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2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2

그런데 이 분들의 삶은 그야말로 문학의 시야 밖으로... 밖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정이현 씨에 의해서 이분들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자 오늘 제가 읽을 책은요, [오늘의 거짓말]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이 단편집에서요..좀 골라봤는데요. 특히 이 단편집에서 많은 분들에게 큰, 강렬한 인상을 준 소설은 [삼풍백화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아마 한 2007 년인가요..2006 년인가요.. 아마 삼풍백화점이 무너진지 한 10 년 좀 더 지난 시점에 문학동네 개간지에 자전소설의 형태로 쓰여졌던 소설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자전소설 시리즈는 문학동네 개간지가 창간한 이래로 계속되어온 시리즈인데, 작가들에게 자전소설을 청탁하고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들이 자전소설을 쓰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청탁을 받고 글을 써야되는데, 쓰기 싫죠. 왜 쓰기 싫으냐면 모든 소설에는 어느정도 자전적인 요소가 있고요, 그걸 굳이 자전소설이란 이름으로 서야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자전소설' 딱 이렇게 붙이고 나가면 한마디로 가드를 내리고 링에 오르는 거와 비슷해서 상당히 좀 꺼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작가들이 굳이 소설을 쓰는 것은, 산문이라든가 논픽션이 아니고 소설을 쓰는 것은, 소설이라는 무대뒤에 숨고 싶어하는 욕망도 강하기 때문인데요. 이걸 자전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쓰라고 하면 작가들이 대체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자 그럼 이 [삼풍백화점] 중에서 일부를 한 번 읽어보고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R과 나는 Z 여자고등학교의 동창생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거의 없었다. 특별한 까닭은 없었다. R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조용한 아이였다. 우리는 1학년 때 한 반이었지만, 가까운 번호도 아니었고, 키나 성적이 비슷하지도 않았고, 친한 친구들도 전혀 겹치지 않았고, 등하굣길도 달랐다. 한강 북단에 위치한 Z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전교생의 삼십 퍼센트에 달하는 강남 거주 학생들을 위해 다섯 대의 스쿨버스를 운행했다. 8학군에 전입한지 만 삼십 개월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다른 학군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은 받아들일 수 없어했고, 단체 전학 움직임이 일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학교 측에서는 최선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안전한 등하교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올 때보다 갈 때가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엉뚱한 데 새지 못하도록 집 앞까지 확실히..." 야간 자습이 끝나자마자 스쿨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R의 집은 학교 후문에서 스물 발짝 떨어진 곳이었다.

R과 나는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 1995년 2월이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식까지 일 주일 남짓 남은 어느 날이었다. 친구 S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일났어. 우리 회사 무조건 정장이래. W네 회사는 금융권이라 유니폼 입는다는데, 옷값 안 들고 좋겠지?"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글쎄, 뭐, 다 똑같은 옷 입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유복이 나을 거 같다." "그래, 그렇긴 하겠지? 참, 넌 졸업식날 뭐 입을 거야?" "글쎄, 뭐, 어차피 검은 가운으로 다 가릴 텐데 무슨 옷 입었는지 보이겠냐." "아우 야, 그래도 그런 게 아니지. 우리 옷 사러 가자. 내가 삼풍으로 갈게." S를 만나기로 한 백화점은 우리 집에서 오 분 거리였다.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는 내내 나는 코트 주머니 속의 삐삐를 만지작거렸다.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화장품 전문 잡지사와 맞춤형 부엌가구 회사의 최종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면접비를 찔러주는 회사는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에 먼젓 번의 영화사가 새삼 그리워졌다. 맥주 몇 잔에 취한 며칠 전 밤에, 헤어진 첫사랑 대신 영화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오 분 동안 신호음만 울렸었다. 야근도 하지 않는, 아주 좋은 회사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내가 무소속의 인간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S는 여성복 매장의 마네킹이 걸친 모든 옷들을 입어보고 싶어 했다. U브랜드의 벨벳 원피스는 통통한 편인 S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S는 기어이 그것을 샀다.

"정장바지는 Q가 예쁘더라." 우리는 Q매장으로 갔다. 거기,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R이 있었다.

"어머, 안녕?" R이먼저 나에게 인사했다.

"어, 그래, 안녕?" 내가 대답했다. 우리가 나눈 첫 대화였다.

"나, 여기서일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R은 굳이 말했다.

"그렇구나, 몰랐어. 나 여기 자주 지나다니는데." "응, 명동 롯데에서 옮긴 지 얼마 안됐거든." 꽤나 어색했다. S가 눈빛으로 누구냐고 물어봤지만 못 본 척했다. 마땅히 설명할 말도 없었거니와,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애야, 피차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귓속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S는 카키색 정장바지를 골라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R과나 둘 뿐이었다. 멋쩍어서 나는 좀 웃었다. R이 말했다.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웃는 모습이 똑같이 예쁘다." 내가 웃는 것을 R이 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 상대방에게 칭찬을 들으면 칭찬으로 대응해주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래서 말했다.

"너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는걸." R이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좀 뚱뚱하긴 했었지." 그러고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 놓였다.

"이상하다. 바지 디자인이 변했나봐. 나 너무 짧아 보이지 않아?" S는 전신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태를 보았다.

"아니에요. 손님, 잘 어울려요." "기장이 길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네." S는 거울 속의 자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기장을 한번 잡아봐 드릴게요." 바짓단을 잡기 위해 R이 S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돌돌 말아올려 검은색 망사그물 속에 집어넣은 R의 머리묶음, 목덜미에 잔머리칼들이 몇 가닥 흩어져 있었다. S는 결국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나 갈께, 오늘 반가웠어." "그래, 오늘 쇼핑 잘 하고 담에여기 지나갈 때 꼭 놀러와." "그래 다음에 만나자." "저기, 잠깐만." 뒤돌아서는 나를 R이 불러 세웠다.

"삐삐번호 하나 적어줘. 세일 정보 있으면 미리 알려줄게." 예의상 나도 R의 번호를 물었다. 015로 시작하는 삐삐번호와, 5로 시작하는 매장 전화번호를 R은 삼풍백화점의 동글동글한 마크가 찍힌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일주일이 흘렀지만 화장품전문 잡지사와 맞춤형 부엌가구 회사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졸업식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겨울방학은 길었지만 방학이 아닌 첫 날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잠깐 ‘어쩌면 영재'로 오인 받았으나 지금은 대졸 실업자가 된 장녀에 대하여 부모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겠지만, 채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딸의 월급을 생계에 보탤 필요가 없을 만큼의 경제력은 가지고있었다. 졸업식에 초대해 학사모를 씌워주며 사진을 박는 대신 나는 맞선 제안을 묵묵히 수락함으로써 최악의 불효를 면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치과대학에 다니는 남자는 신붓감을 찾아 귀국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 손상된 치아의 복원이라고 소개했다. 길을 걷다 말고 그는 십층 높이의 건물을 가리켰다. 하루에 환자 세 명만 받으면 저런 빌딩은 금방 올릴 수 있어요. 그런 말을 진심을 담아 하는 사람을,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서가 아니라 직접 본 것을 처음이었다. 그는 나의 경멸을 산 동시에 엄마를 솔깃하게 했다.

"엄마 미쳤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처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로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삼월이 코앞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가죽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서초동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입구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학생증을 내보였다. 출입증 나누어주는 아저씨는, 학생증의 유효기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정기간행물 실에는 국내에서 발행되는 엔간한 잡지가 죄다 구비되어 있었다. [행복이 가득한 집]과 [워킹우먼], 이름도 모르는 문예지들을 번갈아 읽다보면 머릿속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감자와 당근으로만 이루어진 도서관 식당의 멀건 카레라이스는 딱 한 번 시도하고 말았다. 늦은 점심으로는 김치사발면을 먹거나 포카리스웨트를 뽑아 마셨다. 겨울 코트를 벗지 않았으니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닷새 째 되던 날이었다. 구내매점에서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는데 불현듯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도서관은 너무추웠다. 사발면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고 나는 도서관을 나왔다. 마을버스를 타고 삼풍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 오층의 비빔냉면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시뻘건 면발 속에 겨자를 등뿍 넣어 휘휘 섞었다. 매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육수를 마시다가는 입천장을 데었다. 오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씩 아래로 내려갔다.


Episode 20 - 정이현 (Jung Yihyun) - Part 2

그런데 이 분들의 삶은 그야말로 문학의 시야 밖으로... 밖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정이현 씨에 의해서 이분들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However, these people's lives existed outside the sight of literature... and their real images were revealed by Mr. Jeong Lee-hyun. 자 오늘 제가 읽을 책은요, [오늘의 거짓말]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이 단편집에서요..좀 골라봤는데요. 특히 이 단편집에서 많은 분들에게 큰, 강렬한 인상을 준 소설은 [삼풍백화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아마 한 2007 년인가요..2006 년인가요.. 아마 삼풍백화점이 무너진지 한 10 년 좀 더 지난 시점에 문학동네 개간지에 자전소설의 형태로 쓰여졌던 소설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자전소설 시리즈는 문학동네 개간지가 창간한 이래로 계속되어온 시리즈인데, 작가들에게 자전소설을 청탁하고 받는 것입니다. The autobiographical novel series is a series that has been going on since the founding of Munhakdongne, and it is a request for and receiving autobiographical novels from writers. 그러나 작가들이 자전소설을 쓰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But it is very difficult for writers to write autobiographical novels. 청탁을 받고 글을 써야되는데, 쓰기 싫죠. I have to write after receiving a request, but I don't want to write it. 왜 쓰기 싫으냐면 모든 소설에는 어느정도 자전적인 요소가 있고요, 그걸 굳이 자전소설이란 이름으로 서야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자전소설' 딱 이렇게 붙이고 나가면 한마디로 가드를 내리고 링에 오르는 거와 비슷해서 상당히 좀 꺼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작가들이 굳이 소설을 쓰는 것은, 산문이라든가 논픽션이 아니고 소설을 쓰는 것은, 소설이라는 무대뒤에 숨고 싶어하는 욕망도 강하기 때문인데요. 이걸 자전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쓰라고 하면 작가들이 대체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When asked to write this in the name of an autobiographical novel, the authors are inevitably nervous. 자 그럼 이 [삼풍백화점] 중에서 일부를 한 번 읽어보고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R과 나는 Z 여자고등학교의 동창생이었다. R and I were alumni of Z Girls' High School. 학교에 다니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거의 없었다. While I was in school, I rarely talked. 특별한 까닭은 없었다. There was no particular reason. R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조용한 아이였다. R was a quiet child who didn't know whether or not. 우리는 1학년 때 한 반이었지만, 가까운 번호도 아니었고, 키나 성적이 비슷하지도 않았고, 친한 친구들도 전혀 겹치지 않았고, 등하굣길도 달랐다. 한강 북단에 위치한 Z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전교생의 삼십 퍼센트에 달하는 강남 거주 학생들을 위해 다섯 대의 스쿨버스를 운행했다. 8학군에 전입한지 만 삼십 개월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다른 학군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은 받아들일 수 없어했고, 단체 전학 움직임이 일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학교 측에서는 최선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안전한 등하교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올 때보다 갈 때가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엉뚱한 데 새지 못하도록 집 앞까지 확실히..." It's awkward, but it's definitely up to the front of the house to keep it from leaking..." 야간 자습이 끝나자마자 스쿨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부리나케 달려야 했다. As soon as the night self-study was over, I had to run Brinake in order not to miss the school bus.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R의 집은 학교 후문에서 스물 발짝 떨어진 곳이었다.

R과 나는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 1995년 2월이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식까지 일 주일 남짓 남은 어느 날이었다. 친구 S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일났어. 우리 회사 무조건 정장이래. W네 회사는 금융권이라 유니폼 입는다는데, 옷값 안 들고 좋겠지?"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I didn't know what to say.

"글쎄, 뭐, 다 똑같은 옷 입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유복이 나을 거 같다." "Well, well, I think free clothes would be better than wearing the same clothes." "그래, 그렇긴 하겠지? 참, 넌 졸업식날 뭐 입을 거야?" "글쎄, 뭐, 어차피 검은 가운으로 다 가릴 텐데 무슨 옷 입었는지 보이겠냐." "아우 야, 그래도 그런 게 아니지. 우리 옷 사러 가자. 내가 삼풍으로 갈게." S를 만나기로 한 백화점은 우리 집에서 오 분 거리였다.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는 내내 나는 코트 주머니 속의 삐삐를 만지작거렸다.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No vibration was felt. 그때 나는 화장품 전문 잡지사와 맞춤형 부엌가구 회사의 최종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At that time, I was waiting for a final contact with a cosmetic magazine and a custom kitchen furniture company. 면접비를 찔러주는 회사는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에 먼젓 번의 영화사가 새삼 그리워졌다. 맥주 몇 잔에 취한 며칠 전 밤에, 헤어진 첫사랑 대신 영화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오 분 동안 신호음만 울렸었다. 야근도 하지 않는, 아주 좋은 회사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내가 무소속의 인간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S는 여성복 매장의 마네킹이 걸친 모든 옷들을 입어보고 싶어 했다. U브랜드의 벨벳 원피스는 통통한 편인 S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S는 기어이 그것을 샀다.

"정장바지는 Q가 예쁘더라." 우리는 Q매장으로 갔다. 거기,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R이 있었다.

"어머, 안녕?" R이먼저 나에게 인사했다.

"어, 그래, 안녕?" 내가 대답했다. 우리가 나눈 첫 대화였다.

"나, 여기서일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R은 굳이 말했다.

"그렇구나, 몰랐어. 나 여기 자주 지나다니는데." "응, 명동 롯데에서 옮긴 지 얼마 안됐거든." "Yes, it's been a while since I moved from Lotte in Myeong-dong." 꽤나 어색했다. It was pretty awkward. S가 눈빛으로 누구냐고 물어봤지만 못 본 척했다. 마땅히 설명할 말도 없었거니와,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를 다녔던 애야, 피차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귓속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S는 카키색 정장바지를 골라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R과나 둘 뿐이었다. 멋쩍어서 나는 좀 웃었다. R이 말했다.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웃는 모습이 똑같이 예쁘다." 내가 웃는 것을 R이 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 상대방에게 칭찬을 들으면 칭찬으로 대응해주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I have been taught that when I hear compliments from others, I have to respond with compliments. 그래서 말했다.

"너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는걸." "You are much prettier than before." R이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좀 뚱뚱하긴 했었지." 그러고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 놓였다.

"이상하다. 바지 디자인이 변했나봐. 나 너무 짧아 보이지 않아?" S는 전신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태를 보았다.

"아니에요. 손님, 잘 어울려요." "기장이 길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네." "Is it because the captain is long, I don't know." S는 거울 속의 자신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S seemed to be in the mirror and didn't like it.

"기장을 한번 잡아봐 드릴게요." 바짓단을 잡기 위해 R이 S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돌돌 말아올려 검은색 망사그물 속에 집어넣은 R의 머리묶음, 목덜미에 잔머리칼들이 몇 가닥 흩어져 있었다. R's hair bundle, rolled up and tucked into a black mesh net, was scattered on the back of his neck. S는 결국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S eventually didn't buy those pants.

"나 갈께, 오늘 반가웠어." "그래, 오늘 쇼핑 잘 하고 담에여기 지나갈 때 꼭 놀러와." "그래 다음에 만나자." "저기, 잠깐만." 뒤돌아서는 나를 R이 불러 세웠다.

"삐삐번호 하나 적어줘. 세일 정보 있으면 미리 알려줄게." If you have any sales information, I will let you know in advance. 예의상 나도 R의 번호를 물었다. As a courtesy, I also asked for R's number. 015로 시작하는 삐삐번호와, 5로 시작하는 매장 전화번호를 R은 삼풍백화점의 동글동글한 마크가 찍힌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I wrote a pager number starting with 015 and a store phone number starting with 5 on a memo paper with a round mark at Sampoong Department Store.

일주일이 흘렀지만 화장품전문 잡지사와 맞춤형 부엌가구 회사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졸업식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I didn't go to school on the day of graduation. 겨울방학은 길었지만 방학이 아닌 첫 날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Winter vacation was long, but the first day, not vacation, was a different feeling. 아주 어린 시절 잠깐 ‘어쩌면 영재'로 오인 받았으나 지금은 대졸 실업자가 된 장녀에 대하여 부모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겠지만, 채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딸의 월급을 생계에 보탤 필요가 없을 만큼의 경제력은 가지고있었다. 졸업식에 초대해 학사모를 씌워주며 사진을 박는 대신 나는 맞선 제안을 묵묵히 수락함으로써 최악의 불효를 면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치과대학에 다니는 남자는 신붓감을 찾아 귀국했다고 했다. A man attending a dental school in the United States said that he returned to Korea in search of a bride-in-law. 그는 자신의 전공이 손상된 치아의 복원이라고 소개했다. He introduced that his major was the restoration of damaged teeth. 길을 걷다 말고 그는 십층 높이의 건물을 가리켰다. While walking down the street, he pointed to a ten-story building. 하루에 환자 세 명만 받으면 저런 빌딩은 금방 올릴 수 있어요. 그런 말을 진심을 담아 하는 사람을, 텔레비전 드라마 안에서가 아니라 직접 본 것을 처음이었다. 그는 나의 경멸을 산 동시에 엄마를 솔깃하게 했다. He lived my contempt and appealed to my mother.

"엄마 미쳤어? "Is mom crazy?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How are you going to live in a place where you can't even talk?"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처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로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I can never live in another country."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Because I speak advanced Korean."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It was then that I realized that I had been studying English not to leave, but to remain. 삼월이 코앞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When I opened my eyes in the morning, noon was past. 나는 가죽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 서초동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갔다. I left the house with my leather backpack and went to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in Seocho-dong. 도서관 입구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학생증을 내보였다. At the entrance of the library, they showed a student ID, not a resident registration card. 출입증 나누어주는 아저씨는, 학생증의 유효기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The uncle who handed out passes seemed not interested in things like the expiration date of the student ID. 정기간행물 실에는 국내에서 발행되는 엔간한 잡지가 죄다 구비되어 있었다. The periodicals room was equipped with all domestic magazines. [행복이 가득한 집]과 [워킹우먼], 이름도 모르는 문예지들을 번갈아 읽다보면 머릿속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감자와 당근으로만 이루어진 도서관 식당의 멀건 카레라이스는 딱 한 번 시도하고 말았다. 늦은 점심으로는 김치사발면을 먹거나 포카리스웨트를 뽑아 마셨다. For late lunch, I had kimchi bowl noodles or pulled out a pocari sweat. 겨울 코트를 벗지 않았으니 아직 봄이 온 것은 아니었다. Spring didn't come yet as I didn't take off my winter coat. 그렇게 닷새 째 되던 날이었다. It was the fifth day. 구내매점에서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는데 불현듯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Hot water was poured on the bowl side at the canteen and the wooden chopsticks were split in half. 도서관은 너무추웠다. 사발면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고 나는 도서관을 나왔다. 마을버스를 타고 삼풍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 오층의 비빔냉면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The bibim cold noodles on the fifth floor of the department store were amazingly delicious. 시뻘건 면발 속에 겨자를 등뿍 넣어 휘휘 섞었다. Put a lot of mustard in the red noodles and mix them. 매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육수를 마시다가는 입천장을 데었다. 오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씩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