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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4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Part 1

Episode 4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Part 1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오늘 네 번 째 시간입니다. 팟캐스트라는 생소한 뭐랄까요 플랫폼이랄까요, 미디어랄까요, 이런 것을 시작하면서 ‘와, 이거 과연 제가 할 수 있을 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번, 두 번, 세 번 했구요. 오늘 또 네 번 째 시간입니다. 하다보니까 기분이 참 묘해요. 혼자 사실은 저희 집에 앉아서, 제 책상에서 하는거 거든요. 혼자서 떠드는 거죠. 혼자서 책이나 컴퓨터 화면, 벽을 보고 떠드는 셈인데, 근데 이게 녹음이 돼서 또 누군가의 아이팟이나 MP3 플레이어나, 또는 뭐 누군가의 컴퓨터에서 시차를 두고 송출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시간. 저는 저 대로 , 제 시간에 이것을 녹음을 하면, 예전에 라디오라든가 이런 것은 일제히 송출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자기의 개인화된 시간에서 이걸 받아들이는거죠. 그래서 팟캐스트를 하면서 달라진 시간의 의미라는 것에 대해서 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게됩니다. 지난 시대의 시간이라는 것은 좀 집단화 된 시간 같은거였어요. 모여사는 메스껭이 처럼, 지금 이제 뭐 농담삼아서 ‘본방사수'이런 말이 나오는데 사실은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나중에 시청하거나 청취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정말로 ‘본방사수' 말고는 방법이 없었죠? 근데 지금은 시간이라는 것이 충분히 개인화돼서 이제는 어떤 메시지라던가 또는 어떤 메시지까진 아니다하더라도 이야기가 일제히 집단적으로 동시에 다른사람의 시간을 한꺼번에 폭력적으로 잡아먹으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개인에게 마치 제가 농담 삼아서 제 홈페이지에 ‘어떻게 팟캐스트 들으세요?' 그러면서 5 번인가에 ‘텔레파시' 이렇게 써놨는데요. 어떤 의미에서는 텔레파시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한 개인이 이렇게 앉아서 어떤 메시지를 송출하면 그 메세지는 여러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다른 개인에게 일대일로 전달되는 것이죠. 개인화된 시간에 가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어떤 시집 하나를 발견하게 됐는데요. 마침 오늘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하고 딱 와닿는달까요? 내용을 보지않고서 제목만 딱 보고도 ‘어? 저기에 뭐가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이 되는 그런 책들이 있죠? 우리가 가끔 ‘아 무슨 책을 읽을 까?'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가 보면, 내용을 전혀 모르지만 어떤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끄는 그런 책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런 책들, 그런 제목들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와 어느정도 조응하고 있겠죠? 이 시간에 대한 얘기 말씀드렸는데, 오늘 제가 집어들게 된 시집은요, 제목이 “슬픔이 없는 십 오초”입니다. 심보선이라는 시인의 시집인데요. 그렇게 널리 알려진 시긴은 아니지만, 요즘 문단에서는 상당히 주목받고있는 그런 시인입니다. 시집으로 묶이기 전부터, 문예지에 실릴 때 부터, 저는 상당히 좋아하면서 봤습니다. 유쾌한 면도 있고요. 뒤집어 보는 재미… 이런 것들을 주는 분입니다. ‘아름다운 시어'이런건 잘 모르겠지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는 그런, 그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죠. 시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이 없는 십 오초” 제목 참 재밌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집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얼마 전에 또 제가, 제 서가에서 책을 하나 빼서 읽었는데, 그게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이라는 유명한 사진가가있죠. 시간을 포착하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되는 사람인데. 이분에 대한 그… 사진집 서문을 누가 썼냐하면, 피카소 미술관장이죠. 장 끌레르(Jean Clair)라는 피카소 미술관장입니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은 이제 바르셀로나에도 있고, 뭐 저 프로방스 쪽에도 하나가 있고요. 그 뉴욕에도, 아 뉴욕엔 없구나. 파리에 있죠. 그래서 그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장인 장 끌레르가 그 까르티 브레송의 작품에 대해서 서문을 썼습니다. 이 서문이 재밌습니다. 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한 번 그 부분을 먼저 읽어보로독 하겠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카이로스(Kairos)'라는 말을 우리가 보통 ‘기회'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키는데 사용했다. 그것은 시간과 관련된 말이다. 현대 그리스어에 와서야 결국 시간을 가리키게 된다. 그것은 딱 알맞는 것, 즉 적절한 때, 혹은 유리한 순간, 혹은 지속 속에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더 오래 전에는 시간의 자리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요한 곳을 가리키는 공간의 자리였다. 예컨데 "카이로스"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글에서, 때때로 생사가 달린, 상처받기 쉬운 곳이자 발병 지점인 아픈 신체 부위를 가리킨다. 그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수많은 군가 속에서, 이성의 여신 아테네가, 영웅을 위협하며 날아오르는 창이나 화살을 마지막 순간에 빗나가게 하면서 영웅을 거들어 개입하는 여러 행간들이 보인다. 아테나는 그 창이나 화살을 결정적 지점과 위급한 곳으로부터 뿌리쳐버리는데 이는 실은 공간의 문제이다. 죽음이 갑옷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듯이, 그 흉갑의 틈과 같은 것, 그런 치명적 지점이 신체에서 “카이로스”에 해당된다. 그것은 고대에, 측량술을 거의 무시하고서, 직관적으로 좋은 자리를 가려내고 선택하고 꿰뚫어보는, 여전히 경험적인 눈의 잠재력과 공간적으로 관련되어있는 말이다.

제가 이, 그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이 까르띠 프레송의 작품에 대한 서문을 인용하는 까닭은요, 이 뒤에 장 끌레르라는 피카소 미술관장은 이 카이로스라는 개념을 가지고 까르티 브레송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쉽게 말하자면 그런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 우리가 흔히 까르띠 브레송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이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의 문제이기도 하고, 신체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즉, 사진가의 임무란 무엇이냐. 이 사람이 볼 때,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추구했던 세계는 바로 이런 카이로스적 관점이라는 것이죠. 빈틈, 세계의 빈틈, 또는 인간의 빈틈, 시간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 경험적으로, 즉 카메라를 들고, 이 까르띠에 브레송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다녔다고 그러죠. 카메라를 들고다니면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와 구도를 포착해서 그것을 자기 카메라에, 어떤 찰나의 순간이죠. 이걸 담았다는 것이죠. 제가 오늘 이 심보선이라는, 그 시인의 시를 얘기하기전에 왜 이 얘기를 드리냐하면,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인이라는 것은 언어를 아름답게 조탁하고, 이런 고전적인 시인의 뭐 기능이 있었죠. 모국어를 아름답게 발견하고. 근데 이제 현대의 시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 생각에는 우리 일반인들, 일상인들이 놓치고 있는 카이로스 적인 시간, 빈 시간, 빈 장소. 뭐 아킬레스의 말하자면 아킬레스 건. 하녀가 목욕을 시키다가 손가락으로 집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물이 닿을 수 없었던. 그러므로써 아킬레스라는 영웅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부분. 이런 것들을 포착하는 것. 이런게 시인의 몫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둔감해진 채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제 소설가니까 세상을 산문적으로 바라봅니다. 문장으로 바라보고, 뭐 어떤 산문으로 생각하죠. 스토리로 바라봅니다. 반면, 이 시인들은 ‘촌철살인'이라고 우리가 흔히들 표현하는데요. 어떤 세계의 빈틈을 노리는 자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글을 쓴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Episode 4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Part 1 Episode 4 - The Symbolic Line "Fifteen Seconds Without Sorrow" - Part 1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오늘 네 번 째 시간입니다. 팟캐스트라는 생소한 뭐랄까요 플랫폼이랄까요, 미디어랄까요, 이런 것을 시작하면서 ‘와, 이거 과연 제가 할 수 있을 까? When I started doing something unfamiliar like a podcast, a platform, a media, or something like this, I was like,'Wow, can I do this? 내가 할 수 있을까?' Can I do it?'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번, 두 번, 세 번 했구요. 오늘 또 네 번 째 시간입니다. Today is another fourth time. 하다보니까 기분이 참 묘해요. 혼자 사실은 저희 집에 앉아서, 제 책상에서 하는거 거든요. Actually, I'm sitting at my house and doing it at my desk. 혼자서 떠드는 거죠. I'm talking alone. 혼자서 책이나 컴퓨터 화면, 벽을 보고 떠드는 셈인데, 근데 이게 녹음이 돼서 또 누군가의 아이팟이나 MP3 플레이어나, 또는 뭐 누군가의 컴퓨터에서 시차를 두고 송출되는 것 아닙니까? I'm talking about books, computer screens and walls by myself, but isn't it recorded and transmitted from someone's iPod or MP3 player, or someone's computer with a time difference? 자기의 시간. 저는 저 대로 , 제 시간에 이것을 녹음을 하면, 예전에 라디오라든가 이런 것은 일제히 송출되지 않았습니까? If I record this on time, as it is, wasn't radio or something like this broadcast all at once? 이제는 자기의 개인화된 시간에서 이걸 받아들이는거죠. 그래서 팟캐스트를 하면서 달라진 시간의 의미라는 것에 대해서 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하게됩니다. 지난 시대의 시간이라는 것은 좀 집단화 된 시간 같은거였어요. 모여사는 메스껭이 처럼, 지금 이제 뭐 농담삼아서 ‘본방사수'이런 말이 나오는데 사실은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나중에 시청하거나 청취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정말로 ‘본방사수' 말고는 방법이 없었죠? But back in the day, there really wasn't a way to do anything other than 'main radiator', was there? 근데 지금은 시간이라는 것이 충분히 개인화돼서 이제는 어떤 메시지라던가 또는 어떤 메시지까진 아니다하더라도 이야기가 일제히 집단적으로 동시에 다른사람의 시간을 한꺼번에 폭력적으로 잡아먹으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개인에게 마치 제가 농담 삼아서 제 홈페이지에 ‘어떻게 팟캐스트 들으세요?' However, now that time is sufficiently personalized, the story is not conveyed by violently eating other people's time at the same time collectively, even if it is not a message or a message now. On'How do you listen to the podcast?' 그러면서 5 번인가에 ‘텔레파시' 이렇게 써놨는데요. 어떤 의미에서는 텔레파시와 비슷한 점이 있어요. 한 개인이 이렇게 앉아서 어떤 메시지를 송출하면 그 메세지는 여러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다른 개인에게 일대일로 전달되는 것이죠. 개인화된 시간에 가게되는 것입니다. You are going to be at a personalized time.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어떤 시집 하나를 발견하게 됐는데요. While thinking about that, I discovered a poetry book today. 마침 오늘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하고 딱 와닿는달까요? Do you really want to meet the problem I am thinking of today? 내용을 보지않고서 제목만 딱 보고도 ‘어? If you read the title without looking at the content, you might think, "Huh? 저기에 뭐가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이 되는 그런 책들이 있죠? 우리가 가끔 ‘아 무슨 책을 읽을 까?' 서가를 어슬렁 거리다가 보면, 내용을 전혀 모르지만 어떤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끄는 그런 책들이 있는데, 사실은 그런 책들, 그런 제목들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와 어느정도 조응하고 있겠죠? When I wander around the bookshelves, there are books like that that don't know the content at all, but that catch our minds with just any title, but in fact, those books, those titles, will probably correspond to the problems we are thinking about, the problems we are thinking of, and to some extent. ? 이 시간에 대한 얘기 말씀드렸는데, 오늘 제가 집어들게 된 시집은요, 제목이 “슬픔이 없는 십 오초”입니다. 심보선이라는 시인의 시집인데요. It is a collection of poems by a poet named Shim Bo-seon. 그렇게 널리 알려진 시긴은 아니지만, 요즘 문단에서는 상당히 주목받고있는 그런 시인입니다. 시집으로 묶이기 전부터, 문예지에 실릴 때 부터, 저는 상당히 좋아하면서 봤습니다. Even before it was collected in a poetry book, and even before it was published in a literary magazine, I was quite fond of it. 유쾌한 면도 있고요. There's a funny side to it, too. 뒤집어 보는 재미… 이런 것들을 주는 분입니다. Fun to flip over... He is the one who gives these things. ‘아름다운 시어'이런건 잘 모르겠지만. I'm not sure about'Beautiful Shea'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해주는 그런, 그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죠. It's the kind of person who speaks language like that that allows you to see the world with different eyes. 시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이 없는 십 오초” 제목 참 재밌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시집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얼마 전에 또 제가, 제 서가에서 책을 하나 빼서 읽었는데, 그게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이라는 유명한 사진가가있죠. 시간을 포착하는 사진가라고 불리게 되는 사람인데. He's called a photographer who captures time. 이분에 대한 그… 사진집 서문을 누가 썼냐하면, 피카소 미술관장이죠. Who wrote the foreword to that... photo book about him, the director of the Picasso Museum. 장 끌레르(Jean Clair)라는 피카소 미술관장입니다. This is the director of the Picasso Museum, named Jean Clair.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은 이제 바르셀로나에도 있고, 뭐 저 프로방스 쪽에도 하나가 있고요. The Picasso Museum in Paris is now in Barcelona, and there is one on the Provence side. 그 뉴욕에도, 아 뉴욕엔 없구나. 파리에 있죠. 그래서 그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장인 장 끌레르가 그 까르티 브레송의 작품에 대해서 서문을 썼습니다. 이 서문이 재밌습니다. 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요. 한 번  그 부분을 먼저 읽어보로독 하겠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카이로스(Kairos)'라는 말을 우리가 보통 ‘기회'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키는데 사용했다. Ancient Greeks used the word'Kairos' to refer to what we usually call'opportunity'. 그것은 시간과 관련된 말이다. It's about time. 현대 그리스어에 와서야 결국 시간을 가리키게 된다. It is only when we come to modern Greek that we will eventually point to time. 그것은 딱 알맞는 것, 즉 적절한 때, 혹은 유리한 순간, 혹은 지속 속에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더 오래 전에는 시간의 자리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요한 곳을 가리키는 공간의 자리였다. 예컨데 "카이로스"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글에서, 때때로 생사가 달린, 상처받기 쉬운 곳이자 발병 지점인 아픈 신체 부위를 가리킨다. "Kairos", for example, in the writings of the Greek poet Homer, refers to a sore body part that is sometimes life-and-death, vulnerable and at the point of onset. 그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수많은 군가 속에서, 이성의 여신 아테네가, 영웅을 위협하며 날아오르는 창이나 화살을 마지막 순간에 빗나가게 하면서 영웅을 거들어 개입하는 여러 행간들이 보인다. In the numerous military songs of his epic "Iliad", Athens, the goddess of reason, threatens the hero and deflects the flying spear or arrow at the last minute, helping the hero to intervene. 아테나는 그 창이나 화살을 결정적 지점과 위급한 곳으로부터 뿌리쳐버리는데 이는 실은 공간의 문제이다. Athena deflects the spear or arrow away from the crucial and the critical, which is really a matter of space. 죽음이 갑옷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듯이, 그 흉갑의 틈과 같은 것, 그런 치명적 지점이 신체에서 “카이로스”에 해당된다. 그것은 고대에, 측량술을 거의 무시하고서, 직관적으로 좋은 자리를 가려내고 선택하고 꿰뚫어보는, 여전히 경험적인 눈의 잠재력과 공간적으로 관련되어있는 말이다.

제가 이, 그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이 까르띠 프레송의 작품에 대한 서문을 인용하는 까닭은요, 이 뒤에 장 끌레르라는 피카소 미술관장은 이 카이로스라는 개념을 가지고 까르티 브레송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게 되는데요. 이것은 쉽게 말하자면 그런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 우리가 흔히 까르띠 브레송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인데, 이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의 문제이기도 하고, 신체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즉, 사진가의 임무란 무엇이냐. 이 사람이 볼 때,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추구했던 세계는 바로 이런 카이로스적 관점이라는 것이죠. For this person, the world that Henri Cartier Bresson was pursuing was this Kairos perspective. 빈틈, 세계의 빈틈, 또는 인간의 빈틈, 시간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 경험적으로, 즉 카메라를 들고, 이 까르띠에 브레송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다녔다고 그러죠. 카메라를 들고다니면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와 구도를 포착해서 그것을 자기 카메라에, 어떤 찰나의 순간이죠. 이걸 담았다는 것이죠. 제가 오늘 이 심보선이라는, 그 시인의 시를 얘기하기전에 왜 이 얘기를 드리냐하면,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인이라는 것은 언어를 아름답게 조탁하고, 이런 고전적인 시인의 뭐 기능이 있었죠. 모국어를 아름답게 발견하고. 근데 이제 현대의 시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 생각에는 우리 일반인들, 일상인들이 놓치고 있는 카이로스 적인 시간, 빈 시간, 빈 장소. 뭐 아킬레스의 말하자면 아킬레스 건. 하녀가  목욕을 시키다가 손가락으로 집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물이 닿을 수 없었던. The maid was taking a bath and was holding her finger, so the water could not reach. 그러므로써 아킬레스라는 영웅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부분. Therefore, some part that could not but be a fatal weakness of the hero Achilles. 이런 것들을 포착하는 것. Capturing these things. 이런게 시인의 몫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둔감해진 채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제 소설가니까 세상을 산문적으로 바라봅니다. 문장으로 바라보고, 뭐 어떤 산문으로 생각하죠. We look at it in sentences and think in some prose. 스토리로 바라봅니다. 반면, 이 시인들은 ‘촌철살인'이라고 우리가 흔히들 표현하는데요. 어떤 세계의 빈틈을 노리는 자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글을 쓴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