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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A collection of literary excerpts), 르 클레지오, 「허기의 간주곡」 중에서

르 클레지오, 「허기의 간주곡」 중에서

「허기의 간주곡」 르 클레지오,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생전 처음으로 흰 빵을 먹어보았다. 처음 먹어본 흰 빵은 달콤한 향기가 나고 소화가 잘 되는 강력분을 반죽해 틀에 넣어 구운 네모진 빵으로, 속살은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종이만큼이나 하얬다. 그 빵을 묘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인다. 마치 그 시절부터 세월이 전혀 흐르지 않았고,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내가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나는 미국산 스팸을 먹는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내용물을 다 먹고 빈 깡통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그 위에 회색 페인트를 꼼꼼히 칠해 군함을 만들기 위해서다. 스팸 깡통을 따면 가장자리에 응고된 젤라틴이 술 장식처럼 늘어져 있고 약간 비누 맛이 나는 분홍빛 덩어리가 들어 있는데, 그걸 보면 내 가슴은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그 신선한 고기 냄새, 입안 가득 덩어리를 물면 혀와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얇게 뒤덮는 그 순수한 기름막.

그리고 카네이션 우유도 있다. 나는 그 하얀 가루를 목이 멜 정도로 수북이 떠서 먹은 다음 숟가락을 계속 빨아댔다. 목이 메면서도 마냥 행복했다. 따뜻하고, 뻑뻑하고, 약간 짭짤하기도 한 그 분말우유는 내 이와 잇몸에 달라붙었다가 진득한 액체가 되어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시절의 허기는 지금도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허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강렬한 빛을 발하면서 내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런 허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기나긴 세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지 못했으리라.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배불리 먹을 때의 충족감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음을 기억할 뿐. 새하얗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향긋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나던 그 빵,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던 그 생선 기름, 그 소금, 내 입 저 안쪽과 혀 위에 들러붙어 반죽이 되던 분말우유 몇 숟가락. 바로 그 순간, 나는 살기 시작한다. 잿빛 세월에서 빠져나와 환한 빛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존재한다.


르 클레지오, 「허기의 간주곡」 중에서 Le Clezio, from The Consideration of Hunger Le Clezio, de La consideración del hambre Le Clezio,来自“饥饿的插曲”

「허기의 간주곡」 르 클레지오, 《饥饿的插曲》勒克莱齐奥,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생전 처음으로 흰 빵을 먹어보았다. 童年的一天,我生平第一次吃到白面包。 처음 먹어본 흰 빵은 달콤한 향기가 나고 소화가 잘 되는 강력분을 반죽해 틀에 넣어 구운 네모진 빵으로, 속살은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종이만큼이나 하얬다. 我吃的第一个白面包是用结实、易消化的面粉做成的方形面包,闻起来很香,是在模具里烤的。 그 빵을 묘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인다. 即使现在,当我描述面包时,我仍在流口水。 마치 그 시절부터 세월이 전혀 흐르지 않았고,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내가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仿佛从那时起,时间就没有过去,现在的我和童年的我直接相连。

나는 미국산 스팸을 먹는다. 我吃美国垃圾邮件。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내용물을 다 먹고 빈 깡통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虽然已经过去很长时间了,但我还是把里面的东西都吃完了,空罐头也一直保留着,没有扔掉。 그 위에 회색 페인트를 꼼꼼히 칠해 군함을 만들기 위해서다. 就是在上面仔细地涂上灰色的油漆,做成一艘战船。 스팸 깡통을 따면 가장자리에 응고된 젤라틴이 술 장식처럼 늘어져 있고 약간 비누 맛이 나는 분홍빛 덩어리가 들어 있는데, 그걸 보면 내 가슴은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当我打开一罐垃圾邮件时,我发现一团略带肥皂味的粉红色物质,周围有凝固的明胶,像流苏一样垂在边缘,这让我心里充满了幸福。 그 신선한 고기 냄새, 입안 가득 덩어리를 물면 혀와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얇게 뒤덮는 그 순수한 기름막. 那种新鲜的肉味,当你咬满嘴里的一块东西时,那种纯净的油膜薄薄地覆盖在舌头和喉咙上。

그리고 카네이션 우유도 있다. 나는 그 하얀 가루를 목이 멜 정도로 수북이 떠서 먹은 다음 숟가락을 계속 빨아댔다. 목이 메면서도 마냥 행복했다. 따뜻하고, 뻑뻑하고, 약간 짭짤하기도 한 그 분말우유는 내 이와 잇몸에 달라붙었다가 진득한 액체가 되어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시절의 허기는 지금도 내 안에 있다. 나는 그 허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강렬한 빛을 발하면서 내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게 한다. 그런 허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시절,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기나긴 세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지 못했으리라.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배불리 먹을 때의 충족감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음을 기억할 뿐. 새하얗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향긋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나던 그 빵,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던 그 생선 기름, 그 소금, 내 입 저 안쪽과 혀 위에 들러붙어 반죽이 되던 분말우유 몇 숟가락. 바로 그 순간, 나는 살기 시작한다. 잿빛 세월에서 빠져나와 환한 빛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