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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y of Samsung,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2편 | 사카린 밀수 사건 [브랜드 스토리]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2편 | 사카린 밀수 사건 [브랜드 스토리]

지난 영상에 이어 삼성 2편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 제일제당 휴전상태가 시작되자 많은 회사가 무역업에 뛰어들며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병철은 전부터 제조업으로 진출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정부가 수입대체산업 육성 계획을 추진하면서 제조업에 진출하기 아주 적절한 시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병철은 시장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삼성물산주식회사에서 수입 해오며 성공적으로 매출을 올려주던 설탕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설탕을 제조하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설탕은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고

가격 또한 세계 시장의 3배나 비싸게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미국으로 부터 원조 받던 원료 중에는 설탕의 원료인 원당이 있었습니다.

병철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잘 이용하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후 부산 전포동에 설탕 제조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일본 다나카 기계로부터 제당 기계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1953년 11월 5일

제일제당을 설립하게 됩니다.

수입설탕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품질의 제일제당의 설탕은

수입품의 3분의 1 가격으로 출시됐습니다.

그런데, 출시 초기 사람들은 제일제당의 설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국내에서 제조되는 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산은 싸고 나쁘다는 막연한 불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제일제당의 설탕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1953년 당시 100%였던 설탕의 수입의존도는

1954년엔 51%

1955년에는 27%

1956년에는 7%까지 크게 떨어지며

수입대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 브랜드가 바로 백설표입니다.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되어 나온 뒤

지금의 CJ제일제당이 됩니다.

2. 제일모직 삼성물산에 이어 제일제당까지 계속해서 사업이 성공하면서 병철은 새로운 기업을 하나하나 일으키는 창조의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떠올렸습니다.

제일제당은 '식'에 해당하는 사업이었고

이번에는 '의'에 해당하는 사업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국내 섬유산업의 상황은 아주 열악해서

군용 모포 수준의 제품 정도만 생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한 것이었습니다. 마카오를 통해 밀수한 영국제 복지 로 맞춘 양복도 있었지만

일반 월급쟁이의 3달치 월급보다 더 비쌌습니다.

그래서 이 양복을 입은 사람은 마카오신사라고 불리며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병철은 일반인들도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전통 영국 모직과 상대가 되겠어?"

"제일제당에서 돈 좀 벌더니 세상이 만만하지?"

등의 싸늘한 반응만 되돌아왔습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걱정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국내 최초로 모직 공장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내 경영진은 작은 규모로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병철은 생산원가를 낮추면서도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권유로 일본제 기계 대신 서독제 기계를 들여와서

대구 침산동에 7만평 대지를 확보하여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제일모직 소모사공장 완공을 시작으로

1956년 초까지 방모, 직포, 염색, 가공 공장을 차례대로 완공했습니다. 한편 공장이 건설되는 동안에도 원모 염색, 가공, 방직, 기계 등의여러 영역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 보내

6개월간 관련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일모직은 원단을 생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덴텍스입니다.

비록 영국산 모직만큼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국내 최고의 모직 원단임은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영국산 모직의 5분의 1 가격으로 가성비가 뛰어났습니다.

또한 병철은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직접 양복점을 차리고 양복을 생산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양복점의 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와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를 합쳐

'장미라사'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첫해에는 큰 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골덴텍스 양복을 일부러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값싸고 품질 좋은 골덴텍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일모직의 성공 이후 모직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생산한 모직만으로 완전 자급이 가능해지자 1958년 1월

정부는 소모사 수입을 완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한 이후부터

병철은 재물이 있는 가문, '재벌'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3. 부정축재자 1956년

이승만 정부는 공매불하를 통해 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원래는 정부 소유의 은행을 민영화하여 금융자율화를 하고자 했으나 5번이나 유찰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정부는 불하조건을 조정한 뒤 재벌들에게 은행주를 사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천광사 지금의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을

곰표로 유명한 대한제분이 상업은행을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삼성은 흥업은행 지분의 83%, 조흥은행 지분의 55% 등 4개의 시중은행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며 금융기관을 장악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병철은 호남비료 주식 45%, 한국타이어 주식 50%, 삼척시멘트 주식 70% 등 여러 기업의 주식들도 구매했습니다. 그러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통한 독재를 타도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습니다.

이후 1961년 5월 16일

당시 육군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961년 5월 29일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는데

그 명단의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병철이었습니다. 결국 병철을 포함한 27개 기업의 소유주들에게 378억 8백만 환이라는 추징금이 징수 되었고

그중 삼성은 103억 4백만 환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환'이라는 화폐단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원'의 10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철은 부정축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를 만나서

"지금의 세법은 전시상태 세법 그대로 적용 되고 있어서"

"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세율 그대로 납부했다면 기업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억울함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철은 당장에 벌금을 내는 대신

기업가들에게 투자를 하여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병철의 요청은 투자명령이라는 법령으로 시행됩니다. 한편 1946년

일본에서는 2차세계대전으로 무너진 경제를 다시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민간 경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게이단렌이라는 경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철은 이를 벤치마킹하여 1961년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라는 경제 단체를 설립하고 이곳의 초대 회장이 됩니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국경제인연합회, 전경련입니다.

4.한국비료

대지주의 아들로 자라 직접 대지주가 되기도 했던 병철은

농업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 비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비료공장을 지으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4.19혁명과 5.16 쿠데타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으며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6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박 대통령은 병철에게 정부가 적극 지원할테니 비료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1964년 8월

병철은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산에 대규모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는 1년에 18만톤을 생산하는 당시 세계 최대 비료공장이 있었고 소련에는 1년에 30만톤을 생산하는 비료공장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철은 그보다 더 큰 비료 공장을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조율한 끝에 연 33만톤을 생산하는 한국비료의 공장이 착공됐습니다.

그렇게 공장 건설이 80% 정도 진행 될 무렵이었습니다.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

사건의 발생은 4개월 전인 1966년 5월 24일 한국비료 공장의 건설을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건설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비료의 원료인 사카린 55t 정도와 양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 밀수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것들을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한일 양국 정치인들이 나눠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직접 대검에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를 지시하며 삼성과의 선긋기에 나섰고

당시 한국 비료 상무였던 병철의 둘째 아들 창희는 구속되었습니다. 결국 1966년 9월 22일

병철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의 자기 지분 51%를 국가에 기부하 며 재계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참고로 이 사건 때문에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두한은 국회 대정부 질의 도중 "똥이나 처먹어 이 XX들아"라고 외치며

똥물을 뿌린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병철의 첫째 아들 맹희는 회고록을 통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자신이 직접 현장 지휘했으며

박정희 정부와 삼성이 공모한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한국비료를 국가에 기부한지 30년 가까이 지난 1994년이 되서야 다시 삼성이 인수하여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바꾸는데

이후 2015년

롯데케미칼에 매각하며 지금의 롯데정밀화학이 되었습니다.

5. 중앙일보&tbc; 4.19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며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병철은 경제인의 힘에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이 될까?'하고 생각도 했지만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게 없을까?'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 바로 언론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1964년 5월 9일 라디오 서울이

12월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이 개국되는데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tv 상업 방송이었습니다.

1965년 9월 22일

병철은 서울 서소문동에 10층짜리 현대식 건물 중앙 매스컴 센터를 지은 뒤

다른 신문사 기자 다수를 스카우트하며 새로운 신문사를 창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앙일보입니다.

이후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을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합하여 동양방송, TBC가 됩니다. 그런데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언론을 만들고자 시작하긴 했지만

막상 사카린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은 삼성에 우호적인 보도를 하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습니다.

병철은 처음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창간할 때 홍진기를 사장에 앉히고 경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1967년 4월 30일

병철과 진기는 사돈의 연을 맺게 되는데

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와 진기의 첫째 딸, 홍라희가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12.12 사태가 일어납니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TBC를 강제로 빼앗아 KBS에 흡수시키는 언론통폐합을 추진했고 결국 1980년 11월 30일

TBC는 고별방송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후 중앙일보만 살아남아 운영되다가

1999년 삼성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홍진기의 아들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던 홍석현에게 인수되었습니다.

그러던 2011년 12월 1일

신문사가 종합편성채널 사업이 가능하게 되면서 개국된 채널이

바로 JTBC입니다.

한편 1968년 봄

병철은 자신이 만든 안양골프장 지금의 안양베네스트골프클럽에서 40년 지기 절친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당시 전자 산업으로 잘나가고 있던 금성사의 대표 구인회였습니다. 1956년

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인회의 셋째 아들, 구자학이 결혼을 하며 이들은 사돈의 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병철이 던진 한 마디에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습니다. 삼성 3편에서 계속됩니다.


당신이 몰랐던 삼성의 역사 2편 | 사카린 밀수 사건 [브랜드 스토리] The History of Samsung You Didn't Know, Part 2 | Saccharin Smuggling [Brand Story]

지난 영상에 이어 삼성 2편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Let's continue from the last video with part 2 of Samsung episode.

1\. 제일제당 1\. Cheil Jedang 휴전상태가 시작되자 많은 회사가 무역업에 뛰어들며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Right after the ceasefire, a lot of companies entered the trading business, and the competition got fierce. 병철은 전부터 제조업으로 진출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Byung-chul had already had a plan to start a manufacturing business, 때마침 정부가 수입대체산업 육성 계획을 추진하면서 and just in time, the government started its development program for import substitution industry, 제조업에 진출하기 아주 적절한 시기가 만들어졌습니다. so it was a perfect timing to enter the manufacturing industry.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병철은 시장조사를 시작했습니다. Before launching his new business, Byung-chul started with market research.

그러다 삼성물산주식회사에서 수입 해오며 And then he thought of sugar, which Samsung C&T; Corporation 성공적으로 매출을 올려주던 설탕이 떠올랐습니다. was importing and was making good profit with. 당시 국내에는 설탕을 제조하는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At the time, there were no facilities for manufacturing sugar,

설탕은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고 so sugar supply had to rely on import,

가격 또한 세계 시장의 3배나 비싸게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and the price was three times that of the global average. 한편 미국으로 부터 원조 받던 원료 중에는 설탕의 원료인 원당이 있었습니다. Meanwhile, raw sugar was one of the raw materials that the US granted.

병철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잘 이용하여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Byung-chul took advantage of this situation and launched his business.

이후 부산 전포동에 설탕 제조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Later, he secured a piece of land in Jeonpo-dong, Busan, to build a sugar factory 일본 다나카 기계로부터 제당 기계를 들여왔습니다. and imported sugar manufacturing machines from Tanaka Machinery in Japan.

그리고 1953년 11월 5일 And on November 5th, 1953,

제일제당을 설립하게 됩니다. he established Cheil Jedang.

수입설탕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품질의 제일제당의 설탕은 Cheil Jedang's sugar matched imported sugar in quality

수입품의 3분의 1 가격으로 출시됐습니다. and was sold at 1/3 the price of imported sugar.

그런데, 출시 초기 사람들은 제일제당의 설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However, it is said that when it first came out, people did not even look at Cheil Jedang's sugar. 당시에 국내에서 제조되는 제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At the time, there were no products manufactured within the country,

국산은 싸고 나쁘다는 막연한 불신이 있었습니다. so there was a distrust that domestic products were cheap and low-quality.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자 제일제당의 설탕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But 6 months later, Cheil Jedang's sugar started gaining popularity.

덕분에 1953년 당시 100%였던 설탕의 수입의존도는 Thanks to that, while sugar supply was 100% dependent on import,

1954년엔 51% it was only 51% in 1954,

1955년에는 27% and 27% in 1955,

1956년에는 7%까지 크게 떨어지며 and dropped to 7% in 1956,

수입대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achieving the goal of substituting import.

그리고 1965년 제일제당에서 만든 설탕 브랜드가 And the sugar brand name that Cheil Jedang made in 1965 바로 백설표입니다. is Baekseolpyo.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되어 나온 뒤 Cheil Jedang was separated from Samsung corporations in 1993,

지금의 CJ제일제당이 됩니다. and became the CJ Cheil Jedang of today.

2\. 제일모직 2\. Cheil Industries. 삼성물산에 이어 제일제당까지 계속해서 사업이 성공하면서 From Samsung C&T; to Cheil Jedang, Byung-chul had a series of business success 병철은 새로운 기업을 하나하나 일으키는 창조의 기쁨을 느꼈다고 합니다. and took joy from raising a new company.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And he came to plan another business. 그는 인간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떠올렸습니다. He thought of clothes, food, and housing, the basic necessities in life.

제일제당은 '식'에 해당하는 사업이었고 Cheil Jedang pertained to food industry,

이번에는 '의'에 해당하는 사업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and he decided to start a business related to clothing. 당시 국내 섬유산업의 상황은 아주 열악해서 At the time, the domestic fiber industry was in a dire situation,

군용 모포 수준의 제품 정도만 생산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and the only product they could make was the military blanket. 게다가 대부분의 양복은 미군 군복을 염색한 것이었습니다. Besides, most suits back then were American soldier uniforms dyed in different colors. 마카오를 통해 밀수한 영국제 복지 로 맞춘 양복도 있었지만 It was possible to smuggle tailored British suits through Macau

일반 월급쟁이의 3달치 월급보다 더 비쌌습니다. but the price was more than 3 times the average monthly income.

그래서 이 양복을 입은 사람은 마카오신사라고 불리며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So, people wearing these suits were called "gentlemen of Macau", and the suit became a symbol of affluence. 이런 상황 속에서 병철은 일반인들도 값싸고 질 좋은 양복을 입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In this situation, Byung-chul hoped that common people could wear cheap, good-quality suits 1954년 9월 15일 and on September 15th, 1954,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he established Cheil Industries.

그런데, "전통 영국 모직과 상대가 되겠어?" However, people said, "Could this match the traditional British clothing?"

"제일제당에서 돈 좀 벌더니 세상이 만만하지?" "He forgot how tough the world is after his success at Cheil Jedang."

등의 싸늘한 반응만 되돌아왔습니다. And his efforts were only met with cynical reaction.

회사 내부적으로도 걱정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There were concerns within the company, as well.

국내 최초로 모직 공장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내 경영진은 작은 규모로 시작하길 바랐습니다. They were about to make the first fabric factory in the country, and the board wanted to start at a small scale.

하지만 병철은 생산원가를 낮추면서도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However, Byung-chul thought that in order to make quality products while lowering the manufacturing price

대규모 최신식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they had to build an up-to-date factory of a large scale. 정부의 권유로 일본제 기계 대신 서독제 기계를 들여와서 Following the government's advice, they imported machines from West Germany, instead of Japan,

대구 침산동에 7만평 대지를 확보하여 secured about 60 acres of land in Chimsan-dong, Daegu,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and started building a state-of-the-art factory of the largest scale.

그리고 1955년 12월 And in December, 1955,

제일모직 소모사공장 완공을 시작으로 Cheil industries worsted factory was completed,

1956년 초까지 방모, 직포, 염색, 가공 공장을 차례대로 완공했습니다. and by early 1956 the factories for wool, woven fabric, dying, and manufacturing were completed, as well. 한편 공장이 건설되는 동안에도 원모 염색, 가공, 방직, 기계 등의여러 영역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While the factories were under construction, staff members in charge of raw stock dying, manufacturing, textiles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 보내 were sent to Britain, France, Germany, Italy, etc.

6개월간 관련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and studied relevant technologies for six months.

그렇게 제일모직은 원단을 생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And so, Cheil Industries started manufacturing fabric. 그것이 바로 골덴텍스입니다. And that was "Goldentex".

비록 영국산 모직만큼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국내 최고의 모직 원단임은 분명했습니다. Of course, it was not as good as the British fabric, but it was still the best wool fabric in the country.

게다가 영국산 모직의 5분의 1 가격으로 가성비가 뛰어났습니다. Also, it was very cost-efficient at 1/5 the price of British fabric.

또한 병철은 서울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직접 양복점을 차리고 양복을 생산 했습니다. Byung-chul also opened a tailor shop on the first floor of Cheil Industries building in Euljiro and started making suits as well.

그리고 이 양복점의 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꽃인 '장미'와 유럽의 양복지를 뜻하는 '라사'를 합쳐 And he combined his favorite flower "rose" and the European word for cloth "Rasa"

'장미라사'라 지었습니다. and named his tore "Roserasa".

하지만, 국산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첫해에는 큰 적자를 보게 됩니다. However, due to the distrust of domestic products, he suffered a big deficit in the first year.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제일모직에서 생산한 골덴텍스 양복을 일부러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But he still did not give up and wore Goldentex suits of Cheil Industries wherever he went.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값싸고 품질 좋은 골덴텍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And as time passed, the cheap and good-quality Goldentex gained popularity. 제일모직의 성공 이후 모직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After the success of Cheil Industries, a lot of new fabric companies were established. 국내에서 생산한 모직만으로 완전 자급이 가능해지자 And now that they were producing enough fabric for domestic consumption, 1958년 1월 in January, 1958,

정부는 소모사 수입을 완전 금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the government completely banned the import of yarn (worsted)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한 이후부터 After his success with Cheil Jedang and Cheil industries,

병철은 재물이 있는 가문, '재벌'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people started calling Byung-chul "a family of means", or "Chaebol".

3\. 부정축재자 3\. Illicit accumulation of wealth 1956년 In 1956,

이승만 정부는 공매불하를 통해 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Syngman Rhee administration sought to privatize banks through public auctioning.

원래는 정부 소유의 은행을 민영화하여 금융자율화를 하고자 했으나 At first, they sought to liberalize finances by privatizing government-own bank, 5번이나 유찰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but in five auctions there were no bids made.

결국 정부는 불하조건을 조정한 뒤 재벌들에게 은행주를 사달라고 요청하게 되는데 In the end, the government made changes to the terms of sale and requested corporate owners to buy the bank stocks.

이때 천광사 지금의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을 So, Cheongwangsa of the time, which is Samho Corporation of today, came to own the Savings Bank,

곰표로 유명한 대한제분이 상업은행을 Daehan Flour, which is famous for "Bear Brand", came to own the Commercial Bank,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하게 됩니다. And Gaepung Corporation came to own Seoul Bank.

그리고 삼성은 흥업은행 지분의 83%, 조흥은행 지분의 55% 등 And Samsung also bought 83% of all shares of Heungop Bank and 55% of shares of Choheung Bank. 4개의 시중은행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며 금융기관을 장악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병철은 호남비료 주식 45%, 한국타이어 주식 50%, Not only the bank stake, but Samsung also bought stock of many companies, 삼척시멘트 주식 70% 등 여러 기업의 주식들도 구매했습니다. 그러던 1960년 4월 19일 Then in 19th April 1960,

학생들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통한 독재를 타도하는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960년 4월 26일 In the end, on 26th April 1960,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했습니다. Syngman Rhee resigned from the president's office.

이후 1961년 5월 16일 After that, Chung-hee Park who was

당시 육군 소장 박정희의 주도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the major general back then caused the May 16 coup on 16th May 1961.

그리고 1961년 5월 29일 On 29th May 1961,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되는데 11 businessmen were arrested for illegally accumulating wealth,

그 명단의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병철이었습니다. and Byung-chul was the first on the list. 결국 병철을 포함한 27개 기업의 소유주들에게 378억 8백만 환이라는 추징금이 징수 되었고 In the end, 27 CEOs, including Byung-chul, ended up paying the additional fee of 37.8 billion and 8 million Hwan,

그중 삼성은 103억 4백만 환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습니다. and Samsung paid 10.3 billion and 4 million Hwan, which was 27% of the total. 여기에서 사용된 '환'이라는 화폐단위는 The Hwan we are talking about right now is worth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원'의 10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10 of the Korean Won we are using at the moment. 그런데 However,

병철은 부정축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를 만나서 during the process of solving the issue of illegal wealth, Byung-chul met Chung-hee Park, the vice-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for National Reconstruction,

"지금의 세법은 전시상태 세법 그대로 적용 되고 있어서" and complained of the unfairness. He said,

"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The tax rate is still the same as the wartime where we pay

"세율 그대로 납부했다면 기업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1,200 Hwan when we earn 1,000 Hwan. 억울함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If we keep this up, we won't be able to run a business."

그리고 병철은 당장에 벌금을 내는 대신 He also added to give companies a chance to

기업가들에게 투자를 하여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병철의 요청은 투자명령이라는 법령으로 시행됩니다. In the end, Byung-chul's request is granted through a law called Investment Order. 한편 1946년 On the other hand, in 1946,

일본에서는 2차세계대전으로 무너진 경제를 다시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Japanese private businessmen voluntarily established an organization called Keidanren(Japan Business Federation),

민간 경제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게이단렌이라는 경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to reconstruct the crashed economy after World War II.

시간이 흘러 병철은 이를 벤치마킹하여 After some time, Byung-chul benchmarked it 1961년 8월 16일 and found an organization called

한국경제인협회라는 경제 단체를 설립하고 이곳의 초대 회장이 됩니다. The 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on 16th August 1961 and served as the first chairman.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국경제인연합회, 전경련입니다. The place you're witnessing is The 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4.한국비료 4\. Korean fertilizer

대지주의 아들로 자라 직접 대지주가 되기도 했던 병철은 As the son of a landlord and the landlord himself,

농업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 비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Byung-chul knew that we need fertilizer to enhance agricultural production. 하지만 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But back then, all the fertilizer used in Korea was imported.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비료공장을 지으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Byung-chul had the plans to build a fertilizer factory in his mind from years ago, 4.19혁명과 5.16 쿠데타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으며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but hasn't started it with all the social turmoils like April Revolution and May 16 coup.

그러던 1963년 10월 15일 Then on 15th October 1963,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당선되었습니다. Chung-hee Park was elected as the 5th president of Korea. 이후 박 대통령은 병철에게 정부가 적극 지원할테니 비료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President Park requested Byung-chul to build a fertilizer factory, as the government will offer full support. 그렇게 1964년 8월 That's how Byung-chul established

병철은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Korean Fertilizer Corporation in August 1964

울산에 대규모 비료 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and started planning to build a large factory in Ulsan. 일본에는 1년에 18만톤을 생산하는 당시 세계 최대 비료공장이 있었고 소련에는 1년에 30만톤을 생산하는 비료공장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and the Soviet Union owned a factory that produces 300 thousand tons a year.

그래서 병철은 그보다 더 큰 비료 공장을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Hence, Byung-chul decided to build a larger factory than those two.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조율한 끝에 연 33만톤을 생산하는 한국비료의 공장이 착공됐습니다. After considering many situations, they started to build a Korean fertilizer factory where they can produce 330 thousand tons a year.

그렇게 공장 건설이 80% 정도 진행 될 무렵이었습니다. However, when 80% of the factory was constructed,

1966년 9월 15일 Kyunghyang Shinmun

경향신문을 통해 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trumpeted one incident called Saccharin Smuggling 일명 사카린 밀수 사건 on 15th September 1966.

사건의 발생은 4개월 전인 1966년 5월 24일 The incident happened 4 months ago on 24th May 1966, 한국비료 공장의 건설을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건설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where they imported toilet bowls, refrigerators, air conditioners, and telephones 비료의 원료인 사카린 55t 정도와 양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대량 밀수한 것이었습니다. along with 55 tons of saccharin(raw material of fertilizer) while they were importing building materials from Mitsui & Co. of Japan. 이후 이것들을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한일 양국 정치인들이 나눠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직접 대검에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전면 수사를 지시하며 But President Park ordered Supreme Prosecutors' Office to invest the incident thoroughly 삼성과의 선긋기에 나섰고 to show it doesn't have anything to do with Samsung.

당시 한국 비료 상무였던 병철의 둘째 아들 창희는 구속되었습니다. In the end, Chang-hee, the second son of Byung-chul, who was serving as the director of Korean Fertilizer Corporation, was arrested. 결국 1966년 9월 22일 On 22nd September 1966,

병철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의 자기 지분 51%를 국가에 기부하 며 Byung-chul announced that he would donate 51% of his stock on Korean Fertilizer to the country through a press conference 재계은퇴를 선언했습니다. and declared retirement.

참고로 이 사건 때문에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두한은 For your information, because of this incident, 국회 대정부 질의 도중 "똥이나 처먹어 이 XX들아"라고 외치며 Du-han Kim who was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똥물을 뿌린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But as the twist,

훗날 병철의 첫째 아들 맹희는 회고록을 통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자신이 직접 현장 지휘했으며 Byung-chul's eldest son called Maeng-hee confessed in the memoirs that he directed the Saccharin Smuggle on the scene

박정희 정부와 삼성이 공모한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한국비료를 국가에 기부한지 30년 가까이 지난 1994년이 되서야 In 1994, which is after 30 years of donating Korean Fertilizer Corporation to the country, 다시 삼성이 인수하여 삼성정밀화학으로 사명을 바꾸는데

이후 2015년 Later, in 2015,

롯데케미칼에 매각하며 지금의 롯데정밀화학이 되었습니다. Samsung sold the corporation to Lotte Chemical, and now it is named LOTTE Fine Chemical.

5\. 중앙일보&tbc; 5\. JoongAng Ilbo & TBC 4.19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며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힌 병철은 After the April Revolution and May 16 coup, Byung-chul got a stigma of an illegal moneymaker, 경제인의 힘에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and he felt the limits to the power that the businessman can have.

그래서 '정치인이 될까?'하고 생각도 했지만 He thought of becoming a governor,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게 없을까?' 생각한 끝에 but to contribute to society with greater power than the government,

종합 매스컴 바로 언론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he established a press company.

그렇게 1964년 5월 9일 라디오 서울이 That's how the first commercial broadcasting companies were found,

12월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이 개국되는데 which were KFOX established on 9th May 1964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tv 상업 방송이었습니다. and Tongyang TV established in December of the same year.

1965년 9월 22일 On 22nd September 1965,

병철은 서울 서소문동에 10층짜리 현대식 건물 중앙 매스컴 센터를 지은 뒤 Byung-chul constructed a modern building for JoongAng Mass Communication Center in Seosomun-dong, Seoul,

다른 신문사 기자 다수를 스카우트하며 새로운 신문사를 창간했습니다. and established a new press company by scouting many journalists from other media. 그것이 바로 중앙일보입니다. That is what we address as JoongAng Ilbo today.

이후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을 신사옥으로 이전하고 Later, he moved KFOX and Tongyang TV to the new building and combined the two,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합하여 동양방송, TBC가 됩니다. resulting in Tongyang Broadcasting Company, a.k.a TBC. 그런데 Although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언론을 만들고자 시작하긴 했지만 they started with the goal to contribute to the harmony and stability of the society,

막상 사카린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JoongAng Ilbo and TBC got the backlash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은 삼성에 우호적인 보도를 하다가 역풍을 맞기도 했습니다. by taking Samsung's side during the Saccharin Smuggle Incident.

병철은 처음 라디오 서울과 동양텔레비전방송을 창간할 때 Byung-chul had Jin-ki Hong as a president and run the company 홍진기를 사장에 앉히고 경영을 맡겼습니다. when he first founded KFOX and Tongyang Broadcasting Company.

그리고 1967년 4월 30일 And on April 30, 1967,

병철과 진기는 사돈의 연을 맺게 되는데 Byung-chul and Jin-ki entered matrimonial relation.

병철의 셋째 아들, 이건희와 진기의 첫째 딸, 홍라희가 결혼을 한 것입니다. Byung-chul's third son, Kun-hee Lee and Jin-ki's first daughter, Ra-hee Hong got married. 그러다 1979년 12월 12일 Then on December 12, 1979,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12.12 사태가 일어납니다.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took place where new military force with Doo-hwan Chun as the central figure caused a military revolt.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는 TBC를 강제로 빼앗아 KBS에 흡수시키는 언론통폐합을 추진했고 Doo-hwan Chun government seized power and pushed ahead with the consolidation of press by taking TBC by force and merging it into KBS. 결국 1980년 11월 30일 Eventually, on November 30th, 1980,

TBC는 고별방송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TBC disappeared into history after the farewell broadcast.

이후 중앙일보만 살아남아 운영되다가 After that, only JoongAng Ilbo survived and was operated

1999년 삼성으로부터 분리되면서 then in 1999, it was separated from Samsung

홍진기의 아들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던 홍석현에게 인수되었습니다. and was acquired by Hong Seok-hyun, the son of Hong Jin-ki and the president of JoongAng Ilbo at the time.

그러던 2011년 12월 1일 But on December 1, 2011,

신문사가 종합편성채널 사업이 가능하게 되면서 개국된 채널이 JTBC was established as it became possible for newspaper publishing companies

바로 JTBC입니다.

한편 1968년 봄 In the spring of 1968,

병철은 자신이 만든 안양골프장 지금의 안양베네스트골프클럽에서 Byung-chul came across his best friend of 40 years 40년 지기 절친을 만나게 됩니다. at Anyang golf course, now Anyang Benest golf club, that he made.

바로 당시 전자 산업으로 잘나가고 있던 금성사의 대표 구인회였습니다. 1956년 In 1956,

병철의 둘째 딸, 이숙희와 인회의 셋째 아들, 구자학이 결혼을 하며 Byung-chul's second daughter, Sook-hee Lee and In-Hwoi's third son, Ja-hak Koo got married 이들은 사돈의 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and they also became in-laws.

그런데 But

이날 병철이 던진 한 마디에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습니다. their relationship got totally broken with a single word that Byung-chul said. 삼성 3편에서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in Samsung part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