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문학 발췌문 (Literary Excerpts), 이명행 「푸른 여로」(1)

이명행 「푸른 여로」(1)

「푸른 여로」 이명행

1.

저녁 공기는 제법 시원했다. 하긴 거의 숲 속에 들어앉은 것이나 진배없는 아파트였다. 잘 골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을 지났다. 공중전화박스 곁에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중전화박스 뒤편에 경차인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그곳은 외진 곳이었다. 정원등의 불빛이 가 닿지 않은 곳은 어둠이 짙었다. 주차장이 아직은 넉넉한데 왜 이 외진 곳에 차를 세웠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처음 본 차가 아니었다. 몇 차례 그곳에 연두색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었다. 차 색깔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라니까, 푸른여로가 맞아요. …… 그래요, 파란여로도 있고요. 노란여로도 있는걸요? …… 그래요, 내일 보면 알 수 있어요. 확인해 보자고요. 후훗.”

공중전화박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비어 있었다. 건너편 벤치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요? …… 그래요? 아이 좋아라. 글쎄 그럴 줄 알았다니까. 조금 있다가 올라갈게요. 아직은…… 그래요. 경비실에 김 씨 아저씨가 있어요. 다시 확인해 볼게요. 알았어요.”

거기서 여자가 일어섰다. 나는 여자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그녀는 숲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여자가 뒤돌아서 나오면서 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시늉을 했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남의 얘기를 엿들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으나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내 병적인 호기심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순식간에 나는, 여자의 전화 상대는 아픈 사람이다, 여자는 남자의 방으로 올라가는 문제를 두고 경비실 직원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접수하고 있었다. ‘남자'라고? 누구도 그런 정보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인 것이 낫다. 여자가 정원등 불빛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재빠르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외모를 ‘스캔'했다. 인상적인 용모는 아니었다. 그녀의 푸른색 구두가 눈에 띄었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렇게 하고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푸른 여로'였다. 푸른 여행길이겠지? 참 싱그러운 나그네 길이다. 아니라니까, 하고 그녀는 상대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푸른여로가 맞아요, 했다. 그러고 난 후, 그래요, 하고 긍정한 뒤, 파란여로도 있고요, 라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푸른여로와 파란여로가 한 번씩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부분에서 어떤 울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푸르다, 라는 말과 파랗다, 는 말은 실제로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어울리지 않은 그 두 색깔이 정원등이 밝힌 솔숲 오솔길로 퐁 퐁 퐁 튀며 사라져 갔다.

2.

내 방은 12층에 있다. 내 위로 5층이나 더 있는 17층 원룸 구조의 아파트다. 일주일에 나흘을 이곳에 칩거하며 일을 한다. 이곳에서 한 달 넘게 지냈지만, 이 건물에 방이 몇 개인지 알지 못한다. 중앙 로비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구부러진 기역자 모양의 거대한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세 대다. 이 세 대의 엘리베이터 사이에는 촘촘하게 방들이 늘어서 있다. 마음먹고 세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남쪽 끝에서 중앙로비까지, 다시 중앙로비에서 서쪽 끝까지를 오가며 방 문짝에 삿대질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은 없었다.

내 관심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내 귀는 소나Sonar처럼 예민하다. 한 여자의 울음소리와 한 남자가 땅 꺼지게 토해 내는 한탄이었다. 그 두 소리가 같은 방에서 나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소리가 가지고 있을 심사는 같은 종류여서 서로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버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오지랖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울음소리 끝에 한숨소리가 들렸는지, 한숨소리가 나고 울음소리가 이어졌는지 따져 보지도 않았다. 이 두 소리에 관한 한 나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들었달 뿐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것이 가졌을 온갖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 소리를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밤 문득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편이 정확하다. 내 무의식 속에 그 소리들이 이미 있지 않고서 그것이 그토록 익숙할 수는 없다. 그 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그때 내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오늘은 저 집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울음소리 쪽이었다. 고단한 일상을 잠자리 위에 내려놓는 순간 그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삶은 참 행복하다. 하지만 수면 유도제까지 챙겨먹고 이제는 자지 않을 수 없어 잠자리에 부리듯 몸을 내던지는 삶은 조금 안쓰럽다. 그날도 나는 멜라토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횡행하고 있었다. 분절된 이야기의 토막들이 벽을 기어오르고 입체파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천장 아래에 비행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흑' 하는 소리가 터졌다. 약간의 공명을 꼬리처럼 달고 울린 ‘흑'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저 밑 어딘가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 바로 아래층이거나 옆방은 아니었다. 벽 한두 개를 통과해서는 그런 공명이 따라붙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에 ‘세련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주었다. 거듭되면서 군더더기 없이 간소해진 울음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위로가 되게 하기 위해 주술처럼 쓰이거나 넋두리처럼 쓰일 울음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이제 제 스스로에게 마저도 다짐받을 이유를 잃어버린 허허로운 울음소리였다. 통곡에서 시작했을 것인데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진화 과정이 거기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 속 깊은 의미를 지녔을 울음소리를 듣고 앉아 있었던 시각은 새벽 두 시였다.

3.

이 작은 도시는 내 고향의 군청소재지다. 이곳에서 20km쯤 떨어져 있는 내 고향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검문소 비슷한 곳이기도 하다. 블랙홀처럼 인간들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저 수도 서울로부터 귀향하게 되면 열차를 타고 내 고향의 도청 소재지를 지나 이곳 군청 소재지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택시기사를 하거나 역전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는 고향 선후배나 친구들에게 검문 비슷한 것을 당하게 된다. 일은 잘 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가족들은 모두 무고한지. 고향집에 당도하기 전에 내가 왔다는 소문이 집에 먼저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전에서 누군가를 만나 차라도 한잔하면서 지체하게 되면 영락없이 그렇게 되었다.

내 고향에 기차가 서는 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서울에서 오는 빠른 열차는 그곳에 서지 않는다. 우리가 떠날 때는 고향의 기차역에서 떠났었다. 밤새 서울을 향해 꽥꽥거리며 가는 완행열차였다. 지금은 서울 가는 완행열차가 없어졌다. 군청 소재지쯤 되어야 서는 특급열차만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고향의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살아남아 있다. 그것이 그렇게 살아남아 있어 매우 기껍다. 초등학교라는 것이 살아남아 있기 쉽지 않은 곳이 ‘고향'이다. 사람들의 고향에서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물론 대도시를 고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예외다. 아이 낳았다고 자축하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실정을 이해하고 보면 고향에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살아남아 있는 사실에 기꺼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지천이어서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절이었다. 한 반에 예순다섯 명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는데, 그러고도 공부 끝나고 집에 가는 하굣길에 그제야 등교하는 2부 아이들을 만나던 때였다. 면민이 모두 2만 명이었던 우리의 고향 국민학교 학생은 모두 2천 명이었다. 지금은 2백 명쯤이라고 들었다. 나머지 천 8백 명은 태어날 수 없었던 셋째였거나 우리의 아이들처럼 수도 서울 아류의 대도시로 쓸려가 태어났을 것이다. 그곳이 아름답고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여간 간교한 힘의 작용이 아니다.

우리들은 민들레 씨앗 같은 존재들이었다. 봄날 꽃이었다가 씨앗이 되면 한 움큼 바람에도 몸이 가벼워져 흩날리듯 난 자리에는 흔적도 없었다. 성질 급한 씨앗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날아가 버리기도 했고, 늦어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떠나야 했고, 어느 도시 공장이나 가게의 도제가 되었어도 떠나야 했다. 씨앗이 날아간 방향은 철로의 방향이었다. 그 선이 가지런했다.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이 수도 서울이고, 그 다음이 도청 소재지였고, 가장 가까이는 군청 소재지인 이곳 P시였다. 물론 바람의 방향을 잘못 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씨앗도 있을 것이었다. 가장 먼 서울에 가장 많이 날아갔다. 그 다음 많은 수가 도청 소재지인 J시이고, P시에는 아주 조금만 날아와 살고 있다. 어쨌든 고향에 남아 있는 씨앗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몇뿐이었다.

최근에 나는 고향의 군청 소재지인 P시에 머물며 일할 곳을 마련했다. 일주일을 절반으로 나누어 서울과 P시를 오간다. 가족과 떨어져 호젓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숨어 산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야 알려져서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고향에서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그 때문에 고향의 모든 것들과 서먹해져 있었다. 그것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저 서먹한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숨어살기에 적당한 곳이 바로 이 방 한 칸 구조의 아파트였다. 안으로 들어오면 별 느낌 없이 흔한 원룸이겠지만, 건물 전체를 두고 보면 좀 색다른 면이 있었다. 첫 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어지간한 아파트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방의 숫자가 그렇다. 아파트 부지로만 본다면 작지 않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지만, 늦은 시간에는 차가 넘쳐 도로에까지 밀려나와 있었다. 지상에만도 어지간한 아파트만큼 주차장을 갖췄고, 지하에도 그만 한 주차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녁이면 차들이 도로에까지 길게 줄을 서는 것이다. 각 방에 한 명씩이 기본이겠고, 많다 해도 신접살림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로도 차는 넘쳤다. 이렇게 밀도가 높으니 시선이 분산되어 내 거처가 보다 은밀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고향을 코앞에 두고 도둑고양이처럼 서식하고 있다. 이 익명성을 방패로 은근히 훔쳐보기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아파트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여기에 이런 아파트가 왜 필요했을까? 근처에 새로 생긴 대학이 있었다. 신생 대학들이 대개 그렇듯 이 학교도 학생모집이 어려워 날로 쇠락해 가는 느낌이었다. 이 아파트도 대학과 사정이 비슷했다. 처음에는 비싼 월세에도 학생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의 학생 숫자가 줄면서 세입자도 줄었다. 덕분에 월세가 가벼워졌다. 서울의 같은 규모 원룸에 비하면 다섯 배쯤 차이가 났다. 월세가 가벼워지면서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지금은 그들이 학생 수보다 많다. 가끔은 노인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시내로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아침이면 썰물처럼 나가고 저녁이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 썰물과 밀물은 때가 일정해서 그때만 피한다면 아주 호젓했다. 복도로 통하는 철문 하나를 닫으면 세상은 오직 방 한 칸이었다. 단절감이 구중궁궐 못지않아서 그 점에서는 서울에서도 누리지 못할 호사라고 여겼다. 적어도 ‘흑'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서울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왔다. 가벼운 산보도 좋았지만, 이미 자전거에 익숙해진 몸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를 나선다. 경비실 문 앞에 앉아 졸던 경비원이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그뿐이다.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씩 웃고는 그만이다. 그가 씩 웃었던 것은 내게 보내는 호의가 아니다. 그냥 우습다는 거였다. 반바지에 타이즈를 신고 울긋불긋한 헬멧을 쓴 내 모습이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거의 일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가끔은 관리실 문 앞에 앉아 졸거나 중앙 현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늘 일을 하고 있었다. 앞뜰의 풀을 베거나 복도와 계단 청소를 하거나 엘리베이터 앞에 쏟아 놓은 오물을 치우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우선 방학이어서 한적해진 학교를 둘러보고 싶었다. 종합대학이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쪽은 학생모집을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나마 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나란히 붙어 있는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덕분이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려왔다. 모두 여학생들인 것으로 보아 간호학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켜 가는 그들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운동장이 보였다. 온통 푸른 잔디밭이었다. 웅웅웅, 기계음이 들렸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예초기로 잔디를 깎는 중이었다. 건너편에서는 한 무리의 아낙들이 역시 일렬횡대로 앉아 잔디 사이에서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보건대학 건물을 돌아서니 체육관이 나타났다. 체육관을 옆구리에 끼고 돌았다. 문득 정면으로 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문 바로 앞까지 갔다가 핸들을 돌려 다시 문에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을 바라보았다. 보건대학 건물과 체육관이 막아선 때문인가? 그 왕성하던 예초기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 모기 소리만 한 예초기 기계음을 빼놓고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라고? 그것은 그저 작은 문이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나무들 위로 내려앉는 햇살의 고고한 느낌이 아니었다면, 그 숲에서 흘러나와 아스팔트를 적신 물, 그 수면 위의 무수한 반짝임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했을 작은 문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문을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저 문이 문제인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내가 문제인가?

문 바깥쪽에 알 수 없는 어떤 세상이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나가는 ‘구멍'이 바로 저곳일까? 그때 한 남자가 내 뒤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비켜 지나 그 문을 향했다. ‘여보시오!' 하마터면 그렇게 부를 뻔했다. 내가 목울대에 걸려 있는 그 말을 되삼키는 순간 사내는 문을 나섰다. 사내가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위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그를 하얗게 만들었고, 다음 순간 다시 그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사라졌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페달을 밟았다. 문설주 양쪽으로 햇살이 커튼처럼 걸려 있었다. 햇살의 커튼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놀랍게도 오래된 숲길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가로수로 여겨지는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은 ‘도로'였다. 이를테면 버려진 신작로였다. 어쩌면 한때는 많은 자동차들이 이 길을 질주해 갔을 것이다. 버려져 있는 동안 도로 양쪽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길 위를 터널처럼 뒤덮고 있었다. 길은 시작부터 야트막한 오르막이었다. 오호라, 제법 운동을 하게 생겼군. 페달에 실리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울창한 숲이 아주 천천히 내 곁을 지났다. 숲의 정령이 바로 내 곁에서 꿈을 짓는 느낌이었다. 내 곁을 지나쳐 먼저 간 사내가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자 그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수줍음이 많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자전거를 멈췄을 것이다. 길은 계속해서 구불구불 오르막이었다. 길이 구부러진 간격이 고만고만했다. 좌로 구부러지거나 우로 구부러지거나 간에 비슷한 거리였다. 길은 구부러지면서 그 다음 구부러진 길을 감추고 있었다. 구부러진 지점에 닿으면 새로 나타날 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기대는 언제나 충만하게 채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여백이 싱그러웠다. 모퉁이를 돌면서 눈을 감았다. 피부에서 공기가 일렁이며 바람이 되는 순간을 느꼈다. 순간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온통 진분홍이었다. 때는 8월이었고, 자미화가 제철이었다. 군데군데 무더기로 꽃을 피워낸 오래된 나무들이었다. 누군가가 이 길을 꾸미기 위해 오래 전 심었을 것이었다. 이미 고목이 된 배롱나무에서 피어난 진분홍 꽃에 취해 서 있는데, 마주 오던 승용차가 옆에 와 섰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근처에 대학교가 있지 않나요?”

“있지요.”

“어떻게 가지요?”

“그냥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내가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싱거운 질문에 싱거운 대답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가면 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만나는 교차로가 나옵니까?”

나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교차로는 없습니다만,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나옵니다.”

“교차로가 없다고요? 길을 건너야…….” 하면서 그의 표정이 답답해졌다. 결국 자동차 문이 열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손을 내저었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차에서 내렸다.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 도로 반대편에 있는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었는데, 얘길 하다가 그만 놓쳤어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 샛길로 우회전해서 들어왔습니다. 이 길로 가다 보면 그 큰길과 만날 수 있는 교차로가 나오겠지 하고요. 방향은 어쨌든 학교 방향이니까요.”

그가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긴장할 뿐 다른 도리는 없었다. 나는 조금 전 그 학교의 작은 문에서 나왔고, 그 문을 통해 그가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 길이 맞습니다. 제대로 오셨어요. 이 길로 가시면 바로 학교가 나옵니다. 길을 건너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차로 따위는 없고요. 이 길 어딘가에 바로 학교로 들어가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오른쪽을 잘 살피고 가시면서 그 구멍을 찾으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았다. 별로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동차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한적해지면서 자미화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왜 ‘구멍'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것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구멍이라고 했지? 그곳을 ‘빠져나왔다'라고 했던 것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문보다 구멍이어야 제격일 테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 정도에서 털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는 소리에 뒤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아까 모기만 한 소리로 내게 ‘안녕하세요?' 했던 창백한 사내가 있었다. 내게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내에게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모기만 한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오르막을 올랐다. 핸들에 달린 계기를 보니 4km쯤 오르막을 올라왔다. 그 고갯마루 아래에 작은 광장이 나타났고, 그곳에 휴게소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중국집이었다. 점심 한 번 저녁 한 번을 해결한 적이 있는 식당이었다. 이 집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이로써 세 번째다. 지난주에도 왔었다. 그때 ‘휴가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이 집에 와서 얻어먹을 궁리를 하고 물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갈증이 난 나는 옆집 주막을 기웃거렸다. 오래 전 이 길로 서울을 오르내릴 적 이곳 뒷밤재에는 중국집이 없었다. 재를 넘는 나그네의 허기를 달래 준 것은 오직 이 주막이었다. 난 이 주막만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만 하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이 집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동기생의 집이기도 했다. 그와 친했다면 더 많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별로 가까이 지낸 친구는 아니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할 때 저만치 손을 흔들어 안부를 전하는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영민했던 그가 말단 지방공무원에서 시작해 중앙부처 사무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주막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물 사발을 내밀었다.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물 사발을 받아든 나는 묻지 않았다. 그 친구의 소식을 물으면 내 신원을 밝혀야 하는데, 그것이 마뜩치가 않았다. 뱃속까지 서늘하게 했던 냉수였다. 그날 주막 앞에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그 집 며느리 차예요. 색깔이 요상하지요?”

며느리라면 그 친구 안사람이겠다. 내가 보기엔 중국집 아낙의 미소가 더 요상했다.

“병든 시어머니 보살피겠다고 짐 싸가지고 들어왔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읍내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읍내에? 혼자 살다니?”

“죽었지요, 남편이. 남편 죽고 고향으로 내려왔지요.”

“죽다니, 왜?”

놀랐다. 뜻밖의 부음이었다.

“부지런한 사람이라 무리했던가 봐요. 과로사였대요. 몇 년 됐어요.”

“며느리 고향도 이곳인가요?”

“그렇지요. 지금은 없어진 동강 술도가 딸인데, 근데 차 색깔 한번 요상하지요?”

그녀의 후렴 또한 이상했다. 어라, 동강 술도가 딸이라고?

“그럼 이름이 영흰데.”

불쑥 그녀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아무리 가까이 지낸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렇지, 왜 그것을 그의 옛집 앞에서, 그것도 이 생경한 중국집 아낙에게 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처가 동강 술도가 딸이라는 대목에서 더 크게 가슴이 철렁했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도가 고명딸을 잘 알고 있었다. 내 곁에는 그녀를 매우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몇 년 전 동창회에서 사라져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또 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녀와 맺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두 오빠의 반대 때문이었다. 반대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듣지는 못했다. 그 친구는 술도가 앞에 앉아 ‘꽃부리 영' 자 ‘기쁠 희' 자를 외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나도 그가 그 일인 시위에서 철수하기로 한 마지막 날, 위로차 술도가 앞에 갔었다. 고통스러운 실연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난 뒤여서 그는 핼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뒤 그의 행동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그런데 이 친구에 관한 마지막 소식은 동창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동창회에서 사라졌다고. 일 년에 한 번쯤 동창회에서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이제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가족은 알고 있나 해서 수소문을 해보니 그의 가족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그가 운영했던 회사가 부도난 뒤 잠적했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었다.

그동안 모두들 바빴는가. 단지 혈맹의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백 년이 지나도 우리의 우정만은 변치 말자는 다짐들이 있었지 않은가. 그때는 한없이 절실했을 그 동맹의 진정성이 이리도 허망하게 퇴색되었더란 말인가. 위에서 말한 죄책감이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우정에게만이 아니라, 고향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문장웹진 12월호》

소설가 이명행 씨가 7년 만에 소설을 발표했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되었던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 이후 처음.

지난 2년 동안 7편의 단편소설을 썼고, 1편의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라 한다.

쓰기만 하고, 발표는 미뤘는데, 이번에 그 첫 번째 소설을 종이책이 아닌 웹진에 내놓았다.

<문장웹진> http://webzine.munjang.or.kr/ [소설을 펼치는 시간]이라는 항목에 있다. 나주 다시면이 고향인 이명행 작가를 1983년엔가,

기자 초년시절 ‘황색새의 발톱'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명행 「푸른 여로」(1) Lee Myung-haeng "The Blue Road" (1) Myeonghaeng Lee 《蓝色旅程》(1)

「푸른 여로」 이명행 "The Blue Journey" Lee Myung-haeng 《蓝色旅程》李明行

1.

저녁 공기는 제법 시원했다. The evening air was quite cool. 傍晚的空气相当凉爽。 하긴 거의 숲 속에 들어앉은 것이나 진배없는 아파트였다. In fact, it was almost like sitting in the woods, or an apartment with nothing. 事实上,它几乎就像一座坐落在树林中的公寓。 잘 골랐다. well chosen 选得好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With that in mind, I went down the stairs. 这么想着,我下了楼梯。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을 지났다. I went down the stairs and passed the parking lot. 我走下楼梯,经过停车场。 공중전화박스 곁에 긴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I knew there was a bench next to the pay phone box. 我知道电话亭旁边有一把长椅。 공중전화박스 뒤편에 경차인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Behind the public telephone box stood a light green morning light car. 그곳은 외진 곳이었다. It was a remote place. 정원등의 불빛이 가 닿지 않은 곳은 어둠이 짙었다. It was dark where the lights of the garden lights did not reach. 주차장이 아직은 넉넉한데 왜 이 외진 곳에 차를 세웠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The parking lot is still ample, but I put my buttocks on the chair, wondering why I parked my car in this remote place. 처음 본 차가 아니었다. It wasn't the first car I saw. 몇 차례 그곳에 연두색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었다. I've seen a yellow-green car parked there a few times. 차 색깔이 인상적이었다. The color of the tea was impressive. 그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Then a voice was heard from somewhere.

“아니라니까, 푸른여로가 맞아요. “Because it’s not, the Blue Journey is correct. …… 그래요, 파란여로도 있고요. … … Yes, there is also a blue road. 노란여로도 있는걸요? Is there a yellow road? …… 그래요, 내일 보면 알 수 있어요. … … Yes, we will find out tomorrow. 확인해 보자고요. Let's check it out. 후훗.” Whoops.”

공중전화박스 쪽을 돌아보았다. I turned to the public phone box. 그곳은 비어 있었다. It was empty. 건너편 벤치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It was a voice coming from the other side of the bench.

“병원에서는 뭐라고 해요? “What does the hospital say? …… 그래요? … … Yes? 아이 좋아라. love the kid 글쎄 그럴 줄 알았다니까. Well, I knew it would. 조금 있다가 올라갈게요. I'll go up in a little bit. 아직은…… 그래요. Not yet...... yes. 경비실에 김 씨 아저씨가 있어요. There is Mr. Kim in the guard room. 다시 확인해 볼게요. I'll check again. 알았어요.” Okay."

거기서 여자가 일어섰다. There the woman stood up. 나는 여자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그녀는 숲을 보고 앉아 있었다. I was sitting looking at the woman, and she was sitting looking at the forest. 그녀는 내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She wouldn't have known I was sitting there. 여자가 뒤돌아서 나오면서 나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는 시늉을 했다. The woman turned around and checked me out, pretending to be surprised. 괜스레 미안해졌다. I'm kinda sorry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It was like hearing a story he wanted to hide. 남의 얘기를 엿들었다는 자책감이 들었으나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I felt guilty for eavesdropping, but it was nothing to apologize for. 그 다음이 문제였다. Next came the problem. 내 병적인 호기심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My morbid curiosity had kicked in. 순식간에 나는, 여자의 전화 상대는 아픈 사람이다, 여자는 남자의 방으로 올라가는 문제를 두고 경비실 직원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접수하고 있었다. Before I knew it, I was taking in the fact that the woman's caller was sick, and that she was being questioned by security about going up to the man's room. ‘남자'라고? "A man"? 누구도 그런 정보를 주진 않았다. No one gave me that information. 하지만 남자인 것이 낫다. But it's better to be a man. 여자가 정원등 불빛 아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재빠르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외모를 ‘스캔'했다. When the woman reached the light of the garden lamp, I quickly and greedily 'scanned' her appearance. 인상적인 용모는 아니었다. It was not an impressive display. 그녀의 푸른색 구두가 눈에 띄었다. Her blue shoes stood out.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He looked to be in his mid-40s.

그렇게 하고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푸른 여로'였다. 푸른 여행길이겠지? The road is green, right? 참 싱그러운 나그네 길이다. 아니라니까, 하고 그녀는 상대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푸른여로가 맞아요, 했다. 그러고 난 후, 그래요, 하고 긍정한 뒤, 파란여로도 있고요, 라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푸른여로와 파란여로가 한 번씩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부분에서 어떤 울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푸르다, 라는 말과 파랗다, 는 말은 실제로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어울리지 않은 그 두 색깔이 정원등이 밝힌 솔숲 오솔길로 퐁 퐁 퐁 튀며 사라져 갔다.

2.

내 방은 12층에 있다. 내 위로 5층이나 더 있는 17층 원룸 구조의 아파트다. It's a 17th floor studio apartment, five floors above me. 일주일에 나흘을 이곳에 칩거하며 일을 한다. 이곳에서 한 달 넘게 지냈지만, 이 건물에 방이 몇 개인지 알지 못한다. 중앙 로비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구부러진 기역자 모양의 거대한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세 대다. 이 세 대의 엘리베이터 사이에는 촘촘하게 방들이 늘어서 있다. 마음먹고 세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남쪽 끝에서 중앙로비까지, 다시 중앙로비에서 서쪽 끝까지를 오가며 방 문짝에 삿대질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은 없었다. You can count them if you want to, but there was never a time when I was desperate enough to go from the south end to the main lobby, and then from the main lobby to the west end, and bang on the door of a room.

내 관심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내 귀는 소나Sonar처럼 예민하다. 한 여자의 울음소리와 한 남자가 땅 꺼지게 토해 내는 한탄이었다. It was a woman's wail and a man's lament. 그 두 소리가 같은 방에서 나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소리가 가지고 있을 심사는 같은 종류여서 서로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버렸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오지랖이었다. But it was a ridiculous backwater. 아무려면 어떤가? What about any? 울음소리 끝에 한숨소리가 들렸는지, 한숨소리가 나고 울음소리가 이어졌는지 따져 보지도 않았다. I didn't even try to determine if the cry was followed by a sigh or a sigh followed by a cry. 이 두 소리에 관한 한 나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I was irresponsible as far as these two sounds were concerned. 사실 들었달 뿐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것이 가졌을 온갖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I started to imagine all the things it could have been, even though I had only heard about it and knew nothing about it. 실제로 나는 그 소리를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날 밤 문득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편이 정확하다. It's more accurate to say that I suddenly realized I was listening to it one night. 내 무의식 속에 그 소리들이 이미 있지 않고서 그것이 그토록 익숙할 수는 없다. There's no way it could be so familiar without those sounds already being there in my subconscious. 그 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그때 내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오늘은 저 집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울음소리 쪽이었다. 고단한 일상을 잠자리 위에 내려놓는 순간 그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삶은 참 행복하다. If you can feel a sense of accomplishment when you lay your hard work down on your bed, that's a life well lived. 하지만 수면 유도제까지 챙겨먹고 이제는 자지 않을 수 없어 잠자리에 부리듯 몸을 내던지는 삶은 조금 안쓰럽다. But it's a shame that I've been taking sleeping pills and now I'm crawling into bed because I can't help myself. 그날도 나는 멜라토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횡행하고 있었다. 분절된 이야기의 토막들이 벽을 기어오르고 입체파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천장 아래에 비행하고 있었다. Fragmented narrative fragments crawled up the walls and cubist grotesques flew under the ceiling. 그때 문득 ‘흑' 하는 소리가 터졌다. 약간의 공명을 꼬리처럼 달고 울린 ‘흑'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저 밑 어딘가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I thought the sound was coming from somewhere down there.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 바로 아래층이거나 옆방은 아니었다. 벽 한두 개를 통과해서는 그런 공명이 따라붙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울음소리에 ‘세련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주었다. 거듭되면서 군더더기 없이 간소해진 울음소리였기 때문이었다. It was an iteration of a cry that had gotten simpler and simpler. 자신에게 위로가 되게 하기 위해 주술처럼 쓰이거나 넋두리처럼 쓰일 울음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이제 제 스스로에게 마저도 다짐받을 이유를 잃어버린 허허로운 울음소리였다. But it was a hollow cry that I no longer had a reason to give myself. 통곡에서 시작했을 것인데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진화 과정이 거기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The evolutionary process of what must have started as a wail and all that was left was a shell was embedded in it. 이 속 깊은 의미를 지녔을 울음소리를 듣고 앉아 있었던 시각은 새벽 두 시였다.

3.

이 작은 도시는 내 고향의 군청소재지다. 이곳에서 20km쯤 떨어져 있는 내 고향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검문소 비슷한 곳이기도 하다. 블랙홀처럼 인간들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저 수도 서울로부터 귀향하게 되면 열차를 타고 내 고향의 도청 소재지를 지나 이곳 군청 소재지에서 내려 버스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다. When I return home from Seoul, a capital city that seems to suck people in like a black hole, I take the train, pass by my hometown's National Security Agency headquarters, get off at the county government headquarters here, and take a bus or taxi. 그러면서 택시기사를 하거나 역전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는 고향 선후배나 친구들에게 검문 비슷한 것을 당하게 된다. 일은 잘 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가족들은 모두 무고한지. 고향집에 당도하기 전에 내가 왔다는 소문이 집에 먼저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In some cases, word of my arrival reached my home before I reached my hometown. 역전에서 누군가를 만나 차라도 한잔하면서 지체하게 되면 영락없이 그렇게 되었다.

내 고향에 기차가 서는 역이 없는 것은 아니다. It's not like my hometown doesn't have a train station. 있지만 서울에서 오는 빠른 열차는 그곳에 서지 않는다. but the fast trains from Seoul don't stop there. 우리가 떠날 때는 고향의 기차역에서 떠났었다. When we left, it was from the train station in my hometown. 밤새 서울을 향해 꽥꽥거리며 가는 완행열차였다. 지금은 서울 가는 완행열차가 없어졌다. 군청 소재지쯤 되어야 서는 특급열차만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고향의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살아남아 있다. However, the national school I attended in my hometown became an elementary school and is still there today. 그것이 그렇게 살아남아 있어 매우 기껍다. 초등학교라는 것이 살아남아 있기 쉽지 않은 곳이 ‘고향'이다. The "hometown" is the place where elementary school is not easy to survive. 사람들의 고향에서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물론 대도시를 고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예외다. 아이 낳았다고 자축하는 플래카드를 내거는 실정을 이해하고 보면 고향에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살아남아 있는 사실에 기꺼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겠다. When you understand the reality of putting up banners congratulating people on the birth of a child, it's understandable that they'd be happy to know that the elementary school they graduated from is still standing in their hometown. 아이들이 지천이어서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절이었다. It was a time when we used to say, "Let's just have two children and raise them well, not distinguish between sons and daughters. 한 반에 예순다섯 명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는데, 그러고도 공부 끝나고 집에 가는 하굣길에 그제야 등교하는 2부 아이들을 만나던 때였다. 면민이 모두 2만 명이었던 우리의 고향 국민학교 학생은 모두 2천 명이었다. 지금은 2백 명쯤이라고 들었다. I'm told it's around 200 now. 나머지 천 8백 명은 태어날 수 없었던 셋째였거나 우리의 아이들처럼 수도 서울 아류의 대도시로 쓸려가 태어났을 것이다. The remaining eighteen hundred were either thirds who could not be born or, like our children, were swept away to be born in the metropolis of Seoul, the capital. 그곳이 아름답고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여간 간교한 힘의 작용이 아니다. From the perspective of an era that believed it was beautiful and that there was still hope, this is not an insidious force.

우리들은 민들레 씨앗 같은 존재들이었다. We were like dandelion seeds. 봄날 꽃이었다가 씨앗이 되면 한 움큼 바람에도 몸이 가벼워져 흩날리듯 난 자리에는 흔적도 없었다. 성질 급한 씨앗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날아가 버리기도 했고, 늦어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떠나야 했고, 어느 도시 공장이나 가게의 도제가 되었어도 떠나야 했다. 씨앗이 날아간 방향은 철로의 방향이었다. The direction the seeds flew was in the direction of the railroad tracks. 그 선이 가지런했다.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이 수도 서울이고, 그 다음이 도청 소재지였고, 가장 가까이는 군청 소재지인 이곳 P시였다. 물론 바람의 방향을 잘못 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씨앗도 있을 것이었다. Of course, there would be seeds that caught the wrong wind and landed in the wrong place. 가장 먼 서울에 가장 많이 날아갔다. 그 다음 많은 수가 도청 소재지인 J시이고, P시에는 아주 조금만 날아와 살고 있다. The next largest number are in city J, where the eavesdroppers are located, and only a few fly to city P. 어쨌든 고향에 남아 있는 씨앗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몇뿐이었다.

최근에 나는 고향의 군청 소재지인 P시에 머물며 일할 곳을 마련했다. 일주일을 절반으로 나누어 서울과 P시를 오간다. 가족과 떨어져 호젓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숨어 산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You'll have a place to work in seclusion away from your family, but you'll be living in hiding. 표면적인 이유야 알려져서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The ostensible reason was that they didn't want to be known and disturbed, but the real reason was different. 고향에서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그 때문에 고향의 모든 것들과 서먹해져 있었다. 그것들과 다시 관계를 맺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It will take a lot of time to re-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them. 그저 서먹한 채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숨어살기에 적당한 곳이 바로 이 방 한 칸 구조의 아파트였다. Anyway, this one-room apartment was the perfect place to hide out. 안으로 들어오면 별 느낌 없이 흔한 원룸이겠지만, 건물 전체를 두고 보면 좀 색다른 면이 있었다. 첫 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어지간한 아파트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방의 숫자가 그렇다. As I said in the first header, the number of rooms in a typical apartment can be overwhelming. 아파트 부지로만 본다면 작지 않은 주차장을 가지고 있지만, 늦은 시간에는 차가 넘쳐 도로에까지 밀려나와 있었다. 지상에만도 어지간한 아파트만큼 주차장을 갖췄고, 지하에도 그만 한 주차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저녁이면 차들이 도로에까지 길게 줄을 서는 것이다. 각 방에 한 명씩이 기본이겠고, 많다 해도 신접살림 정도일 것이다. One person in each room is probably a good starting point, and more is probably a bit of a stretch. 그 정도로도 차는 넘쳤다. 이렇게 밀도가 높으니 시선이 분산되어 내 거처가 보다 은밀해지는 느낌이었다. This density distracted the eye and made my abode feel more private. 나는 고향을 코앞에 두고 도둑고양이처럼 서식하고 있다. I've been living like a stray cat in my hometown. 이 익명성을 방패로 은근히 훔쳐보기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I'm enjoying this anonymity as a shield to sneak a peek.

아파트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여기에 이런 아파트가 왜 필요했을까? 근처에 새로 생긴 대학이 있었다. 신생 대학들이 대개 그렇듯 이 학교도 학생모집이 어려워 날로 쇠락해 가는 느낌이었다. 이 아파트도 대학과 사정이 비슷했다. 처음에는 비싼 월세에도 학생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의 학생 숫자가 줄면서 세입자도 줄었다. But as the number of students at the university decreased, so did the number of tenants. 덕분에 월세가 가벼워졌다. 서울의 같은 규모 원룸에 비하면 다섯 배쯤 차이가 났다. 월세가 가벼워지면서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지금은 그들이 학생 수보다 많다. 가끔은 노인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시내로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아침이면 썰물처럼 나가고 저녁이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그 썰물과 밀물은 때가 일정해서 그때만 피한다면 아주 호젓했다. 복도로 통하는 철문 하나를 닫으면 세상은 오직 방 한 칸이었다. 단절감이 구중궁궐 못지않아서 그 점에서는 서울에서도 누리지 못할 호사라고 여겼다. The sense of disconnection was as bad as that of Gujunggung Palace, and in that respect, I considered it a luxury that I would not be able to enjoy even in Seoul. 적어도 ‘흑'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4.

서울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내려왔다. 가벼운 산보도 좋았지만, 이미 자전거에 익숙해진 몸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를 나선다. 경비실 문 앞에 앉아 졸던 경비원이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그뿐이다. But that's not all.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씩 웃고는 그만이다. He stares at me for a moment, then smirks. 그가 씩 웃었던 것은 내게 보내는 호의가 아니다. His smirk was not a favor to me. 그냥 우습다는 거였다. 반바지에 타이즈를 신고 울긋불긋한 헬멧을 쓴 내 모습이 그리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거의 일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가끔은 관리실 문 앞에 앉아 졸거나 중앙 현관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늘 일을 하고 있었다. 앞뜰의 풀을 베거나 복도와 계단 청소를 하거나 엘리베이터 앞에 쏟아 놓은 오물을 치우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우선 방학이어서 한적해진 학교를 둘러보고 싶었다. 종합대학이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문학이나 사회학 쪽은 학생모집을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나마 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나란히 붙어 있는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덕분이었다. The only thing that kept the school afloat was the medical and nursing schools next door.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려왔다. 모두 여학생들인 것으로 보아 간호학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켜 가는 그들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운동장이 보였다. Beyond them as they moved out of the way was a sun-drenched sports field. 온통 푸른 잔디밭이었다. 웅웅웅, 기계음이 들렸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예초기로 잔디를 깎는 중이었다. 건너편에서는 한 무리의 아낙들이 역시 일렬횡대로 앉아 잔디 사이에서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보건대학 건물을 돌아서니 체육관이 나타났다. 체육관을 옆구리에 끼고 돌았다. I circled the gym on my side. 문득 정면으로 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문 바로 앞까지 갔다가 핸들을 돌려 다시 문에서 멀어졌다. I made it to just in front of the door, turned the handle and moved away from the door again. 그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을 바라보았다. Then he looked at the door from a distance. 보건대학 건물과 체육관이 막아선 때문인가? Is it because the health school building and gym are in the way? 그 왕성하던 예초기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아져 있었다. 그 모기 소리만 한 예초기 기계음을 빼놓고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Nothing disturbed us except the sound of the lawnmower, which was as loud as a mosquito. 우리라고? 그것은 그저 작은 문이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나무들 위로 내려앉는 햇살의 고고한 느낌이 아니었다면, 그 숲에서 흘러나와 아스팔트를 적신 물, 그 수면 위의 무수한 반짝임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했을 작은 문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문을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저 문이 문제인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내가 문제인가? Is it the door that feels like it shouldn't be there, or is it me who feels that way?

문 바깥쪽에 알 수 없는 어떤 세상이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나가는 ‘구멍'이 바로 저곳일까? 그때 한 남자가 내 뒤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비켜 지나 그 문을 향했다. ‘여보시오!' 하마터면 그렇게 부를 뻔했다. 내가 목울대에 걸려 있는 그 말을 되삼키는 순간 사내는 문을 나섰다. 사내가 문을 나서는 순간 그 위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그를 하얗게 만들었고, 다음 순간 다시 그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사라졌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페달을 밟았다. 문설주 양쪽으로 햇살이 커튼처럼 걸려 있었다. 햇살의 커튼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놀랍게도 오래된 숲길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가로수로 여겨지는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길은 ‘도로'였다. 이를테면 버려진 신작로였다. 어쩌면 한때는 많은 자동차들이 이 길을 질주해 갔을 것이다. 버려져 있는 동안 도로 양쪽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길 위를 터널처럼 뒤덮고 있었다. 길은 시작부터 야트막한 오르막이었다. 오호라, 제법 운동을 하게 생겼군. 페달에 실리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울창한 숲이 아주 천천히 내 곁을 지났다. 숲의 정령이 바로 내 곁에서 꿈을 짓는 느낌이었다. 내 곁을 지나쳐 먼저 간 사내가 길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자 그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수줍음이 많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자전거를 멈췄을 것이다. 길은 계속해서 구불구불 오르막이었다. 길이 구부러진 간격이 고만고만했다. 좌로 구부러지거나 우로 구부러지거나 간에 비슷한 거리였다. 길은 구부러지면서 그 다음 구부러진 길을 감추고 있었다. 구부러진 지점에 닿으면 새로 나타날 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기대는 언제나 충만하게 채워졌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여백이 싱그러웠다. 모퉁이를 돌면서 눈을 감았다. 피부에서 공기가 일렁이며 바람이 되는 순간을 느꼈다. 순간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온통 진분홍이었다. 때는 8월이었고, 자미화가 제철이었다. 군데군데 무더기로 꽃을 피워낸 오래된 나무들이었다. 누군가가 이 길을 꾸미기 위해 오래 전 심었을 것이었다. 이미 고목이 된 배롱나무에서 피어난 진분홍 꽃에 취해 서 있는데, 마주 오던 승용차가 옆에 와 섰다. I'm standing there, intoxicated by the deep pink blossoms on an already dead pear tree, when a car pulls up beside me.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근처에 대학교가 있지 않나요?”

“있지요.”

“어떻게 가지요?”

“그냥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내가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싱거운 질문에 싱거운 대답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가면 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만나는 교차로가 나옵니까?”

나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교차로는 없습니다만,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나옵니다.”

“교차로가 없다고요? 길을 건너야…….” 하면서 그의 표정이 답답해졌다. 결국 자동차 문이 열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이었다. I didn't need to do that. 내가 손을 내저었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차에서 내렸다.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제가 조금 전에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 도로 반대편에 있는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었는데, 얘길 하다가 그만 놓쳤어요. "I had to turn left off the main road and go into the main entrance of the university on the other side of the road earlier, and I lost track of the conversation.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 샛길로 우회전해서 들어왔습니다. 이 길로 가다 보면 그 큰길과 만날 수 있는 교차로가 나오겠지 하고요. 방향은 어쨌든 학교 방향이니까요.”

그가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저 긴장할 뿐 다른 도리는 없었다. 나는 조금 전 그 학교의 작은 문에서 나왔고, 그 문을 통해 그가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I walked out of that little door of that school a little while ago, because I was confident that he would be able to get in through that door.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I responded calmly.

“이 길이 맞습니다. 제대로 오셨어요. 이 길로 가시면 바로 학교가 나옵니다. 길을 건너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교차로 따위는 없고요. 이 길 어딘가에 바로 학교로 들어가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오른쪽을 잘 살피고 가시면서 그 구멍을 찾으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When I finished, he shrugged.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고 중얼거렸던 것 같았다. 별로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동차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한적해지면서 자미화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When it was quiet again, Jamihua's figure came into view. 그런데 나는 왜 ‘구멍'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것을 문이라고 하지 않고 구멍이라고 했지? 그곳을 ‘빠져나왔다'라고 했던 것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It might have something to do with the fact that I said "got out" of there.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문보다 구멍이어야 제격일 테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 정도에서 털어버렸다.

자동차가 서는 소리에 뒤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There was the sound of a car pulling up, followed by the sound of words. 그곳에 아까 모기만 한 소리로 내게 ‘안녕하세요?' 했던 창백한 사내가 있었다. 내게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내에게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모기만 한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오르막을 올랐다. 핸들에 달린 계기를 보니 4km쯤 오르막을 올라왔다. 그 고갯마루 아래에 작은 광장이 나타났고, 그곳에 휴게소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중국집이었다. 점심 한 번 저녁 한 번을 해결한 적이 있는 식당이었다. It was a restaurant I'd been to once for lunch and once for dinner. 이 집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 이로써 세 번째다. 지난주에도 왔었다. 그때 ‘휴가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이 집에 와서 얻어먹을 궁리를 하고 물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갈증이 난 나는 옆집 주막을 기웃거렸다. 오래 전 이 길로 서울을 오르내릴 적 이곳 뒷밤재에는 중국집이 없었다. Long ago, when I traveled this route to and from Seoul, there were no Chinese restaurants in Backbamjae. 재를 넘는 나그네의 허기를 달래 준 것은 오직 이 주막이었다. It was the only thing that quenched the hunger of the travelers beyond the ashes. 난 이 주막만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만 하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이 집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동기생의 집이기도 했다. This house was also the home of a classmate who went to the same high school as me. 그와 친했다면 더 많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별로 가까이 지낸 친구는 아니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할 때 저만치 손을 흔들어 안부를 전하는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Even so, I remembered that he was the only son of a single mother. 공부는 곧잘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영민했던 그가 말단 지방공무원에서 시작해 중앙부처 사무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I had heard that he had risen through the ranks of the local government to become a central government official. 거기까지였다. 주막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물 사발을 내밀었다. The old man guarding the tent held out a bowl of water.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물 사발을 받아든 나는 묻지 않았다. I was curious about his news, but as I accepted the bowl of water, I didn't ask. 그 친구의 소식을 물으면 내 신원을 밝혀야 하는데, 그것이 마뜩치가 않았다. When I asked for his update, I had to identify myself, which was a pain in the ass. 뱃속까지 서늘하게 했던 냉수였다. 그날 주막 앞에 연두색 모닝이 서 있었다.

“그 집 며느리 차예요. 색깔이 요상하지요?”

며느리라면 그 친구 안사람이겠다. 내가 보기엔 중국집 아낙의 미소가 더 요상했다. I think Anak's smile was even stranger.

“병든 시어머니 보살피겠다고 짐 싸가지고 들어왔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읍내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읍내에? 혼자 살다니?”

“죽었지요, 남편이. 남편 죽고 고향으로 내려왔지요.”

“죽다니, 왜?”

놀랐다. 뜻밖의 부음이었다. It was an unexpected addition.

“부지런한 사람이라 무리했던가 봐요. 과로사였대요. 몇 년 됐어요.”

“며느리 고향도 이곳인가요?”

“그렇지요. 지금은 없어진 동강 술도가 딸인데, 근데 차 색깔 한번 요상하지요?” She's the daughter of the now-defunct Donggang Suldo, but she's got a strange car color, doesn't she?"

그녀의 후렴 또한 이상했다. Her chorus was also strange. 어라, 동강 술도가 딸이라고? Oh, so Donggang Suldo is your daughter?

“그럼 이름이 영흰데.”

불쑥 그녀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짠했다. The part about his friend dying was heartbreaking. 아무리 가까이 지낸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렇지, 왜 그것을 그의 옛집 앞에서, 그것도 이 생경한 중국집 아낙에게 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처가 동강 술도가 딸이라는 대목에서 더 크게 가슴이 철렁했다. But my heart sank even more when I realized that his wife was the daughter of Donggang Suldo. 이유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도가 고명딸을 잘 알고 있었다. I knew the daughter of Suldo well. 내 곁에는 그녀를 매우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몇 년 전 동창회에서 사라져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또 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녀와 맺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두 오빠의 반대 때문이었다. 반대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듣지는 못했다. 그 친구는 술도가 앞에 앉아 ‘꽃부리 영' 자 ‘기쁠 희' 자를 외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The friend sat in front of the sutra and cried for days and days, chanting "Flowering Spirit" and "Rejoice". 나도 그가 그 일인 시위에서 철수하기로 한 마지막 날, 위로차 술도가 앞에 갔었다. 고통스러운 실연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난 뒤여서 그는 핼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 뒤 그의 행동은 두고두고 화제였다. 그런데 이 친구에 관한 마지막 소식은 동창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동창회에서 사라졌다고. 일 년에 한 번쯤 동창회에서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이제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가족은 알고 있나 해서 수소문을 해보니 그의 가족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그가 운영했던 회사가 부도난 뒤 잠적했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었다.

그동안 모두들 바빴는가. 단지 혈맹의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백 년이 지나도 우리의 우정만은 변치 말자는 다짐들이 있었지 않은가. 그때는 한없이 절실했을 그 동맹의 진정성이 이리도 허망하게 퇴색되었더란 말인가. 위에서 말한 죄책감이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우정에게만이 아니라, 고향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문장웹진 12월호》

******

소설가 이명행 씨가 7년 만에 소설을 발표했다.

2004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되었던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 이후 처음.

지난 2년 동안 7편의 단편소설을 썼고, 1편의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라 한다.

쓰기만 하고, 발표는 미뤘는데, 이번에 그 첫 번째 소설을 종이책이 아닌 웹진에 내놓았다.

<문장웹진> http://webzine.munjang.or.kr/ [소설을 펼치는 시간]이라는 항목에 있다. 나주 다시면이 고향인 이명행 작가를 1983년엔가,

기자 초년시절 ‘황색새의 발톱'를 통해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