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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열 여덟 번째-18

나의 어린시절, 열 여덟 번째-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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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여덟 번째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생들은 더욱 바빠진다. 우선 소년단을 면하고 당의 후비대인 사로청에 가맹하게 된다. 이 역시 학급 전체를 같은 날짜에 일제히 가맹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가맹시킨다. 결국에는 전원 가맹시키는 것이면서도 먼저 가맹하려는 경쟁 심리를 유발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방법을 쓴다. 만에 하나라도 사로청에 가맹하지 못하면 로동도 할 수 없고 군대에도 나갈 수 없게 된다. 중학교 4학년이 되여 사로청에 가입하고 나면 남자나 녀자 모두 군사동원부 명부에 등록되여 구역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된다. 난생 처음 종합신체검사를 받는 데다가 녀자들은 산부인과 검사도 받아야 하므로 약간의 수치심도 생겼다. 산부인과에서는 처녀성 여부를 가리는 검사를 하는데 간혹 체조나 무용을 하던 애들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검사 평가를 받기도 하여 뒷말이 나돌곤 했다.

“쟤 산부인과 검사에서 이상있었대.”

수군덕거리며 그 아이의 평가를 다시 내리는 경우도 있다. 체육과 무용을 한 아이들은 은근히 걱정이 되여 서로 너 먼저 하라고 밀치면서 뒤로 빠지지만 결국은 모두 검사를 받는다. 이 검사는 녀자 아이들의 ‘품행검사' 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품행이 좋은가 좋지 못한가의 여부를 가리는 검사이기 때문에 신체검사의 일부분으로 당연히 받는 검사로 생각한다.

신체검사를 받고 나면 학교 운동장에서 ‘붉은 청년 근위대' 입대식이 진행된다. 입대식에는 시당 적위대부에서 간부가 나와 일장 연설을 한다. 연설이 끝나면 근위대 휘장을 수여하는 휘장 수여식이 있다. 우리는 여름철 한 달 동안 붉은청년근위대 훈련을 나갔는데, 우리 학급은 평양 중화구역 주변 야산에 있는 붉은청년근위대 야영소로 배속되여 갔다.

북조선 학생들은 중학교 4학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의무적으로 농촌지원을 나가야 하다. 내가 첫 농촌 지원을 나간 것은 중학 4학년에 올라가자마자 형제산 구역에 있는 협동농장으로 나간 가을 걷이였다. 두 달 동안 농촌에 가서 일하려면 갈아 입을 내의와 작업복, 덮고 잘 모포, 각자 쓸 필수품을 준비해 배낭 속에 넣어야 한다. 더구나 녀자들은 작은 세수대야, 치솔, 고뿌까지 다 준비해 가지고 다녀야 하니 남자들의 짐보다 곱절이나 되였다.

처음 나간 가을걷이는 아직 육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나에게는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난 생 처음 해보는 낫질은 서툴렀고 일은 몇 배나 힘들었다. 특히 날이 무딘 낫이 내 차지가 되면 도끼질하듯 해야 하므로 빨리 지쳤다.

6시 기상해서 아침 체조를 할 때는 모두 다 허리, 다리가 아파 ‘아이쿠', ‘아야' 비명을 질렀 으나 차츰 단련되여 갔다. 9월의 늦가을 따가운 볕에 나가 한참을 일하다나면 겉옷까지 땀에 배어 소금물에 담갔다가 꺼내 말린 옷처럼 허연 소금기가 등어리에 지도를 그렸다. 하지만 다들 경쟁에서 질까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벼를 베여 나갔다. 서툰 낫질로 시퍼런 날에 손을 베는 수도 많았지만 별다른 약이 준비되여 있지 않아 담배가루를 붙여 림시 지혈시키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낫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장화가 없어 맨발로 논에 들어가 일하다가 낫에 발가락을 찍혀 병원으로 실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낫질하다가 벤 상처뿐 아니라 억센 풀에 베어 생긴 상처 자리가 아직도 내 손에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있다. 남조선에 와서 내 또래 녀자들의 고운 손을 대하다나면 나는 부끄러워 손을 감추기도 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열 여덟 번째-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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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여덟 번째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생들은 더욱 바빠진다. 우선 소년단을 면하고 당의 후비대인 사로청에 가맹하게 된다. 이 역시 학급 전체를 같은 날짜에 일제히 가맹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가맹시킨다. 결국에는 전원 가맹시키는 것이면서도 먼저 가맹하려는 경쟁 심리를 유발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방법을 쓴다. 만에 하나라도 사로청에 가맹하지 못하면 로동도 할 수 없고 군대에도 나갈 수 없게 된다. 중학교 4학년이 되여 사로청에 가입하고 나면 남자나 녀자 모두 군사동원부 명부에 등록되여 구역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된다. 난생 처음 종합신체검사를 받는 데다가 녀자들은 산부인과 검사도 받아야 하므로 약간의 수치심도 생겼다. 산부인과에서는 처녀성 여부를 가리는 검사를 하는데 간혹 체조나 무용을 하던 애들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검사 평가를 받기도 하여 뒷말이 나돌곤 했다.

“쟤 산부인과 검사에서 이상있었대.”

수군덕거리며 그 아이의 평가를 다시 내리는 경우도 있다. 체육과 무용을 한 아이들은 은근히 걱정이 되여 서로 너 먼저 하라고 밀치면서 뒤로 빠지지만 결국은 모두 검사를 받는다. 이 검사는 녀자 아이들의 ‘품행검사' 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품행이 좋은가 좋지 못한가의 여부를 가리는 검사이기 때문에 신체검사의 일부분으로 당연히 받는 검사로 생각한다.

신체검사를 받고 나면 학교 운동장에서 ‘붉은 청년 근위대' 입대식이 진행된다. 입대식에는 시당 적위대부에서 간부가 나와 일장 연설을 한다. 연설이 끝나면 근위대 휘장을 수여하는 휘장 수여식이 있다. 우리는 여름철 한 달 동안 붉은청년근위대 훈련을 나갔는데, 우리 학급은 평양 중화구역 주변 야산에 있는 붉은청년근위대 야영소로 배속되여 갔다.

북조선 학생들은 중학교 4학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의무적으로 농촌지원을 나가야 하다. 내가 첫 농촌 지원을 나간 것은 중학 4학년에 올라가자마자 형제산 구역에 있는 협동농장으로 나간 가을 걷이였다. 두 달 동안 농촌에 가서 일하려면 갈아 입을 내의와 작업복, 덮고 잘 모포, 각자 쓸 필수품을 준비해 배낭 속에 넣어야 한다. 더구나 녀자들은 작은 세수대야, 치솔, 고뿌까지 다 준비해 가지고 다녀야 하니 남자들의 짐보다 곱절이나 되였다.

처음 나간 가을걷이는 아직 육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나에게는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난  생 처음 해보는 낫질은 서툴렀고 일은 몇 배나 힘들었다. 특히 날이 무딘 낫이 내 차지가 되면 도끼질하듯 해야 하므로 빨리 지쳤다.

6시 기상해서 아침 체조를 할 때는 모두 다 허리, 다리가 아파 ‘아이쿠', ‘아야' 비명을 질렀  으나 차츰 단련되여 갔다. 9월의 늦가을 따가운 볕에 나가 한참을 일하다나면 겉옷까지 땀에 배어 소금물에 담갔다가 꺼내 말린 옷처럼 허연 소금기가 등어리에 지도를 그렸다. 하지만 다들 경쟁에서 질까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벼를 베여 나갔다. 서툰 낫질로 시퍼런 날에 손을 베는 수도 많았지만 별다른 약이 준비되여 있지 않아 담배가루를 붙여 림시 지혈시키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낫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장화가 없어 맨발로 논에 들어가 일하다가 낫에 발가락을 찍혀 병원으로 실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낫질하다가 벤 상처뿐 아니라 억센 풀에 베어 생긴 상처 자리가 아직도 내 손에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있다. 남조선에 와서 내 또래 녀자들의 고운 손을 대하다나면 나는 부끄러워 손을 감추기도 했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