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KBS 무대: 2016 10월 - 11월,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1)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1)

작의

신혼집을 구하는 비용이 평균 1억에서 2억,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 1억 이상.

당장 오늘을 살기에도 벅찬 청춘들은 이 압도적인 숫자의 나열 앞에서 수없이 작아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자질이 필요하거나 준비가 따로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아버지가 되는 것,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를 찾아서>는 이혼 후 24년 만에 아버지 부고 소식을 전해 받은 아들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하나 없는 그.

아버지의 유품 중 돈관계가 적힌 수첩을 발견한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서 여행을 시작한다.

과연 여행 끝에 마주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들의 여행 끝에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되기를 걱정하는 청춘들에게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장인물

최형규(30대 초반/남) 주인공. 수도권 대학을 나와 인턴을 돌고돌아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계약도 곧 두 달 후면 끝이 날 판이다.

최철환(60대/남) 형규의 아버지. 왕년의 카사노바

김희자(50대/여) 형규의 어머니

세빈(30대 초반/여) 형규의 여자친구, 심성이 깊고 애교많은 성격

강씨(60대/남) 일용직노동자

김천댁(70대/여) 홀로 식당 운영하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

유마담(40대후반/여) 다방 제비 운영.

그외

형규(N)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E. 회사내 탕비실

선배 무슨 전화인데 그래? 빚 독촉 전화라도 온 거야?

형규 그냥.. (커피 삼키고)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셨대요.

선배 아, 미안. 바로 가봐야 되는 거 아냐?

형규 뭐.. 24년만의 연락이라서 당황스러운 거뿐이에요.

형규(N) (커피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저 갑자기 혀 안을 감싸는 믹스커피의 단맛이 몹시 인위적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E.장례식장, 멀리서 적당히 북적이는 사람들

상조직원 먼저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슬픔이 깊으시겠지만, 저희 상조는 임종부터 장지까지 곁에서..

형규 (큭- 웃음이 새어나오다) 아, 죄송합니다. 저보다 더 비통한 표정을 지으셔서.. 말씀 계속 하세요.

상조직원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시죠..

형규(N) 확실히, 영정사진 속의 저 초라한 사내는 내가 처음 보는 사내였다. 다가올 생의 끝을 짐작한 사내의 초점 잃은 눈빛과 잿빛 피부. 영정 사진 속 사내는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분명 아니었다.

상조직원 상주님. 형규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상조직원 아, 제가 깜빡했네요. (쇼핑백 올려놓는) 최철환고인님이 중환자실 입원 전 입으셨던 옷과 지니고 계셨던 소지품이에요.

비상연락처는 상조가입 전에 말씀해주셨고요.

형규 아버지가요..?

상조직원 그리고 유산 상속 관련 간단한 법률상담도 부탁하셨는데..

여도우미 저희 도착했습니다.

상조직원 네, 이쪽으로 와주세요. 이 분들이 식사준비와 안내를 맡아주실 전문 도우미세요.

형규 네, 안녕하세요.

M. 음악 브릿지

E. 화장터

세빈 (F)잘 끝냈어? 나도 갔어야 하는 건데. 왜 얘기 안했어.

연락 안 돼서 걱정했잖아. 형규씬 괜찮아?

형규 안 괜찮고 할 게 뭐가 있겠어. 아버지라고 불러본 것도 24년만인데.. 사실 저 화장되고 있는 유골이 진짜 아버지란 사람의 건지도 잘 모르겠는걸.

세빈 (F/투정 받아주듯) 으이그. 못됐게 말하면 마음이 좀 편해?

... 피곤하겠네.. 잠은 좀 잤어?

형규 상조직원도 있고 뭣보다 문상객도 몇 안 왔는데.

세빈 (F) 어머니는..?

형규 올리가 있겠어.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이야.

세빈 (F)형규씨, 나.. (머뭇거리는) 할 말이 있는데..

상조직원E. (멀리서 부르는) 최형규 상주님!

형규 아, 끊어야겠다. 나 찾는 것 같아. 다시 할게.

세빈 (F) 알았어. 꼭 전화해야 돼. 꼭이야. (끊는)

상조직원 (다가오며) 고생하셨습니다.

형규 아닙니다. 저는 그냥 뭐 서있기만 했는데요. 도와주신 덕분에 잘 끝마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상조직원 도움이 되셨다니 저희가 다 감사하죠. 앞으로도 임종부터 장지까지 유족 분들이 온전한 슬픔으로 고인을 배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상조 서비스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법률상담은 언제가 편하신지요?

형규 따로 연락드릴게요.

상조직원 네, 그럼 편하신 때 연락 주세요. (가는)

형규(N) 3일간 고작해서 스무 명 남짓한 조문객이 왔다간 사내의 유산이란 과연 무엇일는지... 한쪽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호기심을 펼쳐보았다. (쇼핑백 보며) 장례지도사가 건네준 쇼핑백 안에는 소매가 해어진 얇은 외투와 밑단이 짧은 통이 넓은 바지, 밑창이 한쪽으로 닳은 낡은 운동화 한 켤레. 손때 묻은 수첩, 잔고 ‘120'만원이 박힌 통장, 그리고 31호라고 적힌 열쇠가 들어있었다. E.사무실

선배 형규씨 일찍 왔네. 잘 끝낸 거야..? 부조만해서 미안하네.

형규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그런데, 형규씨 몇 년차지? 곧 계약 만기 아냐?

형규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선배 두 달도 남았구만! 형규씨 동기들은 벌써 이력서 쓰고 난리인데.. 형규씨도 이제 슬슬 이직 준비해야지.

형규 네.

선배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발 빠르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이니까. 형규씨 이제 나이도 있고.. 이젠 좀 자리잡아야지.

형규 (열쇠 고쳐 잡는) 네..

선배 무슨 열쇠야?

형규 아버지 유품인데.. 무슨 열쇠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선배 (열쇠 살펴보는) 고시원 아니면 찜질방 열쇠 아냐. E. 차임벨 울리며 문 여는 소리.

고시원반장 31호 아저씨 아들이라고요?

형규 안 닮았어요?

고시원반장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살펴보듯) 눈이 좀 째진 게 닮았나? 뭐, 밀린 방세 내준다는데 내가 따질 건 아니고. (E.장부 넘겨보는) 보자, 31호.. 두 달치 잔금 87만원이요. 그런데 아저씨 도망간 줄 알고 방 뺐는데?

형규 그럼 짐은?

고시원반장 짐? 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바구니 턱하고 올려놓는)

얼마 안 되니까 가져가시던지?

형규 아..

고시원반장 버리더라도 재활용은 하고 가셔야 돼요.

형규 네.

잠깐 볼게요. (찾다가).. 정말 짐이 이것뿐이에요? 옷도 네 벌뿐이고..

고시원반장 (짜증) 그럼 내가 쌔비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형규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요. (혼잣말) 발끈하니까 더 웃기네.

고시원반장 (기막힌) 챠, 생전보도 못한 게 꼴에 아들이라고. 아아~ 뭐 쫌 돈 될 만한 게 있나 하고 와봤는데 잔금이나 떼먹었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히겠어. 그런데 아무리 쥐짠다고 시궁창에서 나오는 게 오물뿐이지 안 그래?

형규 (멱살 잡는) 뭐! 이 자식아!

고시원반장 (같이 잡는) 이 자식이!! E. 경찰 사이렌

M. 브릿지

E. 파출소 앞

세빈 답지 않게 웬 싸움이야. 진짜. 자, 두부! 먹어.

형규 됐어. 이럴 일 또 없어.

세빈 그래도 액땜해야지. 애 아빠가 돼서도 파출소 들락거려야 되겠어?

형규 뭔 소리야 그게.

세빈 (밝게) 나, 임신했어. 우리 결혼해 형규씨.

형규 뭐? 세빈 우리 진짜 웃기다. 파출소 앞에서 프로포즈라니.

그래도 형규씨가 말할 타이밍을 안 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수줍게) 형규씨, 자꾸 나 부끄럽게 할래..? 또 말해야 해?

형규 ....

세빈 .. 형규씨 표정 이상하다. 나 잘못한 거야?

형규 너.. 제 정신이야? (손 잡아 끌며) 확실한 거 맞아? 일단 병원을..

세빈 (손 확 빼며) 아파! 타이밍이 나쁜 거 알지만 형규씨 좀 이상해. 당황스러울수도 있겠지만.

형규 당황? 세빈아, 제발 정신 차려. 나 연봉 3000도 안 돼.. 매달 집세에 빠듯해서 변변한 적금 하나 없어. 그 잘난 계약직도 두 달 뒤면 끝이야. 그런데 결혼..? 애..? 장난해 지금? 애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돈 없으면 애도 못 키워 세빈아. 우리 그런 세상에 살아.. 지금.

세빈 나도 벌잖아..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같이 벌면, 같이 노력하면.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 지 보고 싶지 않아? 너랑 얼마나 닮았는지 안 궁금해? 너..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형규 아빠? 내 아버지라는 인간한테 24년 만에 온 연락이란 게, 처음으로 한 통화가 죽었다는 거야. 그리고 고작 60평생 살아온 인생이란게 이 라면박스 하나가 전부야. 유산은 무슨 씹! 밀린 고시원 방세 내고 나면 잔고 33만원이야. 나한테 아버지란 이런 거야. 이런 나한테 아버지가 되라고? 그런 궁상을 살라고? 당장 애 지워. 날짜 잡으면 연락하고.

세빈 (짝-! 뺨 올리는) 최형규, 너.. 최저, 최악, 최하야. (돌아서려다가) 그리고 형규씨... 내가 그런 계산이 되면 널 만났겠니? (가는)

형규 (짐 담으며) 기집애.. 쓸데없이 팔힘만 세가지고.

(수첩 넘겨보다가) 수첩이 아니라 설마 가계부도 쓴건가 아버지. 진짜 궁상. (잠시)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없잖아.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렇죠?

(회상)

E.매미 소리

형규(N) 여섯 살의 여름은 목청 좋은 매미 울음만큼이나 길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E.선풍기 켜져 있는 방안

어린형규 (희자를 흔들어 깨우며) 엄마, 엄마.. 하드.. 하드 사줘

희자 (돌아 누우며) 끄으응.. 서랍 위에 100원 있어..

어린형규 엄마꺼도? 엄마꺼도 사올까?

희자 (졸려) 괜찮아, 맛있게 먹어.

어린형규 아빠거는? 아빠는 언제 와? 열밤만 자고 온다고 그랬는데? 열밤 지났는데?

희자 안 와. 아빠.

어린형규 안 와..? 아빠 이제 안 와? 아냐. (울음이 터지는 누우며 눈 꼭 감는) 언능 열밤 더 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와서 깨울거야.

희자 (놀라서 달래는) 아냐, 엄마가 나빴어. 엄마가 거짓말했어. 아빠 올거야 형규야. 우리 열밤만 자면 아빠 올거야.

형규(N)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E.매미소리, 문구점 오락기

친구1 열밤만 자면 온다고? 거짓말쟁이. 야, 최형규 또 거짓말한다.

어린형규 맞는데? 맞는데? 아빠는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멀리 가서, 열밤이 여기랑 다르게 세는 거랬어. 열밤 자면 과자랑 초콜렛이랑 잔뜩 사오신대!

친구1 웃기시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니네 아빠 제비라 비행기 필요 없다는데?

친구2 제비가 뭐야? 니네 아빠 새야?

어린형규 우리 아빠가 무슨 제비야! 니네 아빠 비행기 타봤어? 알지도 못하는 게.

친구1 웃, 웃기지마! 너는? 너도 못 타본 게? 어린형규 나는 아빠가 나중에 하와이에 비행기 타고 가자고했어.

친구2 우와, 정말?! 좋겠다.

친구아빠 (멀리서) 태준아!

친구1 (달려가며) 아빠닷! 아빠 아빠 비행기 타봤어?

친구아빠 그러엄~

친구1 들었지 들었지?

친구아빠 태준이도 비행기 태워줄까? (안아서 휙 드는)

친구아빠 이륙합니다! 태준아, 어디까지 갈까?

친구1 하와이보다 더 멀리!

친구아빠 네, 태준비행기 하와이보다 더 멀리 캐나다로 갑니다~ 삐요요요용

친구1 우와, 신난다!

친구아빠 친구들한테 인사해야지

친구1 빠이~ 아빠 더 빠르게!

친구2 잘가아~! (부러운) 태준이 재밌겠다. 그치?

어린형규 흥! 뭐가 재밌다고. 하나도 재미없다. 뭐!

친구2 나도 아빠한테 비행기 태워달라고 할래. 형규야 나 간다!

어린형규 흥, 가라 가! 바보들. 저딴 가짜 비행기가 뭐가 좋다고..

M. 짧은 브릿지

E. 형규, 주택 철문을 열고 들어서는

어린형규 열밤만 자면 아빠 오니까.. (킁킁) 어? 아빠 냄새다! (달려가는) 아빠아아아아~

E.신발 벗어던지듯 집안으로 들어가는

어린형규 아빠아아 (안기려는데)

철환 (멀찍이 떨어뜨리며) 꼬라지가 그게 뭐야.

너 또 하드 먹은 손으로 흙장난했지? 끈적끈적하게..

희자 한 달만에 본 아들 먼저 안아주면 어디가 덧나요?

철환 그렇게 오냐 오냐 하니까. 애 버릇 나빠지는 거야.

아빠가 집에 오면 뭐부터 하라고 했어.

어린형규 손 닦고 세수..

철환 알면 빨리 들어가.

E. 어린 형규 세수하곤 달려와 방문 열며

어린형규 아빠, 아빠. 나 세수하고 이도 닦고 나왔어. 아빠..

희자 형규야 아빠 주무셔.. 피곤하신가봐. 아빠가 대신 형규 선물 많이 사왔는데 엄마랑 같이 풀어볼까?

어린형규 응..

E. 선물상자 풀어보는

희자 형규가 좋아하는 거 많다 그지? 과자도 있고 초콜렛도 있고, 우와, 퍼즐도 있네? 형규가 가고싶다던 하와이그림이네. 친구들이랑 같이하면 되겠다~

어린형규 싫어. 걔들이 아빠 제비라 비행기 못 탄다고, 안 타도 된다고 놀렸단 말야.. 엄마, 아빠 제비야?

희자 (머뭇거리다가) 아빠가 제비처럼 멋있어서 그래.. 멋진 사람을 제비라고 그러거든. 형규도 아빠가 멋졌으면 좋겠지?

어린형규 응, 우리 동네에서 우리 아빠가 제일 멋있어!

형규(N) 동네에서 가장 멋있었던, 제비라 불리던 내 기억 속 아버지. 24년 동안 당신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M. 현재

강씨(F) (경계) 여보세요?

형규 안녕하세요. 저, 최철환씨라고 아세요?

강씨(F) 근디요?

형규 저, 최철환씨 아들 되는데요. (바로 끊는) 여, 여보세요? 끊은 거야? (다시 거는데)

안내음성(F)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E. 공사장, 인부들 밥 먹는, 강씨의 벨소리 계속 울리면 끊고 울리면 끊는.

인부1 아, 전화 받어? 시끄러워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귀로 들어가는 지 모르겠네!

인부2 그냥 끊던지 받던지

강씨 (밥 먹으며) 남일 신경 끄고 밥이나 자셔들..

형규 아저씨!

강씨 누쇼?

형규 강씨 아저씨 맞으시죠?

강씨 사람 잘못 봤수.

형규 (전화 걸어) 맞는데요?

강씨 (끊고) 강씨 아니라니까!

형규 (다시 울리는) 맞는 것 같은데요?

인부들 강씨 전화 받으라니까!

강씨 (끊고) 강씨 아니라니까!

형규 맞는 거 같은 거 같은데요?

강씨 강씨는 긴데, 최철환은 모르는 강씨여.

형규 빚 갚으라고 온거 아니에요.

강씨 빚? 뭔 빚?

형규 (품에서 수첩 꺼내 보여주는) 강씨 45만원.

강씨 젊은 친구가 쉰밥을 먹었나.. 뭔 소리당가 통 모르겠네.

형규 (수첩 뒤적이며 읽는) 가장 최근부터 2013년 10월 2일 강씨 소주 8000원, 담배 3500원, 오징어 3000원.. 2013년 9월 20일 강씨 국밥, 소주 3병 18000원.. 가계부인줄 알았는데, 빚 장부더라고요. 꽤 되는데 계속 할까요?

강씨 진짜 아들 맞긴 해? 눈 째진 것도 안 닮고 키도 작고..

쉰소리 집어치우고..

형규 빚 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아버지 빚 받을 자격도 없어요.

강씨 빚 아니라니까.. (솔깃) 그럼 뭐 뜯어먹을 거 있다고 온겨?

형규 그냥..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E. 선술집. 강씨의 술잔 채워주는.

강씨 (쪼록 마시고) 크.. 몇 번을 물어봐도, 최씨는 잘 몰라..

형규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말씀해주셔도 돼요.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는 잘 아실테니까.

강씨 그냥 조용조용했지. 꽁생원처럼 수첩 나부랭이나 적고 있으니 그 속을 누가 알아.

형규 그 전엔 어떤 일을 했다던가..

강씨 우리야 원래 이름 없는 사람들이니까 각자 말 못할 사연인들 왜 없겠어. 그저 바람따라 계절따라 상황따라 가는 인생들이니 최씨도 그런 사람인가 했지

형규 아버지가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분은 따로 없으셨어요?

강씨 빌린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는 걸 기억하고 있는 꽁생원한테 무슨 친구가 있겠어?

형규 그래도 강씨 아저씨한테 돈을 빌려드린 걸 보면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강씨 (말 자르며) 기분 나쁜 소리말어. 그냥 내가 딴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약해.. 숫자도 약하고. 꼭 돈이 부족할 때만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돈을 꿨네, 빚이 있네 하면서. 이런 기분 나쁜 수첩을 남겨두다니. (한잔 마시고는) 흥, 몇 달 전부터 얼굴이 안 보인다고 했더니.. 갔구만. (미안해져서) 그래도 일을 잘 했어. 바람이 강하게 불면 고층작업장은 잠깐 쉬기도 하는데 그 사람은 해야 하는 일은 하는 사람이었지, 암! 태산 같았달까. (긁적)

형규 의외네요. 아버지한테 그런 성실한 구석이 있다는 게..

강씨 (버럭)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자네하고 최씨 사이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야. 뭐,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건거겠지만. 최씨는 성실한 사람이야. 얼마나 구식인지, 함밥집도 꼭 가는 데에만 갔어. 김천댁네였나? 자네도 가서 한번 먹어봐.

형규(N) 성실한 아버지라.. 내 기억속 아버지가 가장 성실한 때가 있긴했다. 바로.

(회상)

E. 매미소리 멀리 깔리고...

희자 식사해요.

철환 (옷 입으며) 밥 먹을 시간 없대도 그러네. 이놈의 날씨는 숨만 쉬어도 땀이 나.

희자 이 뙤약볕에 한 시간씩 다림질을 하니까 그렇죠.

철환 각이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잖아. 다리미 고장 난거 같아.

돈 여기 둘 때니까 이따 사다놔. 오늘은 좀 늦을 거야.

희자 언제는 일찍 와요?

철환 무슨 말이 그래.. 생활비 모자라서 그래?

희자 당신, 언제까지 그 일 할 거에요?

철환 새삼스럽게 왜 그래..

희자 일이 안 되면 그 꽃무늬 셔츠라도 좀 어떻게 해봐요.

철환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없게.


아버지를 찾아서 (2016/10/21) (1) In Search of My Father (10/21/2016) (1)

**작의

신혼집을 구하는 비용이 평균 1억에서 2억,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 1억 이상.

당장 오늘을 살기에도 벅찬 청춘들은 이 압도적인 숫자의 나열 앞에서 수없이 작아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자질이 필요하거나 준비가 따로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아버지가 되는 것,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를 찾아서>는 이혼 후 24년 만에 아버지 부고 소식을 전해 받은 아들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하나 없는 그.

아버지의 유품 중 돈관계가 적힌 수첩을 발견한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서 여행을 시작한다.

과연 여행 끝에 마주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들의 여행 끝에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되기를 걱정하는 청춘들에게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장인물

최형규(30대 초반/남) 주인공. 수도권 대학을 나와 인턴을 돌고돌아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계약도 곧 두 달 후면 끝이 날 판이다.

최철환(60대/남) 형규의 아버지. 왕년의 카사노바

김희자(50대/여) 형규의 어머니

세빈(30대 초반/여) 형규의 여자친구, 심성이 깊고 애교많은 성격

강씨(60대/남) 일용직노동자

김천댁(70대/여) 홀로 식당 운영하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

유마담(40대후반/여) 다방 제비 운영.

그외

형규(N)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E. 회사내 탕비실

선배 무슨 전화인데 그래? 빚 독촉 전화라도 온 거야?

형규 그냥.. (커피 삼키고) 아버지가 오늘 돌아가셨대요.

선배 아, 미안. 바로 가봐야 되는 거 아냐?

형규 뭐.. 24년만의 연락이라서 당황스러운 거뿐이에요.

형규(N) (커피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저 갑자기 혀 안을 감싸는 믹스커피의 단맛이 몹시 인위적으로 느껴졌을 뿐이었다.

E.장례식장, 멀리서 적당히 북적이는 사람들

상조직원 먼저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슬픔이 깊으시겠지만, 저희 상조는 임종부터 장지까지 곁에서..

형규 (큭- 웃음이 새어나오다) 아, 죄송합니다. 저보다 더 비통한 표정을 지으셔서.. 말씀 계속 하세요.

상조직원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시죠..

형규(N) 확실히, 영정사진 속의 저 초라한 사내는 내가 처음 보는 사내였다. 다가올 생의 끝을 짐작한 사내의 초점 잃은 눈빛과 잿빛 피부. 영정 사진 속 사내는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분명 아니었다.

상조직원 상주님. 형규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상조직원 아, 제가 깜빡했네요. (쇼핑백 올려놓는) 최철환고인님이 중환자실 입원 전 입으셨던 옷과 지니고 계셨던 소지품이에요.

비상연락처는 상조가입 전에 말씀해주셨고요.

형규 아버지가요..?

상조직원 그리고 유산 상속 관련 간단한 법률상담도 부탁하셨는데..

여도우미 저희 도착했습니다.

상조직원 네, 이쪽으로 와주세요. 이 분들이 식사준비와 안내를 맡아주실 전문 도우미세요.

형규 네, 안녕하세요.

M. 음악 브릿지

E. 화장터

세빈 (F)잘 끝냈어? 나도 갔어야 하는 건데. 왜 얘기 안했어.

연락 안 돼서 걱정했잖아. 형규씬 괜찮아?

형규 안 괜찮고 할 게 뭐가 있겠어. 아버지라고 불러본 것도 24년만인데.. 사실 저 화장되고 있는 유골이 진짜 아버지란 사람의 건지도 잘 모르겠는걸.

세빈 (F/투정 받아주듯) 으이그. 못됐게 말하면 마음이 좀 편해?

... 피곤하겠네.. 잠은 좀 잤어?

형규 상조직원도 있고 뭣보다 문상객도 몇 안 왔는데.

세빈 (F) 어머니는..?

형규 올리가 있겠어.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이야.

세빈 (F)형규씨, 나.. (머뭇거리는) 할 말이 있는데..

상조직원E. (멀리서 부르는) 최형규 상주님!

형규 아, 끊어야겠다. 나 찾는 것 같아. 다시 할게.

세빈 (F) 알았어. 꼭 전화해야 돼. 꼭이야. (끊는)

상조직원 (다가오며) 고생하셨습니다.

형규 아닙니다. 저는 그냥 뭐 서있기만 했는데요. 도와주신 덕분에 잘 끝마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상조직원 도움이 되셨다니 저희가 다 감사하죠. 앞으로도 임종부터 장지까지 유족 분들이 온전한 슬픔으로 고인을 배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상조 서비스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법률상담은 언제가 편하신지요?

형규 따로 연락드릴게요.

상조직원 네, 그럼 편하신 때 연락 주세요. (가는)

형규(N) 3일간 고작해서 스무 명 남짓한 조문객이 왔다간 사내의 유산이란 과연 무엇일는지... 한쪽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호기심을 펼쳐보았다. (쇼핑백 보며) 장례지도사가 건네준 쇼핑백 안에는 소매가 해어진 얇은 외투와 밑단이 짧은 통이 넓은 바지, 밑창이 한쪽으로 닳은 낡은 운동화 한 켤레. 손때 묻은 수첩, 잔고 ‘120'만원이 박힌 통장, 그리고 31호라고 적힌 열쇠가 들어있었다. E.사무실

선배 형규씨 일찍 왔네. 잘 끝낸 거야..? 부조만해서 미안하네.

형규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그런데, 형규씨 몇 년차지? 곧 계약 만기 아냐?

형규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선배 두 달도 남았구만! 형규씨 동기들은 벌써 이력서 쓰고 난리인데.. 형규씨도 이제 슬슬 이직 준비해야지.

형규 네.

선배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발 빠르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이니까. 형규씨 이제 나이도 있고.. 이젠 좀 자리잡아야지.

형규 (열쇠 고쳐 잡는) 네..

선배 무슨 열쇠야?

형규 아버지 유품인데.. 무슨 열쇠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선배 (열쇠 살펴보는) 고시원 아니면 찜질방 열쇠 아냐. E. 차임벨 울리며 문 여는 소리.

고시원반장 31호 아저씨 아들이라고요?

형규 안 닮았어요?

고시원반장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살펴보듯) 눈이 좀 째진 게 닮았나? 뭐, 밀린 방세 내준다는데 내가 따질 건 아니고. (E.장부 넘겨보는) 보자, 31호.. 두 달치 잔금 87만원이요. 그런데 아저씨 도망간 줄 알고 방 뺐는데?

형규 그럼 짐은?

고시원반장 짐? 짐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바구니 턱하고 올려놓는)

얼마 안 되니까 가져가시던지?

형규 아..

고시원반장 버리더라도 재활용은 하고 가셔야 돼요.

형규 네.

잠깐 볼게요. (찾다가).. 정말 짐이 이것뿐이에요? 옷도 네 벌뿐이고..

고시원반장 (짜증) 그럼 내가 쌔비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형규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요. (혼잣말) 발끈하니까 더 웃기네.

고시원반장 (기막힌) 챠, 생전보도 못한 게 꼴에 아들이라고. 아아~ 뭐 쫌 돈 될 만한 게 있나 하고 와봤는데 잔금이나 떼먹었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히겠어. 그런데 아무리 쥐짠다고 시궁창에서 나오는 게 오물뿐이지 안 그래?

형규 (멱살 잡는) 뭐! 이 자식아!

고시원반장 (같이 잡는) 이 자식이!! E. 경찰 사이렌

M. 브릿지

E. 파출소 앞

세빈 답지 않게 웬 싸움이야. 진짜. 자, 두부! 먹어.

형규 됐어. 이럴 일 또 없어.

세빈 그래도 액땜해야지. 애 아빠가 돼서도 파출소 들락거려야 되겠어?

형규 뭔 소리야 그게.

세빈 (밝게) 나, 임신했어. 우리 결혼해 형규씨.

형규 뭐? 세빈 우리 진짜 웃기다. 파출소 앞에서 프로포즈라니.

그래도 형규씨가 말할 타이밍을 안 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수줍게) 형규씨, 자꾸 나 부끄럽게 할래..? 또 말해야 해?

형규 ....

세빈 .. 형규씨 표정 이상하다. 나 잘못한 거야?

형규 너.. 제 정신이야? (손 잡아 끌며) 확실한 거 맞아? 일단 병원을..

세빈 (손 확 빼며) 아파! 타이밍이 나쁜 거 알지만 형규씨 좀 이상해. 당황스러울수도 있겠지만.

형규 당황? 세빈아, 제발 정신 차려. 나 연봉 3000도 안 돼.. 매달 집세에 빠듯해서 변변한 적금 하나 없어. 그 잘난 계약직도 두 달 뒤면 끝이야. 그런데 결혼..? 애..? 장난해 지금? 애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돈 없으면 애도 못 키워 세빈아. 우리 그런 세상에 살아.. 지금.

세빈 나도 벌잖아.. 작은 방에서 시작해서 같이 벌면, 같이 노력하면.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 지 보고 싶지 않아? 너랑 얼마나 닮았는지 안 궁금해? 너..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형규 아빠? 내 아버지라는 인간한테 24년 만에 온 연락이란 게, 처음으로 한 통화가 죽었다는 거야. 그리고 고작 60평생 살아온 인생이란게 이 라면박스 하나가 전부야. 유산은 무슨 씹! 밀린 고시원 방세 내고 나면 잔고 33만원이야. 나한테 아버지란 이런 거야. 이런 나한테 아버지가 되라고? 그런 궁상을 살라고? 당장 애 지워. 날짜 잡으면 연락하고.

세빈 (짝-! 뺨 올리는) 최형규, 너.. 최저, 최악, 최하야. (돌아서려다가) 그리고 형규씨... 내가 그런 계산이 되면 널 만났겠니? (가는)

형규 (짐 담으며) 기집애.. 쓸데없이 팔힘만 세가지고.

(수첩 넘겨보다가) 수첩이 아니라 설마 가계부도 쓴건가 아버지. 진짜 궁상. (잠시)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없잖아.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렇죠?

(회상)

E.매미 소리

형규(N) 여섯 살의 여름은 목청 좋은 매미 울음만큼이나 길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E.선풍기 켜져 있는 방안

어린형규 (희자를 흔들어 깨우며) 엄마, 엄마.. 하드.. 하드 사줘

희자 (돌아 누우며) 끄으응.. 서랍 위에 100원 있어..

어린형규 엄마꺼도? 엄마꺼도 사올까?

희자 (졸려) 괜찮아, 맛있게 먹어.

어린형규 아빠거는? 아빠는 언제 와? 열밤만 자고 온다고 그랬는데? 열밤 지났는데?

희자 안 와. 아빠.

어린형규 안 와..? 아빠 이제 안 와? 아냐. (울음이 터지는 누우며 눈 꼭 감는) 언능 열밤 더 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와서 깨울거야.

희자 (놀라서 달래는) 아냐, 엄마가 나빴어. 엄마가 거짓말했어. 아빠 올거야 형규야. 우리 열밤만 자면 아빠 올거야.

형규(N) 하지만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E.매미소리, 문구점 오락기

친구1 열밤만 자면 온다고? 거짓말쟁이. 야, 최형규 또 거짓말한다.

어린형규 맞는데? 맞는데? 아빠는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멀리 가서, 열밤이 여기랑 다르게 세는 거랬어. 열밤 자면 과자랑 초콜렛이랑 잔뜩 사오신대!

친구1 웃기시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니네 아빠 제비라 비행기 필요 없다는데?

친구2 제비가 뭐야? 니네 아빠 새야?

어린형규 우리 아빠가 무슨 제비야! 니네 아빠 비행기 타봤어? 알지도 못하는 게.

친구1 웃, 웃기지마! 너는? 너도 못 타본 게? 어린형규 나는 아빠가 나중에 하와이에 비행기 타고 가자고했어.

친구2 우와, 정말?! 좋겠다.

친구아빠 (멀리서) 태준아!

친구1 (달려가며) 아빠닷! 아빠 아빠 비행기 타봤어?

친구아빠 그러엄~

친구1 들었지 들었지?

친구아빠 태준이도 비행기 태워줄까? (안아서 휙 드는)

친구아빠 이륙합니다! 태준아, 어디까지 갈까?

친구1 하와이보다 더 멀리!

친구아빠 네, 태준비행기 하와이보다 더 멀리 캐나다로 갑니다~ 삐요요요용~~

친구1 우와, 신난다!

친구아빠 친구들한테 인사해야지

친구1 빠이~ 아빠 더 빠르게!

친구2 잘가아~! (부러운) 태준이 재밌겠다. 그치?

어린형규 흥! 뭐가 재밌다고. 하나도 재미없다. 뭐!

친구2 나도 아빠한테 비행기 태워달라고 할래. 형규야 나 간다!

어린형규 흥, 가라 가! 바보들. 저딴 가짜 비행기가 뭐가 좋다고..

M. 짧은 브릿지

E. 형규, 주택 철문을 열고 들어서는

어린형규 열밤만 자면 아빠 오니까.. (킁킁) 어? 아빠 냄새다! (달려가는) 아빠아아아아~

E.신발 벗어던지듯 집안으로 들어가는

어린형규 아빠아아~~ (안기려는데)

철환 (멀찍이 떨어뜨리며) 꼬라지가 그게 뭐야.

너 또 하드 먹은 손으로 흙장난했지? 끈적끈적하게..

희자 한 달만에 본 아들 먼저 안아주면 어디가 덧나요?

철환 그렇게 오냐 오냐 하니까. 애 버릇 나빠지는 거야.

아빠가 집에 오면 뭐부터 하라고 했어.

어린형규 손 닦고 세수..

철환 알면 빨리 들어가.

E. 어린 형규 세수하곤 달려와 방문 열며

어린형규 아빠, 아빠. 나 세수하고 이도 닦고 나왔어. 아빠..

희자 형규야 아빠 주무셔.. 피곤하신가봐. 아빠가 대신 형규 선물 많이 사왔는데 엄마랑 같이 풀어볼까?

어린형규 응..

E. 선물상자 풀어보는

희자 형규가 좋아하는 거 많다 그지? 과자도 있고 초콜렛도 있고, 우와, 퍼즐도 있네? 형규가 가고싶다던 하와이그림이네. 친구들이랑 같이하면 되겠다~

어린형규 싫어. 걔들이 아빠 제비라 비행기 못 탄다고, 안 타도 된다고 놀렸단 말야.. 엄마, 아빠 제비야?

희자 (머뭇거리다가) 아빠가 제비처럼 멋있어서 그래.. 멋진 사람을 제비라고 그러거든. 형규도 아빠가 멋졌으면 좋겠지?

어린형규 응, 우리 동네에서 우리 아빠가 제일 멋있어!

형규(N) 동네에서 가장 멋있었던, 제비라 불리던 내 기억 속 아버지. 24년 동안 당신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M. 현재

강씨(F) (경계) 여보세요?

형규 안녕하세요. 저, 최철환씨라고 아세요?

강씨(F) 근디요?

형규 저, 최철환씨 아들 되는데요. (바로 끊는) 여, 여보세요? 끊은 거야? (다시 거는데)

안내음성(F)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E. 공사장, 인부들 밥 먹는, 강씨의 벨소리 계속 울리면 끊고 울리면 끊는.

인부1 아, 전화 받어? 시끄러워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귀로 들어가는 지 모르겠네!

인부2 그냥 끊던지 받던지

강씨 (밥 먹으며) 남일 신경 끄고 밥이나 자셔들..

형규 아저씨!

강씨 누쇼?

형규 강씨 아저씨 맞으시죠?

강씨 사람 잘못 봤수.

형규 (전화 걸어) 맞는데요?

강씨 (끊고) 강씨 아니라니까!

형규 (다시 울리는) 맞는 것 같은데요?

인부들 강씨 전화 받으라니까!

강씨 (끊고) 강씨 아니라니까!

형규 맞는 거 같은 거 같은데요?

강씨 강씨는 긴데, 최철환은 모르는 강씨여.

형규 빚 갚으라고 온거 아니에요.

강씨 빚? 뭔 빚?

형규 (품에서 수첩 꺼내 보여주는) 강씨 45만원.

강씨 젊은 친구가 쉰밥을 먹었나.. 뭔 소리당가 통 모르겠네.

형규 (수첩 뒤적이며 읽는) 가장 최근부터 2013년 10월 2일 강씨 소주 8000원, 담배 3500원, 오징어 3000원.. 2013년 9월 20일 강씨 국밥, 소주 3병 18000원.. 가계부인줄 알았는데, 빚 장부더라고요. 꽤 되는데 계속 할까요?

강씨 진짜 아들 맞긴 해? 눈 째진 것도 안 닮고 키도 작고..

쉰소리 집어치우고..

형규 빚 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아버지 빚 받을 자격도 없어요.

강씨 빚 아니라니까.. (솔깃) 그럼 뭐 뜯어먹을 거 있다고 온겨?

형규 그냥..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E. 선술집. 강씨의 술잔 채워주는.

강씨 (쪼록 마시고) 크.. 몇 번을 물어봐도, 최씨는 잘 몰라..

형규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말씀해주셔도 돼요.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는 잘 아실테니까.

강씨 그냥 조용조용했지. 꽁생원처럼 수첩 나부랭이나 적고 있으니 그 속을 누가 알아.

형규 그 전엔 어떤 일을 했다던가..

강씨 우리야 원래 이름 없는 사람들이니까 각자 말 못할 사연인들 왜 없겠어. 그저 바람따라 계절따라 상황따라 가는 인생들이니 최씨도 그런 사람인가 했지

형규 아버지가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분은 따로 없으셨어요?

강씨 빌린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는 걸 기억하고 있는 꽁생원한테 무슨 친구가 있겠어?

형규 그래도 강씨 아저씨한테 돈을 빌려드린 걸 보면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강씨 (말 자르며) 기분 나쁜 소리말어. 그냥 내가 딴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약해.. 숫자도 약하고. 꼭 돈이 부족할 때만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돈을 꿨네, 빚이 있네 하면서. 이런 기분 나쁜 수첩을 남겨두다니. (한잔 마시고는) 흥, 몇 달 전부터 얼굴이 안 보인다고 했더니.. 갔구만. (미안해져서) 그래도 일을 잘 했어. 바람이 강하게 불면 고층작업장은 잠깐 쉬기도 하는데 그 사람은 해야 하는 일은 하는 사람이었지, 암! 태산 같았달까. (긁적)

형규 의외네요. 아버지한테 그런 성실한 구석이 있다는 게..

강씨 (버럭)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자네하고 최씨 사이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야. 뭐,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건거겠지만. 최씨는 성실한 사람이야. 얼마나 구식인지, 함밥집도 꼭 가는 데에만 갔어. 김천댁네였나? 자네도 가서 한번 먹어봐.

형규(N) 성실한 아버지라.. 내 기억속 아버지가 가장 성실한 때가 있긴했다. 바로.

(회상)

E. 매미소리 멀리 깔리고...

희자 식사해요.

철환 (옷 입으며) 밥 먹을 시간 없대도 그러네. 이놈의 날씨는 숨만 쉬어도 땀이 나.

희자 이 뙤약볕에 한 시간씩 다림질을 하니까 그렇죠.

철환 각이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잖아. 다리미 고장 난거 같아.

돈 여기 둘 때니까 이따 사다놔. 오늘은 좀 늦을 거야.

희자 언제는 일찍 와요?

철환 무슨 말이 그래.. 생활비 모자라서 그래?

희자 당신, 언제까지 그 일 할 거에요?

철환 새삼스럽게 왜 그래..

희자 일이 안 되면 그 꽃무늬 셔츠라도 좀 어떻게 해봐요.

철환 아침 댓바람부터 재수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