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진행하고 있는 작가 김영하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이 시간이 참 빨리 흐르네요. 벌써 일주일이 됐습니다. 봄이 온 줄 알았는데 계속 (눈)내리고 오늘도 지금 눈이 흩뿌리고 있어서 을씨년스러운 그런…그런 날 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이 봄눈에 대해서 어디에 쓴 말이 있는데, 이 그런겁니다 봄눈… 3월 말에 내리는 이런 봄눈이란 것은 술자리에 파하기 직전에 오는 친구같다고요. 반갑긴한데 꼭 이때 와야되나… 그리고 좀 그만오지..이런 생각도 좀 들고요. 그런 눈이 봄눈이 아닌가..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이 팟캐스트 제목이 ‘책 읽는 시간'아닙니까. 그래서 독서에 관한 책을 해볼까..그런 생각을하게 됐어요. 독서에 관한 책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요. 좀 있습니다.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책들도 있고요. 그리고 독서라는게 과연 뭐냐 그런 책들이 많고 독서를 어떻게 해야되는냐 이런 책이 가장 많죠. 중고등학생들의 논술시험을 대비해서 나온 그런 책들도 있고요. 시중에 나와있는 참고서용 무슨 뭐 독서지도 책들.. 죄송한 얘기지만 대부분이 지루하고 ..제가 볼때는 불필요한 책들입니다. 한마디로 쓰레기죠. 대부분의 이 쓰레기들 중에서 빛을 발하는 몇 권들이 언제나 있기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독서에 대한 얘기를 왜 하게 됐냐면 지나치게 독서를 강조하면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그런 경향이 많은데요. 독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독서 자체가 억압이 돼서요, 책을 더 읽기 싫어지는 것이죠. 제가 한 10년 가까이 된것 같아요. 그전에 어디에 가서 문학교육에 관해서 무슨 발제를 하게됬는데, 원래 제가 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였죠. 어쩌다 어떨결에 하게 됐습니다. 거기 가서 제가 발제를 ‘토지 문화관'이었나요. 아마 원주에 거기사서 발제한 것 같은데, 차라리 중고등학생들이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차라리 문학교육을 금지하는 게 어떠냐. 지금처럼 문학교육을 도구처럼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뜻이었죠. 문학교육을 함으로서 뭘… 뭐 모국어를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이해하게되고 뭐 이러이러 여러 이유들이 있죠. 그런데 문학이라는 것은 글만 읽을 줄 알면 자기가 스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권장될 수록 멀어진다는 이상한 속성을 갖고있습니다. 읽으라고 읽으라고 하는 책일수록 읽기가 싫고요. 읽지 말라고말라고하는 책일수록 더 재밌는 것 같고. 그리고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금지된 책, 금서로 인해 그 풍성해져온 역사 아니겠습니까? 세르반 테스의 “돈 키호테” 중남미 일대에서 엄청난 금서였다고 그러죠? 그러나 뭐 안 읽은 사람이 없었죠. 뿐만 아니라 많은 금서들이 나중에…. 뭐 예를들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든가 “율리우스” 이런 책들이 결국에는 인류의 고전이 되어온 것이 문학의 역사였습니다. 하여간, 독서에 대한 이런 억압들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좀 .. 부당하다.. 좀 짜증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책을..차라리 그럴 바에는 읽지 말아라..이런 생각을 하게됬는데 이런..뭐 생각을 하게된 저의 원초적인 경험은.. 아마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쯤이었을 것 같아요. 그때 저희 교장선생님께서 신기한 안을 하나 내놓으셨는데 얼핏 듣기에는 괜찮은 안이었어요. 도서관에 책은 별로없고, 학생들이게 문학작품이라던가 양서들을 읽혀야되니까 이렇게 하자! 이래가지고 반을 열 개의 줄로 재편성합니다. 그리고 한 줄 마다 책을 한 권씩 사는거죠. 그런 다음에 그 책을 일주일간 다 읽으면 다음 줄로 넘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 반 학생들은 한 권만 사고도 책 열 권을 읽을 수가있게 되는 것이고요. 그 반 학생들이 다 읽은 다음에는 다른 반으로 넘겨서 또 읽도록하자. 그러면 전교생이 책 한 권만 사고도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라는게 이 교장 선생님의 생각이셨는데, 그러나 언제나 선의에서 출발한 많은 계획들이 재난적 결과에 봉착하지 않습니까. 그게 인류의 역사인데요. 그래서 저는 뭐 지금도 아무리 선량한 뜻에서 나온 계획이라 할지라도 일단 의심하고 보는 버릇이 그때 생겼는데, 그때 제가 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저희 반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독서부장으로 임명을하고, 니가 책의 관리를 맡아라..이렇게 얘기을 해주셨어요. 그런가보다 했는데, 뭐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죠. 각반 학생들이, 우리반 학생들이 책을 한 권 씩 샀습니다. 근데 이 문제는 책의 리스트예요. 중학교 1 학년이 읽어야 되는 책에 어떤게 있었냐하면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까라마 조프의 형제들”..도스도예프스키죠? 전 세 권 아닙니까? 전 삼 권인데 그걸 언제 읽습니까? 불가능하죠. 일주일 동안 그걸 읽는다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한 일이죠. 뭐 그런 책이라던가 뭐 도저히 중학교 1학년이 소화할 수 없는 리스트의 책이었어요. 제 생각에는아마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졸업 전에 읽어되는 뭐 고전 100선..이런걸 뽑아오신게 아닌가 싶어요. 어쨌건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한것은 적어도 그 리스트를 뽑은 사람은 거의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 교장선생님 읽지 않으셨고 그 밑에 그 리스트를 학생들에게 뿌린 그 선생님…누가 계셨을 텐데, 그 분도 아마 그 책의 10%도 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읽었다면 그런 리스트를 중학교 1 학년 학생들에게 권할 수가 없었겠죠. 하여간 그러다 보니까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에 그 책을 읽지 못하고, 그래서 그 다음 옆에 짝한테 그 책을 넘기지 못하게되고 그렇게 되면서 2주, 3주, 4주가 되면서 책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달이 안 되는거죠.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그렇게 된거예요. 어떤 학생을 집으로 가져갔는데 그 책을 자기 형이 가져가서 보기도 하고, 자기 집에 있는 책하고 학교에서 가져간 책하고 구분도 잘 안 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학기 말이 됐을 때는 책의 많은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학기 말에 저를 부르셔가지고는 교장선생님께서 각반에서 본 책을 모두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라고명을 내리셨으니 아이들의 책을 전부 걷어서 오라..! 이렇게 저에게 말씀을 하셨어요. 걷어보니까 반도 없죠.. 책이. 그랬어요 반도 없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독려해서 자기 집에서 책을 가져오게 했지만 뭐 별로없고..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선생님한테 여쭤 봤더니 김영하가 독서부장이고 책임을 지기로 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책을 맞춰서 내라는거예요..저는 인간적으로 좀 나쁜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중학교 1학년이 무슨 돈으로 사서 채워넣겠습니까. 또 애들 집을 일일이 가서 가택수색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요. 지금 생각해도 좀 화가 나네요. 하여간 그래서 저의 그 곤란을 보고 저희 반에 반장이라던가 다른 학급의 임원들이 아이들을 설득해가지고 아이들이 십시일반으로 이렇게 각출을 했죠. 그돈을 가지고 청계천에 헌책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12월에..) 헌책방을 돌아댕기면서 그 어린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호호 불면서..”아저씨, 카프카의 [성]있어요? 아저씨,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 도피]있어요?” 이런 얘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카프카의 소설에 나올 법한 기괴한상황이죠. 아저씨들이 어 그래 카프카의 [성]있는데 몇 권 필요하니? 그러면 “있는대로 다 주세요..뭐 또 열 권 주세요..다섯 권 주세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 도피]주세요.. [까라마 조프 형제들] 삼 권 있어요?”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어쨌든 채워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 생각을하면 그건 온당치 않은 일이다 생각이 듭니다.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 결국에는.. 책을 학생들이 읽게 만들지도 못 했을 뿐아니라, 저로 하여금 한동안 이 고전을 멀리하게 만든 그런 부작용을 야기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리한 제도는 다음해에 바로 폐지됐고요. 그렇습니다. 학교의 도서관은 학교의 예산으로 채워넣는게 맞죠.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아..재밌는 책이 한 권 떠올랐어요. 그게뭐냐하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에세이입니다. 제목이 일단 우리에게 해방감을 주죠. 문학의 기능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해방감인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나라의 독서교육은 그야말로 강제로 책을 읽게하는데 주한점을 두고있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가 않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좀 놀랄 때가 있어요. 그게 어디서 왔나 생각해보면 글쎄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어떤 유교적 전통때문이 아닌가..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때는 책을 읽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이었잖아요. 정전은 중국에 있는 것이고 중국의 경전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조금 똑똑한 사람은 거기에 주석을 다는 정도가 전부였죠.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하는 그런 작풍은 드물었던게 조선시대의…물론 후기로 오면 좀 달라지긴합니다만.. 네..작풍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그렇고 일반인들에게도 그렇고 신문이며, TV며, 매스미디어며, 학교며.. 뭐 사방에서 책을 읽어라 읽어라 읽어라!하는데 저는 사실 그런 주문은 좀 끔찍해요. 책은 읽고 싶은 사람이, 읽고 싶을 때 그냥 읽으면 되는 거죠. 그거를 강요를 해서 마치 그걸 안 읽으면 큰일 나는 것 처럼..사람들을 몰아 붙이는건 좀 부당하다는..생각이 늘 있어요. 그러다가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되게 반가웠어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인데, 저자는 피에르 바야르라는 분인데 현재 파리 8대학 프랑스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입니다. 최초에 제가 이 책에 대해 서평을 본 것은, 미국에서 봤는데요. 그쪽에서도 상당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얘기는 되게 많지만 (그런 책들 참 많아요..비교적..) 뭐에 비해서 많으냐, 비독서, 즉 안 읽는 것에 대한 책 보다는 훨씬 많다 이거죠. 이 저자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즉 비독서라는 말을 번역자가 사용을 했는데요, ‘읽지 않는 다는 것은 뭔가?' 에 대한 책을 쓰신 분입니다. 이 책을 일단 읽고나면 어떤 기분이 드냐하면 상당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런 독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기분이 들고요. 그렇습니다. 일단 이 저자가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는지 제가 원문을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마그걸 들으시면 이 저자의 이 책에 대한 관점 조금더 분명하게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책이라곤 거의 읽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나서 독서에 그다지 취미를 들이지 못했고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었던 나는 살면서 겪게되는 이런 저런 사정에 엮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밖에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이기에 사실 나는 이런저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책들은 대부분 내가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이지만, 내가 언급하는 책을 읽은 학색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의 수업은그것에 영향을 받게 되고 언제라도 나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게다가 나는 내가 쓰는 책이나 논문들에서도 어김없이 이런저런 간행물들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경우는 더욱 더 곤란하다. 구두로 하는 경우는 부정확한 진술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글로 하는 논평은 흔적이 남아 진위 여부를 검증받게 되기때문이다. 나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이런 상황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록 진정한 교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비독서자로서 겪어온 깊은 체험을 전하고 이 금기시 되는 주제에대한 성찰, (이런 성찰은 여러가지 금기들 때문에 아직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 성찰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적임자라는 느낌을 갖고있다. 사실 자신의 그런 경험을 전하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데 비독서의 좋은 점을 자랑하는 텍스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런 점에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비독서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차지 못하게 하는 일련의 내면화된 두려움에 부닥치게 하며, 그 두려움들 가운데 적어도세 가지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두려움은 독서의 의무라 이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게 사실이다. 특히 일정 수의 모범적 텍스트들이 그런 신성시의 대상이 되는데, 그런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이며 이를 어기면 눈총을 받게 된다.
두 번째 두려움은 정독해야 할 의무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첫 번째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읽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지만, 후딱 읽어치우거나 대충 읽어버리는 것, 특히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로서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어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나 강의자들 대부분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세 번째 두려움은 책들에 관한 담론과 관계된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한데 내가 경험해본 바로 우리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누군가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 상대 역시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점차 보게 되겠지만, 경우에 따라 심지어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하거나 평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책읽기에 어떤 위험들이 들러붙는지를 부단히 강조해나갈 것이다.
여러가지 의무와 금기로 우리를 구속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결국 독서에 대한 전반적인 위선을 낳게 된다.
나는 우리의 사생활에서 돈과 섹스의 영역을 제외하고 독서의 영역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힘든 영역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독서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때문에 그래서 더욱, 내가 방금 언급한 그 삼중의 제약으로 인해 거짓이 일반화 돼있다, 나 자신도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지만, 어떤 책들 (이번에도 프루스트의 책을 염두해 두고 하는 말이다)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아는 편이어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진실이 드물다는 것도 잘 안다. 이는 다른사람들을 기만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인데 이따금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중요하게 꼽는 어떤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워 하고 있다. 또한 다른 영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도 과거라는 것을 재구성하여 우리의 바람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만드는 우리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한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책 얘기를 꺼내는 즉시 자리잡는 이 일반화 된 거짓은 비독서를 짓누르고 있는 터부의 이면으로서 그 밑바탕에는 유년시절 부터 우리를 괴롭혀온 오랜 고뇌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어던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이 야기하는 그 무의식적 죄책감을 분석하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자하는 의도에서 쓰였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성찰하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하는 말들에 대해 성찰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 비독서라는 개념이 불분명하고 그래서 어떤이가 어떤 책을 읽었다고 주장할 때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파악이 쉽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비독서라는 개념은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 이 양자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성립되지만 사실 우리가 텍스트를 만나는 다양한 형태들은 대부분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주의 깊게 읽은 책과 한 번도 손에 잡아본 적이 없는, 얘기 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책 사이에는 여러 수준의 독서가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세밀하게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경우, 사람들이 독서라는 말을 정확히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에 관심을 갖는게 중요하다. 사실 이 독서라는 말은 아주 상이한 여러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반대로,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치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책들도 메아리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네, 잘들으셨습니까?
네 이게 이 책의 서문이 되는데요, 좀 다른 말로 말씀을 드리면 이런 것이죠. 사실 솔직히 말하면 안 읽고 떠드는 책이 자기도 많다. 자기는 문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읽지 않고 떠드는 책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을 밝히는 것은, 고백하는 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하다. 현대에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한마디로 쪽팔린 것이죠. 왜 그게 그렇게 두려울까.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왜 그렇게 두려울까..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독서를 신성시하는 그런 문화에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느정도는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있다는 점. 또 그런 사람들이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죠. 두 번 째는 잘 읽어야된다는 거죠. 똑바로 읽어야 된다는 거예요. 대충 읽어선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읽지 않았다거나, 대충 봤어 그냥 스킵해가면서 봤어..이렇게 얘기하기 조차도 사실 두려운 것이죠. 세 번 째는 그 책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 해야된다는 거 틀려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책을 아주 잘 읽어야 한다는 것 이런 의무가 책에 관해서는 들러붙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제 저도 이 책을 읽어봤습니다만 이 뒤에가면 폴 발레리같이 정말로 유명한 시인 조차도, 심지어 먼저 죽은 선배 작가의 조사를 써야되는 그런 상황에서 조차도 그 책을 읽지 않고 쓴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발레리는 읽지 않는 것이 더 좋다라고까지 주장을 합니다. 이런 담론들이 우리에게 상당히 기쁨을 주는데요. 어쩌면 어려분은 지금 현재 저한테 팟캐스트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을 소개 받으셨기 때문에 나중에 어디가서 이 책을 읽지 않으시고도 충분히 이 책에 대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뭐 술자리에서 아니면 어디 뭐 어디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겠죠? 이 저자는 그게 자연스럽다는거예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책을 우리는 읽을 수도 없거니와 또 뭐 그것을 읽는 다 해도 다 기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뭐 기억을 한다 하더라도 뭐 그것이 정확하지 않다라는 것이죠. 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 관해서 저자가 상당히 자유롭고 유연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을 특별하게 보이게 만드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 서문에 보면은, 나중에 각주로 이 책에 쓰여진 네 가지 약호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걸 보시기만 해도 이 저자가 독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UB 라고 이제 써놓으면 어떤 책이냐면, 전혀 접해보지 않은 책들, 저자가 전혀 접해보지 않은 책들 un-read book이겠죠. 그다음에 SB는 대충 뒤적거려본 책들 여기서 S는 skip의 약자이겠고요. HB는 다른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알게된 책들을 언급하는 그런 약호이고요. FB는 읽었지만, forgot, 잊어버린 책들을 가리키는 그런 약호입니다. 이 사람은 읽은 책과 읽지 않는 책 구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식으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 사이에 여러가지 좀 더 섬세한 구분을 두게됩니다. 읽었지만 잊어버린 책들, 또는 대충 뒤적거린 책들 뭐 이런식으로 구별을 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 보면은 목차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 수가 있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요. 첫 번 째는 비독서의 방식들인데, 제 1 장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2 장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다른 사람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4 장은 ‘책의 내용을 칮어버렸을 경우'…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각각 써놓았는데, 로베르토 부질의 책이라든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발레리에 관한 얘기 이런 일화들이 쭉 나오게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답게 유머러스하면서도 생각보다 묵직하고 읽을 만한 그런 에세이입니다. 여기 무질의 그 [특징 없는 남자]라는 책이 있죠. 이 책 물론 저는 안 읽었습니다. 네, 읽지를 않았습니다. 근데 가끔 읽은 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뭐 적극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요. 사람들이 얘기하면 그냥 어 그냥 읽은 척하고 있을 때가 있는 그런 책인데, 이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데요. 어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책이 있는, 장서가 있는 도서관에 사서에게 ‘당신은 어떻게 이 책을 이렇게 다 잘 알 수 있느냐? 어느 책이 어디에 있는지..' 이 사람 얘기가, ‘비밀은 간단하다. 나는 그 책들을 전혀 읽지 않는다.' 읽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의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재밌는 아니러니죠? 그 책을 다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을 사실은 어디에 분류해야할지 잘 모르게 될겁니다. 이런 경험은 사실은 우리에게도 다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을 사실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될겁니다. 이런 경험은 사실은 우리에게도 있는데 집에 책이 좀 많은 분들은 책을 분류할 때 대단히 어려움을 겪게 되죠. 예를 들면 뭐 저자의 국적별로 분류한다…이거는 좀 무식한 방식이고 뭐 소설과 에세이라고 분류하는 거는 쉬울 수가 있습니다. 소에서도 어떤 소설이냐에 따라서 만약에 책 꽂이를 나누게 된다거나, 칸을 나누게 된다면 대단히 애매한 책들이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애매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책을 알기 때문이죠. 모른다면 뭐 그냥 아무데나 놓겠죠. 사실 그 시내 대형 서점들의 직원들 아마 로베르토 무질의 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책을 안 읽기 때문에 그렇게 효율적으로 책을 여기저기 빠르게 배치하고,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치명적으로 실수들이 발생하게 되죠. 예를 들면, 은대명의 소설집인 ‘은하낚시통신'이 뭐 레저코너 이런데에 있다든지 뭐 이런 일들은 벌어질 수가 있겠습니다만 하여간 이런 효율성과 전체 체계를 파악하는 것은 책을 읽지 않음으로서 가능하다..상당히 흥미로운 일화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들은 여러분이 아마 직접 읽어보시는게 더 재밌을 것 같고요. 제가 잘 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재밌었던 부분은 책을 또 읽..잊어버린 경우인데 저자도 사실 자기 책을 잊어버리거든요. 이 사람이 그 얘기를 합니다. 저자 조차도 자기 책을 자주 잊어버리고, 물론 독자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목차의 뒷부분에 가보면 어떤게 나오냐면은, 상황들, 담론의 상황들인데, 제 1 장 ‘사교생활들에서', 사람들을 뭐 파티같은데서 만났을 때,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책 얘기를 하는 경우죠. ‘선생 앞에서', 제 3 장, 이게 저로선 제일 흥미로운 부분인데, ‘작가 앞에서' 입니다. 작가들도 제 책을 읽었다고 주장하는..읽었다고 믿고 계신, 읽은 것이 분명한 독자들을 많이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떤 미묘한 긴장감이 생깁니다. 그것은 좀 전에 말씀드린 것 처럼 작가도 자기가 쓴 책을 어느정도 잊어버리고, 독자도 자기 마음대로 어떤 책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기억하기 때문인데, 하튼 뭐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쓰고 있고요. 그다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 4 장입니다. 그 다음에 ‘대처요령' 이런게 있는데 실용적인 정보를 주고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여기서 어떤 실용적으로 쓸모있는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대처 방법은 바로 제3장 ‘작가 앞에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읽지 않는 책의 저자와 만나는 경우, 즉 책을 쓴 장본인 입으로 책을 잘 알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와 만나는 경우가 우리로써는 가장 곤란할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 처럼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단술 할 수 있다. 우선 작가의 책에 대해 말을 하거나, 그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가 하는 점이 생각과는 달리 그리 확실치 않다. 사람들이 자기 글을 인용할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몽테뉴의 예는, 작가라 해도 일단 글을 쓴 뒤, 자신의 글로부터 분리된 뒤에는 다른 사람들과 못지 않게 그것들로 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것 보다도 우리가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어차피 두 사람의 내면의 책이 서로 부합될 수 없는 거라면 어떤 작가 앞에서 긴 설명을 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그가 쓴 내용을 환기시킬수록 오히려 그에게 다른 어떤 책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저자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그를 점점 더 고통스럽게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두 존재가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지 확인시켜 줌으로서, 그로 하여금 진정으로 어떤 몰개성화의 경험을 맛보게 할 위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저자에게 그가 쓴 어떤 책에 대해 읽지 않는 상태에서 얘기를 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세부내용으로 들어가지 말고 좋게 말해주라는 것이다. 결코 저자는 자신의 책에 대한 요약이나 논리정연한 코멘트를 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것을 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단지 그는 사람들이 되도록 더할 수 없이 모호한 표현으로 자신이 쓴 것이 좋았다고 얘기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네, 상당히 실랄한 그런 이야기죠?
작가도 잊어버리고 독자도 잊어버린다는 거죠? 내면의 (이 사람이 쓴 용어는 앞에 설명이 됩니다만) 자기 내면에 저장되어있는 어떤 책에 대한 기억이라는 겁니다. 저자와 독자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읽고 얘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치되기는 것은 좀 어렵다는 것이죠. 하물며 안 읽은 책의 저자를 예를 들면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을 때에는 그냥 좋게 얘기해주는 것이 ‘아~! (아주 두루뭉술하게)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는요,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그 햄릿을 서아프리카 티부족에게 즉 햄릿을 읽어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그런..얘기하는 장면인데요. 이것은 어떤 얘기냐하면 어떤 텍스트를 읽지 않는 사람조차도, 그 텍스트에 대해서 아무 정보가 없어도 나름대로 텍스트를 즐길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그런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서 든 것인데요, 읽어보시 상당히 재밌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자 오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는요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피에르 바랴르의 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봤고요. 여름언덕이라는 출판사에서 번역이 됐고, 번역자는 김병호 씨입니다. 네, 뭐 읽어야할 책들은 쏟아져 나오고 시간은 없다고 한탄하는 탄식들을 제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되는데요. 적어도 이 책만은 읽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훨씬 여유롭게 의무감이나 죄책감 없이 책읽기를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거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요.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