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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열 세 번째-13

나의 어린시절, 열 세 번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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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세 번째

소년단이고 사로청이고간에 조직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뭐니뭐니 해도 ‘사상투쟁'을 할 때이다. 사상투쟁 때는 같이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도 호상비판을 해야 하니 괴롭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우리 어머니 말대로 비위살이 없고 심기가 약한데다 수집음을 잘 타서 호상비판 때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 호상비판을 못한다고 호되게 비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중학교 때 35살의 로처녀 선생이 담임이였는데 외모는 깔끔하지만 성격이 못되어 자기가 잘못 본 학생은 계속 비판시켜 몰아세웠다. 한번은 학교 내의 망나니패를 뿌리뽑겠다며 학급 총회 때 한 아이를 집중 비판하게 하였다. 비판 무대 주인공은 결석도 잘 하고 청소 담당일 때 농땡이를 치고 놀기만 좋아하는 락후생이였다. 나는 학급 간부이기 때문에 응당 비판 사업에 나서야 했다. 그 아이에게서 별로 비판거리를 잡지 못하여 주저주저하는데 선생이 나를 쏘아보고 있어 흠칫 놀랐다. 마지못해 나는 먼저 번 아이들이 비판하고 지적했던 내용을 작은 소리로 되풀이해 말하다나니까 차츰 비판내용이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여 새로운 비판거리 하나를 생각해내였다.

“동무는 시간이 없어서 청소도 못하고 숙제도 안 했다는 것은 구실입니다. 어제도 밖에서 놀기만 하던데 그럼 놀 시간은 있는데 청소와 숙제할 시간은 없다는 겁니까? 이건 조직 생활에 충실하라는 아버지 원수님의 교시 말씀에 어긋나고 충실치 못하고 책임성이 없다는 것이며.....”

선생도 나의 비판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현희동무 말이 옳아요! 놀 시간은 있어도 청소할 시간이 없어요!” 하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호상비판 투쟁에서 선생의 호응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학생들 중에서 호상비판에 언제나 앞장서는 당찬 애들도 있었다. 선영이란 아이는 사상투쟁시 발딱 일어나 당돌하게 비판 잘하는 학생이였다.

“동무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량심이 없습니다. 동무는 아버지 원수님의 품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니 퇴학당해 마땅합니다.”

어떻게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옆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조마조마 할 정도였다. 이 아이는 말로 다른 사람을 쪼아대고 덧이발까지 나 있어 남학생들로부터 ‘쪼대미' 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비애)비판하는 것도 성격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아이들로 키우는 것이 북조선의 교육 방침인 것 같기도 하다. 거의 매주 두서너 번씩 벌어지는 비판 시간에 비판거리를 찾다 보면 동무는 물론 부모형제까지도 비판 할 수 있는 충성심을 키우는 곳이 학교이기도 하다.

나의 인민학교 시절은 그런데로 순탄했고 오히려 하신인민학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특출 나게 보내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던 시절이였다.

나는 1972년 9월, 중신중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동네 근처에 있었다. 중학교라고는 해도 인민학교 때 같은 반 하던 학생들이 그대로 진학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기분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지방으로 이사 간 가족의 자녀나 특수학교로 전출한 학생만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얼굴이였다. 중학교 역시 소년단 생활의 연장이였으므로 학교와 교실만 달라졌을 뿐 인민학교 생활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호)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나는 각종 행사에 자주 뽑혀 동원되여 나갔다. 그중에서도 1972년 11월 2일 북남조절위원회 두 번째 회담을 위해 남조선 대표가 평양을 방문할 때 나는 남조선 대표 성원 한 분께 꽃다발을 증정한 사실이 있다. 이 문제는 그동안 여러 사람의 관심과 질문의 대상이였기 때문에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소상히 밝히려 한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열 세 번째-13 My Childhood, Thirteenth-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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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세 번째

소년단이고 사로청이고간에 조직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뭐니뭐니 해도 ‘사상투쟁’을 할 때이다. The most difficult thing in organizing life between boys and girls is the time for ideological struggle. 사상투쟁 때는 같이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도 호상비판을 해야 하니 괴롭지 않을 수 없었다. Friends who had been close friends during the ideological struggle also had to be critical of the appeal was inevitable. 더구나 나는 우리 어머니 말대로 비위살이 없고 심기가 약한데다 수집음을 잘 타서 호상비판 때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 호상비판을 못한다고 호되게 비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중학교 때 35살의 로처녀 선생이 담임이였는데 외모는 깔끔하지만 성격이 못되어 자기가 잘못 본 학생은 계속 비판시켜 몰아세웠다. In middle school, a 35-year-old teacher was a teacher, but she looked neat but didn't have a good personality. 한번은 학교 내의 망나니패를 뿌리뽑겠다며 학급 총회 때 한 아이를 집중 비판하게 하였다. One time, I was to critically criticize a child at the class meeting, saying that I would eradicate the unruly plaque in the school. 비판 무대 주인공은 결석도 잘 하고 청소 담당일 때 농땡이를 치고 놀기만 좋아하는 락후생이였다. 나는 학급 간부이기 때문에 응당 비판 사업에 나서야 했다. Because I was a class officer, I had to start a critical business. 그 아이에게서 별로 비판거리를 잡지 못하여 주저주저하는데 선생이 나를 쏘아보고 있어 흠칫 놀랐다. The teacher hesitated because I couldn't criticize the child very much and was surprised to see me shooting. 마지못해 나는 먼저 번 아이들이 비판하고 지적했던 내용을 작은 소리로 되풀이해 말하다나니까 차츰 비판내용이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여 새로운 비판거리 하나를 생각해내였다. Reluctantly, I reiterate what the children had criticized and pointed out in small voices.

“동무는 시간이 없어서 청소도 못하고 숙제도 안 했다는 것은 구실입니다. 어제도 밖에서 놀기만 하던데 그럼 놀 시간은 있는데 청소와 숙제할 시간은 없다는 겁니까? 이건 조직 생활에 충실하라는 아버지 원수님의 교시 말씀에 어긋나고 충실치 못하고 책임성이 없다는 것이며.....” This is contrary to my father's teachings to be faithful to the organizational life, unfaithful and not responsible. ”

선생도 나의 비판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현희동무 말이 옳아요! 놀 시간은 있어도 청소할 시간이 없어요!” 하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호상비판 투쟁에서 선생의 호응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It was the first and the last time my teacher received a response in the struggle for escort.

학생들 중에서 호상비판에 언제나 앞장서는 당찬 애들도 있었다. Some of the students were full of leading critics. 선영이란 아이는 사상투쟁시 발딱 일어나 당돌하게 비판 잘하는 학생이였다. Sunyoung was a student who was upset during the ideological struggle.

“동무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량심이 없습니다. 동무는 아버지 원수님의 품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니 퇴학당해 마땅합니다.” The comrade is deserved of expulsion because he is not eligible to study in the arms of his father's enemy. ”

어떻게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옆에서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조마조마 할 정도였다. How to criticize the bitter side of the viewer was even nervous. 이 아이는 말로 다른 사람을 쪼아대고 덧이발까지 나 있어 남학생들로부터 ‘쪼대미' 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비애)비판하는 것도 성격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아이들로 키우는 것이 북조선의 교육 방침인 것 같기도 하다. 거의 매주 두서너 번씩 벌어지는 비판 시간에 비판거리를 찾다 보면 동무는 물론 부모형제까지도 비판 할 수 있는 충성심을 키우는 곳이 학교이기도 하다.

나의 인민학교 시절은 그런데로 순탄했고 오히려 하신인민학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특출 나게 보내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던 시절이였다.

나는 1972년 9월, 중신중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동네 근처에 있었다. 중학교라고는 해도 인민학교 때 같은 반 하던 학생들이 그대로 진학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기분도 느낄 수가 없었다. 지방으로 이사 간 가족의 자녀나 특수학교로 전출한 학생만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얼굴이였다. The faces were the same except for the children of family members who moved to the provinces or the students who moved to special schools. 중학교 역시 소년단 생활의 연장이였으므로 학교와 교실만 달라졌을 뿐 인민학교 생활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호)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나는 각종 행사에 자주 뽑혀 동원되여 나갔다. 그중에서도 1972년 11월 2일 북남조절위원회 두 번째 회담을 위해 남조선 대표가 평양을 방문할 때 나는 남조선 대표 성원 한 분께 꽃다발을 증정한 사실이 있다. 이 문제는 그동안 여러 사람의 관심과 질문의 대상이였기 때문에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소상히 밝히려 한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