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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15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Romain Gary) - Part 4

Episode 15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Romain Gary) - Part 4

벵티밀 발 열두 시 오십 분 기차가 증기의 구름을 뚫고 지나갔다. 창가에 앉은 승객들은 아마도 백발의 부인과 아직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슬픈 아이가 하늘에서 저토록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였으리라, 어머니는 갑자기 얼이 빠진 것 같았다.

“필명을 하나 찾아내야 돼” 하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위대한 프랑스 작가가 러시아 이름을 갖고 있을 수는 없지. 네가 바이올린의 거장이라면 그래도 좋지만, 프랑스 문학의 거인에겐 안 될 말이야…”

이른바 ‘프랑스 문학의 거인'은 이번엔 완전히 동의하였다. 여섯 달 전부터 나는 매일 몇 시간씩 꼬박 필명을 ‘시험해'보는 데 보냈다. 나는 특별 노트에다 그 필명들을 붉은 잉크로 멋지게 써넣었다. 바로 그 날 아침에도 나는 ‘위베르 드 라 발레'를 채택하기로 결정했었으나, 삼십 분 후엔 ‘로맹 드 롱스보'라는 이름의 향수 어린 매력에 지고 말았다. 내 진짜 이름인 로맹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미 로맹 롤랑이 있었고, 나는 나의 영광을 아무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참 어려운 문제였다. 한 개의 필명을 놓고 보았을 때 난처한 점은 그 것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결코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문학적 표현수단으로서 한 개의 필명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 써야 할 책이 많은데 말이다.

“네가 바이올린의 거장이라면 카세프라는 이름도 아주 괜찮은데" 하고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되새겼다. 이 ‘바이올린의 거장' 사건은 어머니에겐 큰 실망을 준 사건이었고, 그래서 나는 크게 죄지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 일엔 운명과의 오해가 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온통 나에게만 희망을 걸고,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영광과 대중의 찬사'로 이끌어갈 경이로운 지름길을 모색하면서 어머니는 우선 내가 당시 약관의 나이에 영광의 절정에 있었던 야샤 하이페츠와 예후디 메뉴인을 섞은 신동이 되어주리라는 희망을 처음으로 품었던 것이다. 지난날 어머니는 늘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잠시 머무르고 있던 동부 폴란드 윌노의 한 상점에서 중고 바이올린을 하나 산 뒤,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긴, 지쳐 보이는 남자에게로 엄숙하게 인도되었을 때 내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는 존경 어린 목소리로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불렀다. 그 후엔 혼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보라색 벨벳으로 안을 댄 황토색 상자에 담긴 바이올린을 가지고 씩씩하게 그의 집에 갔다. 그 ‘마에스트로'에 대해서는 내가 악기를 잡을 때마다 깜짝 놀라던 모습밖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때마다 그가 두 손을 귀로 가져가며 부르짖던 ‘아이! 아이! '하는 고함 소리는 아직도 또렷하다. 그는 그 비참한 세계에서 우주적 하모니의 결여 때문에 고통받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내 레슨이 계속되는 삼 주 동안 그 하모니의 부재에 내가 현저한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삼 주째 되는 날, 그는 난폭하게 내게서 악기를 빼앗고는 엄마에게 말하겠다며 나를 되돌려 보냈다. 그가 내 어머니에게 한 말을 나는 결코 알지 못했지만, 이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가끔씩 불쌍한 마음이 솟구쳐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한숨을 쉬거나 비난하듯 바라보기도 하며 보냈다.

위대한 꿈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감을 받아서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우편을 통해 고객을 불러 모았다. 광고지는 한 장 한 장 직접 손으로 쓰여졌으며, ‘지난날 파리에서 일류 양장점을 운영하던 분이 한가한 중에 심심풀이로 소수의 선택된 고객들을 위해 자택에서 손수 모자를 지어주기로 하였다'고 알리고 있었다. 몇 년 뒤, 그러니까 1928년 우리가 니스의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어머니는 똑같은 일을 해보려고 시도하였는데, 그 일이 잘 굴러가려면-물론 끝까지 잘 굴러가진 않았지만-시간을 요했으므로 그사이에 어떤 미장원 골방에서 여자들을 화장해주는 것으로 재능을 낭비하였다. 오후에는 또 빅투아르 가의 누추한 집에서 고급 개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고 말이다. 그 후에는 구전을 먹는 호텔 진열장 시대가 왔고, 호화로운 집들을 방문하는 보석 장사, 뷔파 시장의 야채 도매 동업, 부동산, 여관 소개업-요컨대 나에겐 부족한 것이 없었고, 정오에는 늘 비프스테이크가 놓여졌으며, 니스에 사는 누구도 결코 내가 험한 신발이나 험한 옷을 걸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음악적 천재성이 전무하여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 것이 몹시도 괴로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메뉴인이나 하이페츠의 이름만 들으면 가슴속에 회한이 끓어 오르는 것이다. 그로부터 삼십 년쯤 지난 뒤, 내가 로스앤젤레스의 총영사로 있을 때, 운명은 나로 하여금 야샤 하이페츠에게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을 달아주게 하였다. 얄궂게도 그 수여식이 내 구역에서 있었던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고 ‘하이페츠 씨,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또 우리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당신에게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하는 수여사를 읽고 났을 때, 나는 갑자기 하늘로 눈을 쳐들고 높고도 또렷하게 말하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재능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이에요!”

마에스트로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지요, 영사님?" 나는 수여식을 끝내기 위해 관례대로 서둘러 그의 두 뺨에 입을 맞추었다.

게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끔찍이 낙담시켰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녀가 내 앞에서 결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일에서는 속마음을 너무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가 그 일에선 그처럼 조심했던 것은 그만큼 마음속 슬픔이 깊었다는 분명한 표시다. 어머니 자신의 예술적 야망이 결코 미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내가 그것을 실현시켜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나의 중개인 역할에 의해 어머니가 유명하고 갈채 받는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힘 닿는 것은 무엇이든 하리라는 결심이었고, 그리하여 오랫동안 그림, 영화, 노래 그리고 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이 땅 위 어디에 끼어들지를 모르는 모든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같이 보였던 문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린의 일화는 이후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언급되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할 새로운 길을 탐색하였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비단신을 신고 어머니 손을 잡고서 사샤 지글로프의 무용 연구소로 갔다. 거기서 나는 두 시간 동안 성실하게 철봉에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였고, 그러는 동안 구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가끔씩 감탄어린 미소와 더불어 두 손을 모으면서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니진스키다! 니진스키야! 넌 니진스키가 될 거야! 분명해!" 이어 어머니는 탈의실까지 따라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눈에 불을 켜고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사샤 지글로프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사샤 지글로프가 발끝으로 그 구석까지 왔던 것이다. 완전히 숙맥이었던 나는 그가 나를 물어뜯으려는 줄 알고 무시무시한 고함을 내질렀다. 지팡이를 치켜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어머니에게 쫓겨 연습실을 가로질러 달아나던 불쌍한 지글로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위대한 무용가 시절의 끝이었다. 그때 윌노에는 무용 학교가 두 개 더 있었지만, 단단히 각성한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모험을 하려 들지 않았다. 당신 아들이 여인들을 사랑하는 사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머니에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나이 여덟 살도 채 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나의 미래의 ‘성공들', 한숨이며 시선들, 전갈 쪽지들, 사랑의 맹서들 따위를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환한 달빛을 받으며 남몰래 테라스를 움켜쥐는 손, 나의 하얀 근위 장교복,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왈츠, 속삭임과 애원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약간 죄스러운 듯하며 이상스럽게 젊어 뵈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안고는, 온갖 찬사와 숭배의 말을 퍼붓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난날 그녀가 지녔던 굉장한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는 그 찬사들을 들었을 것이고, 아직도 그것에 대한 흥미, 혹은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는 아무렇게나 기대 앉아 있었다. 나는 무심한 척하며, 그러나 최대한의 흥미를 가지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에 바른 잼을 정신 없이 핥아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로서의 고독을, 애정과 주목을 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물리치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 어머니 어떤 분인지 좀 아시겠죠? 일단 아들이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성공해야된다는 어떤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면서도 계속해서 단 한 번 도 이 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빅토르 위고가 될거야..이런 식으로.. 이 뒤에 또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데요, 그림도 배우게 되는데요 그림을 배우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불안감을 느끼게 돼요. '라 보엠' 같은 오페라의 장면들이라든가 빈센트 반 고흐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들이 가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요절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죠. 결핵이라든가 이런게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 어머니는 그림은 다시 포기 시키고요, 그러고서는 갑자기 글을 쓰게 만듭니다.


Episode 15 -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Romain Gary) - Part 4 Episode 15 - Romain Gary "The Promise of Dawn" (Romain Gary) - Part 4

벵티밀 발 열두 시 오십 분 기차가 증기의 구름을 뚫고 지나갔다. 창가에 앉은 승객들은 아마도 백발의 부인과 아직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슬픈 아이가 하늘에서 저토록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였으리라, 어머니는 갑자기 얼이 빠진 것 같았다.

“필명을 하나 찾아내야 돼” 하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위대한 프랑스 작가가 러시아 이름을 갖고 있을 수는 없지. 네가 바이올린의 거장이라면 그래도 좋지만, 프랑스 문학의 거인에겐 안 될 말이야…”

이른바 ‘프랑스 문학의 거인'은 이번엔 완전히 동의하였다. 여섯 달 전부터 나는 매일 몇 시간씩 꼬박 필명을 ‘시험해'보는 데 보냈다. 나는 특별 노트에다 그 필명들을 붉은 잉크로 멋지게 써넣었다. 바로 그 날 아침에도 나는 ‘위베르 드 라 발레'를 채택하기로 결정했었으나, 삼십 분 후엔 ‘로맹 드 롱스보'라는 이름의 향수 어린 매력에 지고 말았다. 내 진짜 이름인 로맹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미 로맹 롤랑이 있었고, 나는 나의 영광을 아무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참 어려운 문제였다. 한 개의 필명을 놓고 보았을 때 난처한 점은 그 것이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결코 전부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문학적 표현수단으로서 한 개의 필명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 써야 할 책이 많은데 말이다.

“네가 바이올린의 거장이라면 카세프라는 이름도 아주 괜찮은데" 하고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되새겼다. 이 ‘바이올린의 거장' 사건은 어머니에겐 큰 실망을 준 사건이었고, 그래서 나는 크게 죄지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 일엔 운명과의 오해가 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온통 나에게만 희망을 걸고,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영광과 대중의 찬사'로 이끌어갈 경이로운 지름길을 모색하면서 어머니는 우선 내가 당시 약관의 나이에 영광의 절정에 있었던 야샤 하이페츠와 예후디 메뉴인을 섞은 신동이 되어주리라는 희망을 처음으로 품었던 것이다. 지난날 어머니는 늘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잠시 머무르고 있던 동부 폴란드 윌노의 한 상점에서 중고 바이올린을 하나 산 뒤, 검은 옷을 입고 머리가 긴, 지쳐 보이는 남자에게로 엄숙하게 인도되었을 때 내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는 존경 어린 목소리로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불렀다. 그 후엔 혼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보라색 벨벳으로 안을 댄 황토색 상자에 담긴 바이올린을 가지고 씩씩하게 그의 집에 갔다. 그 ‘마에스트로'에 대해서는 내가 악기를 잡을 때마다 깜짝 놀라던 모습밖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때마다 그가 두 손을 귀로 가져가며 부르짖던  ‘아이! 아이! '하는 고함 소리는 아직도 또렷하다. 그는 그 비참한 세계에서 우주적 하모니의 결여 때문에 고통받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내 레슨이 계속되는 삼 주 동안 그 하모니의 부재에 내가 현저한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삼 주째 되는 날, 그는 난폭하게 내게서 악기를 빼앗고는 엄마에게 말하겠다며 나를 되돌려 보냈다. 그가 내 어머니에게 한 말을 나는 결코 알지 못했지만, 이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가끔씩 불쌍한 마음이 솟구쳐 나를 끌어안아주면서, 한숨을 쉬거나 비난하듯 바라보기도 하며 보냈다.

위대한 꿈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감을 받아서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우편을 통해 고객을 불러 모았다. 광고지는 한 장 한 장 직접 손으로 쓰여졌으며, ‘지난날 파리에서 일류 양장점을 운영하던 분이 한가한 중에 심심풀이로 소수의 선택된 고객들을 위해 자택에서 손수 모자를 지어주기로 하였다'고 알리고 있었다. 몇 년 뒤, 그러니까 1928년 우리가 니스의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어머니는 똑같은 일을 해보려고 시도하였는데, 그 일이 잘 굴러가려면-물론 끝까지 잘 굴러가진 않았지만-시간을 요했으므로 그사이에 어떤 미장원 골방에서 여자들을 화장해주는 것으로 재능을 낭비하였다. 오후에는 또 빅투아르 가의 누추한 집에서 고급 개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고 말이다. 그 후에는 구전을 먹는 호텔 진열장 시대가 왔고, 호화로운 집들을 방문하는 보석 장사, 뷔파 시장의 야채 도매 동업, 부동산, 여관 소개업-요컨대 나에겐 부족한 것이 없었고, 정오에는 늘 비프스테이크가 놓여졌으며, 니스에 사는 누구도 결코 내가 험한 신발이나 험한 옷을 걸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나는 음악적 천재성이 전무하여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 것이 몹시도 괴로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메뉴인이나 하이페츠의 이름만 들으면 가슴속에 회한이 끓어 오르는 것이다. 그로부터 삼십 년쯤 지난 뒤, 내가 로스앤젤레스의 총영사로 있을 때, 운명은 나로 하여금 야샤 하이페츠에게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을 달아주게 하였다. 얄궂게도 그 수여식이 내 구역에서 있었던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고 ‘하이페츠 씨,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또 우리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당신에게 레지옹 도뇌르 대훈장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하는 수여사를 읽고 났을 때, 나는 갑자기 하늘로 눈을 쳐들고 높고도 또렷하게 말하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재능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이에요!”

마에스트로는 약간 놀란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지요, 영사님?" 나는 수여식을 끝내기 위해 관례대로 서둘러 그의 두 뺨에 입을 맞추었다.

게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끔찍이 낙담시켰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녀가 내 앞에서 결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일에서는 속마음을 너무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가 그 일에선 그처럼 조심했던 것은 그만큼 마음속 슬픔이 깊었다는 분명한 표시다. 어머니 자신의 예술적 야망이 결코 미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내가 그것을 실현시켜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나의 중개인 역할에 의해 어머니가 유명하고 갈채 받는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힘 닿는 것은 무엇이든 하리라는 결심이었고, 그리하여 오랫동안 그림, 영화, 노래 그리고 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이 땅 위 어디에 끼어들지를 모르는 모든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같이 보였던 문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린의 일화는 이후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언급되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할 새로운 길을 탐색하였다.

일주일에 세 번 나는 비단신을 신고 어머니 손을 잡고서 사샤 지글로프의 무용 연구소로 갔다. 거기서 나는 두 시간 동안 성실하게 철봉에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였고, 그러는 동안 구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가끔씩 감탄어린 미소와 더불어 두 손을 모으면서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니진스키다! 니진스키야! 넌 니진스키가 될 거야! 분명해!" 이어 어머니는 탈의실까지 따라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눈에 불을 켜고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사샤 지글로프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사샤 지글로프가 발끝으로 그 구석까지 왔던 것이다. 완전히 숙맥이었던 나는 그가 나를 물어뜯으려는 줄 알고 무시무시한 고함을 내질렀다. 지팡이를 치켜들고 미친 듯이 날뛰는 어머니에게 쫓겨 연습실을 가로질러 달아나던 불쌍한 지글로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위대한 무용가 시절의 끝이었다. 그때 윌노에는 무용 학교가 두 개 더 있었지만, 단단히 각성한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모험을 하려 들지 않았다. 당신 아들이 여인들을 사랑하는 사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머니에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나이 여덟 살도 채 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나의 미래의 ‘성공들', 한숨이며 시선들, 전갈 쪽지들, 사랑의 맹서들 따위를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환한 달빛을 받으며 남몰래 테라스를 움켜쥐는 손, 나의 하얀 근위 장교복, 그리고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왈츠, 속삭임과 애원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약간 죄스러운 듯하며 이상스럽게 젊어 뵈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안고는, 온갖 찬사와 숭배의 말을 퍼붓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난날 그녀가 지녔던 굉장한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는 그 찬사들을 들었을 것이고, 아직도 그것에 대한 흥미, 혹은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는 아무렇게나 기대 앉아 있었다. 나는 무심한 척하며, 그러나 최대한의 흥미를 가지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에 바른 잼을 정신 없이 핥아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로서의 고독을, 애정과 주목을 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물리치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다.

네, 잘 들으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 어머니 어떤 분인지 좀 아시겠죠? 일단 아들이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성공해야된다는 어떤 자기만의 목표를 가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면서도 계속해서 단 한 번 도 이 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을 거라고, 빅토르 위고가 될거야..이런 식으로.. 이 뒤에 또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데요, 그림도 배우게 되는데요 그림을 배우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불안감을 느끼게 돼요. '라 보엠' 같은 오페라의 장면들이라든가  빈센트 반 고흐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들이 가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요절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죠. 결핵이라든가 이런게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 어머니는 그림은 다시 포기 시키고요, 그러고서는 갑자기 글을 쓰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