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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여섯 번째-6

나의 어린시절, 여섯 번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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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여섯 번째

그나마 우리 아빠트는 그 주변 아빠트와는 달리 외랑식이였고 제일 잘 사는 아빠트라고 불리웠다.

특히 그 주변에 학교, 진료소, 배급소, 석탄공장, 밥공장, 상점과 각종 편의 시설이 린접해 있어 생활하기에 아주 편리한 아빠트였다. 그런데도 이처럼 불편하다고 느껴졌으니 다른 사람들이 사는 아빠트나 집은 오죽했을까. 그래도 요즘 어른들은 1960년대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그나마 물자도 풍부하고 자유가 많았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애.” 라고 지금의 궁한 생활을 탄식하곤 한다. 꾸바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나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없어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는 일부 애들은 직장 유치원에 다녔고 나처럼 어머니가 집에 있는 애들은 개인이 운영하는 동네 유치원에 다녔다. 내가 다닌 유치원은 우리 아빠트에서 몇 채 건너에 있는 아빠트인데, 두 칸짜리 살림방에 방 하나를 유치원으로 꾸민 것이였다. 그 유치원에는 20여 명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다녔는데 방 벽에는 어린이 이름과 그 밑에 착한 일 했다는 표시로 빨간 오각별을 그려 붙였고, 어린이가 그린 그림과 구호가 붙여져 있었다. 요즈음 유치원 어린이의 구호는,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요.' ‘세상에 부럼 없어라.'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쑤 미국놈을 쳐부시자. '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녀동생 현옥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녔다. 아침 9시에 가서 학습준비를 하고 9시 15분에 라지오를 통해 나오는 어린이 방송 시간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배웠다. 점심때가 되면 준비해간 밥곽을 꺼내 먹고 바로 오침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강제로 나란히 눕히고 잠을 재웠다. 이때만 해도 북에서는 전국 학교와 직장에 점심식사 후 오침 시간이 주어졌다. 낮잠이 끝나면 아파트 마당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추었고 우리들이 고대하던 간식도 나왔다. 유치원생 간식은 주로 과자와 사탕 몇 개씩이였는데 간식비로 월 2원씩을 걷어서 내면 선생님이 식료품 상점에서 유치원 간식용으로 구입해 왔다. 1967년 여름, 나는 한창 아이들 사이에 류행하던 볼거리에 걸려 한쪽 볼이 벌겋게 부어 오르고 열이났다. 개성 외가집 명자 이모가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에 나는 유치원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보내져 2개월간 이모의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받는 동안 외할머니는 나에게 약과와 함께 녹두부침, 강정 등 간식을 떨어뜨리지 않고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더러는 시장에 데리고 가서 연시도 사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 내 외손녀딸'이라고 자랑하셨다. 개성 외가집에서 볼거리 치료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곧 동네 근처에 있는 ‘하신인민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을 하던 날 나는 너무 좋아서 엄마의 손을 잡고 옆걸음으로 깡충깡충 뛰면서 갔다. 운동장에 모여 예쁘게 꾸미고 나온 다른 애들과 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홍택실' 이란 아이도 와 있었다. 아직 선생님들이 운동장에 나오지 않아 집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른들은 나와 택실이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추어 보라고 하면서 박수를 쳐댔다. 택실이는 원래 춤에 소질이 있고 유치원에서 나와 자주 ‘쌍무'를 조직했기 때문에 손발이 잘 맞았다. 이날 쌍무를 추는 모습을 본 음악 선생님은 이것이 인상에 남았는지 나를 ‘음악 써클부'에 편입시켰다. 1학년 때 내가 한 것은 군무였다. 우리 학교는 북조선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이나 외부 손님에게 참관시키는 참관학교로 선정되여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학생소년궁전'에 가서 공연도 했다. 2학년에 올라가니 음악 선생님이 무용은 그만두게 하고 손풍금을 하게 했다. 그리고 혼성 제창에도 끼워 주었는데 사실 나는 노래에 소질이 없었으나 음악 선생이라는 배경 때문에 뽑혀 다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여섯 번째-6 My Childhood, Sixth - 6 Mi infancia, Sexto - 6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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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여섯 번째 My childhood, the sixth

그나마 우리 아빠트는 그 주변 아빠트와는 달리 외랑식이였고 제일 잘 사는 아빠트라고 불리웠다. At the same time, my Dad, unlike the surrounding Dad, was a lover and was best called Dad. せめてもの救いは、私たちのお父さんは周りのお父さんとは違い、外食主義で一番裕福なお父さんと呼ばれていたことだ。

특히 그 주변에 학교, 진료소, 배급소, 석탄공장, 밥공장, 상점과 각종 편의 시설이 린접해 있어 생활하기에 아주 편리한 아빠트였다. In particular, the school, clinic, distribution center, coal factory, rice factory, shops and other convenient facilities are nearby, making it a convenient place to live. 特にその周辺には学校、診療所、配給所、石炭工場、米工場、商店と各種便宜施設が隣接しており、生活するのにとても便利なアパルトマンだった。 그런데도 이처럼 불편하다고 느껴졌으니 다른 사람들이 사는 아빠트나 집은 오죽했을까. Nevertheless, I felt so uncomfortable, so would my family or other house live? それなのにこれだけ不快に感じたのだから、他の人が住んでいるアパルトマンや家はどうなんだろう。 그래도 요즘 어른들은 1960년대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그나마 물자도 풍부하고 자유가 많았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애.” 라고 지금의 궁한 생활을 탄식하곤 한다. Nowadays, adults remember the 1960s, and they lamented their hard lives, saying, “At that time, there was plenty of material and freedom. それでも最近の大人たちは1960年代の当時を思い出しながら、「あの頃はまだ物資も豊富で自由が多かった、虎の巻タバコを吸っていた頃の話だね。と今の貧しい生活を嘆くことがある。 꾸바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나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Shortly after returning from Cuba, I entered kindergarten. クバから帰ってきて間もなく、私は幼稚園に入りました。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없어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는 일부 애들은 직장 유치원에 다녔고 나처럼 어머니가 집에 있는 애들은 개인이 운영하는 동네 유치원에 다녔다. At that time, there were no state-run kindergartens, so some of my kids went to work in kindergarten. Like me, the kids in my home went to privately run neighborhood kindergartens. 当時は国が運営する幼稚園がなく、母親が仕事に行っている子供たちは職場幼稚園に通い、私のように母親が家にいる子供たちは個人が運営する近所の幼稚園に通っていました。 내가 다닌 유치원은 우리 아빠트에서 몇 채 건너에 있는 아빠트인데, 두 칸짜리 살림방에 방 하나를 유치원으로 꾸민 것이였다. 私が通った幼稚園は、うちのアパートの数軒先にあるアパートにある幼稚園で、二間続きのリビングルームの一室を幼稚園にしたものだった。 그 유치원에는 20여 명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다녔는데 방 벽에는 어린이 이름과 그 밑에 착한 일 했다는 표시로 빨간 오각별을 그려 붙였고, 어린이가 그린 그림과 구호가 붙여져 있었다. その幼稚園には20人ほどの子供たちが通っていたのですが、部屋の壁には子供の名前とその下に良いことをしたという印として赤い五角形を描き、子供が描いた絵やスローガンが貼られていました。 요즈음 유치원 어린이의 구호는,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The relief of kindergarten children these days is "Thank you, Father Kim Il-sung." 最近の幼稚園の子供たちの掛け声は、「お父さん金日成元帥、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우리는 행복해요.' 私たちは幸せです。 ‘세상에 부럼 없어라.' 'Do not call the world.' '世界に誇りを持て'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쑤 미국놈을 쳐부시자. 'Let's defeat the one-man Americans of the nation. '我が民族の鉄天下原水アメリカ野郎を叩き潰そう。 '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が内容の主流を占めている。 나는 녀동생 현옥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녔다. I went to kindergarten with my sister Hyun-ok. 私は妹のヒョンオクを連れて幼稚園に通っていた。 아침 9시에 가서 학습준비를 하고 9시 15분에 라지오를 통해 나오는 어린이 방송 시간에 맞추어 노래와 춤을 배웠다. I went to 9 o'clock in the morning and prepared for learning, and at 9:15 I learned to sing and dance for the children's broadcast time through Lazio. 朝9時に行って学習の準備をし、9時15分にラジオから流れる子供向け放送の時間に合わせ、歌とダンスを学びました。 점심때가 되면 준비해간 밥곽을 꺼내 먹고 바로 오침에 들어갔다. When it was lunch, I took out the prepared rice cake and ate it immediately. ランチタイムになると、用意したご飯箱を取り出し、すぐに朝食に入りました。 선생님은 아이들을 강제로 나란히 눕히고 잠을 재웠다. 先生は子供たちを無理やり並べて寝かせた。 이때만 해도 북에서는 전국 학교와 직장에 점심식사 후 오침 시간이 주어졌다. At this time, in the north, school and work nationwide were given lunch time after lunch. この頃、北では全国の学校や職場に昼食後の午前の時間が与えられていた。 낮잠이 끝나면 아파트 마당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추었고 우리들이 고대하던 간식도 나왔다. After the nap, we went to the apartment yard to exercise or dance, as well as the snack we were looking forward to. 昼寝が終わると、アパートの庭に出て運動をしたり、ダンスをしたり、私たちが楽しみにしていたおやつも出てきました。 유치원생 간식은 주로 과자와 사탕 몇 개씩이였는데 간식비로 월 2원씩을 걷어서 내면 선생님이 식료품 상점에서 유치원 간식용으로 구입해 왔다. The kindergarten snacks were mainly snacks and a few candy. If you pay 2 won a month for snacks, the teacher bought them at the grocery store for kindergarten snacks. 幼稚園児のおやつは主にお菓子とキャンディー数個ずつでしたが、おやつ代として月2ウォンずつを徴収し、先生が食料品店で幼稚園のおやつ用に購入していました。 1967년 여름, 나는 한창 아이들 사이에 류행하던 볼거리에 걸려 한쪽 볼이 벌겋게 부어 오르고 열이났다. 1967年の夏、私はちょうど子供たちの間で流行っていた疱瘡にかかり、片方の頬が腫れ上がり、熱が出た。 개성 외가집 명자 이모가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에 나는 유치원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보내져 2개월간 이모의 치료를 받았다. Since my aunt was a pediatrician, I quit kindergarten and sent to Kaesong for two months. 開城の実家の明子叔母が小児科医だったので、私は幼稚園をやめて開城に送られ、2ヶ月間叔母の治療を受けた。 치료를 받는 동안 외할머니는 나에게 약과와 함께 녹두부침, 강정 등 간식을 떨어뜨리지 않고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During the treatment, my grandmother cared me with medicines without dropping snacks such as green bean curd and gangjeong. 治療を受けている間、祖母は私に薬と一緒に緑豆粥、姜焼きなどのおやつを落とさずに丁寧に世話をしてくれました。 더러는 시장에 데리고 가서 연시도 사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 내 외손녀딸’이라고 자랑하셨다. Some took me to the market, bought a new year, and boasted that they were my granddaughter. 時には市場に連れて行って年賀状を買ってあげたり、会う人会う人に「私の一人娘」と自慢していました。 개성 외가집에서 볼거리 치료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곧 동네 근처에 있는 ‘하신인민학교’에 입학했다. 開城の実家でおたふく風邪の治療を終えて家に帰ると、すぐに近所にある「ハシン人民学校」に入学した。 입학식을 하던 날 나는 너무 좋아서 엄마의 손을 잡고 옆걸음으로 깡충깡충 뛰면서 갔다. 入学式の日、私は嬉しくて、ママの手をつないで、横一歩でバタバタしながら行きました。 운동장에 모여 예쁘게 꾸미고 나온 다른 애들과 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運動場に集まって、きれいに飾って出てきた他の子たちと自分を比べてみるのも楽しかったです。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홍택실' 이란 아이도 와 있었다. 同じ幼稚園に通っていた「ホン・テクシル」という子も来ていた。 아직 선생님들이 운동장에 나오지 않아 집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른들은 나와 택실이를 단상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추어 보라고 하면서 박수를 쳐댔다. まだ先生たちが運動場に出てこないので集合を待っている間、大人たちは私とタクシルを壇上に乗せて踊れと言いながら拍手喝采を浴びせました。 택실이는 원래 춤에 소질이 있고 유치원에서 나와 자주 ‘쌍무’를 조직했기 때문에 손발이 잘 맞았다. Taeksil was good at dancing because he was originally good at dancing, and he came out of kindergarten and often organized 'Danmu'. タクシルはもともとダンスが得意で、幼稚園で私とよく「双舞」を組んでいたので、手足が合う。 이날 쌍무를 추는 모습을 본 음악 선생님은 이것이 인상에 남았는지 나를 ‘음악 써클부’에 편입시켰다. The music teacher who saw him dancing on the day included me in the 'Circle of Music.' この日の双舞を見た音楽の先生は、これが印象に残ったのか、私を「音楽サークル部」に編入してくれました。 1학년 때 내가 한 것은 군무였다. 1年生の時に私がやったのは軍務でした。 우리 학교는 북조선을 방문하는 외국 손님이나 외부 손님에게 참관시키는 참관학교로 선정되여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방문하는 손님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학생소년궁전’에 가서 공연도 했다. Since our school was selected as an observer school for foreign and foreign visitors to North Korea, we danced in front of the visitors and performed at the 'Student Boy Palace.' 私たちの学校は、北鮮を訪れる外国人客や外部客に参観させる参観学校に選ばれていたので、学校を訪れる客の前で踊ったり、「学生少年宮殿」に行って公演をしたりしました。 2학년에 올라가니 음악 선생님이 무용은 그만두게 하고 손풍금을 하게 했다. 2年生になると、音楽の先生がダンスはやめさせ、尺八をやらせました。 그리고 혼성 제창에도 끼워 주었는데 사실 나는 노래에 소질이 없었으나 음악 선생이라는 배경 때문에 뽑혀 다녔다. I also put it in the hybrid proposition, but I wasn't good at singing, but I was chosen because of my background as a music teacher. そして、混声合唱にも参加させてもらったのですが、実は私は歌が苦手だったのですが、音楽教師というバックグラウンドから選ばれていまし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Park Hyun-hyun was the confession of Kim Hyun-hee of the Daenam Institute of Tech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