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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1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Mishima Yukio) - Part 2

Episode 1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Mishima Yukio) - Part 2

마이즈루만은 시라쿠 마을의 서쪽으로 1 마일 반 정도 가면 있는데, 산에 가로 막혀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고장에는 언제나 바다의 예감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바람에서도 이따금 바닷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며, 파도가 사나워지면 수 없는 갈매기 떼가 피해와서 논 바닥에 내려 앉곤 하였다. 몸이 약한 나는 달리기를 해도, 철봉을 해도, 남에게 지기만 했다. 게다가 나는 선천적인 말 더듬이여서, 갈수록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모두들 내가 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못된 아이들은 말더듬이 중이 더듬거리며 불경을 외는 흉내까지 내면서 나를 놀려댔다. 야담에 말더듬이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목을 일부러 큰 소리로 읽어 내려 가면서 내게 들려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말을 더듬는 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나와 바깥 세계와의 사이에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언제나 최초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와주지를 않았다. 그 최초의 소리가 나의 내부와 외부사이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할 때, 그 열쇠가 쉽게 열린 적이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부와 외부사이의 문을 열어놓은 채 바람 소통이 잘 되고 있지만, 내게는 그게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 열쇠가 녹슬어버린 것이다. 말더듬이가 말문을 열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는 동안, 그는 마치 내부의 찰진 찰떡에서 몸을 떼내어 내려고 몸을 파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참새와도 다를바가 없었다. 겨우 몸을 떼어냈을 때는 이미 늦다. 과연 바깥세계의 현실이 내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일손을 쉬고 기다려주는 것 처럼 여겨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닌 것이다. 내가 애써서 겨우 바깥세계에 도달해 보았자, 언제나 거기에는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어긋나버린, 그리하여 그것만이 내게 걸 맞는 듯한 낡은 현실, 절반 쯤 상한 냄새가 나는 현실이 가로놓여있을 뿐이었다. 이런 소견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두 종류의 상반된 권력의지를 품게되기 마련이다. 나는 역사에 나오는 폭군에 관한 얘기를 좋아했다. 말더듬이인 내가 만약에 말 수 적은 폭군이라고 한다면, 부하들은 내 안색을 살피면서 온 종일 벌벌 떨면서 지낼테지? 나는 명확하고도 매끄러운 말투로 내 작악함을 정당화시킬 필요도 없다. 내 침묵만이 모든 잔악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평소에 나를 깔보는 교사나, 한 반 친구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리는 공상을 즐겼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나는 또 내면세계의 왕자, 조용하게 체험하고 밝게 깨달아 내다보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공상을 즐기곤 했다. 보기에는 초라한 나였지만, 나의 내면세계는 이렇게해서 누구보다도 풍요했다. 무언가 떨펴버릴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소년이, ‘나는 은밀하게 선택된 인간이다.' 하고 생각한다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앞 부분 읽어봤는데요. 이 앞 부분을 보면, 이 인물이 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토록 집착할 수 밖에 없는가를, 이 인물의 어떤 태생적 성격, 한계, 예를 들면 말더듬이라는 것으로 부터도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살고있는 지형의 지정학적인 것, 즉, 바다가 옆에 있지만 그 아름다운 바다를 사실은 볼 수 없다는 것, 그것도 이 인물이 나중에 아름다운 미를 볼 때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중적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단초가 된다고 할 까요? 그런게 있죠. 또하나, 말더듬이라는 것 때문에 자기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를 일치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은 이 소설 전체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제가 사실 소설을 습작하고 있을 떄, 이 작가와 오스카 와일드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둘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깊이 천착했던 그런 작가들인데요. 미시마 유키오 자신도 오스카 와일드를 상당히 사숙했었다고 전해지죠?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 서구식 유미주의의 어떤 절정이라면, 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동양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중의 아들로 설정돼 있고, 나중에도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려고 하죠. 그러면서 일본 선불교의 전통에 따라서 조주와 남전의 공안같은 동양적 질문과 대답의 체계들을 계속해서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 걸 보면, 미시마 유키오가 이 소설, 아주 젊은 나이에, 20 대에 썼는데요. 상당히 세심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들을 앞에서 부터 짜고있다고 볼 수 있구요. 지금까지 읽은 부분이 약 두 페이지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이지만, 이 인물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일이 전개 될 것 인지, 이런 예감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어떤 작가적 능력, 작가적인 어떤 재능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탄하게 만드는 그런 서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오늘 김영하의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 첫 번 째 시간이었고요. 글쎄요, 저도 이거, 뭐, 혼자 앉아서 제가 하고있어 보니까, 고등학교 때 방송반 그런거 있잖아요. 그런거 해 본 적은 없지만, 전 지금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시절로 돌아가서 혼자 재미있는 장난, 놀이를하고있는 그런 느낌이기도 하고, 또 미지의 청취자, 미지의 독자들을 향해서 무슨 병에다 편지를 담아서 보내는 것 같은 그런 기분도 듭니다. 이 팟캐스트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병 속에 편지를 넣어서 띄워 보낼 생각이고요. 팟고여(not clear) 무슨 의견이 있으시다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은 구글에서 ‘김영하'를 치시면 저의 그 홈페이지가 뜹니다. 거기 오셔서 의견 남겨 주십시오. 그러면 오늘 첫 번 째 시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계십시오.


Episode 1 -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Mishima Yukio) - Part 2 Episode 1 - Mishima Yukio "Der goldene Pavillon" (Mishima Yukio) - Teil 2 Episode 1 - Yukio Mishima "The Golden Pavilion" (Mishima Yukio) - Part 2 Episode 1 - 三島由紀夫「金閣寺」 (Mishima Yukio) - Part 2

마이즈루만은 시라쿠 마을의 서쪽으로 1 마일 반 정도 가면 있는데, 산에 가로 막혀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Maizuru Bay is about a mile and a half west of Shiraku Village. 舞鹤湾位于白乐村以西约一英里半处,但被群山挡住,看不到大海。 그러나 이 고장에는 언제나 바다의 예감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However, there was always a feeling of the sea in this town. 但这个小镇总有一种大海的预感。 바람에서도 이따금 바닷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며, 파도가 사나워지면 수 없는 갈매기 떼가 피해와서 논 바닥에 내려 앉곤 하였다. Occasionally, the winds could smell the sea, and when the waves were fierce, flocks of sea gulls would escape and settle on the ground. 即使在风中,我也不时能闻到大海的味道,当海浪汹涌时,无数的海鸥就会飞来,落在稻田的底部。 몸이 약한 나는 달리기를 해도, 철봉을 해도, 남에게 지기만 했다. I was weak, but even if I ran or rod, I lost to others. 尽管我很弱,即使我跑、打铁棍,我也只是输给了别人。 게다가 나는 선천적인 말 더듬이여서, 갈수록 주눅이 들었다. On top of that, I have a congenital stutter, which made me feel even more intimidated. 另外,我天生口吃,所以我越来越害怕。 그리고 모두들 내가 중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And everyone knew that I was the son of China. 每个人都知道我是中国人的儿子。 못된 아이들은 말더듬이 중이 더듬거리며 불경을 외는 흉내까지 내면서 나를 놀려댔다. The naughty children made fun of me, even pretending to stutter and chant profanities. 顽皮的孩子们取笑我,口吃甚至假装念佛经。 야담에 말더듬이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목을 일부러 큰 소리로 읽어 내려 가면서 내게 들려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There is a scene in the conversation where stuttering appears, and I read that passage out loud on purpose and even told it to me. 有一个讲故事出现口吃的场景,我特意把这段话大声朗读给自己听。 말을 더듬는 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나와 바깥 세계와의 사이에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口吃不可避免地成为我与外界之间的障碍。 언제나 최초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와주지를 않았다. 第一个声音并不总是自然发出的。 그 최초의 소리가 나의 내부와 외부사이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할 때, 그 열쇠가 쉽게 열린 적이 없는 것이다. When the first sound is the key that opens the door between the inside and the outside, the key has never been opened easily. 如果那第一声声音是打开我的内在和外在之门的钥匙,那把钥匙从来都不是轻易打开的。 보통 사람들은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부와 외부사이의 문을 열어놓은 채 바람 소통이 잘 되고 있지만, 내게는 그게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다. Since ordinary people can speak freely, the door between the inside and the outside is open and the wind is communicating well, but for me, that doesn't work no matter what. 一般情况下,人们想说什么就说什么,所以里外的门是开着的,沟通也很好,但对我来说,无论我做什么,都行不通。 열쇠가 녹슬어버린 것이다. 钥匙已经生锈了。 말더듬이가 말문을 열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는 동안, 그는 마치 내부의 찰진 찰떡에서 몸을 떼내어 내려고 몸을 파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참새와도 다를바가 없었다. While the stutterer frantically tried to open his mouth, he was like a sparrow fluttering and writhing to free itself from the glutinous rice inside. 当口吃者挣扎着张开嘴时,他就像一只挣扎着从里面的糯米糕中挣脱出来的麻雀一样。 겨우 몸을 떼어냈을 때는 이미 늦다. It is already too late by the time the body is removed. 当我终于摆脱困境时,已经太晚了。 과연 바깥세계의 현실이 내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일손을 쉬고 기다려주는 것 처럼 여겨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닌 것이다. 내가 애써서 겨우 바깥세계에 도달해 보았자, 언제나 거기에는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어긋나버린, 그리하여 그것만이 내게 걸 맞는 듯한 낡은 현실, 절반 쯤 상한 냄새가 나는 현실이 가로놓여있을 뿐이었다. Whenever I tried to reach the outside world, there was always an old reality that had faded and shifted in an instant, so that only it suited me, a reality that smelled half bad. 이런 소견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두 종류의 상반된 권력의지를 품게되기 마련이다. These observations are often imaginable, but they tend to harbor two opposing wills for power. 나는 역사에 나오는 폭군에 관한 얘기를 좋아했다. I liked the stories of tyrants in history. 말더듬이인 내가 만약에 말 수 적은 폭군이라고 한다면, 부하들은 내 안색을 살피면서 온 종일 벌벌 떨면서 지낼테지? If I were a stuttering tyrant, would my subordinates spend all day cringing at my complexion? 나는 명확하고도 매끄러운 말투로 내 작악함을 정당화시킬 필요도 없다. I don't even need to justify my wickedness with a clear and smooth tone. 내 침묵만이 모든 잔악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My silence alone justifies all atrocities. 이렇게 나는 평소에 나를 깔보는 교사나, 한 반 친구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리는 공상을 즐겼다. In this way, I enjoyed the fantasies of having a teacher or a classmate who usually looked down on me executed.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나는 또 내면세계의 왕자, 조용하게 체험하고 밝게 깨달아 내다보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공상을 즐기곤 했다. 보기에는 초라한 나였지만, 나의 내면세계는 이렇게해서 누구보다도 풍요했다. 무언가 떨펴버릴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소년이, ‘나는 은밀하게 선택된 인간이다.' A boy with a weakness that cannot be shaken off, 'I am a secretly chosen human being.' 하고 생각한다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Wouldn't it be natural to think so?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앞 부분 읽어봤는데요. Yes, I read the first part of “The Golden Pavilion,” by Yukio Mishima. 이 앞 부분을 보면, 이 인물이 왜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토록 집착할 수 밖에 없는가를, 이 인물의 어떤 태생적 성격, 한계, 예를 들면 말더듬이라는 것으로 부터도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살고있는 지형의 지정학적인 것, 즉, 바다가 옆에 있지만 그 아름다운 바다를 사실은 볼 수 없다는 것, 그것도 이 인물이 나중에 아름다운 미를 볼 때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중적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단초가 된다고 할 까요? 그런게 있죠. 또하나, 말더듬이라는 것 때문에 자기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를 일치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은 이 소설 전체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Another thing is that one cannot reconcile one's inner world with the outer world because of stuttering, a theme that is repeated throughout the novel. 제가 사실 소설을 습작하고 있을 떄, 이 작가와 오스카 와일드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둘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깊이 천착했던 그런 작가들인데요. When I was actually writing a novel, I really liked this author and Oscar Wilde, both of whom had a deep understanding of beauty. 미시마 유키오 자신도 오스카 와일드를 상당히 사숙했었다고 전해지죠? It is said that Mishima Yukio himself was quite fond of Oscar Wilde, right?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 서구식 유미주의의 어떤 절정이라면, 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However, if Oscar Wilde's “Portrait of Dorian Gray” is the pinnacle of Western aestheticism, this “Golden Pavilion” by Yukio Mishima is 'What is beauty? '에 대한 동양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t can be said to be an oriental response to '. 그래서 주인공이 중의 아들로 설정돼 있고, 나중에도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려고 하죠. So, the main character is set as the son of a middle school student, and he plans to enter the temple later to become a middle school student. 그러면서 일본 선불교의 전통에 따라서 조주와 남전의 공안같은 동양적 질문과 대답의 체계들을 계속해서 가져오게 됩니다. In doing so, he continued to bring in oriental question-and-answer systems, such as Joju and Namjeon, in accordance with the tradition of Zen Buddhism in Japan. 그런 걸 보면, 미시마 유키오가 이 소설, 아주 젊은 나이에, 20 대에 썼는데요. 상당히 세심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들을 앞에서 부터 짜고있다고 볼 수 있구요. It can be seen that the stories are woven from the front in a very meticulous and delicate way. 지금까지 읽은 부분이 약 두 페이지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것 이지만, 이 인물이 어떤 인물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일이 전개 될 것 인지, 이런 예감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어떤 작가적 능력, 작가적인 어떤 재능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탄하게 만드는 그런 서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오늘 김영하의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 첫 번 째 시간이었고요. Now, today was the first time on Kim Young-ha's podcast, 'Time to read a book'. 글쎄요, 저도 이거, 뭐, 혼자 앉아서 제가 하고있어 보니까, 고등학교 때 방송반 그런거 있잖아요. Well, since I'm sitting alone and doing this, there's something like that in a broadcasting class in high school. 그런거 해 본 적은 없지만, 전 지금 그런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시절로 돌아가서 혼자 재미있는 장난, 놀이를하고있는 그런 느낌이기도 하고, 또 미지의 청취자, 미지의 독자들을 향해서 무슨 병에다 편지를 담아서 보내는 것 같은 그런 기분도 듭니다. It feels like going back to those days and playing a fun game by myself, and it also feels like sending a letter in a bottle to an unknown listener or unknown reader. 이 팟캐스트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병 속에 편지를 넣어서 띄워 보낼 생각이고요. From now on, I plan to send a letter in a bottle and send it out at least once a week from now on. 팟고여(not clear) 무슨 의견이 있으시다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신 분은 구글에서 ‘김영하’를 치시면 저의 그 홈페이지가 뜹니다. 거기 오셔서 의견 남겨 주십시오. 그러면 오늘 첫 번 째 시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