나쳐 가본 적이 있었고, 선자가 살았던 모든 집을 알고 있었다. Of course, Hansu had passed this house before and knew all the houses where Sunja had lived before.

하지만 전쟁 중에 머물렀던 농장을 제외하면

선자의 집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구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것들과 비슷했다.

소파며 높은 원목 식탁, 크리스털 샹드리에, 가죽 안락의자까지 모두 미국식이었다.

한수는 이 집안 식구들이 요나 바닥이 아니라 침대에서 잔다고 추측했다.

이 집에는 오래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선이나 일본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널찍한 부엌 창문 너머로는 이웃집의 바위 정원이 내다보였다.

선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화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수에게 등을 돌린 채 난로만 보고 있었다.

한수는 선자의 낙타색 스웨터와 갈색 바지 속에 감춰진

몸의 곡선을 그려볼 수 있었다.

맨 처음 선자를 보았을 때

저고리 아래의 풍만하고 탱탱한 가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수는 가슴이 크고 탄력 있는 엉덩이를 가진 여자를 좋아했다. Hansoo liked women with big breasts and elastic hips.

그런데 선자의 알몸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But I've never seen her naked

선자와는 언제나 야외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그때마다 선자는 항상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수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내는

가슴이랄 것도, 엉덩이랄 것도 없는 여자였다.

게다가 누가 만지는 걸 역겨워했기 때문(skip, recording error)

한수도 아내와 관계를 갖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목욕을 해야 했고, I always had to take a bath before going to bed.

관계가 끝나고 나면 아내는 몇 시간이고 상관없이 오랫동안 목욕을 해야 했다.

아내가 딸 셋을 낳은 후, 한수는 아들을 포기했다.

심지어는 한수가 존경했던 장인도 한수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한수는 자신의 조선 현지처가 되는 걸 거절한 선자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결혼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자신은 선자와 노아를 아주 잘 보살펴줄 수 있었다.

자신과 선자는 아이를 더 가질 수도 있었다.

선자는 노점상을 하거나 식당 부엌에서 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는 요즘 젊은 여자들과 달리

자신의 돈을 받지 않는 선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에서는 프랑스 향수 한 병이나

이탈리아 구두 한 켤레로 여자를 살 수 있었다. A pair of Italian shoes could buy a woman.

한수가 부엌 식탁에 앉아 회상에 젖어 있을 때

선자는 그런 한수의 모습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Seon-ja was very anxious to see Han-soo like that.

한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선자는 항상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한수의 존재를 느꼇다. Sunja felt the existence of Hansu, who was always somewhere around her.

원치 않았지만 한수는 항상 그녀의 상상 속에 나타나는 존재였다.

노아가 사라진 이후, 두 부자가 선자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수는 지금 그녀의 부엌에서

그녀의 관심을 받으려고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He was patiently waiting for her attention.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없었다. In all these years, the two never ate together.

그는 왜 왔을까? 언제 가려는 걸까?

한수는 자기 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하는 사람이었다.

찻물을 끓이면서 선자는 생각했다.

'내가 돌아보면 그는 떠나버리고 없을까? 그럼 어쩌지?'

선자는 수입산 버터쿠키 몇 개를 접시에 꺼내놓았다.

찻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채워 넣고 찻잎을 넉넉히 집어 넣었다.

차를 살 돈도 없고, 살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 금세 떠 올랐다. It was easy to remember the days when there was no money for tea and a time when there was none to buy.

"매달 첫날에 노아가 잘 있다는 쪽지와 함께 돈을 보내줍니더.

소인은 항상 다르고예." 선자가 말했다.

"나도 노아를 찾아봤어.

노아는 아무도 자기를 찾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

지금도 노아를 찾고 있어.

선자야, 노아는 내 아들이기도 해."

어떻게 날 비난할 수 있어?

한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선자는 한수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선자는 쉰두 살이었다.

주름과 점이 생기지 않도록 밖에 나갈 때

항상 모자와 장갑을 챙기는 경희 언니는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았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선자는 자신의 짤막한 회색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평생 사랑스러웠던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사랑스럽지 못했다. I've never been lovable in my life, but now I'm definitely not lovable.

이런 여자를 원하는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남자에게 사랑받았던 선자의 인생은 모자수의 아버지와 함께 끝이 났다.

이제 선자는 주름살 가득한 평범한 여자였다.

허리와 허벅지도 굵어졌다.

얼굴과 손은 일만 하는 가난한 여자의 그것이었고,

지갑에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매력적인 여자는 될 수 없었다.

오래전에는 자신의 생명보다 한수를 더 간절하게 원했다.

한수와 헤어졌을 때도 한수가 돌아와 자신을 데려가주기를 바랐다. Even when I broke up with Hansoo, I hoped that Hansoo would come back and take him with me.

이제 한수는 칠십이 되었지만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변한 게 있다면 인상이 더 좋아졌다는 것뿐이었다.

한수는 여전히 숱이 많은 흰머리를 조심스럽게 빗어내려 Hansoo is still carefully combing her thick gray hair.

향이 나는 기름을 발라 다듬었다.

그리고 비싼 양복을 차려입고 수제 구두를 신었다.

한수는 우아한 정치가나 잘생긴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야쿠자 보스를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자는 욕실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거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거나 수치스러운 몰골은 아니었지만

들락날락거려도 누구 한 사람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그런 나이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선자는 차가운 물을 틀어서 세수를 했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한수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여자로 봐주기를 바랐다.

자신도 몰랐던 이런 속마음에 선자는 당혹스러워졌다.

선자의 인생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낮다고 선자는 생각했다.

그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선자는 작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불을 껐다.

한수는 부엌에서 쿠키를 먹고 있었다.

"여기서 사는건 괜찮아?"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녀석 말이야. 아주 예의 바르더군."

"모자수가 항상 잘 돌봐줍니더."

"모자수는 언제 집에 와?"

"곧 올 기라예. 전 저녁을 준비하는 게 좋겠어예."

"내가 도와줄까?" 한수가 양복 상의를 벗는 척했다.

선자가 웃었다.

"드디어 웃는군. 난 네가 웃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어."

두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죽어간다고예?" 선자가 물었다.

"전립선암이야. 훌륭한 의사들이 있어.

이 병 때문에 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빨리는 아니지."

"그러면 죽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네예."

"그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어."

선자는 거짓말을 한 한수에게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그녀는 한수를 사랑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문이 열렸을 때 솔로몬이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

재빠르게 빨간색 스웨터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솔로몬은

왼팔을 들어 급격하게 휜 L 자 모양으로 구부렸다.

그러고는 오른팔과 왼팔을 교차시켜 비스듬한 십자가를 만들었다.

아이는 왼손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소리를 내면서 험악한 포즈를 취했다.

하루키가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하루키는 신음하더니 폭발음을 냈다.

"야호, 내가 괴수를 물리쳤다!"

솔로몬이 소리치면서 하루키를 덮쳤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자수가 한수에게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 도토야마 하루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토야마입니다."

솔로몬이 다시 포즈를 취했다.

"제발 좀 봐줘요. 울트라맨. 도토 괴수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해요.

"어서 들어오거레이." 선자가 말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로몬이 선자와 하루키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토 괴수!"

"예!" 하루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째 새 울트라맨 사줬어."

"이야, 좋겠는데. 운이 좋은걸." 하루키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보여줄게. 이리 와!"

솔로몬이 하루키를 끌어당기자 다 큰 어른이 솔로몬의 방을 향해 요란스럽게 돌진해나갔다.

한수는 선자의 인생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조사했다. Hansu investigated everyone who came in and out of Sunja's life.

오사카에서 제복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재봉사의 장남인 도토야마 하루키 형사에 관한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루키에게는 아버지가 없었고, 지적장애아인 남동생이 있었다.

하루키는 엄마 밑에서 일하는 연상의 여자와 약혼했지만 동성애자였다. Haruki was engaged to an older woman who worked for her mother, but was gay.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관할구역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Even at a relatively young age, he was a highly respected figure in his jurisdiction.

저녁 식탁에서는 즐겁고 편안한 이야기가 오갔다. At the dinner table, pleasant and comfortable conversations were exchanged.

"요코하마로 와서 우리와 같이 살아요, 네?" "Come to Yokohama and live with us, okay?"

솔로몬이 하루키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흠, 그거 아주 좋은 일인데.

그럼 매일 울트라맨 놀이를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소로야. 어머니와 형제가 오사카에 살고 있어서 나는 오사카에서 살아야 해."

"아." 솔로몬이 한숨을 쉬었다.

"형제가 있는지 몰랐네. 동생이에요, 형이에요?

"동생이야."

"만나고 싶어요.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솔로몬이 말했다.

"그래. 그런데 내 동생이 부끄럼이 많아." 솔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도 부끄럼이 많아요."

선자가 고개를 가로저었고, 모자수는 미소를 지었다. Sunja shook her head, and Mozasu smiled.

"동생과 같이 오면 좋겠어요. 솔로몬이 조용히 말했다.

하루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Haruki nodded.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장애가 있는 동생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Because he had to take responsibility for his younger brother with a disability

누군가를 돌보는 걸 꺼렸다.

"여자 친구 아야메는 오사카보다 도쿄를 더 좋아해.

내 여자 친구는 여기 오면 더 좋아할걸." 하루키가 말했다.

"그럼 결혼해서 여기 올 수도 있겠네." 솔로몬이 말했다. "Then you can get married and come here." Solomon said.

모자수가 웃었다. "그렇지."

한수는 허리를 좀 더 곧게 펴고 앉았다. Hansu sat up a little straighter.

"요코하마 경찰서장이 내 친구야.

전근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봐주지." 한수가 제안을 했다.

그러고는 명함을 꺼내 젊은 경관에게 건네주었고,

하루키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모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자는 조용히 한수를 지켜보았다.

선뜻 도와주겠다는 한수가 의심스러웠다.

한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선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He was a person capable of doing things that Sunja did not notice or underst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