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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열 네 번째-14

나의 어린시절, 열 네 번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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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네 번째

나의 실체가 드러나자 북조선 당국은 내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나는 어린 시절, 북남조절위원회 두 번째 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조선 대표단 중 한 명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사실이 있다. 그 사진이 공개되자 북조선 당국은 다른 녀자를 내세워 김현희는 가짜 북조선 사람이라고 선전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1972년 10월 말경,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소년단 지도 교원이 나를 찾는다 해서 소년단실로 갔다. 그곳에는 학생 몇 명이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소년단 지도원 선생은 모인 학생들에게 시 행사부에 가보라 며 어느 처녀 교원을 딸려 보내주었다. 우리들은 처녀 교원의 안내를 받아 외성구역 동성교 부근에 있는‘평양시 행사부'에 갔다. 다른 학교에서도 많은 여학생들이 와 있었고 행사부 남녀 지도원 몇 명이 인원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시 행사부에는 행사 때마다 동원되는 학생들의 명단이 있기 때문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누구누구를 동원한다는 계획을 미리 짤 수 있었다. 그래서 인원 파악은 쉽게 되었다. 그날 모인 학생은 많았으나 행사부 지도원이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운 뒤 그중에서 20여명 정도를 선발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 혼자만 선발되었다.

선발된 학생 중에는 금성중학교 학생이 많은 것 같았다. 금성중학교는 전문적으로 예술인을 키우는 학교로서 ‘소년궁전' 을 운영,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1호 행사' 때는 대부분 이 학교 학생들로 ‘조선 소년단 축하단'을 꾸리며 여러 행사에도 많이 동원된다. 큰 행사 때 5,6 명 또는 20여명 정도가 김일성이 참석한 주석단에 나가 감격한 표정과 목소리로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업적을 칭송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축하단이다.

선발된 학생 20 여 명은 행사부 빈 방에서 의자에 앉아 행사부 사업을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주의사항을 들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 다음으로 높은 리후락이라는 사람이 대표 성원과 기자들을 데리고 두 번째 북남회담을 위해 평양에 오게 됐다. 이 사람들은 다른 외국 손님과 다르니 그 어느때 보다 잘해야 한다. 특히 남조선 기자들은 좋지 않은 건 다 사진을 찍으려 하거나 말을 시켜 꼬투리를 잡으려 한다. 그러니 웃는 표정을 짓지 말고 심각한 얼굴로 대하고 이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행사 사업부 아주머니는 남조선 기자들이 물어볼 예상 질문과 우리가 대답해야 할 답변 요지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만약 남조선 기자가 여러 동무에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 원수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아무 부럼 없이 잘 자리고 있다고 대답하여 높은 사상성과 신심을 보여야 한다. 또 남조선 어린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어린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간결하게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아주머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실수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동무들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당 간부의 딸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각자 정해주는 대로 로동자의 딸이라고 대답해야만 한다. 모두 알겠지?”

이러한 주의사항이 끝나자 각자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정해 주었는데 나에게는 ‘서평양역 선로공' 이라는 직업이 정해졌다. 어느 학생에게는 ‘화력발전소 터빈공' 으로 정해 주었는데 ‘터빈공' 이라는 말이 그 당시 너무나 생소한 말이라서 모두 기억에 남았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열 네 번째-14 My Childhood, Fourteenth-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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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열 네 번째

나의 실체가 드러나자 북조선 당국은 내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When my reality was revealed,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insisted I was fake. 나는 어린 시절, 북남조절위원회 두 번째 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조선 대표단 중 한 명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사실이 있다. 그 사진이 공개되자 북조선 당국은 다른 녀자를 내세워 김현희는 가짜 북조선 사람이라고 선전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조국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This incident made me feel deeply betrayed by my country. 이 문제에 관련해서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I would like to shed some light on the situation at that time.

1972년 10월 말경,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소년단 지도 교원이 나를 찾는다 해서 소년단실로 갔다. 그곳에는 학생 몇 명이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소년단 지도원 선생은 모인 학생들에게 시 행사부에 가보라 며 어느 처녀 교원을 딸려 보내주었다. 우리들은 처녀 교원의 안내를 받아 외성구역 동성교 부근에 있는‘평양시 행사부'에 갔다. We went to the Pyongyang City's Events Department near the Dongseong Bridge in the Outerseong Area under the guidance of a virgin teacher. 다른 학교에서도 많은 여학생들이 와 있었고 행사부 남녀 지도원 몇 명이 인원수를 파악하고 있었다. There were many girls from other schools, and several men and women in the event department kept track of the number.

시 행사부에는 행사 때마다 동원되는 학생들의 명단이 있기 때문에 무슨 행사가 있으면 누구누구를 동원한다는 계획을 미리 짤 수 있었다. 그래서 인원 파악은 쉽게 되었다. 그날 모인 학생은 많았으나 행사부 지도원이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운 뒤 그중에서 20여명 정도를 선발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 혼자만 선발되었다.

선발된 학생 중에는 금성중학교 학생이 많은 것 같았다. 금성중학교는 전문적으로 예술인을 키우는 학교로서 ‘소년궁전' 을 운영, 관리하고 있다. Geumseong Middle School is a professional school for raising artists. 그래서 ‘1호 행사' 때는 대부분 이 학교 학생들로 ‘조선 소년단 축하단'을 꾸리며 여러 행사에도 많이 동원된다. 큰 행사 때 5,6 명 또는 20여명 정도가 김일성이 참석한 주석단에 나가 감격한 표정과 목소리로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업적을 칭송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At the big event, about 5, 6 or 20 people attended the commentary attended by Kim Il-sung and watched the scenes of the Kim Soo-sung's Mansu Mugang with a thrilling expression and voice and praised their achievements. 이것이 바로 축하단이다.

선발된 학생 20 여 명은 행사부 빈 방에서 의자에 앉아 행사부 사업을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주의사항을 들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 다음으로 높은 리후락이라는 사람이 대표 성원과 기자들을 데리고 두 번째 북남회담을 위해 평양에 오게 됐다. 이 사람들은 다른 외국 손님과 다르니 그 어느때 보다 잘해야 한다. 특히 남조선 기자들은 좋지 않은 건 다 사진을 찍으려 하거나 말을 시켜 꼬투리를 잡으려 한다. 그러니 웃는 표정을 짓지 말고 심각한 얼굴로 대하고 이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행사 사업부 아주머니는 남조선 기자들이 물어볼 예상 질문과 우리가 대답해야 할 답변 요지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The event's aunt gave us details of the questions South Korean reporters might ask and the points we should answer.

“만약 남조선 기자가 여러 동무에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 원수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아무 부럼 없이 잘 자리고 있다고 대답하여 높은 사상성과 신심을 보여야 한다. 또 남조선 어린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어린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간결하게 대답해야 한다.” If you ask what you think about South Korean children, you have to concisely answer that whenever you think of naked and hungry South Korean children, rice doesn't get caught.

우리는 그 아주머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실수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러 동무들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물으면 당 간부의 딸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각자 정해주는 대로 로동자의 딸이라고 대답해야만 한다. 모두 알겠지?”

이러한 주의사항이 끝나자 각자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정해 주었는데 나에게는 ‘서평양역 선로공' 이라는 직업이 정해졌다. 어느 학생에게는 ‘화력발전소 터빈공' 으로 정해 주었는데 ‘터빈공' 이라는 말이 그 당시 너무나 생소한 말이라서 모두 기억에 남았다. One student was designated as a 'turbine power plant for thermal power plant', but the term 'turbine ball' was so unfamiliar at that time that it was all memorable.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Kim Hyun-hee's confession from Daenam Institute of Tech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