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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여덟 번째-8

나의 어린시절, 여덟 번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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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여덟 번째 드디어 대극장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가운데 공연을 하게 되였는데 그동안 련습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야 할 때가 왔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이 울렁거리고 긴장된 동작 때문에 만족한 공연이 되지 못했다. 관람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자신들은 불만족했지만 공연이 끝난 뒤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며칠 더 공연을 하여 일반 인민들에게도 관람토록 하였다. 내가 인민학교에 다닐 동안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 1967년에는 평양에 대 홍수가 발생했다. 대동강 물이 범람하고 평양시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집과 공장이 물에 잠기고 사람과 가축, 가재도구가 떠내려가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했다. 우리가 살던 하신동 아파트도 1,2층이 물에 잠겼다. 가구가 물에 떠다니고 사람들이 헤엄치거나 나무토막을 잡고 건너는가 하면 수도가 끊겨 고무배가 다니며 먹는 물 공급을 하는 데 3층에서 바께쯔에 각종 색으로 표시된 줄을 달아 내려 보내면 반 바께쯔씩 먹는 물을 배급해 주었다. 우리 또래의 애들에게는 무서움보다도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희한한 현상을 재미있어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아래층에서 피신해 온 여러 가구와 함께 생활하다나니 아이들은 7~8명씩 모이게 되여 놀이하기도 좋아서 마냥 즐겁고 신이 났다. 물이 빠지자 이번에는 식량부족과 전염병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모두 구원사업에 동원 되여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아빠트에는 바퀴 벌레가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우와독소'를 뿌려 겨우 바퀴벌레를 없앴는가 하면 얼마 안가서 또다시 다른 집 바퀴벌레가 몰려왔다. 수해로 인해 사회가 떠들썩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미국 잠수함 ‘푸에불로호 사건'이 일어나 곧 전쟁이 터진다고 란리였다. 정세가 극도로 긴장되고 인민들은 전쟁 준비에 들볶였다. 어른에서부터 아이들까지 솜 동복과 배낭을 만들고 미시가루, 양초, 성냥, 고체연료와 쌀을 배낭에 넣고 신발과 모자도 준비하였다. 라지오에서는 매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고 ‘ 전면전에는 전면전으로, 보복에는 보복으로' 라는 구호가 거리 곳곳에 나붙었다. 당장 전쟁이 터질 것 같아 외할머니는 개성에서 우리 집에 와 전쟁 준비물을 거들어 주었다. 인민반과 동에서는 매일 각 가정의 전쟁 준비물을 검열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전쟁준비와 훈련에 시달렸으나 아이들은 배낭 속에 있는 미시가루도 몰래 꺼내 먹고, 자기 몫으로 만들어 놓은 배낭도 짊어져 보기도 하며 살금살금 재미있어 하였다. 특히 공습경보 소리에 맞춰 불을 끄는 등화관제 훈련 때는 평양 시내 전체가 암흑 속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빠트 옥상으로 뛰여 올라 가기도 했다. 또 실제 대피훈련도 실시했다. 새벽 4시에 자는 애까지 다 깨워 배낭을 지게 하고 앞장선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둠속을 걸어 서평양역 근처에 있는 지당산으로 피신하였다. 지휘자의 신호에 따라 엎드리기도 하고, 웅크리고 앉아 백포를 뒤집어쓰기도 했었다. 날이 밝으면 각자 배낭에서 쌀을 꺼내 고체 연료로 밥을 지어서 소금을 찍어 먹는 것으로 훈련은 끝났다. 그 무렵 김일성의 심복이였던 허봉학과 김창봉 등이 떨어져 나갔는데 인민반과 학교를 통해 회상기에서 이들의 이름과 이들에 관한 내용을 없애라고 지시가 내려와 책을 찢는가 하면 그 부분만을 잉크로 지우거나 칼로 도려내는 작업을 했던 기억도 난다. 북조선에서의 학교생활은 수업보다도 조직 생활과 특별활동 시간이 더 많이 배정되여 있다. 소년단 생활을 비롯해서 꼬마 규찰대, 꼬마 수매사업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해야 한다. 나는 어린시절 꼬마 수매사업을 하면서 길러진 습관 때문에 남조선에서 웃지 못할 일을 겪기도 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여덟 번째-8 My Childhood, Eight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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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여덟 번째  드디어 대극장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가운데 공연을 하게 되였는데 그동안 련습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야 할 때가 왔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이 울렁거리고 긴장된 동작 때문에 만족한 공연이 되지 못했다. My childhood, the eighth 관람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At last, Kim Il Sung participated in the concert at the main theater, and it was time to perform his performances as much as he could, but he could not get a satisfying performance because his mind was upset and tense. 우리 자신들은 불만족했지만 공연이 끝난 뒤 좋은 평가를 받았다. I did not see anybody sitting in the bleachers. 그래서 며칠 더 공연을 하여 일반 인민들에게도 관람토록 하였다. We were dissatisfied with ourselves but received a good evaluation after the performance. 내가 인민학교에 다닐 동안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 So I did a few more performances to see the public. 1967년에는 평양에 대 홍수가 발생했다. There were many incidents while I was in the People's School. 대동강 물이 범람하고 평양시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집과 공장이 물에 잠기고 사람과 가축, 가재도구가 떠내려가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했다. In 1967, a flood occurred in Pyongyang. 우리가 살던 하신동 아파트도 1,2층이 물에 잠겼다. The floods in the Taedong River flooded all over Pyongyang City. The houses and factories were submerged in water, people, cattle and household items were flooded, causing human and material damage. 가구가 물에 떠다니고 사람들이 헤엄치거나 나무토막을 잡고 건너는가 하면 수도가 끊겨 고무배가 다니며 먹는 물 공급을 하는 데 3층에서 바께쯔에 각종 색으로 표시된 줄을 달아 내려 보내면 반 바께쯔씩 먹는 물을 배급해 주었다. The apartment we were living in was also flooded on the first and second floors. 우리 또래의 애들에게는 무서움보다도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희한한 현상을 재미있어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아래층에서 피신해 온 여러 가구와 함께 생활하다나니 아이들은 7~8명씩 모이게 되여 놀이하기도 좋아서 마냥 즐겁고 신이 났다. We had no interest in seeing interesting phenomena that seemed to come out of the window rather than fear to the children of our age. 물이 빠지자 이번에는 식량부족과 전염병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모두 구원사업에 동원 되여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Moreover, I lived with several families who had fled from the downstairs, so the children gathered for 7 ~ 8 people, 아빠트에는 바퀴 벌레가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When the water went out, this time, due to food shortages and infectious diseases, both father and mother were mobilized for relief work and returned home late at night. ‘우와독소’를 뿌려 겨우 바퀴벌레를 없앴는가 하면 얼마 안가서 또다시 다른 집 바퀴벌레가 몰려왔다. In the apartment, wheelworms gathered around the crowd. 수해로 인해 사회가 떠들썩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미국 잠수함 ‘푸에불로호 사건’이 일어나 곧 전쟁이 터진다고 란리였다. 정세가 극도로 긴장되고 인민들은 전쟁 준비에 들볶였다. 어른에서부터 아이들까지 솜 동복과 배낭을 만들고 미시가루, 양초, 성냥, 고체연료와 쌀을 배낭에 넣고 신발과 모자도 준비하였다. 라지오에서는 매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고 ‘ 전면전에는 전면전으로, 보복에는 보복으로' 라는 구호가 거리 곳곳에 나붙었다. 당장 전쟁이 터질 것 같아 외할머니는 개성에서 우리 집에 와 전쟁 준비물을 거들어 주었다. 인민반과 동에서는 매일 각 가정의 전쟁 준비물을 검열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전쟁준비와 훈련에 시달렸으나 아이들은 배낭 속에 있는 미시가루도 몰래 꺼내 먹고, 자기 몫으로 만들어 놓은 배낭도 짊어져 보기도 하며 살금살금 재미있어 하였다. 특히 공습경보 소리에 맞춰 불을 끄는 등화관제 훈련 때는 평양 시내 전체가 암흑 속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빠트 옥상으로 뛰여 올라 가기도 했다. 또 실제 대피훈련도 실시했다. 새벽 4시에 자는 애까지 다 깨워 배낭을 지게 하고 앞장선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둠속을 걸어 서평양역 근처에 있는 지당산으로 피신하였다. 지휘자의 신호에 따라 엎드리기도 하고, 웅크리고 앉아 백포를 뒤집어쓰기도 했었다. 날이 밝으면 각자 배낭에서 쌀을 꺼내 고체 연료로 밥을 지어서 소금을 찍어 먹는 것으로 훈련은 끝났다. 그 무렵 김일성의 심복이였던 허봉학과 김창봉 등이 떨어져 나갔는데 인민반과 학교를 통해 회상기에서 이들의 이름과 이들에 관한 내용을 없애라고 지시가 내려와 책을 찢는가 하면 그 부분만을 잉크로 지우거나 칼로 도려내는 작업을 했던 기억도 난다. 북조선에서의 학교생활은 수업보다도 조직 생활과 특별활동 시간이 더 많이 배정되여 있다. 소년단 생활을 비롯해서 꼬마 규찰대, 꼬마 수매사업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해야 한다. 나는 어린시절 꼬마 수매사업을 하면서 길러진 습관 때문에 남조선에서 웃지 못할 일을 겪기도 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