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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1 - 존 크라카우어 (Jon Krakauer) - Part 2

Episode 21 - 존 크라카우어 (Jon Krakauer) - Part 2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이 참사의 과정을 기록을 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이 책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앞에 다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읽다보면 도데체 다가올 운명을 이들은 왜 모르는가...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읽어나가게 되죠. 이 서스펜스라는 것은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관객은 아는데 극속의 인물들은 모르는 것, 이게 서스펜스죠. 예를 들면 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는데, 의자 밑에서 째깍거리고 있는데 아이가 모른다거나 이럴 때 우리는 (관객인 우리는) 막 마음이 졸아들죠. '어서 도망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는 상태인데 이 서스펜스가 이 책에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물들이 다가올 운명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단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읽어나가게 됩니다. 일단 앞부분을 한번 읽은 다음에요 얘기를 좀 더 나눠보도록 하죠.

1996 년 '아웃사이드'에서는 나를 네팔로 보낼 가이드가 딸린 등반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하고 그에 관해 글을 쓰게 했다. 나는 로브 홀이라는 뉴질랜트 출신의 유명한 가이드가 인솔하는 등반대의 여덟 고객들 중 한 사람의 자격으로 그곳에 갔다. 5월 10일, 나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정상에 오른 다섯 명의 동료들 가운데 홀을 포함한 네 사람이 우리가 아직 봉우리, 그 높은 데 있는 동안 아무 예고 없이 불어닥친 맹렬한 폭풍 속에서 사망했다. 내가 베이스 캠프로 내려올 즈음 네 팀의 등반대에서 아홉 명이 사망했으며, 그 달이 가기전에 가시 세명이 사망했다. 나는 그 등반으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아 그에 관한 기사를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네팔에서 돌아오고나서 5 주가 지났을 때, '아웃사이드'에 원고를 넘겨줬고, 그 잡지의 9월 호에 기재되었다. 이 일이 끝난 뒤 나는 에베레스트의 기억들을 마음 속에서 몰아내고 내 생활에만 전념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 했다. 나는 혼돈스런 안개속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명확하게 기억하려 애썼으며, 내 동료을의 죽음을 규명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아웃사이드'에 수록된 기사는 그때의 상황에서 내가 나름대로 이뤄낼 수 있는 최대한 정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고 마감기일은 가차없이 다가왔고, 에베레스트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은 더없이 복잡 미묘했으며, 생존자들의 기억은 피로와 산소부족,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 기사를 쓰는 동안 나는 세 사람에게, 나 까지 포함한 네 사람이 그 산에서 목격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누구누구가 현장에 있었고 누가 어떤 말을 했는가는 아주 중요한 사실들에 대한 증언이 서로 엇갈렸다. 그 기사가 인쇄에 들어간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기사문 중에서 몇 군데가 잘못 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대부분은 원고 마감기한에 쫒길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인 사소한 실수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그냥 봐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실수 중 하나였으며, 그건 희생자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실을 잘못 서술한 실수들 보다 약간 덜 당혹스러운 것으로 지면 부족으로 인해 얼마간의 내용을 누락시킬수 밖에 없었다는 점도 얘기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아웃사이드'의 편집장인 마크 브라이언트, 발행인인 래리 버크는 내게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지면을 하례해줬다. 17,000 자에 해당하는 지면은 전형적인 잡지 기사의 네, 다섯 배나 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는 그 비극을 제대로 다루기에 지면이 너무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등반으로 인해 내 삶 전체가 뿌리 채 뒤흔들렸으므로 내게는 그 사건들을 지면의 제약을 받지않고 면밀하게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이 더 없이 중요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강박증의 결실이다.

높은 고도에 오른 사람의 정신력을 크게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은 이 글을 쓰는데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지각하고 기억하는 내용들에만 의존하는 걸 피하기 위해, 그 사건의 주역들과 여러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무선일지 교신들을 참조해서 이 글의 내용을 보강하려 애썼는데 그 일지들에 수록된 내용이 너무 간결해서 선명한 인상을 포착하긴 어려웠다. '아웃사이드'의 기사를 자세히 읽은 독자들은 기사에 나온 내용의 일부와 이 책에 나온 내용의 일부가 서로 엇갈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그건 그 기사가 나온 이후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일부 수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작가들과 편집자들은 내게 이 책을 너무 빨리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분들은 나와 그 사건 사이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어야 좀 더 넓고 명확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니 2, 3 년 정도 기다리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그분들의 충고는 옳았으나 결국나는 그걸 무시했다. 주로 그 산에서 일어난 일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씀으로서 내 삶에서 에베레스트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것 처럼 작가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행위로서 글을 쓰는 일이 독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 참사로 인한 생생한 충격속에서 사건 직후의 혼돈과 고통속에서 내 온 영혼을 쏟아 부음으로서 뭔가 얻어지는 게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는 내 글이 생생하고 무자비하다 할 정도로의 정직성을 갖기를 원했으며 그런건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가라앉음에 따라 걸러질 위험성이 있을 것 같았다. 내게 너무 빨리 쓰지 말라고 충고하던 사람들 중의 일부는 바로 애초에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는게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현명한 분별에 대한 욕구의 승리, 정말로 에베레스트에 오를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당 이성적인 분별의 영역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사실은 나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결국 에베레스트에 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실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두고두고 괴롭히리라...

1996 년 11 월, 시애틀에서, 존 크라카우어

네, 이게 이 책의 머릿말입니다. 상당히 간략하고 절제된 그런 문체로 자신의 소회를 적고있습니다. 상당히 끔찍한 일을 경험을 했지만 그런 것을 최대한 억누르려는 태도가 보이는 데요. 이 문학사에는 우리가 보통 소설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오랫동안의 기록문학의 전통들이 있어왔습니다. 남들이 가지 못한 곳을 가거나 아니면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들이 적어서 그것을 후대에 남기는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같은 글도 그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극 탐험에 나섰던 그 스콧의 일기 같은 것도 본 일이 있고요. 그 밖에도 극지탐험에 나섰던 많은 기록들, 또 셰클턴 호의 비극에 대해서도 글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이 탐험에 나선 사람들, 모험에 나선 사람들, 자기의 운명을 걸고 도전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단히 간결하고 담백하다는 겁니다. 별로 감정에 과잉돼있지 않고 차분하다는 것이고, 특히 현장에서 쓰여진 글들은 좀 더 정제돼있다고 할까요? 네 그런 것이 느껴져서 흥미롭죠. 좀 넓게 보자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같은 것도 그런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고요. 저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같은 글도 거기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일대 운명이 걸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동료들, 백성들의 운명이 걸린, 정말 절대절명의 순간을 기록해 나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삿된 것이 끼어들 틈이 없죠. 아주 남성적인 문체들이 빛나게 되는 순간인데요. 저는 사실 이런 산악 문학들, 이런 거를 산악문학이라는 장르로 부르기도 하는 데, 늘 상당히 좋아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영어로 Armchair Traveler라고 하는 데요, 집에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대리체험하는 그런 사람인데, 저는 이제 이런 글들을 통해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가..이런 것들을 참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그리고 도데체 이들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을... 젊은 이도 아니예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30 대, 40 대, 50 대 까지도... 60 대 까지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가서, 산에서 목숨을 건 모험을 벌이게 됩니다. 이런 것들.. 이런 동기는 뭘까.. 이런 걸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고요. 다른 어떤 소설들에서도 전문적인 작가들의 소설들에서도 얻지 못한 그런 특별한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나오면 꼭 구해서 보는 편입니다.


Episode 21 - 존 크라카우어 (Jon Krakauer) - Part 2 Episode 21 - Jon Krakauer - Part 2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이 참사의 과정을 기록을 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이 책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앞에 다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읽다보면 도데체 다가올 운명을 이들은 왜 모르는가...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읽어나가게 되죠. 이 서스펜스라는 것은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관객은 아는데 극속의 인물들은 모르는 것, 이게 서스펜스죠. 예를 들면 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는데, 의자 밑에서 째깍거리고 있는데 아이가 모른다거나 이럴 때 우리는 (관객인 우리는) 막 마음이 졸아들죠. '어서 도망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는 상태인데 이 서스펜스가 이 책에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인물들이 다가올 운명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단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읽어나가게 됩니다. 일단 앞부분을 한번 읽은 다음에요 얘기를 좀 더 나눠보도록 하죠.

1996 년 '아웃사이드’에서는 나를 네팔로 보낼 가이드가 딸린 등반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하고 그에 관해 글을 쓰게 했다. 나는 로브 홀이라는 뉴질랜트 출신의 유명한 가이드가 인솔하는 등반대의 여덟 고객들 중 한 사람의 자격으로 그곳에 갔다. 5월 10일, 나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정상에 오른 다섯 명의 동료들 가운데 홀을 포함한 네 사람이 우리가 아직 봉우리, 그 높은 데 있는 동안 아무 예고 없이 불어닥친 맹렬한 폭풍 속에서 사망했다. 내가 베이스 캠프로 내려올 즈음 네 팀의 등반대에서 아홉 명이 사망했으며, 그 달이 가기전에 가시 세명이 사망했다. 나는 그 등반으로 인해 심한 충격을 받아 그에 관한 기사를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네팔에서 돌아오고나서 5 주가 지났을 때, '아웃사이드’에 원고를 넘겨줬고, 그 잡지의 9월 호에 기재되었다. 이 일이 끝난 뒤 나는 에베레스트의 기억들을 마음 속에서 몰아내고 내 생활에만 전념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 했다. 나는 혼돈스런 안개속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명확하게 기억하려 애썼으며, 내 동료을의 죽음을 규명하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아웃사이드’에 수록된 기사는 그때의 상황에서 내가 나름대로 이뤄낼 수 있는 최대한 정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원고 마감기일은 가차없이 다가왔고, 에베레스트에서 연이어 일어난 사건들은 더없이 복잡 미묘했으며, 생존자들의 기억은 피로와 산소부족,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 기사를 쓰는 동안 나는 세 사람에게, 나 까지 포함한 네 사람이 그 산에서 목격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누구누구가 현장에 있었고 누가 어떤 말을 했는가는 아주 중요한 사실들에 대한 증언이 서로 엇갈렸다. 그 기사가 인쇄에 들어간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기사문 중에서 몇 군데가 잘못 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대부분은 원고 마감기한에 쫒길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인 사소한 실수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그냥 봐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실수 중 하나였으며, 그건 희생자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실을 잘못 서술한 실수들 보다 약간 덜 당혹스러운 것으로 지면 부족으로 인해 얼마간의 내용을 누락시킬수 밖에 없었다는 점도 얘기하고 넘어가야 되겠다.

'아웃사이드’의 편집장인 마크 브라이언트, 발행인인 래리 버크는 내게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지면을 하례해줬다. 17,000 자에 해당하는 지면은 전형적인 잡지 기사의 네, 다섯 배나 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는 그 비극을 제대로 다루기에 지면이 너무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등반으로 인해 내 삶 전체가 뿌리 채 뒤흔들렸으므로 내게는 그 사건들을 지면의 제약을 받지않고 면밀하게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이 더 없이 중요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강박증의 결실이다.

높은 고도에 오른 사람의 정신력을 크게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은 이 글을 쓰는데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지각하고 기억하는 내용들에만 의존하는 걸 피하기 위해, 그 사건의 주역들과 여러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무선일지 교신들을 참조해서 이 글의 내용을 보강하려 애썼는데 그 일지들에 수록된 내용이 너무 간결해서 선명한 인상을 포착하긴 어려웠다. '아웃사이드’의 기사를 자세히 읽은 독자들은 기사에 나온 내용의 일부와 이 책에 나온 내용의 일부가 서로 엇갈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그건 그 기사가 나온 이후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일부 수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몇몇 작가들과 편집자들은 내게 이 책을 너무 빨리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분들은 나와 그 사건 사이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어야 좀 더 넓고 명확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니 2, 3 년 정도 기다리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그분들의 충고는 옳았으나 결국나는 그걸 무시했다. 주로 그 산에서 일어난 일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씀으로서 내 삶에서 에베레스트를 완전히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것 처럼 작가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행위로서 글을 쓰는 일이 독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 참사로 인한 생생한 충격속에서 사건 직후의 혼돈과 고통속에서 내 온 영혼을 쏟아 부음으로서 뭔가 얻어지는 게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는 내 글이 생생하고 무자비하다 할 정도로의 정직성을 갖기를 원했으며 그런건 시간이 지나고 고통이 가라앉음에 따라 걸러질 위험성이 있을 것 같았다. 내게 너무 빨리 쓰지 말라고 충고하던 사람들 중의 일부는 바로 애초에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는게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현명한 분별에 대한 욕구의 승리, 정말로 에베레스트에 오를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당 이성적인 분별의 영역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사실은 나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결국 에베레스트에 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선량한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사실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두고두고 괴롭히리라...

1996 년 11 월, 시애틀에서, 존 크라카우어

네, 이게 이 책의 머릿말입니다. 상당히 간략하고 절제된 그런 문체로 자신의 소회를 적고있습니다. 상당히 끔찍한 일을 경험을 했지만 그런 것을 최대한 억누르려는 태도가 보이는 데요. 이 문학사에는 우리가 보통 소설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오랫동안의 기록문학의 전통들이 있어왔습니다. 남들이 가지 못한 곳을 가거나 아니면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들이 적어서 그것을 후대에 남기는 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같은 글도 그런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극 탐험에 나섰던 그 스콧의 일기 같은 것도 본 일이 있고요. 그 밖에도 극지탐험에 나섰던 많은 기록들, 또 셰클턴 호의 비극에 대해서도 글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이 탐험에 나선 사람들, 모험에 나선 사람들, 자기의 운명을 걸고 도전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단히 간결하고 담백하다는 겁니다. 별로 감정에 과잉돼있지 않고 차분하다는 것이고, 특히 현장에서 쓰여진 글들은 좀 더 정제돼있다고 할까요? 네 그런 것이 느껴져서 흥미롭죠. 좀 넓게 보자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같은 것도 그런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고요. 저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같은 글도 거기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일대 운명이 걸린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동료들, 백성들의 운명이 걸린, 정말 절대절명의 순간을 기록해 나가는 사람의 마음에는 삿된 것이 끼어들 틈이 없죠. 아주 남성적인 문체들이 빛나게 되는 순간인데요. 저는 사실 이런 산악 문학들, 이런 거를 산악문학이라는 장르로 부르기도 하는 데, 늘 상당히 좋아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영어로 Armchair Traveler라고 하는 데요, 집에 편안하게 앉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대리체험하는 그런 사람인데, 저는 이제 이런 글들을 통해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가..이런 것들을 참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그리고 도데체 이들을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을... 젊은 이도 아니예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30 대, 40 대, 50 대 까지도... 60 대 까지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가서, 산에서 목숨을 건 모험을 벌이게 됩니다. 이런 것들.. 이런 동기는 뭘까.. 이런 걸 궁금해 하면서 읽게 되고요. 다른 어떤 소설들에서도 전문적인 작가들의 소설들에서도 얻지 못한 그런 특별한 종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나오면 꼭 구해서 보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