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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3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3

사층의 스포츠용품, 삼층의 남성복, 이층의 여성복 매장을 꼼꼼히 구경했다. 무료한 시간을 짜릿하게 보내기에 역시 백화점만큼 좋은 공간을 없었다. 이층의 오른쪽 모퉁이 매장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R의 모습이 보였다. 66사이즈까지밖에 나오지 않는 Q브랜드와 어울리지 않아 뵈는, 덩치 큰 중년여자를 앞에 두고 R은 친절히 웃고 있었다. 나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 R의 어깨를 툭 치려다 발길을 돌렸다. 일층에서는 화장품 진열대의 아이섀도 신제품을 테스트했고, 헵번스타일의 알 굵은 선글라스를 만지작대다 내려놓았다. 지하 일층의 팬시점에 들어가 아기곰 푸의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색 헝겊 필통을 샀다. 그 옆의 서점에 서서, 지금은 내용도 잊어버린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는데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백화점 안에는 시계가 없으니까,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R이 준 메모지를 찾느라 배낭을 뒤집어엎었다. 파리의 거리처럼 멋 부려 만들어 놓은 백화점일층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 속에 들어가 이층의 R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너구나." R은 내이름을 정확하게 댔다.

"두 시간만 기다려봐. 서두르면 여덟시엔 나갈 수 있어." 그 1995년이한참 흘러간 뒤에, 나는 가끔씩 궁금해지곤 했다. 그때 R은 왜 내 전화를 그렇게 담담하게받았던 걸까. 내가 먼저 연락해 올 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R에게도 그때,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여덟시가 넘자, 옥외 주차장 쪽으로 한 무더기의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니폼이 아닌평상복 차림의 그녀들은 어둠 속에서도 뽀얗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R이 먼저 내 어깨를 툭쳤다.

"오래 기다렸어?" 청바지와 모자 달린 점퍼를 입은 R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배고프다. 가자." R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꼈다. 우리는 고속도로터미널 방향으로 걸어내려갔다. 칼국수집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서야 점심으로도 면을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어머, 나도 면이라면 환장하는데 너도 그렇구나. 그래도 밀가루는 한 끼씩 건너뛰며 먹어야해. 안 그랬다간 나처럼 속 다 버린다. 이쪽 일 하는 사람들은 불규칙하게 먹으니까 다들 속이 안 좋아." 나는 단무지를 씹으며 물었다.

"백화점일을 오래 했나봐?" "스무살에 시작했으니까 올해가 오 년 짼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람결에라도 R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 R이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렇구나, 일은 재밌어? 그냥저냥, 먹고사는게 다 그렇지 뭐. 유통 일은 마약 같다고들 해. 너무 힘들어서 관두겠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녀도 또 이 언저리를 못 벗어나거든." 칼국수가 나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칼국수를 우리는 묵묵히 먹었다. R은 나더러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갈 때 R이 계산서를 들었다. 나는 얼른 지갑에서 천 원짜리 넉장을 꺼냈다. 내 몫의 칼국수 값이었다. 동전 하나까지 정확히 나누는 더치페이가 1990년대초반 여대생들의 일반적인 계산법이었다. R은 한사코 그것을 뿌리쳤다. 할 수 없이 나는 천원짜리 넉 장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커피 살게." R이 다시 내 팔짱을 꼈다.

"나는 카페 가는 거 솔직히 너무 돈 아깝더라. 차라리 우리집 갈래? 요 앞에서 버스 한 번만 타면 되는데." 우리는 Z 여자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R을 딸라 미로처럼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헤치고 들어가니 낯익은 Z 여고 후문 담벼락이 보였다.

"지름길로 온 거야." 삼 년 동안 다니고도 모르는 길이었다.

"우리집 학교랑 되게 가깝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가 전교에서 제일 빨리 등교하는 학생이었을 걸. 텅 빈 교실에 앉아 있으면 그제야 해가 뜰때도 있었어." R이 수줍게 웃었다. R의 집으로 가기 위해선 대문을 들어서서, 안채 옆쪽으로 길게 뻗은 시멘트 계단을 올라야 했다. 어두웠고, 층계의 한 칸 사이가 멀어서 좀 힘들었다. R이 마루의 스위치를 올렸다. 실내는 단출했지만 창 너머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불빛들은 근사했다.

"와아아, 야경 끝내준다아." 나는 조금은 과장된 감탄사를 뱉었다.

"이래봬도 여기가 남산이잖아." R은 쑥스러운 듯 덧붙였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앉은뱅이탁자에는 보라색 천이 덮여 있었다. R이 탁자를 창가 옆으로 끌어다놓았다. 달착지근한 커피가 부드럽게 혀 안에 감겼다.

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삼풍백화점에서 만나서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고,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간 대목이죠. 이 1995 년의 어떤 사회상이 보입니다. 뭐 삐삐 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뭐 이런 대목들이 나오고요, 제가 읽진 않았습니다만 앞부분에는 서태지 얘기도 나옵니다. 이런 어떤 그 당시의 여대생의.. 대학은 졸업했으나 아직 직장을 얻지 못한 여대생의 생활도 보이고요. 이 두 여성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한 여성은 강남의 뭐 그럭저럭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즉 그걸 작자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자식이 벌어오는 월급을 생계비에 보태지 않아도 되는 집안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했으나 직장을 아직 얻지 못한 한 여성과, 네 강북에서 살았죠. 강남에서 온 학생들이 '전학을 가버릴까' 생각할 정도의, 즉 8 학군에 배정받지 못해서, 밀려나서 가게된 학교라고 생각하는 강북의 남산 자락에 있는 어떤 여고 바로 근처에, 산동네에 살고있는 그런 여성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다 돈을 벌기 시작했고, 벌써 백화점 생활을 5 년 동안 하면서 사회인이 된, 이 두 여성의 만남...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 소설에서 이렇게 대조적이 타자들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갈등하거나, 또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거나...이런 것이 사실은 그렇게 또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학적인 용어로는 이것을 '타자와의 만남' 이렇게들 부르는 데요. 즉, 일상적으로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갈등을 유발하고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것이 말하자면.. 문학에서 말하는 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화자에게 있어서 화자는 고등학교 때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 삼풍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던 그 친구이겠지요. 이 친구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자가 없다면 우리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지요. 그들은 어떤 이상한 거울 처럼 기능하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자, 이 두 여성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뭐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보자면 그 강남에서 상당히 촉망받던, 어렸을 때 어쩌면 영재라는 소리도 들었던 이 화자는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신분이 추락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이 모이는 졸업식에도 가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이력서나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친구는 사회인이 돼서 칼국수 값을 대신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 어느정도, 그때보다는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비로소 둘이 비슷한 처지가 된 것이죠.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이라면 중간중간에 고딕체로 적어 넣은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들은 특이하나 효과를 자아내는 데요. 이것은 화자와 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말고 삼풍백화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서술할 때 이 고딕체를 써서 따로 이렇게 떼어 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R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 층으로 내려갔다. 삼풍백화점의 구조라면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큼 훤했다. 팬시 코너로 가, 하드커버 일기장을 골랐다. 물방울 무늬과 얼룰말 무늬 표지 중에서 갈등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얼룩말 무늬로 결정했다. 숨 쉬기가 힘들만큼 후텁지근 했다.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 서너들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들었어? 아까 냉면 집 5 층 상판이 주저앉았데." "웬일이니,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것은 정말로 까르르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손님, 사천 구백 원입니다." 나는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그곳을 떠났다.

네, 이런 식입니다. 삼풍백화점에서 일어날 어떤 비극, 우리가 알고있는 그 끔찍한 비극을 예감케 하는 그런 장면인데, 짧은 글이지만, 짧은 부분이지만, 이 주인공, 이 화자는 어떤 일기장... 아직 소녀취향이라는 것이죠. 하드커버 일기장을 어떤 무늬로 할 것인가 고르는 사이에 익명의 점원들은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고 있습니다. 냉면 집 상판이 무너졌다는 것, 이것은 삼풍백화점이 붕괴할 어떤 전조였는데요. 그것을 유머로 넘기고 있는 어떤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런 그 삼풍백화점은 결국 붕괴되게 됩니다. 그 전까지 이 주인공과 R이라는 인물은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겪에 되는데요. R이 일하는 그 Q브랜드에 갑자기 사람이 하나 필요하게 되서 이 실업자로 있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아직 갖지못한 주인공이 가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 상당히 인상적인데요. 두 인물의 갈등이 조금더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런 대목입니다. 한번 이 장면부터요 끝가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3 Episode 20 - Jung Yihyun - Part 3

사층의 스포츠용품, 삼층의 남성복, 이층의 여성복 매장을 꼼꼼히 구경했다. We carefully looked at the sports goods on the fourth floor, men's clothing on the third floor, and women's clothing on the second floor. 무료한 시간을 짜릿하게 보내기에 역시 백화점만큼 좋은 공간을 없었다. There was no space as good as a department store to spend your free time. 이층의 오른쪽 모퉁이 매장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R의 모습이 보였다. I saw R serving customers at the store on the right corner of the second floor. 66사이즈까지밖에 나오지 않는 Q브랜드와 어울리지 않아 뵈는, 덩치 큰 중년여자를 앞에 두고 R은 친절히 웃고 있었다. R was smiling kindly with an oversized middle-aged woman in front of a large middle-aged woman who couldn't fit with the Q brand, which only comes in size 66. 나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 R의 어깨를 툭 치려다 발길을 돌렸다. I went into the store and tried to smack R's shoulder and turned around. 일층에서는 화장품 진열대의 아이섀도 신제품을 테스트했고, 헵번스타일의 알 굵은 선글라스를 만지작대다 내려놓았다. On the first floor, I tested new eyeshadows on the cosmetic shelf, and put down the thick Hepburn-style sunglasses. 지하 일층의 팬시점에 들어가 아기곰 푸의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색 헝겊 필통을 샀다. I went into the fancy shop on the basement floor and bought a red cloth pencil case with the character of Pooh, a baby bear. 그 옆의 서점에 서서, 지금은 내용도 잊어버린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는데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백화점 안에는 시계가 없으니까,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R이 준 메모지를 찾느라 배낭을 뒤집어엎었다. 파리의 거리처럼 멋 부려 만들어 놓은 백화점일층 로비의 공중전화 부스 속에 들어가 이층의 R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너구나." R은 내이름을 정확하게 댔다. R put my name correctly.

"두 시간만 기다려봐. "Wait for two hours. 서두르면 여덟시엔 나갈 수 있어." 그 1995년이한참 흘러간 뒤에, 나는 가끔씩 궁금해지곤 했다. 그때 R은 왜 내 전화를 그렇게 담담하게받았던 걸까. 내가 먼저 연락해 올 줄 예상했던 걸까. 아니면 R에게도 그때,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친구가 필요했던 걸까.

여덟시가 넘자, 옥외 주차장 쪽으로 한 무더기의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니폼이 아닌평상복 차림의 그녀들은 어둠 속에서도 뽀얗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R이 먼저 내 어깨를 툭쳤다. R tapped my shoulder first.

"오래 기다렸어?" 청바지와 모자 달린 점퍼를 입은 R은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Wearing jeans and a jumper with a hat, R was just like in high school.

"배고프다. 가자." R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꼈다. R folded my arms so naturally. 우리는 고속도로터미널 방향으로 걸어내려갔다. We walked down towards the highway terminal. 칼국수집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서야 점심으로도 면을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어머, 나도 면이라면 환장하는데 너도 그렇구나. 그래도 밀가루는 한 끼씩 건너뛰며 먹어야해. 안 그랬다간 나처럼 속 다 버린다. 이쪽 일 하는 사람들은 불규칙하게 먹으니까 다들 속이 안 좋아." 나는 단무지를 씹으며 물었다.

"백화점일을 오래 했나봐?" "스무살에 시작했으니까 올해가 오 년 짼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람결에라도 R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 R이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렇구나, 일은 재밌어? 그냥저냥, 먹고사는게 다 그렇지 뭐. It's just me, everything I eat is like that 유통 일은 마약 같다고들 해. They say distribution work is like drugs. 너무 힘들어서 관두겠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녀도 또 이 언저리를 못 벗어나거든." It's so hard that I can't get out of this fringe again even if I talk like a habit of quitting." 칼국수가 나왔다. Kalguksu came out. 김이 무럭무럭 나는 칼국수를 우리는 묵묵히 먹었다. We ate kalguksu silently. R은 나더러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R didn't ask me what I was doing. 학교를 졸업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식당에서 나갈 때 R이 계산서를 들었다. When leaving the restaurant, R heard the bill. 나는 얼른 지갑에서 천 원짜리 넉장을 꺼냈다. I quickly pulled out four thousand won in my wallet. 내 몫의 칼국수 값이었다. It was my share of the kalguksu price. 동전 하나까지 정확히 나누는 더치페이가 1990년대초반 여대생들의 일반적인 계산법이었다. Dutch pay, which divides up to a single coin, was a common calculation method for female college students in the early 1990s. R은 한사코 그것을 뿌리쳤다. 할 수 없이 나는 천원짜리 넉 장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커피 살게." R이 다시 내 팔짱을 꼈다.

"나는 카페 가는 거 솔직히 너무 돈 아깝더라. “I honestly waste money going to a cafe. 차라리 우리집 갈래? Would you rather go to my house? 요 앞에서 버스 한 번만 타면 되는데." You only have to take the bus once in front of you." 우리는 Z 여자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We got off the bus at the stop in front of Z Girls' High School. R을 딸라 미로처럼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헤치고 들어가니 낯익은 Z 여고 후문 담벼락이 보였다.

"지름길로 온 거야." 삼 년 동안 다니고도 모르는 길이었다.

"우리집 학교랑 되게 가깝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I nodded.

"아마 내가 전교에서 제일 빨리 등교하는 학생이었을 걸. “Probably, I was the fastest student in the whole school. 텅 빈 교실에 앉아 있으면 그제야 해가 뜰때도 있었어." R이 수줍게 웃었다. R의 집으로 가기 위해선 대문을 들어서서, 안채 옆쪽으로 길게 뻗은 시멘트 계단을 올라야 했다. 어두웠고, 층계의 한 칸 사이가 멀어서 좀 힘들었다. R이 마루의 스위치를 올렸다. 실내는 단출했지만 창 너머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불빛들은 근사했다.

"와아아, 야경 끝내준다아." "Wow, the night view is amazing." 나는 조금은 과장된 감탄사를 뱉었다. I spit a little exaggerated exclamation.

"이래봬도 여기가 남산이잖아." "Even so, this is Namsan." R은 쑥스러운 듯 덧붙였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앉은뱅이탁자에는 보라색 천이 덮여 있었다. R이 탁자를 창가 옆으로 끌어다놓았다. 달착지근한 커피가 부드럽게 혀 안에 감겼다. The sweet coffee gently rolled into my tongue.

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를 삼풍백화점에서 만나서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고,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간 대목이죠. Yes, I met a friend who wasn't that close when I was in high school at Sampoong Department Store, ate together for the first time, and went to the friend's house. 이 1995 년의 어떤 사회상이 보입니다. This 1995 social image is visible. 뭐 삐삐 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뭐 이런 대목들이 나오고요, 제가 읽진 않았습니다만 앞부분에는 서태지 얘기도 나옵니다. Well, there are topics like sending and receiving pager numbers, or something like this. 이런 어떤 그 당시의 여대생의.. 대학은 졸업했으나 아직 직장을 얻지 못한 여대생의 생활도 보이고요. 이 두 여성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한 여성은 강남의 뭐 그럭저럭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즉 그걸 작자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자식이 벌어오는 월급을 생계비에 보태지 않아도 되는 집안이다.' 'It's a family that doesn't have to add to the living expenses of the child's salary.'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했으나 직장을 아직 얻지 못한 한 여성과, 네 강북에서 살았죠. 강남에서 온 학생들이 '전학을 가버릴까' 생각할 정도의, 즉 8 학군에 배정받지 못해서, 밀려나서 가게된 학교라고 생각하는 강북의 남산 자락에 있는 어떤 여고 바로 근처에, 산동네에 살고있는 그런 여성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다 돈을 벌기 시작했고, 벌써 백화점 생활을 5 년 동안 하면서 사회인이 된, 이 두 여성의 만남...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 소설에서 이렇게 대조적이 타자들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거나, 갈등하거나, 또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거나...이런 것이 사실은 그렇게 또 많지 않습니다. In fact, in Korean novels, there are not so many of these contrasts that other people meet and understand each other, conflict, or cause various problems. 우리가 문학적인 용어로는 이것을 '타자와의 만남' 이렇게들 부르는 데요. In literary terms, we call this'meeting with others'. 즉, 일상적으로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갈등을 유발하고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것이 말하자면.. 문학에서 말하는 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화자에게 있어서 화자는 고등학교 때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 삼풍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던 그 친구이겠지요. 이 친구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자가 없다면 우리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지요. Without the other, we don't have to. 그들은 어떤 이상한 거울 처럼 기능하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자, 이 두 여성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뭐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보자면 그 강남에서 상당히 촉망받던, 어렸을 때 어쩌면 영재라는 소리도 들었던 이 화자는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신분이 추락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들이 모이는 졸업식에도 가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이력서나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친구는 사회인이 돼서 칼국수 값을 대신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 어느정도, 그때보다는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비로소 둘이 비슷한 처지가 된 것이죠.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이라면 중간중간에 고딕체로 적어 넣은 부분입니다. The peculiar thing about this novel is the part written in Gothic in the middle. 이런 부분들은 특이하나 효과를 자아내는 데요. These parts are peculiar, but they have an effect. 이것은 화자와 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말고 삼풍백화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서술할 때 이 고딕체를 써서 따로 이렇게 떼어 놨습니다. This is not what happened between the speaker and the character, but when I described what happened at Sampoong Department Store, I used this Gothic font and separated it like this.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R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 층으로 내려갔다. 삼풍백화점의 구조라면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큼 훤했다. The structure of Sampoong Department Store was simple enough to be able to walk around with closed eyes. 팬시 코너로 가, 하드커버 일기장을 골랐다. Go to the fancy corner and pick a hardcover diary. 물방울 무늬과 얼룰말 무늬 표지 중에서 갈등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얼룩말 무늬로 결정했다. During the conflict between the polka dots and the zebra pattern, at the last minute, I decided to use the zebra pattern. 숨 쉬기가 힘들만큼 후텁지근 했다. It was so thick that it was difficult to breathe.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들 서너들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Three or four of the salesmen in uniforms gathered near the cash register and mumbled.

"들었어? 아까 냉면 집 5 층 상판이 주저앉았데." The top plate on the 5th floor of the Naengmyeon house collapsed." "웬일이니, 설마 오늘 여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오늘은 죽어도 안 돼! 나, 새로 산 바지 입고 왔단 말이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것은 정말로 까르르 소리가 나는 웃음이었다.

"손님, 사천 구백 원입니다." 나는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그곳을 떠났다.

네, 이런 식입니다. 삼풍백화점에서 일어날 어떤 비극, 우리가 알고있는 그 끔찍한 비극을 예감케 하는 그런 장면인데, 짧은 글이지만, 짧은 부분이지만, 이 주인공, 이 화자는 어떤 일기장... 아직 소녀취향이라는 것이죠. 하드커버 일기장을 어떤 무늬로 할 것인가 고르는 사이에 익명의 점원들은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고 있습니다. While choosing what pattern to use for the hardcover diary, anonymous clerks are getting some ominous foreboding. 냉면 집 상판이 무너졌다는 것, 이것은 삼풍백화점이 붕괴할 어떤 전조였는데요. 그것을 유머로 넘기고 있는 어떤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런 그 삼풍백화점은 결국 붕괴되게 됩니다. 그 전까지 이 주인공과  R이라는 인물은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겪에 되는데요. Until then, the protagonist and the character R had an interesting incident. R이 일하는 그 Q브랜드에 갑자기 사람이 하나 필요하게 되서 이 실업자로 있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아직 갖지못한 주인공이 가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 상당히 인상적인데요. 두 인물의 갈등이 조금더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그런 대목입니다. 한번 이 장면부터요 끝가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