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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5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5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와는 곧 헤어졌다. 이내 그는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리고 일본인형처럼 깜찍하게 생긴 여대생과 사귀기 시작했다. 6월 29일 이후 한번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에서, 등기우편으로 해고통지서를 보내왔다. 사유가 무단결근이라고 되어 있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붕괴 377시간 만에 열아홉 살의 여성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오늘이 며칠이에요? ', 였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사상자 수는 실종자 삼십 명을 포함하여 사망자 오백일 명, 부상자 구백삼십팔 명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십 분만 늦게 나왔으면 어쩔 뻔했니?" 사람들은 나에게 운이 참 좋다고 말했다.

작고 불안전한 은색 열쇠를 책상서랍 맨 아래칸에 넣어둔 채, 십 년을 보냈다. 스카치테이프나 물파스 같은 것을 급히 찾을 때 무심코 나는 서랍을 열곤 했다. R에게서는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호출기에서 핸드폰으로, 아이러브스쿨에서 미니홈피로 자주 장난감을 바꾸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이월드의 ‘사람찾기' 기능으로 R의 미니홈피를 찾아보았다. R과 같은 이름을 가진 1972년생 여자는 모두 열두 명이었다.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클릭해보았다. 열 두 명의 R들은 대부분 바쁜 모양인지 미니홈피를 꾸미지 않고 있었다. 만 서른셋. 우리가 한창 현실적인 시절을 통과하고 있기는 한가보다. 열한 번째 미니홈피에 들어가니 대문에 여자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나는 사진을 확대하여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눈이 착하게 커다랬다. 잘 보니 둥그런 턱선도R을 닮은 것 같았다. 더 선명하게 나온 다른 사진들을 보고 싶었지만 달랑 그것 한 장 뿐이었다. 그 아이가 R의 딸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는 한 동안 공동으로 남아 있었으나,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가 완공되기 몇 해전에 나는 멀리 이사를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앞을 지나간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고향이 꼭, 간절히 그리운 장소만을 아닐 것이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잘 들으셨습니까? 저도 읽다가 몇 번 감정이 울컥해서 멈추고 다시 읽어야만 했습니다. 뒷 부분 아주 감동적이죠? 제가 좀 전에 읽는 부분에 그런 얘기가 나오죠. 어떤 신문사의 칼럼 얘기가 나옵니다. 여성 명사가 기고한 칼럼인데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이다...일지도 모른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이렇게 얘기하고, 이 화자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해서 전화를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네 이것이 정이현 씨의 자전소설이니까 어쩌면 정이현 씨가 이것을 했을 수도 있고 뭐 어느정도 소설속 가공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은 이래서 존재하는 구나. 세상이 칼럼이라든가 에세이로만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글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를 질타하거나, 비아냥 거리거나, 공격하거나, 이런 것들이요. 이런 글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소설은 그렇게 널리 읽히지도 않고요. 어딘가에 숨어있죠. 하지만 오직 소설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때 잠깐 만나서.. 뭐 별 인연도 아니예요. 칼국수를 한 번 먹었고, 그 친구 집에가서 커피를 얻어 마셨고, 그리고 하루 알바를 했던 것이죠. 그치만 그 기억은 서로에게 좀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자기의 어떤 생활의 속살을 들켜버린 느낌이었을 것이고요. 이 화자는 화자대로 미안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둘은 그 뒤로는 연락을 안 했을 겁니다. 그냥 이렇게 뭍혀버렸을 어떤 사건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에요. 정이현 씨는 어쩌면 이 얘기를 쓰기 위해서 소설가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꼭 이게 그 얘기는 아닐 수 있겠지만 정이현 씨가 겪었을 어떤 일들이 있겠죠. 그것을 소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두 소설가가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네, 이 소설은 삼풍백화점이라는 어떤 초유의 끔찍한 사건, 게다가 이 사건이 강남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여러가지로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요. 이 끔찍한 사건을 대단히 담담하게 서술해 갔습니다. 이런 어떤... 이 소설 전체에서 빛나는 것은 이런 밸런스인데요, 엄청난 사건과 (사회적인 사건이죠) 그런데 소설이라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작고 아주 낮은 목소리죠. 이것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 어떤 밸런스를 가져가야 하는 가를 잘 모여주고 있고, 또 이런 거대한 사회정치적인 사건과 개인의 삶, 자전이라는 것 사이의 밸런스...이것도 참 작가로써 컨트롤 하기가 어려운 균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을 제가 읽은 지 벌써 몇 년이 됐고, 오늘 팟캐스트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게 됐는데요. 사실 이렇게... 저의 동료 작가의 소설에 대해서 뭐라고 발언하기가 쉬운 것은 아닌데, 이 소설을 쓴 정이현 씨에게 (이런 인사를 아직 못 했는데요)이 소설 참 잘 읽었고, 이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고 꼭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 오늘 이렇게 해서 정이현 씨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 안에 들어있는 소설 [삼풍백화점]를 가지고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스무 번 째 에피소드를 진행해봤습니다. 자 날씨가 덥습니다. 여러분도 이 여름, 휴가 가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요. 좋은 책과 함께하는 그런 의미있느 휴가가 되었으면 좋겠고, 또 스스로를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어떤 사람들의 삶과 내면을 발견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영하였습니다. 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5 Episode 20 - Jung Yihyun - Part 5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와는 곧 헤어졌다. 이내 그는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리고 일본인형처럼 깜찍하게 생긴 여대생과 사귀기 시작했다. 6월 29일 이후 한번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에서, 등기우편으로 해고통지서를 보내왔다. 사유가 무단결근이라고 되어 있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붕괴 377시간 만에 열아홉 살의 여성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오늘이 며칠이에요? ', 였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사상자 수는 실종자 삼십 명을 포함하여 사망자 오백일 명, 부상자 구백삼십팔 명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십 분만 늦게 나왔으면 어쩔 뻔했니?" 사람들은 나에게 운이 참 좋다고 말했다.

작고 불안전한 은색 열쇠를 책상서랍 맨 아래칸에 넣어둔 채, 십 년을 보냈다. 스카치테이프나 물파스 같은 것을 급히 찾을 때 무심코 나는 서랍을 열곤 했다. R에게서는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호출기에서 핸드폰으로, 아이러브스쿨에서 미니홈피로 자주 장난감을 바꾸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이월드의 ‘사람찾기' 기능으로 R의 미니홈피를 찾아보았다. R과 같은 이름을 가진 1972년생 여자는 모두 열두 명이었다.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클릭해보았다. 열 두 명의 R들은 대부분 바쁜 모양인지 미니홈피를 꾸미지 않고 있었다. 만 서른셋. 우리가 한창 현실적인 시절을 통과하고 있기는 한가보다. 열한 번째 미니홈피에 들어가니 대문에 여자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나는 사진을 확대하여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눈이 착하게 커다랬다. 잘 보니 둥그런 턱선도R을 닮은 것 같았다. 더 선명하게 나온 다른 사진들을 보고 싶었지만 달랑 그것 한 장 뿐이었다. 그 아이가 R의 딸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는 한 동안 공동으로 남아 있었으나,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가 완공되기 몇 해전에 나는 멀리 이사를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앞을 지나간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고향이 꼭, 간절히 그리운 장소만을 아닐 것이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잘 들으셨습니까? 저도 읽다가 몇 번 감정이 울컥해서 멈추고 다시 읽어야만 했습니다. 뒷 부분 아주 감동적이죠? 제가 좀 전에 읽는 부분에 그런 얘기가 나오죠. 어떤 신문사의 칼럼 얘기가 나옵니다. 여성 명사가 기고한 칼럼인데 '대한민국이 사치와 향락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하늘의 뜻이다...일지도 모른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이렇게 얘기하고, 이 화자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해서 전화를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네 이것이 정이현 씨의 자전소설이니까 어쩌면 정이현 씨가 이것을 했을 수도 있고 뭐 어느정도 소설속 가공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은 이래서 존재하는 구나. 세상이 칼럼이라든가 에세이로만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글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를 질타하거나, 비아냥 거리거나, 공격하거나, 이런 것들이요. 이런 글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소설은 그렇게 널리 읽히지도 않고요. 어딘가에 숨어있죠. 하지만 오직 소설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때 잠깐 만나서.. 뭐 별 인연도 아니예요. 칼국수를 한 번 먹었고, 그 친구 집에가서 커피를 얻어 마셨고, 그리고 하루 알바를 했던 것이죠. 그치만 그 기억은 서로에게 좀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자기의 어떤 생활의 속살을 들켜버린 느낌이었을 것이고요. 이 화자는 화자대로 미안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둘은 그 뒤로는 연락을 안 했을 겁니다. 그냥 이렇게 뭍혀버렸을 어떤 사건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에요. 정이현 씨는 어쩌면 이 얘기를 쓰기 위해서 소설가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꼭 이게 그 얘기는 아닐 수 있겠지만 정이현 씨가 겪었을 어떤 일들이 있겠죠. 그것을 소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모두 소설가가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네, 이 소설은 삼풍백화점이라는 어떤 초유의 끔찍한 사건, 게다가 이 사건이 강남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여러가지로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요. 이 끔찍한 사건을 대단히 담담하게 서술해 갔습니다. 이런 어떤... 이 소설 전체에서 빛나는 것은 이런 밸런스인데요, 엄청난 사건과 (사회적인 사건이죠) 그런데 소설이라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작고 아주 낮은 목소리죠. 이것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 어떤 밸런스를 가져가야 하는 가를 잘 모여주고 있고, 또 이런 거대한 사회정치적인 사건과 개인의 삶, 자전이라는 것 사이의 밸런스...이것도 참 작가로써 컨트롤 하기가 어려운 균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을 제가 읽은 지 벌써 몇 년이 됐고, 오늘 팟캐스트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게 됐는데요. 사실 이렇게... 저의 동료 작가의 소설에 대해서 뭐라고 발언하기가 쉬운 것은 아닌데, 이 소설을 쓴 정이현 씨에게 (이런 인사를 아직 못 했는데요)이 소설 참 잘 읽었고, 이런 소설을 써줘서 고맙다고 꼭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자 오늘 이렇게 해서 정이현 씨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 안에 들어있는 소설 [삼풍백화점]를 가지고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스무 번 째 에피소드를 진행해봤습니다. 자 날씨가 덥습니다. 여러분도 이 여름, 휴가 가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텐데요. 좋은 책과 함께하는 그런 의미있느 휴가가 되었으면 좋겠고, 또 스스로를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어떤 사람들의 삶과 내면을 발견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영하였습니다. 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