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6 -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Part 2

Episode 26 -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Part 2

그때까지 오기와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여러 번 토론을 했지만 지난 주에야 나는 그가 어떻게 카메라를 손에 넣고 그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가를 알게 됐다. 그게 그가 말해 준 이 이야기의 소재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그 주초에 '뉴욕타임스'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와서 크리스마스 아침 자에 실릴 단편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거절'이라는 단어가 바로 떠올랐지만 그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끈질겼다. 그래서 통화가 끝날 무렵나는 한번 애를 써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아주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 내가 뭘 안단 말인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의뢰를 받고 단편을 써본 적도 없지 않은가?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디킨스, 오 헨리 그리고 다른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싸우며 며칠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는 즐겁지 않은 연상 작용을 일으켰고, 위선적인 값싼 감상과 입에 발린 달콥한 말의 홍수를 떠올리게 해서 심히 불쾌했다. 기껏 그럴듯하게 써봤자,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게 소원 성취하는 이야기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것일텐데. 말도 안된다. 내가 그런 글들이나 쓰고 있다니!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써달라면서 감상적이지 않게 써달라고 부탁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모순된 말이고, 불가능 그 자체이며 구제 불능의 수수께끼였다. 그건 발 없는 경주마나 날개 없는 참새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방법이 없었다. 목요일에,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바깥공기가 내 머리를 맑게 해줄까 싶어서였다.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시가가 떨어진 것이 생각나서 시가 가게에 들렀다. 오기는, 항상 그렇 듯이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지금의 내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이야기를 다 끝내자 그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그게 문제야? 이봐 친구, 점심 사면 자네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해줄게. 게다가 이건 몽땅 실화라는 걸 보장하지." 우리는 한 블록을 걸어서 잭 네 식당으로 갔다. 거기는 비좁고 떠들썩한 샌드위치 가게인데, 훈제 쇠고기 샌드위치가 아주 맛이 있고, 옛날 다저스 팀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뒤쪽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고 나자 오기는 이야기를 꺼냈다.

"1972년 여름이었어." 그가 말했다.

"한 꼬마가 어느 날 아침 가게에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지. 아마 열아홉이나 스물쯤 됐었을 거야. 내가 봐온 사람들 중에 가장 애처로운 좀도둑이었지. 그는 끝 쪽에 있는 잡지 꽂이 옆에 서서 책들을 레인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어. 그 때 카운터에 사람이 좀 많았기 때문에 난 처음에는 그걸 못 봤어. 그러다가 그가 하는 짓을 눈치채고 소리를 질렀지. 그는 산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고, 내가 카운터 뒤에서 겨우 빠져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애틀랜틱 애브뉴 아래쪽으로 쏜살같이 뛰고 있었어. 그를 잡으려고 반 블록쯤 쫒아가다가 난 포기했지. 그는 도망가다가 뭔가를 길에 떨어뜨렸어. 난 더 이상 못 뛰겠어서 그게 뭔가 하고 내려다 봤지.

그건 그 애의 지갑이었어. 안에 돈은 한 푼도 없었고, 그 애의 운전 면허증이 사진 서너 장하고 같이 들어 있었어. 경찰을 불러서 그 애를 잡아 가둬야겠다고 생각했지. 운전 면허증에 그 애의 이름과 주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어. 그 애는 그냥 조무래기 좀도둑 아닌가. 게다가 지갑에 들어 있던 사진들을 보고 나니까 화를 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로버트 굿윈. 이게 그 애 이름이었어. 사진 가운데 하나는 그 애가 엄마 아니면 할머니인 듯한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찍은 사진이었지. 다른 사진에는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된 그 애가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입이 찢어질 듯이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어. 난 감히 고발할 용기가 나지 않더군. 아마 그 애는 지금 마약을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가진 것 없는 브루클린 출신의 불쌍한 꼬마가 그 따위 싸구려 책 몇 권 훔쳤기로 뭐 그리 큰 일이겠나?

그래서 그 지갑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 가끔 보내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냥 미적대고만 있었지.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난 아무 할 일이 없었어. 크리스마스 날에는 사장이 항상 날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같이 지내곤 했는데, 그해에는 가족들과 함께 친척들을 방문하러 플로리다로 가버렸거든. 그래서 그날 아침에 난 기운이 빠져서 아파트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가 부엌 선반 위에 있는 로버트 굿윈의 지갑을 봤지. 그러자 제기랄, 뭔가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코트를 걸치고 지갑을 직접 돌려주려고 갔지.

주소는 보럼 힐 너머에 있는 임대 주택 단지 어딘가였어. 그날 바깥 날씨는무척 추웠지. 번지수를 몇 번 잘못 짚은 끝에 집을 찾았어. 그 동네는 모든 게 똑같아 보여서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뺑뺑 돌아야 했어. 하여튼, 결국 찾아내서 초인종을 눌렀지. 응답이 없었어. 아무도 없나 보다 생각했지. 하지만 혹시나 하고 다시 초인종을 눌렀지. 그리고 조금 더 기다렸어. 그러다가 막 가려는데, 문으로 나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거야. 누구냐고 묻는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로버트 굿윈을 찾는다고 말했지. 늙은 여자는 '로버트, 너냐?' 하고 묻더니 한 15개쯤 되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어.

그녀는 최소한 여든, 아마 아흔쯤 돼보였어. 난 그녀를 보자마자 장님이라는 걸 알았지. '네가 올 줄 알았다. 로버트'하고 그녀는 말했어. '난 네가 크리스마스 날에는 이 에슬 할미를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안으려는 듯 팔을 벌렸어.

자네도 눈치챘겠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 빨리 사실을 알려 줘야 했지.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군. '맞아요. 에슬 할머니. 크리스마스 날이라서 할머니를 뵈러 제가 돌아왔어요.' 왜 그랬냐고는 묻지 마. 나도 모르겠어. 아마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가 뭐 그랬겠지.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돼버렸어. 그러자 이 할머니는 갑자기 문 앞에서 나를 껴안았고, 나도 마주 껴안아 줬지.

내가 당신 손자라고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어.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최소한, 그건 그냥 분위기만 그런 척했던 거야. 난 속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어. 그건 우리들이 그렇게 하기로 꾸민 게임 같은 거였어. 규칙 같은 건 정할 필요도 없는. 내 얘기는 할머니도 내가 손자 로버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녀는 늙고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최소한 낯선 사람과 자신의 혈육을 구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 하지만, 그런 척하는 게 그녀는 기쁜 것 같았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난 그렇게 하는 게 행복했어.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하루를 같이 보냈지. 거긴 정말 지저분했어. 하지만, 장님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 당연하지 않았겠나?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을 때마다 거짓말을 했어. 시가 가게에 일자리를 얻었다고 했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고, 수백 개의 그럴듯한 듣기 좋은 얘기를 꾸며 댔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전부 믿는 척했어. '잘 됐구나, 로버트. '라고 말하곤 했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어 가며. '난 네가 뭐든지 잘 해낼 줄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난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 집안에 먹을 게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웃에 있는 가게로 가서 먹을 걸 한 보따리 사왔지. 닭 요리, 야채 수프, 감자 샐러드 한 바가지, 초콜릿 케이크 등등. 에슬 할머니는 침실에 와인 몇 병을 감춰 놨더군. 그래서 우린 둘이서 제접 그럴듯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게 됐지. 우린 둘 다 와인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어.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거실로 가서 앉았지. 거기 의자가 더 편했거든. 오줌이 마려워서 할머니에게 실례한다고 말하고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갔어. 거기서 일이 묘하게 돌아간 거야. 내가 에슬 할머니의 손자 노릇을 하며 까불어 댄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 뒤에 내가 한 짓은 미친 짓이었고 난 결코 그런 짓을 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기 옆 벽에 기대자 카메라 6~7대가 쌓여 있는 게 보이더군. 최신형 35밀리 카메라였어. 상자도 뜯지 않은 채였고, 최상품들이었어. 난 이게 진짜 로버트의 짓이고 그가 최근에 훔쳐 온 물건들을 쌓아 놓은 거라는 걸 알아차렸지. 난 평생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물건을 훔친 적도 전혀 없었지. 하지만 화장실에 앉아서 그 카메라들을 보는 순간, 카메라를 한 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냥 그랬어.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딴 생각할 틈도 없이 상자 중에 하나를 내 팔 밑에 쑤셔 넣고 거실로 돌아왔어.

내가 자리를 비운 게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에슬 할머니는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어. 와인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나는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는데, 할머니는 시끄러운 설거지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기처럼 가늘게 코를 골며 계속 자고 있었어. 그녀를 깨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떠나기로 했지. 작별인사를 메모로 남길 수도 없었어. 그녀는 장님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나왔어. 손자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고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든 다음, 아파트에서 걸어 나왔지.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야." "할머니를 만나러 다시 간 적 있나?" 내가 물었다.

"한 번." 그가 말했다.

"서너 달 후에. 카메라를 훔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어. 그때까지는 쓰지도 않았었지. 결국은 돌려주기로 마음을 정하고 갔었지만, 에슬 할머니는 이미 거기 살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아파트에 새로 이사 왔고, 이사 온 사람도 할머니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고 했어." "아마 돌아 가셨겠지." "그래, 아마도." "그건 할머니가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자네와 함께 보냈다는 뜻이고."


Episode 26 -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Part 2 Episode 26 - Paul Auster "The Christmas Story of Ogieren" - Part 2 Episode 26 - Paul Auster "L'histoire de Noël d'Ogieren" - Partie 2

그때까지 오기와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여러 번 토론을 했지만 지난 주에야 나는 그가 어떻게 카메라를 손에 넣고 그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가를 알게 됐다. 그게 그가 말해 준 이 이야기의 소재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그 주초에 '뉴욕타임스'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와서 크리스마스 아침 자에 실릴 단편을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거절'이라는 단어가 바로 떠올랐지만 그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끈질겼다. 그래서 통화가 끝날 무렵나는 한번 애를 써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아주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크리스마스에 대해 내가 뭘 안단 말인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의뢰를 받고 단편을 써본 적도 없지 않은가?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디킨스, 오 헨리 그리고 다른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싸우며 며칠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는 즐겁지 않은 연상 작용을 일으켰고, 위선적인 값싼 감상과 입에 발린 달콥한 말의 홍수를 떠올리게 해서 심히 불쾌했다. 기껏 그럴듯하게 써봤자,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게 소원 성취하는 이야기나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것일텐데. 말도 안된다. 내가 그런 글들이나 쓰고 있다니! 게다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써달라면서 감상적이지 않게 써달라고 부탁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모순된 말이고, 불가능 그 자체이며 구제 불능의 수수께끼였다. 그건 발 없는 경주마나 날개 없는 참새를 상상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방법이 없었다. 목요일에,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바깥공기가 내 머리를 맑게 해줄까 싶어서였다.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시가가 떨어진 것이 생각나서 시가 가게에 들렀다. 오기는, 항상 그렇 듯이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지금의 내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이야기를 다 끝내자 그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그게 문제야? 이봐 친구, 점심 사면 자네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해줄게. 게다가 이건 몽땅 실화라는 걸 보장하지." 우리는 한 블록을 걸어서 잭 네 식당으로 갔다. 거기는 비좁고 떠들썩한 샌드위치 가게인데, 훈제 쇠고기 샌드위치가 아주 맛이 있고, 옛날 다저스 팀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뒤쪽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고 나자 오기는 이야기를 꺼냈다.

"1972년 여름이었어." 그가 말했다.

"한 꼬마가 어느 날 아침 가게에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지. 아마 열아홉이나 스물쯤 됐었을 거야. 내가 봐온 사람들 중에 가장 애처로운 좀도둑이었지. 그는 끝 쪽에 있는 잡지 꽂이 옆에 서서 책들을 레인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어. 그 때 카운터에 사람이 좀 많았기 때문에 난 처음에는 그걸 못 봤어. 그러다가 그가 하는 짓을 눈치채고 소리를 질렀지. 그는 산토끼처럼 달아나기 시작했고, 내가 카운터 뒤에서 겨우 빠져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애틀랜틱 애브뉴 아래쪽으로 쏜살같이 뛰고 있었어. 그를 잡으려고 반 블록쯤 쫒아가다가 난 포기했지. 그는 도망가다가 뭔가를 길에 떨어뜨렸어. 난 더 이상 못 뛰겠어서 그게 뭔가 하고 내려다 봤지.

그건 그 애의 지갑이었어. 안에 돈은 한 푼도 없었고, 그 애의 운전 면허증이 사진 서너 장하고 같이 들어 있었어. 경찰을 불러서 그 애를 잡아 가둬야겠다고 생각했지. 운전 면허증에 그 애의 이름과 주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어. 그 애는 그냥 조무래기 좀도둑 아닌가. 게다가 지갑에 들어 있던 사진들을 보고 나니까 화를 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로버트 굿윈. 이게 그 애 이름이었어. 사진 가운데 하나는 그 애가 엄마 아니면 할머니인 듯한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찍은 사진이었지. 다른 사진에는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된 그 애가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입이 찢어질 듯이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어. 난 감히 고발할 용기가 나지 않더군. 아마 그 애는 지금 마약을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가진 것 없는 브루클린 출신의 불쌍한 꼬마가 그 따위 싸구려 책 몇 권 훔쳤기로 뭐 그리 큰 일이겠나?

그래서 그 지갑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 가끔 보내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냥 미적대고만 있었지.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난 아무 할 일이 없었어. 크리스마스 날에는 사장이 항상 날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같이 지내곤 했는데, 그해에는 가족들과 함께 친척들을 방문하러 플로리다로 가버렸거든. 그래서 그날 아침에 난 기운이 빠져서 아파트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가 부엌 선반 위에 있는 로버트 굿윈의 지갑을 봤지. 그러자 제기랄, 뭔가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코트를 걸치고 지갑을 직접 돌려주려고 갔지.

주소는 보럼 힐 너머에 있는 임대 주택 단지 어딘가였어. 그날 바깥 날씨는무척 추웠지. 번지수를 몇 번 잘못 짚은 끝에 집을 찾았어. 그 동네는 모든 게 똑같아 보여서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뺑뺑 돌아야 했어. 하여튼, 결국 찾아내서 초인종을 눌렀지. 응답이 없었어. 아무도 없나 보다 생각했지. 하지만 혹시나 하고 다시 초인종을 눌렀지. 그리고 조금 더 기다렸어. 그러다가 막 가려는데, 문으로 나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거야. 누구냐고 묻는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로버트 굿윈을 찾는다고 말했지. 늙은 여자는 '로버트, 너냐?' 하고 묻더니 한 15개쯤 되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어.

그녀는 최소한 여든, 아마 아흔쯤 돼보였어. 난 그녀를 보자마자 장님이라는 걸 알았지. '네가 올 줄 알았다. 로버트'하고 그녀는 말했어. '난 네가 크리스마스 날에는 이 에슬 할미를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안으려는 듯 팔을 벌렸어.

자네도 눈치챘겠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 빨리 사실을 알려 줘야 했지.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군. '맞아요. 에슬 할머니. 크리스마스 날이라서 할머니를 뵈러 제가 돌아왔어요.' 왜 그랬냐고는 묻지 마. 나도 모르겠어. 아마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가 뭐 그랬겠지.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돼버렸어. 그러자 이 할머니는 갑자기 문 앞에서 나를 껴안았고, 나도 마주 껴안아 줬지.

내가 당신 손자라고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어.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최소한, 그건 그냥 분위기만 그런 척했던 거야. 난 속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어. 그건 우리들이 그렇게 하기로 꾸민 게임 같은 거였어. 규칙 같은 건 정할 필요도 없는. 내 얘기는 할머니도 내가 손자 로버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그녀는 늙고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최소한 낯선 사람과 자신의 혈육을 구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 하지만, 그런 척하는 게 그녀는 기쁜 것 같았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난 그렇게 하는 게 행복했어.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서 하루를 같이 보냈지. 거긴 정말 지저분했어. 하지만, 장님 여자 혼자 사는 집이니 당연하지 않았겠나? 그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을 때마다 거짓말을 했어. 시가 가게에 일자리를 얻었다고 했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고, 수백 개의 그럴듯한 듣기 좋은 얘기를 꾸며 댔고, 그녀는 그 이야기를 전부 믿는 척했어. '잘 됐구나, 로버트. '라고 말하곤 했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어 가며. '난 네가 뭐든지 잘 해낼 줄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난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 집안에 먹을 게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웃에 있는 가게로 가서 먹을 걸 한 보따리 사왔지. 닭 요리, 야채 수프, 감자 샐러드 한 바가지, 초콜릿 케이크 등등. 에슬 할머니는 침실에 와인 몇 병을 감춰 놨더군. 그래서 우린 둘이서 제접 그럴듯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게 됐지. 우린 둘 다 와인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어.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우리는 거실로 가서 앉았지. 거기 의자가 더 편했거든. 오줌이 마려워서 할머니에게 실례한다고 말하고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갔어. 거기서 일이 묘하게 돌아간 거야. 내가 에슬 할머니의 손자 노릇을 하며 까불어 댄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 뒤에 내가 한 짓은 미친 짓이었고 난 결코 그런 짓을 한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서 샤워기 옆 벽에 기대자 카메라 6~7대가 쌓여 있는 게 보이더군. 최신형 35밀리 카메라였어. 상자도 뜯지 않은 채였고, 최상품들이었어. 난 이게 진짜 로버트의 짓이고 그가 최근에 훔쳐 온 물건들을 쌓아 놓은 거라는 걸 알아차렸지. 난 평생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었어. 그리고 물건을 훔친 적도 전혀 없었지. 하지만 화장실에 앉아서 그 카메라들을 보는 순간, 카메라를 한 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 그냥 그랬어.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딴 생각할 틈도 없이 상자 중에 하나를 내 팔 밑에 쑤셔 넣고 거실로 돌아왔어.

내가 자리를 비운 게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에슬 할머니는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어. 와인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나는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는데, 할머니는 시끄러운 설거지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기처럼 가늘게 코를 골며 계속 자고 있었어. 그녀를 깨우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떠나기로 했지. 작별인사를 메모로 남길 수도 없었어. 그녀는 장님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나왔어. 손자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두고 카메라를 다시 집어 든 다음, 아파트에서 걸어 나왔지.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야." "할머니를 만나러 다시 간 적 있나?" 내가 물었다.

"한 번." 그가 말했다.

"서너 달 후에. 카메라를 훔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어. 그때까지는 쓰지도 않았었지. 결국은 돌려주기로 마음을 정하고 갔었지만, 에슬 할머니는 이미 거기 살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아파트에 새로 이사 왔고, 이사 온 사람도 할머니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고 했어." "아마 돌아 가셨겠지." "그래, 아마도." "그건 할머니가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자네와 함께 보냈다는 뜻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