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5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5

“설마 엑스파일 같은 거 만드는 건 아니겠지?”

“엑스파일 좋아해?”

“아니, 난 로맨틱 코미디가 좋아. 투닥거리지만 마지막엔 모든 게 용서되잖아.”

“미안해, 이런 얘기해서……”

“2001년에 강원도 평창군의 한 목장에서 소를 돌보던 남자가 화상으로 사망했어. 주변에 인부들이 여럿 있었는데 증언이 희한해. 소들이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달려오기에 봤더니 그 남자가 온몸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워하더라는 거야. 그 남자의 주머니에선 어떤 발화물질도 나오질 않았어. 휘발유나 시너 같은 것도 검출되지 않았고. 그런데 그 남자는 뭘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죽어버린 거야. 그 남자의 팔과 다리는 채 불타지 않고 남았대.”

“정말 끔찍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경은 버튼을 눌러 차창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2002년 가을엔 야근을 하고 나오던 한 회계사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역시 차 안에서 불에 타 숨졌어.”

어린아이들이 연줄을 잡고 우리 앞을 뛰어 지나갔다. 연은 별로 하늘 높이 날지도 못한 채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펄럭였다. 아이들과 연이 시야 밖으로 나가버리자 강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어쩐지 통속적인 TV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 회계사,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이야.”

나는 미경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물이 담배에 떨어져 담배 허리가 젖어들었다. 곧이어 손등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조사중이야. 근데 희한한 건, 발화점이 이상하게도 사망자의 심장 부근이라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데 그렇대. 안에서부터 타들어가면서 몸 전체를 태우고 그게 자동차나 집을 태운 거야. 그것도 순식간에.”

“설마.”

“보통 화상을 당하면 피부가 가장 큰 손상을 입는데 이런 경우엔 내부 장기가 더 심한 손상을 입는다는 거야. 안 믿어지지? 나도 그랬어. 우리들은 이런 사건을 자연발화라고 불러. 라이터도, 휘발유도 없이 그냥 한 인간의 내부에서 불이 타올라 모든 걸 태워버리는 거야.”

“미경아. 나 좀 봐.”

미경이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요즘 회사 나가지?”

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 정상이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근데 미국에서 이런 유형의 사건에 대한 다큐가 만들어진 적이 있어. 어떤 카우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죽었어. 사람들이 달려들어 담요로 불을 껐지만 역부족이었어. 역시 손과 발, 머리는 별로 타지 않은 채로 남았어. 우리가 그냥 단순한 화재로 알고 있는 사건 중에는 분명 이런 사건들도 섞여 있어. 누군가 운전대를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다가 갑자기 불길에 휩싸이는 거야. 그럼 가로수를 들이받고 쾅. 보험회사 조사팀과 경찰 교통사고 조사반은 운전 미숙으로 인한 추돌사고로 정리하는 거지. 그런데 아까 그 해산물 도매업자의 차에는 연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 신혼여행중이었던 그 신부, 정신병원에 있다는 그 여자는 지금도 자연발화를 주장하고 있어. 갑자기 신랑의 몸에서 불이, 마치 휴대용 가스버너가 폭발하듯 타올랐다는 거야.”

“정식이는?”

“역시 연료가 거의 없었어. 야근이 계속돼서 기름 넣을 시간도 없이 바빴거든. 너도 알잖아. 정식이는 담배도 안 피웠어. 주차장 폐쇄회로 화면을 봐도 외부에서 접근한 흔적은 없어. 그냥 정식이는 가방을 들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어. 잠깐 예열을 하고 차를 몰고 앞으로 나오는데 차가 멈추더니 잠시 후 차에서 연기와 화염이 보여. 그리고 나오지도 못하고……”

미경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미경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함께 울어주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남편이 제 속에서 타오른 불길로 죽었다는 걸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미경의 어깨를 안고 있으면서도 나는 핑크플로이드의 앨범, ‘Wish You Were Here'의 표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몸에 불이 붙은 한 남자와 멀쩡한 한 남자가 황량한 거리에서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의 우린 모두 핑크플로이드와 그 앨범을 사랑했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너한테 이런 프로그램을 맡긴 건 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맞아. 다큐 만든다는 건 거짓말이야. 생각만 해도 온몸이 벌벌 떨리는데 어떻게 만들어. 너무 우중충한 소재여서 아마 내가 하겠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오케이 안 했을 거야.”

“그렇게 몹쓸 회사는 아니구나.”

“그냥 나 혼자 알아보고 있어. 나 말고도 꽤 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도 교환하고 피해자 주변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래. 모두 그런 거라도 안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야. 근데 모여서 맨날 불, 불, 불 얘기만 하니까 힘들었어.”

“나한테도 불 얘기만 하고 있잖아.”

“그랬나?”

미경이 피식 웃었다. 나는 바오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럴 만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도 많고 말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많다.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의도의 불빛이 많은 별을 집어삼켰지만 그래도 몇몇 행성과 항성 들은 살아남아 오래 전에 쏘아보낸 그 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이가 죽고 나니까 문득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냥 착한 사람이었다는 거. 애를 갖고 싶었지만 끝내 못 가졌다는 거, 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거, 야구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거. 그 정도야. 허깨비랑 살았다는 기분이야.”

“묘는 어디야?”

“납골당이 있어. 파주 쪽에.”

“언제 같이 가자.”

미경이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바닥은 축축하고 등은 거칠었다.

“안 돼.”

“왜 안 돼?”

“같이 가면, 너 나랑 결혼해야 돼.”

미경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미쳤구나.”

“거 봐, 안 되잖아. 그러니까 너 혼자 가.”

이것도 데자뷰. 똑같은 일이 그 옛날에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식이 죽은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이다. 그러니 그랬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 일이 처음이 아닌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빌딩 위에서 빛나는 행성들을 바라본다. 나는 씩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건다. 부르릉. 뭔가 활기가 생기는 느낌이다.

미경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미경과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함께 지내보면 까짓,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같이 아침 먹고 바쁜 그녀를 출근시키고 녹차를 마시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듣고 퇴근하는 그녀와 저녁을 먹는 것이다. 오늘 많이 썼어? 그녀가 물으면 나는 그녀가 나간 사이에 쓴 소설들을 보여주리라. 우리 둘 다, 더이상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한동안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누군가와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다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림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멋진 그림자가 생기면 사제관으로 불쑥 찾아가 얄밉도록 잘생긴 바오로 신부의 뒤통수를 한대 툭 치며 내 아이의 영세를 부탁하게 될지도 모른다. 멋진 세례명 하나 지어줘. 바오로 같은 거 말고. 일 년에 한 번은 정식의 제사도 지내주리라. 자식도 없이 죽은 녀석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거대한 새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늘을 본다. 이상하다. 달도 없는 밤에 웬 새 그림자. 몸이 다시 움츠러든다. 덕분에 쓸데없는 상상은 끝. 나는 옷만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운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제가 지금 꽤 오랫동안 감기에 걸려있어서요 목소리가 좋지 않은, 네 그래도 뭐 많이 나아지고 있어서 오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쓴 단편소설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한, 벌써 꽤 됐군요, 옛날에 쓴 소설이고요.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있는 소설입니다. 그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집에는 워낙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소설이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소설은 그 소설만큼은 주목을 받진 못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쓴 단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작가들한테 제가 물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작가마다 마음속에 품고있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어서요, 네, 오늘 오랜만에 꺼내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저도 이걸 오랜만에 읽어보는 것이라 감회가 새롭군요. 제 소설이라 제가 더.. 할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작가 김영하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5 Episode 35 - Youngha Kim "The Man Who Sold the Shadow" - Part 5

“설마 엑스파일 같은 거 만드는 건 아니겠지?”

“엑스파일 좋아해?”

“아니, 난 로맨틱 코미디가 좋아. 투닥거리지만 마지막엔 모든 게 용서되잖아.”

“미안해, 이런 얘기해서……”

“2001년에 강원도 평창군의 한 목장에서 소를 돌보던 남자가 화상으로 사망했어. 주변에 인부들이 여럿 있었는데 증언이 희한해. 소들이 갑자기 펄쩍펄쩍 뛰며 달려오기에 봤더니 그 남자가 온몸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워하더라는 거야. 그 남자의 주머니에선 어떤 발화물질도 나오질 않았어. 휘발유나 시너 같은 것도 검출되지 않았고. 그런데 그 남자는 뭘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죽어버린 거야. 그 남자의 팔과 다리는 채 불타지 않고 남았대.”

“정말 끔찍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경은 버튼을 눌러 차창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며.

“2002년 가을엔 야근을 하고 나오던 한 회계사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역시 차 안에서 불에 타 숨졌어.”

어린아이들이 연줄을 잡고 우리 앞을 뛰어 지나갔다. 연은 별로 하늘 높이 날지도 못한 채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펄럭였다. 아이들과 연이 시야 밖으로 나가버리자 강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어쩐지 통속적인 TV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 회계사,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이야.”

나는 미경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물이 담배에 떨어져 담배 허리가 젖어들었다. 곧이어 손등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조사중이야. 근데 희한한 건, 발화점이 이상하게도 사망자의 심장 부근이라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데 그렇대. 안에서부터 타들어가면서 몸 전체를 태우고 그게 자동차나 집을 태운 거야. 그것도 순식간에.”

“설마.”

“보통 화상을 당하면 피부가 가장 큰 손상을 입는데 이런 경우엔 내부 장기가 더 심한 손상을 입는다는 거야. 안 믿어지지? 나도 그랬어. 우리들은 이런 사건을 자연발화라고 불러. 라이터도, 휘발유도 없이 그냥 한 인간의 내부에서 불이 타올라 모든 걸 태워버리는 거야.”

“미경아. 나 좀 봐.”

미경이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요즘 회사 나가지?”

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 정상이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근데 미국에서 이런 유형의 사건에 대한 다큐가 만들어진 적이 있어. 어떤 카우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죽었어. 사람들이 달려들어 담요로 불을 껐지만 역부족이었어. 역시 손과 발, 머리는 별로 타지 않은 채로 남았어. 우리가 그냥 단순한 화재로 알고 있는 사건 중에는 분명 이런 사건들도 섞여 있어. 누군가 운전대를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다가 갑자기 불길에 휩싸이는 거야. 그럼 가로수를 들이받고 쾅. 보험회사 조사팀과 경찰 교통사고 조사반은 운전 미숙으로 인한 추돌사고로 정리하는 거지. 그런데 아까 그 해산물 도매업자의 차에는 연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 신혼여행중이었던 그 신부, 정신병원에 있다는 그 여자는 지금도 자연발화를 주장하고 있어. 갑자기 신랑의 몸에서 불이, 마치 휴대용 가스버너가 폭발하듯 타올랐다는 거야.”

“정식이는?”

“역시 연료가 거의 없었어. 야근이 계속돼서 기름 넣을 시간도 없이 바빴거든. 너도 알잖아. 정식이는 담배도 안 피웠어. 주차장 폐쇄회로 화면을 봐도 외부에서 접근한 흔적은 없어. 그냥 정식이는 가방을 들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어. 잠깐 예열을 하고 차를 몰고 앞으로 나오는데 차가 멈추더니 잠시 후 차에서 연기와 화염이 보여. 그리고 나오지도 못하고……”

미경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미경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함께 울어주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남편이 제 속에서 타오른 불길로 죽었다는 걸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미경의 어깨를 안고 있으면서도 나는 핑크플로이드의 앨범, ‘Wish You Were Here'의 표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몸에 불이 붙은 한 남자와 멀쩡한 한 남자가 황량한 거리에서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의 우린 모두 핑크플로이드와 그 앨범을 사랑했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너한테 이런 프로그램을 맡긴 건 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맞아. 다큐 만든다는 건 거짓말이야. 생각만 해도 온몸이 벌벌 떨리는데 어떻게 만들어. 너무 우중충한 소재여서 아마 내가 하겠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오케이 안 했을 거야.”

“그렇게 몹쓸 회사는 아니구나.”

“그냥 나 혼자 알아보고 있어. 나 말고도 꽤 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도 교환하고 피해자 주변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래. 모두 그런 거라도 안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야. 근데 모여서 맨날 불, 불, 불 얘기만 하니까 힘들었어.”

“나한테도 불 얘기만 하고 있잖아.”

“그랬나?”

미경이 피식 웃었다. 나는 바오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럴 만했으니 그랬을 것이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도 많고 말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많다.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의도의 불빛이 많은 별을 집어삼켰지만 그래도 몇몇 행성과 항성 들은 살아남아 오래 전에 쏘아보낸 그 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이가 죽고 나니까 문득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냥 착한 사람이었다는 거. 애를 갖고 싶었지만 끝내 못 가졌다는 거, 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거, 야구라면 사족을 못 썼다는 거. 그 정도야. 허깨비랑 살았다는 기분이야.”

“묘는 어디야?”

“납골당이 있어. 파주 쪽에.”

“언제 같이 가자.”

미경이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바닥은 축축하고 등은 거칠었다.

“안 돼.”

“왜 안 돼?”

“같이 가면, 너 나랑 결혼해야 돼.”

미경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미쳤구나.”

“거 봐, 안 되잖아. 그러니까 너 혼자 가.”

이것도 데자뷰. 똑같은 일이 그 옛날에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식이 죽은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이다. 그러니 그랬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 일이 처음이 아닌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빌딩 위에서 빛나는 행성들을 바라본다. 나는 씩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건다. 부르릉. 뭔가 활기가 생기는 느낌이다.

미경을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미경과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함께 지내보면 까짓,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같이 아침 먹고 바쁜 그녀를 출근시키고 녹차를 마시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듣고 퇴근하는 그녀와 저녁을 먹는 것이다. 오늘 많이 썼어? 그녀가 물으면 나는 그녀가 나간 사이에 쓴 소설들을 보여주리라. 우리 둘 다, 더이상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한동안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누군가와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다보면, 어쩌면 내게도 그림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멋진 그림자가 생기면 사제관으로 불쑥 찾아가 얄밉도록 잘생긴 바오로 신부의 뒤통수를 한대 툭 치며 내 아이의 영세를 부탁하게 될지도 모른다. 멋진 세례명 하나 지어줘. 바오로 같은 거 말고. 일 년에 한 번은 정식의 제사도 지내주리라. 자식도 없이 죽은 녀석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거대한 새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늘을 본다. 이상하다. 달도 없는 밤에 웬 새 그림자. 몸이 다시 움츠러든다. 덕분에 쓸데없는 상상은 끝. 나는 옷만 벗어던지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운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제가 지금 꽤 오랫동안 감기에 걸려있어서요 목소리가 좋지 않은, 네 그래도 뭐 많이 나아지고 있어서 오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쓴 단편소설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한, 벌써 꽤 됐군요, 옛날에 쓴 소설이고요.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에 수록되어있는 소설입니다. 그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집에는 워낙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소설이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소설은 그 소설만큼은 주목을 받진 못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쓴 단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작가들한테 제가 물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작가마다 마음속에 품고있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어서요, 네, 오늘 오랜만에 꺼내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저도 이걸 오랜만에 읽어보는 것이라 감회가 새롭군요. 제 소설이라 제가 더.. 할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작가 김영하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