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6 - [위험한 생각들] (What is Your Dangerous Idea) - Part 3
보복은 도덕적 원칙으로는 올바를 수 있지만,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인 관점과는 어긋난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인공지능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물리 법칙의 지배응 받는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우리는 컴퓨터가오작동을 일으킨다고 해서 컴퓨터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문제를 철저히 조사해 손상된 부분을 찾아내고 수리하는 게 상식이다. 영국의 유명한 프로듀서인 존 클리스가 만든 시트콤에서 호텔 경영자인 베이절 폴티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출발을 하지 못하자 자시 성질을 참지 못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동차에게 엄하게 경고한다.
"셋 셀 때까지 기회를 주겠어." 그래도 차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난 너에게 분명히 경고했어. 네가 네 무점을 판 거야!"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 차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몽둥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불합리한 행동을 보면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차를 때리는대신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카뷰레터에 물이 찼는지, 스파크 플러그나 배전기 포인트가 고장이 났는지, 기름이 떨어졌는지.왜 우리는 살인자나 강간범 같은 결함있는 사람에게는 고장 난 자동차를 대하득이 반응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판사에게는 베이절 폴티를 비웃는 것 처럼 비웃지 않는가? 혹은 기원전 480 년, 자신의 배를 망가뜨린 거친 바다에게 태형 300 대를 선고한 고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비웃는 것처럼, 그 판사를 비웃지 않는가? 살인자나 강간범은 바로 결함 있는 부품을 가진기계가 아닌가? 혹은 결함 있는 양육, 혹은 결함 있는 교육, 혹은 결함 있는 유전자의 탓이 아닌가?
비난과 책임 같은 개념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존재하는곳에서는 어디든 거리낌 없이 떠돈다. 한 소년이 어떤 할머니의 돈을 강탈할 때 우리는 그 소년이나 그의 부모를 비난해야 하는가? 혹은 그가 다니는 학교를 비난해야 하는가? 주의를 게을리 한 사회복지사를 비난해야 하는가? 만약 법정에서 그 소년이 정신능역이 박약하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정신이상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방어수단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피고의 책임이 작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불행한 유년기, 아버지의 학대, 혹은 불운한 유전자까지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의 신경계를 연구한 결과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책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원칙적으로는 범죄자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생리와 유전, 그리고 환경 조건들은 비난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그런 결함을 제공란 생리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따지지 않고 한 사람의 책임을 묻는 법정의 청문회라는 것은 베이절 폴티가 고장 난 자동차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왜 범죄자 자신이 아니라 범죄에 이르게 된 생리적,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따져보자는 견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가? 왜 어린이를 살해한 사람, 혹은 파괴적인 약탈자들에게 감정적인 증오를 드러내는 데만 몰두하는가? 왜 그들은 수리나 부품 교체가 필요한 결함이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비난이나 책임, 더 나아가 선과 악의 개념 같은 정신적 구조물이 다윈식 진화에의해 1000년에 걸텨 인간의 뇌 안에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비난과 책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잘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간편하고 유용한 수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게상을 이해하려고 만든 허구적인 매개물일 뿐이다.
나의 위험한 생각은우리가 마침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베이절 폴티가 자동차를 매질할 때 그를 비웃는 것과 똑같이 범죄자 개인을 비난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을 비웃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계몽의 수준에 영원히 도달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두렵기도 하다.
네, 역시 위험한 생각이죠?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은 '너희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그런 류의 감정적인 반응들이죠. 물론 그런 반응은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쳤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필자의 말처럼 천 년에 걸쳐 뇌 안에 형성된 선과 악에 대한 개념덕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반사적으로 표출하기 전에 합리적인 이성으로 필자의 논리를 최대한
따라가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죠. 이것은 꼭 뭐 사실 이 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새로운 지식이나 주장을 접할 때 나와는 다른 생각들을 접할 때 항상 요구되는 자세인 것 같아요. 어떤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우선은 상대방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까지 따라가 보는 일이 항상 필요합니다. 이건 제가 생각해낸 얘기는 아니고요, 어느 유명하신 분이 한 얘기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조목조목 이 필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논리적으로 별로 틀린 이야기가 아니죠. 물론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한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터무니 없거나하지는 않습니다. 이분들이 그렇게 만만한 분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죠. 아무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그런 반사적인 반발심과 필자의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인정하려는 합리적 사고 사이에서 우리 안의 어떤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위험한 생각인거죠. 그밖에도 여러가지 흥미롭고 논쟁적인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 집단은 유전적으로 재능과 기질이 다르다. 평등하지 않다..라는 주장도 있고. 지구 온난화가 지구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고요. 생명의 목적은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이다..라는 글도 아주 의미심장하죠.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글들 중에서 성격이 조금 다른 하나를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요. 이 책의 대부분의 어떤 전복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식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그런 쪽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들이 몇 편 정도 실려있는데 그중에서 설득력있게 느껴지는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슨 고프닉이라는 UC Berkely 교수가 쓴 '논쟁의 불협화음'이라는 글입니다.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게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닐 수 있다. 좋은 과학자한 그 정의상 모름지기 무엇에 대한 자기만의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거나 좀처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반대도 불구하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생각을 고수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사실 고집스러움과 반대로 생각하기는 과학 혹은 과학자를 위한 일종의 전제이자 용인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는 과학자는 하나도 없다. 과학자들은 항상 가상의 반대자를 세워놓고는 그들의 반대논리를 가차없이 깨 부수기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