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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개인학습 가이드 (The Linguist), 스물 다섯: 대기업 일본

스물 다섯: 대기업 일본

대기업 일본

70, 80 년대초의일본은오늘의일본과달랐다.

훨씬덜개방된사회였다. 일본에서의 첫 4 년동안 나는 캐나다 대사관 주서기관으로 일했다. 이 기간동안 북미의 목재 플랫폼 건축 방식을 일본에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숙련목수의 수가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고심하고 있던 일본 건설성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가옥 건축이 한창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동참하고 있는 도쿄 청년 목재인 조합의 멤버들이라든지 건설성 관리들과 같은 일본쪽 관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반면, 외교 업무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감, 사생활을 침범하는 잦은 파티와 연회 등은 덜 반가왔다. 1974년 10월, 대사관 근무가 끝날 즈음 아시아 연구를 위해 대학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캐나다의 선두 목재회사인 씨보드 럼버 세일즈 (Seaboard Lumber Sales) 로부터 도쿄에 지사를 설치하는 문제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기회였다. 그 제의를 수락하여 1974 년부터 1977 년까지 씨보드사의 도쿄지사에 근무하다가 가족과 함께 밴쿠버로 돌아왔다. 그 후, 또 다른 캐나다 목재회사인 맥밀란 블로델사 (MacMillan Bloedel Ltd.) 의 일본 업무를 담당하며 1981 년부터 2 년간 더 일본에 머물렀다. 그 당시 일본은 자국 제품은 해외로 다량 수출하면서도 수입의 문은 천천히 마지못해 열고 있던 중이었다. 맥밀란 블로델사의 아시아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목재뿐 아니라 제지나 펄프 거래까지 담당하고 있었으며 가끔은 장벽에 부딪혀야만 했다. 일본의 제지 산업계는 사용자, 생산자, 정부가 단단히 얽혀 있다. 따라서 캐나다 제지를 선전하는 우리 회사 일본인 직원들의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반역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1981 년, “종이가 떨어진 날”이라는 유명한책이일본국제무역및산업성의한관리에의해가명으로출판되었다. 그 책의 메시지는 일본인 신문 발행가가 외국 종이를 수입한다면 그건 언론의 자유를 외국의 음모에 넘겨주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어 오늘날 일본의 제지회사들은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 그들의 공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 자유화 압력을 받고 있던 1980 년대, 일본 전신전화국(NTT)은 전화 번호부 제지 입찰에 외국 제지업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우리 회사가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첫 번째 외국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 테스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본 기업과 고객간의 돈독한 인간관계에 끼어들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 일본이 하나의 거대한 기업과도 같았다. 우리의 경쟁 상대였던 일본 제지업자들은 우리측 주요 고객 NTT 에서 퇴직한 고위 경영자들을 이사회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NTT 의 퇴직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지정 대리업체를 통해 NTT 와 거래를 해야했다. 인쇄회사들 또한 NTT의 전 직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뚫고 캐나다 제지 시장을 확보하기까지는 나의 일본어 실력이 크게 한 몫을 했다. 일본의 제지 시장은 대형 생산업체 몇몇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반 독점화 거래 현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목재 시장은 달랐다. 목재시장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목재 소매업자, 도매업자, 건축업자들 다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구성원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목재 시장이 현대적인 제지 시장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나는일본과의목재거래에점점더깊이관여하게되었다. 우선일본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제품 디자인 및 생산의 우수성을 추구하는 정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통적인 건축 방식과 목수의 기술에 대한 존중, 나무에 대한 이해와 관심 등 그 모든 태도가 깊고 뚜렷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물론 일본사회의 보수적인 면도 맛보았다. 때때로 나는 회사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정해진 방식을 이탈하곤 했는데 그것이 일본인 관계자들을 언짢게 했다. 일본 목재무역신문은 한 때 나를 “카프만 태풍”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사업가들은 설령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상호존중의 자세만은 잃지 않았다. 상호존중 정신은 일본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며 일본인들이 단합하고 성공하는데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스물 다섯: 대기업 일본 Fünfundzwanzig: Big Business Japan Twenty-Five: Big Business Japan 二十五: 大企業日本

대기업 일본 Big business Japan

70, 80 년대초의일본은오늘의일본과달랐다. Japan in the 70's and early 80's was different from today's Japan.

훨씬덜개방된사회였다. It was a much less open society. もっとオープンな社会だった。 일본에서의 첫 4 년동안 나는 캐나다 대사관 주서기관으로 일했다. During my first four years in Japan, I worked as a Canadian Embassy Juicer. 이 기간동안 북미의 목재 플랫폼 건축 방식을 일본에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관여하고 있었다. During this time, he was involved in a program that introduced the North American timber platform construction method to Japan. 그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숙련목수의 수가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고심하고 있던 일본 건설성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 The program gave hope to the construction of Japan, which was struggling with the prediction that the number of skilled carpenters needed to build buildings in a traditional way would be insufficient. そのプログラムは、伝統的な方法で建物を建てるのに必要な熟練大工の数が不足するだろうと予想して苦労していた日本の建設性に希望を与えてくれた。 생활수준이 급속히 향상되고 가옥 건축이 한창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It was a time when living standards were rapidly improving and house construction was in full swing. 生活水準が急速に向上し、家屋建築が盛んなブームを成し遂げた時期だった。 나는 그 프로그램에 동참하고 있는 도쿄 청년 목재인 조합의 멤버들이라든지 건설성 관리들과 같은 일본쪽 관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I enjoyed doing it because I had close relationships with members of the Tokyo Youth Lumber Union who were participating in the program, and with Japanese officials such as construction officials. 私はその番組に参加している東京青年木材の組合のメンバーたちとか建設性管理などの日本の関係者たちと近い関係を維持していたので、その仕事を推進するのがとても楽しかった。 반면, 외교 업무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감, 사생활을 침범하는 잦은 파티와 연회 등은 덜 반가왔다. On the other hand, the social obligations of diplomatic affairs and the frequent parties and banquets that invade privacy were less welcome. 一方、外交業務に伴う社会的義務感、私生活を侵犯する頻繁なパーティーや宴会などはあまり嬉しかった。 1974년 10월, 대사관 근무가 끝날 즈음 아시아 연구를 위해 대학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캐나다의 선두 목재회사인 씨보드 럼버 세일즈 (Seaboard Lumber Sales) 로부터 도쿄에 지사를 설치하는 문제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In October 1974, when I was thinking about returning to university for my research in Asia at the end of my embassy, I was asked to set up a branch office in Tokyo from Seaboard Lumber Sales, Canada's leading timber company. The offer came in. 1974年10月、大使館勤務が終わる頃にアジア研究のために大学に戻るかという考えをしていた中、カナダの先頭木材会社であるシーボード・ランバーセールス(Seaboard Lumber Sales)から東京に支社を設置する問題を引き受けてほしいという提案が入った。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기회였다. It was an opportunity I couldn't have if I hadn't studied Japanese. 日本語を勉強していなければ、ありえない機会だった。 그 제의를 수락하여 1974 년부터 1977 년까지 씨보드사의 도쿄지사에 근무하다가 가족과 함께 밴쿠버로 돌아왔다. In accepting the offer, he worked at Seaboard's Tokyo office from 1974 to 1977, then returned to Vancouver with his family. その提案を受け入れ、1974年から1977年までシーボード社の東京支社に勤務し、家族と共にバンクーバーに戻った。 그 후, 또 다른 캐나다 목재회사인 맥밀란 블로델사 (MacMillan Bloedel Ltd.) After that, another Canadian lumber company, MacMillan Bloedel Ltd. その後、別のカナダの木材会社であるマクミラン・ブロデルサ(MacMillan Bloedel Ltd.) 의 일본 업무를 담당하며 1981 년부터 2 년간 더 일본에 머물렀다. In charge of Japanese affairs in Japan, he has stayed in Japan for two more years since 1981. の日本業務を担当し、1981年から2年間さらに日本にとどまった。 그 당시 일본은 자국 제품은 해외로 다량 수출하면서도 수입의 문은 천천히 마지못해 열고 있던 중이었다. At that time, Japan was exporting a large amount of its products abroad, but the doors of import were slowly opening reluctantly. その当時、日本は自国製品は海外に多量輸出しながらも輸入の扉はゆっくりと渇いて開いていた中だった。 맥밀란 블로델사의 아시아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목재뿐 아니라 제지나 펄프 거래까지 담당하고 있었으며 가끔은 장벽에 부딪혀야만 했다. I was in charge of Macmillan Blodel's Asian business, and I was in charge of not only dealing with wood, but also paper and pulp, and sometimes had to run into barriers. マクミラン・ブロデル社のアジア業務を担当していた私は、木材だけでなく製紙やパルプ取引まで担当しており、時には障壁にぶつか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일본의 제지 산업계는 사용자, 생산자, 정부가 단단히 얽혀 있다. In Japan's paper industry, users, producers, and government are tightly intertwined. 日本の製紙産業界は、ユーザー、生産者、政府がしっかりと絡み合っている。 따라서 캐나다 제지를 선전하는 우리 회사 일본인 직원들의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Therefore, the position of Japanese employees of our company to promote Canadian paper was not difficult. そのため、カナダ製紙を宣伝する我が社の日本人職員の立場が、これまで困惑したわけではなかった。 거의 반역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It was almost called a traitor. ほとんど反逆者と呼ばれるほどだった。 1981 년, “종이가 떨어진 날”이라는 유명한책이일본국제무역및산업성의한관리에의해가명으로출판되었다. In 1981, the famous book "The Day The Paper Fell" was published under a pseudonym by an official of the Japan 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 1981年、「紙が落ちた日」という有名な本が日本国際貿易および産業省の管理によって仮名で出版された。 그 책의 메시지는 일본인 신문 발행가가 외국 종이를 수입한다면 그건 언론의 자유를 외국의 음모에 넘겨주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The message of the book was that if a Japanese newspaper publisher imports foreign paper, it is an act of handing over freedom of speech to foreign conspiracy. その本のメッセージは、日本人新聞発行者が外国紙を輸入するならば、それは言論の自由を外国の陰謀に渡す行為だということだった。 그러나 상황은 바뀌어 오늘날 일본의 제지회사들은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 그들의 공장을 가지고 있다. However, the situation has changed, and today Japanese paper companies have their factories all over the world, including Canada. しかし状況は変わり、今日の日本の製紙会社はカナダを含む世界各地に彼らの工場を持っている。 미국으로부터 무역 자유화 압력을 받고 있던 1980 년대, 일본 전신전화국(NTT)은 전화 번호부 제지 입찰에 외국 제지업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In the 1980s, when pressured to liberalize trade from the United States, the Japan Telegraph and Telephone Authority (NTT) allowed foreign papermakers to participate in bidding for phone book restraints. 우리 회사가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첫 번째 외국 기업이었다. It was the first foreign company our company passed the quality test. 그러나 그 테스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But the test was nothing. しかし、そのテストは何もなかった。 일본 기업과 고객간의 돈독한 인간관계에 끼어들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It was not difficult to intervene in the strong relationship between Japanese companies and customers. 日本企業と顧客との間の金銭的な人間関係に割り込むのはこれまで難しいことではなかった。 전 일본이 하나의 거대한 기업과도 같았다. Japan was like a giant company. 全日本が一つの巨大な企業と同じだった。 우리의 경쟁 상대였던 일본 제지업자들은 우리측 주요 고객 NTT 에서 퇴직한 고위 경영자들을 이사회에 두고 있었다. Our rival Japanese papermakers had senior executives on our board of directors who retired from our major client, NTT. 私たちの競争相手だった日本製紙業者は、韓国側の主要顧客NTTで退職した上級経営者を理事会に置いていた。 게다가 우리는 NTT 의 퇴직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지정 대리업체를 통해 NTT 와 거래를 해야했다. In addition, we had to deal with NTT through a designated agency run by NTT's retirees. さらに、私たちはNTTの退職従業員によって運営されている指定代理店を通じてNTTと取引する必要がありました。 인쇄회사들 또한 NTT의 전 직원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Printing companies were also owned by all NTT employees. 印刷会社もNTTの全社員が所有していた。 이런 복잡한 관계를 뚫고 캐나다 제지 시장을 확보하기까지는 나의 일본어 실력이 크게 한 몫을 했다. My Japanese proficiency played a big part in securing the Canadian paper market through these complex relationships. このような複雑な関係を突き抜けてカナダ製紙市場を確保するまでは、私の日本語実力が大きくした分けた。 일본의 제지 시장은 대형 생산업체 몇몇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반 독점화 거래 현상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The Japanese paper market was driven by a few large producers, so the phenomenon of anti-monopoly trading could easily occur. 日本の製紙市場は大型生産業者の一部によって動いており、半独占化取引現象が容易に起こり得た。 그러나 목재 시장은 달랐다. But the timber market was different. 목재시장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목재 소매업자, 도매업자, 건축업자들 다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The wood market consisted of a number of wood retailers, wholesalers and builders with traditional mindset. 木材市場は伝統的な考え方を持つ木材小売業者、卸売業者、建築業者の多くで構成されていた。 역설적이게도 구성원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목재 시장이 현대적인 제지 시장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Ironically, the traditional wood market was more open than the modern paper market because of the large number of members. 나는일본과의목재거래에점점더깊이관여하게되었다. I became more and more involved in lumber trading with Japan. 私は日本との木材取引にますます深く関わることになりました。 우선일본인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제품 디자인 및 생산의 우수성을 추구하는 정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First of all, I was very impressed with the Japanese's love for nature and the pursuit of excellence in product design and production. まず、日本人の自然に対する愛と、製品デザインと生産の卓越性を追求する精神が非常に印象的だった。 전통적인 건축 방식과 목수의 기술에 대한 존중, 나무에 대한 이해와 관심 등 그 모든 태도가 깊고 뚜렷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All attitudes, such as traditional architecture, respect for carpenters' skills, and understanding and interest in wood, left a deep and distinct impression. 伝統的な建築様式や大工の技術に対する尊重、木に対する理解と関心など、そのすべての態度が深くてはっきりとした印象を残してくれた。 물론 일본사회의 보수적인 면도 맛보았다. Of course, I tasted the conservative side of Japanese society. もちろん日本社会の保守的な面も味わった。 때때로 나는 회사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정해진 방식을 이탈하곤 했는데 그것이 일본인 관계자들을 언짢게 했다. Sometimes I used to deviate from the set method to achieve the company's goals, which offended Japanese officials. 時々私は会社の目標達成のために定められた方式を離脱したが、それが日本人関係者たちを厄介にした。 일본 목재무역신문은 한 때 나를 “카프만 태풍”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었다. The Japanese timber trade newspaper once introduced me as a "Kafman typhoon." 日本の木材貿易新聞はかつて私を「カフマン台風」と紹介したこともあった。 그러나 일본인 사업가들은 설령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상호존중의 자세만은 잃지 않았다. However, even though Japanese entrepreneurs disagree with each other on essential issues, they have not lost their respect for each other. 상호존중 정신은 일본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며 일본인들이 단합하고 성공하는데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The spirit of mutual respect is a force that sustains Japanese society and is a major cause of Japanese unity and success. 相互尊重精神は日本社会を支える力であり、日本人が団結して成功するのに主な原因となっ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