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8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Jose Saramaga) - Part 3
"오시오. 날 따라 오시오." 세 번 째 목소리가 그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이 먼 남자를 앞좌석에 태우고 안전띠를 메주었다.
"안 보여...안 보여..." 눈이 먼 남자는 계속 훌쩍거리며 중얼 댔다. "집이 어디요?"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물었다.
물릴줄 모르는 호기심을 지닌 얼굴들이 차창으로 다가오며 뭐 새로운 소식이 없나하는 표정으로 안을 살폈다. 눈이 먼 남자는 두 손을 눈으로 가져가며 휘저었다.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마치 안개 속이나 우유로 가득한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눈이 머는 건 그런게 아니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눈이 멀면 검게 보인다고 하던데?" "글쎄...하지만 나는 모든게 하얗게 보이는 걸요." "아까 그 여자 말이 맞나보군. 그 신경에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몰라. 그 신경이란 놈이 늘 말썽이니까."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건 재난입니다. 그래요. 재난이죠." "그..어디 사는 지나 얘기해주시오." 동시에 엔진이 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먼 남자는 시력을 잃는 바람에 기억마저 희미해진 것 처럼 더듬거리며 주소를 이야기 해주면서 말했다.
"저..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말했다.
"그런 말 마시오. 오늘은 당신이 이런 꼴을 당했지만 내일은 내가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요." "그 말이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집을 나설 때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눈이 먼 남자는 차가 계속 멈춰서 있자 어리둥절해 했다.
"왜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눈이 먼 남자가 물었다.
"빨간 불이오."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대답했다.
이제 눈이 먼 남자는 신호등이 빨간불인지 파란불인지도 알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눈이 먼 남자의 말 대로 그의 집은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차가 빽빽했기 때문에 주차할 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 이면도로로 갔다. 그러나 그곳은 인도가 좁아서 조수석 쪽 문을 열면 벽에 닿아서 한 뼘 정도 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브레이크와 운전대를 피해가며 눈이 먼 남자를 운전석 쪽으로 끌어내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 주차를 하기전에 그를 먼저 내리게 했다. 눈이 먼 남자는 길 한가운데 서있었다. 땅이 올라갔다 내려왔다하는 느낌이었다. 눈이 먼 남자는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공포를 억누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눈이 먼 남자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내밀어 그가 우유의 바다라고 묘사했던 곳에서 헤엄을 치듯이 두 손을 내저었다. 입에서는 벌써 도와달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절망으로 넘어가려는 마지막 순간에 눈이 먼 남자는 다른 남자의 손이 자신의 팔을 가볍게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진정하시오. 내가 잡았소." 동행한 남자는 눈이 먼 남자가 혹시 넘어질까 걱정되어 아주 천천히 걸었다. 눈이 먼 남자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는데 그 바람에 인도의 돌출부에 자꾸 발이 걸렸다.
"조금만 참으시오. 이제 거의 다 왔소." 동행한 남자가 말했다. 조금 더 가다가 동행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있소?" 눈이 먼 남자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아직 퇴근을 안 했을 겁니다. 나는 오늘따라 좀 일찍 퇴근을 했는데 그만 이런 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심각한게 아닐거요. 갑자기 눈이 멀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소." "이런 꼴을 당할 줄도 모르고 그동안 나는 안경도 필요없다고 자랑하고 다녔다니.." "자..자.. 곧 저절로 다시 보이게 될거요." 그들은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동네 여자 두명이 궁금한 표정으로 이웃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눈에 뭐가 들어갔나요? '하고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 했다. 여자들의 머리속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또 설사 물어봤다 하더라도 눈이 먼 남자 입장에서는 '네. 우유의 바다에 빠졌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먼 남자가 말했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폐를 끼쳐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군요. 이제 부터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습니다." "뭐 사과할 필요 없소. 내가 함께 가리다. 여기 혼자 두고 가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요." 그들은 약간 어렵게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몇 층에 사시오?" "삼층입니다. 이거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다 할 수가 없군요." "고마워 할 필요 없소. 오늘은 댁이 운이 없었던 것 뿐이니까." "그렇죠. 그 말이 맞습니다. 내일은 또 댁의 운이 나쁠수도 있는 거죠." 엘리베이터가 머졌다. 그들은 층계참으로 내려섰다.
"내가 문을 열어드릴까?" "고맙습니다만...그런 저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눈이 먼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열쇠가 몇 개 달린 고리를 꺼내더니 열쇠의 톱니자국을 하나하나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이...이건 것 같습니다." 눈이 먼 남자는 왼손 손가락 끝으로 열쇠 구멍을 더듬어 문을 열려고 했다.
"이게 아니네..." "어디 봅시다. 내가 해보겠소." 문은 세 번 째 열쇠에서 열렸다. 눈이 먼 남자는 안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집에 있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이 먼 남자가 말했다.
"아까 말한대로 제 아내는 아직 오지 않았군요."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안으로 조금 더듬어 들어가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는 동행한 남자가 있다고 추측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뭐 이정도를 가지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덧붙였다.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소." 이윽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안으로 함께 들어가 부인이 올 때까지 말동무나 해드릴까?" 상대가 너무 열의를 보이자 눈이 먼 남자는 갑자기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대는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무방비 상태의가엾은 장님을 넘어뜨려 묶고 재갈을 물린다음 값진 물건을 훔쳐가려는 꿍꿍이 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귀찮을 텐데. 그러지 마십시오. 난 괜찮습니다." 눈이 먼 남자는 천천히 문을 닫으며 되풀이 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눈이 먼 남자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듣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가 눈이 멀었다는 것을 잊고 아무생각 없이 문에 달린 뚜껑을 제치고 밖을 내다 보았다. 마치 구멍 바깥에 하얀 벽이 서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구멍을 둘러싼 금속 테가 속눈썹에 닿는 것을 느꼈다. 속눈썹이 아주 작은 렌즈를 스쳤다. 그러나 밖은 볼 수 없었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백색이 모든 것은 덮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집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 냄새, 공기, 정적 등이 모두 익숙했다.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어 보기만 하면 이것이 어떤 가구이고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물건이 해체되어 남과 북이 없고 위와 아래도 없는 어떤 이상한 영역으로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렸을 때 장님 놀이를 자주 했다. 그는 오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떠 보고는 앞이 안 보이는 것이 괴로운 상태임은 틀림 없지만 그래도 충분한 기억, 그러니까 색깔만이 아니라 형태와 면에 대한 충분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적어도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아닌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나마 견딜만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장님들이 살아가는 어둠이라는 것은 단순한 빛의 부재일 따름이며 우리가 실명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와 사물의 외향을 덮고 있는 어떤 것일 뿐 그 검은 베일 뒤에는 모든 것이 말짱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빠진 백색의 상태는 너무 환하고 너무 전면적이어서 색깔만이 아니라 사물과 존재자체를 흡수해 버렸다. 아니 삼켜버렸다. 그래서 훨씬 더 안 보였다.
네, 이 소설의 가장 앞부분입니다. 소설이 시작되는 부분인데요. 네, 이 부분은 주제 사라마구의 스타일을 엿볼수 있는데... 아주 뭐랄까요.. 장식이 없는 문체죠? 이분이 용접공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군더더기 없이 대화와 그리고 상황에 대한 아주 간결한 묘사만으로 시작을 합니다. 옛날의 소설들은 (지금도 그런 소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 그다음에 장황한 묘사.. 뭐 이런 것들로 한참 앞부분을 끌고가는 소설들이 많이 있는데요. 주제 사라마구의 이 작품은 장편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특히 이 앞부분의 단 몇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요.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원고지로 따진다면 아마..한 30 매도 안 되지 않을까하는 분량인데 이 분량에 이 소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단 눈이 먼 사람이 나타나죠.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이 나타나게 되고요,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합니다. 일단 눈이 먼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죠. 그렇지만 눈이 먼 사람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뒤쪽에 있는 차들, 막 빵빵거리면서 얼른 치워버리라고 그러죠. 한 사람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해서 무심하고 한 편으로 공격적인 그런 사람들이 벌써 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의 핵심적인 갈등을 이미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동안에 독자들은 그것을 눈치 챌 수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